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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한국사,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4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북풍), 곡예의 끝②: 인조반정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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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4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북풍), 곡예의 끝②: 인조반정

건방진방랑자 2021. 6. 20.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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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예의 끝

 

 

그런 상황에서 1622년 이이첨이 폐위된 인목왕후를 살해하려다가 실패한 사건은 반대파의 공분을 자아내기에 족했다. 특히 정철(鄭澈)이 실각한 이래 오랫동안 권력 맛을 보지 못한 서인들은 이런 분위기를 틈타 뭔가 일을 엮어내야 한다고 판단한다. 실제로 사대부들의 상당수가 왕당파로 변신해 있었으니 그대로 간다면 조선을 사대부 국가로 되돌릴 가능성은 점점 더 희박해질 것이다. 그래도 늙은 관료들이었다면 노골적으로 나서진 못했을 것이다(게다가 그들의 주무기는 말만의 역모인데, 지금은 그게 통할 상황이 아니다), 그러나 현 정권에 항거했다 관직을 박탈당한 김류(金瑬, 1571 ~ 1648), 최명길(崔鳴吉, 1586 ~ 1647), 김자점(金自點, 1588 ~ 1651), 그리고 성균관 제적생으로 역시 현 정권에 원한이 깊은 심기원(沈器遠, ? ~ 1644) 등 소장파 서인들은 원로들이라면 꿈꾸지도 못할 과감한 음모를 꾸민다. 연산군(燕山君)을 타도한 중종반정(中宗反正) 이래 처음으로 말만이 아닌 역모가 계획된다(그들이 거사를 계획하고 칼을 갈아 씻은 곳이 오늘날 서울의 세검정 洗劍亭이다).

 

반란에 필요한 준비물은 우선 왕으로 내세울 후보이고, 그 다음은 물리력이다. 그들은 어렵지 않게 능양군(陽君)이라는 후보를 낙점한다. 신성군의 조카인 그는 1615년 친동생인 능창군(綾昌君)광해군(光海君)에게 살해된 원한에 사무쳐 있다. 양측은 쉽게 계약을 체결한다. 후보는 됐고,

 

그럼 물리력은 어떻게 할까? 원래 정규군이라 할 만한 것은 없었지만 그나마 조선의 군사력은 북방의 정세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북도에 집결해 있다. 그래서 거사에 필요한 물리력은 황해도 평산 군수인 이귀(李貴, 1557 ~ 1633)와 함경도 병마절도사인 이괄(李适, 15871624)이 담당한다(말하자면 전방 사단을 동원해서 권력을 잡으려는 격인데, 이런 경우는 19791212일에 재현된다). 골조가 다 짜였으니 이제 모 아니면 도다.

 

16233월 그들은 약 7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남행길에 올랐다. 때맞춰 경기방어사인 이서(李曙, 1580 ~ 1637)가 고양에서 700명의 병력으로 합류하면서 반란군의 규모는 두 배로 늘어난다. 그러나 그들이 한양에 들어올 때까지도 광해군은 반란군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채 궁중에서 연회를 벌이고 있었다. 보안 유지에서도 반란군은 한 수 위였던 셈이다. 손쉽게 궁궐을 장악한 반란군은 서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왕후에게 옥새를 건넨 다음 그녀의 손으로 광해군(光海君)을 폐위시키고 능양군을 왕위에 올리게 했다. 그가 조선의 16대 왕인 인조(仁祖, 1595 ~ 1649, 재위 1623 ~ 49)이므로 이 사건을 인조반정(仁祖反正)이라 부른다불과 1500명도 못 되는 병력으로 반란을 성공시켰다는 사실이 당시 조선의 형편을 말해준다. 물론 궁을 점령할 때는 각본에 따라 궁 안의 동조 세력이 내응하기는 했으나, 반란군이 그 정도 규모만으로 북도에서 한양까지 한달음에 내려올 수 있었다면 조선에는 치안 자체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원래 도성을 지키는 중앙군으로는 경군(京軍)이라 불리는 조직이 있었고 또 별도의 왕실 근위대가 편제되어 있었지만,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군제가 사실 상 마비되어 있어 기능을 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 얼마 안 되는 군 조직마저도 반란군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는 것은 곧 광해군(光海君) 치세에도 사대부(士大夫)들이 국정 전반을 장악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광해군의 낙관과는 달리 조선은 왕국으로 되돌아오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조선 역사상 두번째로 반정이 성공했고, 광해군은 연산군(燕山君)에 이어 두번째로 왕의 묘호를 받지 못한 군주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두 가지가 더 있다. 하나는 조선이 사대부(士大夫) 국가로 컴백했다는 사실이다. 광해군(光海君)이 꾀한 왕국의 꿈이 실패하면서 조선은 시대적 조류에 역행하는 수구적 체제로 돌아갔다. 또 하나의 문제는 광해군이 줄에서 떨어짐으로써 조선에 다시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수구의 칼을 씻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의 주역들이 쿠데타의 칼을 씻었다는 세검정이다. 쿠데타가 성공함으로써 광해군(光海君)의 중립 노선도 끝장나고 말았는데, 당시 반정 세력은 광해군의 가장 큰 죄목을 사대의 예를 다하지 않은 데서 찾았으니 이런 시대착오도 없다. 결국 그 대가는 전란에의 초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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