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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4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북풍), 사대부에 도전한 국왕(광해군)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4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북풍), 사대부에 도전한 국왕(광해군)

건방진방랑자 2021. 6. 20.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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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북풍)

 

 

사대부에 도전한 국왕

 

 

정철(鄭澈)이 이루지 못한 건저(建儲)의 꿈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마자 실현되었다. 북쪽으로 도망치던 선조(宣祖)는 평양에 이르렀을 때 황급히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한 것이다. 자칫 잘못하다가 왕실 사직이 끊어지면 종계변무(宗系辨誣)를 해결했어도 죽어 조상들을 뵐 수 없으리라는 판단이었을 게다. 광해군(光海君)에게는 친형 임해군이 있었지만, 그는 성질이 포악해서 세자 책봉을 받지 못했다(물론 사대부들의 구미에 맞는 후보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난리 덕분에 세자가 된 광해군은 공교롭게도 그 난리가 끝나면서 세자 자리를 빼앗길 위기에 처한다.

 

1600년에 의인왕후가 죽은 게 그에게는 큰 불운이다. 어차피 마흔이 넘은 그녀가 아이를 낳을 가능성은 제로였으므로 그는 세자 자리에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죽었으니 혹시 선조(宣祖)가 계비라도 들인다면 알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과연 그 혹시는 역시가 된다. 난리가 가라앉은 1602년에 선조는 주책없이 쉰 살의 나이로 열여덟 살의 계비를 맞아들인 것이다(광해군光海君보다도 아홉 살이나 어린 계비다), 후궁이라면 충분히 있을 수 있겠지만 그 나이에 굳이 계비를 둔 이유는 뭘까? 그 어린 계비인 인목왕후(仁穆王后, 1584~1632)4년 뒤 이들 영창대군(永昌大君, 1606~14)을 낳자 광해군은 긴장할 수밖에 없다. 나이는 훨씬 어리더라도 엄연히 왕실 적자 출신이니 서자인 자신과는 신분이 다른 것이다조선의 국왕은 많은 후궁들을 거느릴 수는 있지만 정비는 하나뿐이다. 정비가 죽었을 때는 계비를 맞을 수 있는데, 후궁들 가운데서 고르거나 궁 밖에서 데려온다. 왕실에서도 서얼의 차이는 있었으므로 정비나 계비가 낳은 아들은 대군(大君)이고 후궁의 아들은 그냥 군()이며, 딸은 각각 공주와 옹주(翁主)가 된다(그래서 광해군光海君도 광해대군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많은 아내를 거느렸던 세종도 소헌왕후가 그보다 먼저 죽었을 때 계비를 들이지는 않았으니, 선조(宣祖)가 계비를 들인 것은 확실히 특이한 데가 있다. 나이도 나이인 데다 후궁들이 있으므로 성생활의 문제는 아니다. 그렇다면, 기록에는 없으나 여기에도 광해군에 반대하는 사대부들의 입김이 작용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그간 그는 세자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의주에 붙박힌 채 여차하면 중국으로 넘어갈 차비를 갖추고 있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북도와 남도를 오가며 군대를 모집하고 군량미를 조달했는가 하면, 명나라의 요청으로 국내의 군무를 주관하는 등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았던가? 이제 와서 겨우 갓난아이 하나 때문에 세자 자리를 위협받다니 그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다.

 

광해군(光海君)의 안타까운 심정과는 달리, 이런 좋은 찬스를 사대부(士大夫)들이 놓칠 리 만무하다. 대북과 소북은 각자 자기 구미에 맞는 북을 골라 두드리기 시작했는데, 큰 북은 광해군이고 작은 북은 영창대군이다. 결과는 1608년에 광해군이 선조(宣祖)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면서 큰 북의 승리로 끝났다. 그와 함께 광해군의 잠 못 이루는 밤도 끝났다.

 

사대부의 도움으로 세자 자리를 끝까지 보전하고 왕위에까지 오른 광해군의 첫 작업은 당연히 그에 대한 보답이다. 홍여순에 뒤이어 큰북의 보스가 된 이이첨(李爾膽, 1560~1623)의 제안에 따라 그는 우선 형이자 잠재적 라이벌인 임해군을 유배시키고 작은 북 중 가장 소리가 컸던 유영경(柳永慶, 1550~1608)에게 사약을 내렸다(임해군은 이듬해에 역모죄를 뒤집어쓰고 사약을 받았다).

 

그러나 온갖 풍상을 헤치며 우여곡절 끝에 서른 이 넘은 나이로 왕위에 오른 탓일까? 광해군(光海君)은 중종 이래 사대부들에게 마냥 휘둘려왔던 집안의 쭉정이 조상들과는 인물됨이 달랐다. 아마도 그는 나라와 백성을 황폐하게 만든 난리에서 크게 깨달은 점이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당쟁을 그대로 놔두면 장차 더 큰 난리를 겪게 되리라는 점은 분명히 확신하고 있었던 듯하다. 따라서 그는 100년이 넘도록 사대부(士大夫) 국가를 유지해 온 조선을 다시금 왕국으로 만들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말하자면 국왕이 사대부에게 도전장을 던진 격이다.

