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최후의 전성기
급변하는 만주
역대 통일 왕조가 그랬듯이 명 제국도 외부의 침략이 아니라 내부에서 자멸했다. 마지막 황제인 의종이 즉위하던 해부터 발발한 농민 반란은 점차 전국으로 번지며 규모가 커졌다. 비가 잦으면 벼락이 치는 법이다. 중원 북서쪽 산시에서 벼락이 울렸다. 지방관이던 이자성(李自成, 1605~1645)은 그 지역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나자 관직을 팽개치고 반란군을 규합했다. 쿠데타와 건국의 차이는 나라를 바꾸느냐, 못 바꾸느냐에 있다. 1643년에 그는 시안에서 대순(大順)이라는 새 왕조를 세우고, 이듬해에는 베이징을 공략해 손에 넣었다. 도성이 함락되고 의종이 목을 매 자살하는 것으로 명 제국의 사직은 명이 끊겼다.
이자성이 계속 권력을 유지했더라면 명 제국을 대신해 ‘순(順) 제국’이 한족 왕조를 이어 갔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같은 성씨가 같은 시대에 중국과 한반도의 왕실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주인은 따로 있었다. 당시 명의 주력군은 만주에 있었기 때문에 이자성의 반란군을 미처 막지 못했을 뿐이다. 왜 만주에 있었을까?
그때까지 역대 통일 왕조들 가운데 만주를 지배한 것은 몽골족의 원 제국뿐이었다. 명의 영락제(永樂帝)가 직접 몽골 초원까지 원정을 떠난 적이 있듯이 중원의 북쪽은 제압한 적이 있었으나 만주만은 예외였다. 사실 수ㆍ당 시대 이래 중국은 만주를 정복하려는 시도를 한 적이 없었다. 따라서 14세기에 원이 멸망하자 만주는 다시 중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났다【만주는 고려시대까지도 한반도와 인연이 있었다. 원 황실은 딸을 고려의 왕에게 출가시켜 고려를 부마국으로 복속시켰다. 충렬왕(忠烈王)부터 공민왕(恭愍王)까지 몽골 지배기의 왕들은 모두 원 황제의 사위다. 굴욕적이기는 하지만 만주에 관해서는 중요한 혜택도 있었다. 원은 고려 왕족을 심양왕(瀋陽王: 심양의 중국식 명칭은 지금의 선양이다)으로 봉해 고려에 만주의 관할권을 맡겼던 것이다(심양왕의 지위도 세습되었다). 당시에 고려 왕실은 그것을 ‘혜택’으로 여기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그것은 만주를 영토화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때 만주를 잘 관리하고 그곳에 살고 있던 여러 부족을 동화시켰다면 만주는 그때부터 한반도와 한 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고려는 원의 속국이었으나 당시 만주는 원에도, 또 이후 명에도 중요한 지역이 아니었으므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몽골 지배기 고려의 왕과 심양왕 들은 그럴 만한 기개와 의지가 없었다. 이후 만주는 청 황실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봉금책(封禁策)이 시행되면서 성역화되어 중국인이나 조선인의 이주가 금지되었고, 우리 민족과 영원히 분리되었다(그 때문에 414년에 세워진 광개토왕비가 무려 1500년이나 뒤인 19세기 말에 ‘발견’되었다. 봉금책으로 만주 통행이 어려워진 조선시대에 실학자들은 그 비석을 금 나라의 시조비로 오해하기도 했다)】.
▲ 만주족의 영웅 누르하치가 제위에 오르는 장면이다. 누르하치까지는 아직 후금일 뿐 청 제국이 아니었으나 그의 후손들은 중국식 체제를 소급해 그를 청 태조로 취급했다
명에 있어 만주는 ‘변방’에도 포함되지 않는 그 바깥이었고, 정복과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제압의 대상일 뿐이었다. 당시 만주의 주인인 만주족(여진족)에게 명은 관작도 주고 조공 무역도 허락하는 등 북변을 침범하지 않도록 무마하는 정책으로 일관했다. 그 정책이 계속 약효를 지니려면 명의 힘이 강해야 했으나 명이 쇠약해지면서 만주에는 서서히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1588년 만주족의 영웅 누르하치(Nurhachu, 1559~1626)는 만주 일대를 통일했다. 이후에도 계속 세력을 확장하더니 1616년에는 칸(후금 태조)을 자칭했다. 수도는 남만주의 선양이었고, 국호는 300여년 전 조상들이 세운 강국 금을 좇아 후금(後金)으로 정했다. 누르하치는 국호만이 아니라 북중국을 지배한 조상들의 역사까지 재현하려 했다.
후금이 랴오둥에서 랴오허를 건너 랴오시까지 진출하자 아무리 쇠락해가는 명이라 해도 더 이상 두고 볼 입장이 아니었다. 정부는 후금을 저지하기 위해 다급히 군대를 파견했다. 그래서 이자성이 베이징을 점령했을 때 명의 주력군은 만주 쪽으로 이동해 있었다.
누르하치는 새 제국의 기틀을 세우고 전장에서 얻은 부상으로 죽었지만, 그의 야망은 그에 못지않게 유능한 아들에게로 이어졌다. 칸위를 물려받은 홍타이지(태종, 1592~1643)는 아직 ‘재야 세력’인 후금을 본격적인 ‘수권 정당’으로 탈바꿈시킨 인물이다. 그는 우선 투항해온 한인들을 중용해 중국의 6부제를 도입하는 등 후금을 중국식 전제 국가로 만들었다. 그리고 곧이어 1627년과 1636년 두 차례에 걸친 조선 정벌(정묘호란과 병자호란)로 후방을 다지는 동시에 중국 정복을 위한 재정을 확보했다. 마지막으로 1636년에 그는 국호를 중국식 대청(大淸)으로 고쳐 드디어 대권을 위한 포석을 완료했다.
한편 이자성이 베이징을 장악하는 바람에 만주로 파견된 명의 군대는 돌아갈 곳이 없어졌다. 총사령관인 오삼계(吳三桂, 1612~1678)는 베이징과 선양 사이의 요충지인 산하이관에 머물면서 사태를 관망했다. 떠날 땐 정부군이었는데 돌아갈 땐 반란군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럴 바에는 아예 진짜 반란군이 되자. 그는 차라리 청에 항복해 이자성의 ‘반란군’을 진압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무렵에는 청 태종이 사망하고 그의 아홉째 아들인 세조(世祖, 1638~1661)가 제위를 이은 상태였다. 황제의 나이는 겨우 여섯 살이었으므로 삼촌인 도르곤(1612~1650)이 섭정이자 실권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도르곤은 오삼계에게 후한 대가를 약속하고 그의 안내를 받아 손쉽게 입관했다(만주에서 중국 본토로 들어가는 것은 산하이관을 통과한다는 의미에서 입관入關이라고 불렀다). 곧이어 1644년에 청은 이자성을 물리치고 꿈에도 그리던 베이징에 입성했다.
▲ 정복 군주의 양면 누르하치를 칭기즈 칸에 비유한다면 청 태종은 오고타이나 쿠빌라이에 비유할 수 있다. 대외적인 정복 활동과 대내적인 전제정치 확립을 통해 후금을 대청 제국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는 임진왜란(壬辰倭亂)에 버금갈 정묘호란(丁卯胡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일으킨 인물로 악명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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