 

 

 

 

왕국을 만들기 위해 국왕도 당파가 필요하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일찍이 세조(世祖)가 그러했듯이 왕국으로 컴백하려면 왕당파라는 측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세조 때와 달리 사대부(士大夫) 체제가 굳어져 있는 지금은 더더욱 측근의 힘이 튼튼해야 한다. 그래서 광해군(光海君)은 자신의 즉위를 도운 세력 중에서 왕당파의 리더를 발탁하고자 한다. 이이첨은 책략이 있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에서 별로 한 게 없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최적임자는 바로 정인홍이다. 연배도 높고 의병장으로 활약한 경력이 있을 뿐 아니라 이황과 더불어 성리학의 최고 권위자였던 조식의 수제자가 아닌가? 게다가 그는 광해군의 즉위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적도 있었다(유영경이 선조가 광해군에게 양위하려 한 사실을 숨기려 했을 때 그것을 적발했다).

 

과연 정인홍은 광해군의 구미에 딱 맞는 사건을 엮어준다. 1611년 그는 성균관 유생들이 이황과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언적은 명종(明宗) 때 양재역 대자보 사건에 휘말려 유배된 문신이지만, 그보다는 성리학의 지치주의적 정치철학을 발전시킨 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정치 이데올로기에 국한되어 있던 유학에 철학적 성격을 가미했으니 말하자면 주희(朱熹)의 한반도판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비록 그는 경기 출신이지만 이황과 기대승에게 영향을 주어 영남학파의 태동에 간접적으로 기여했다. 성균관 유생들에게 존경을 받은 것은 그 때문이다의 문묘종사를 지내려 할 때 거세게 반대하고 나선다(앞에서 보았듯이 문묘종사란 국가에서 유학의 거두에게 사당을 지어 주는 것이었으니 오늘날의 무형문화재 이상 가는 영예다). 왜 자기 스승은 제외하느냐는 것인데, 조식의 수제자로서 당연히 할 만한 주장이지만 그렇다고 남의 제사에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는 건 자긍심 강한 성균관 유생들의 비위를 건드리는 결과가 된다. 대학의 자율과 자유는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것. 격분한 유생들은 정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해 버린다. 졸업장 명부에서 제적당한 격이니 정인홍은 열받을 수밖에 없다. 그는 쪼르르 달려가 보스에게 탄원했고 광해군(光海君)은 성균관 유생 전원 제적이라는 극단의 조치를 내렸다.

 

야당의 입장에 있었던 소북은 그 사건으로 다시 한번 대북에게 두들겨맞았다. 물론 이것도 당쟁이긴 하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미 대북을 왕당파로 만들었으므로 과거의 당쟁과는 다르며, 엄밀히 말해 국왕과 사대부(士大夫)의 대결이다. 서전을 승리로 장식한 국왕에게는 건수로 활용할 만한 사건이 계속 터진다. 이듬해인 1612년에는 황해도에서 허위 역모 사건이 꾸며졌다. 내용인즉슨 터무니없다. 김경립(金景立)이라는 자가 군역을 피하기 위해 사기를 치다가 걸리자 봉산 군수 신율(申慄)은 그를 고문해서 김백함(金百緘)이라는 자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허위 자백을 받아냈다. 김백함을 체포하니 그의 아버지 김직재(金直哉)가 일찍이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아버지의 상중에 술과 고기를 먹었다가 파직된 사연이 드러났다. 역모를 조작할 수 있는 좋은 건수다. 고문에 못 이긴 김백함은 엉뚱하게도 인목왕후의 아버지이자 영창대군의 외조부인 김제남(金悌男, 1562~1613)을 불었고, 때마침 충청도에서 강도질을 하다 잡힌 박응서(朴應犀, ?~1623)라는 자가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려 했다는 사건까지 겹치면서 사태는 일파만파로 번진다박응서는 선조(宣祖) 초기에 영의정이었던 박순(朴淳)의 서자로, 학문과 재주가 뛰어났으나 서얼 출신이라는 이유로 좌절한 인물이다. 그는 같은 처지의 명문 출신 서자들과 함께 강변 7라는 동아리를 만들어 신세를 한탄하다가 광해군(光海君) 즉위 초에 서얼 출신에 대한 차별을 없애 달라고 탄원했으나 거절당했다. 공교롭게도 광해군은 그 자신도 왕실의 서자로 설움을 겪었으면서도 그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서자를 주인공으로 삼은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쓴 허균(許筠, 1569~1618)은 친구인 박응서가 체포된 뒤 신분 해방의 꿈을 접었으나 1618년 반역을 꾀했다가 처형당했다.

 

광해군으로서는 가장 큰 라이벌인 영창대군과 소북 세력을 한꺼번에 제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를 빌미삼아 그는 김제남에게 사약을 안기고 그 이듬해에 영창대군을 유배시켰다가 죽였으며, 그밖에 100명이 넘는 소북 세력을 숙청했다. 이로써 반대파는 완전히 제거되었고 광해군(光海君)은 왕당파를 심복으로 삼아 왕권을 단단히 다지는 기반을 마련했다.

 

 

재야의 구심점 조식은 평생 관직에 진출하지 않았으면서도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한 인물이다. 하지만 조선 특유의 학자=관료, 학문=정치의 등식을 알면 그 메커니즘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의 제자들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고 당쟁에도 열심이었으니, 유학에 도가 사상을 가미해서 남명학파(南冥學派, 남명은 조식의 호다)를 이룬 스승의 학풍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할까?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사대부에 도전한 국왕

남풍 뒤의 북풍

곡예의 끝

수구의 대가

중화세계의 막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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