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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4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북풍), 남풍 뒤의 북풍(대동법)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4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북풍), 남풍 뒤의 북풍(대동법)

건방진방랑자 2021. 6. 20.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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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풍 뒤의 북풍

 

 

국왕의 승리일까? 그럼 조선은 왕국으로 되돌아간 걸까? 아직 확실치 않으나 광해군(光海君)은 그렇다고 믿었다. 벌써 100년을 지배해 온 사대부 세력이 그렇듯 쉽게 권력을 내놓을 리는 없지만, 사태를 낙관한 그는 이제야 비로소 국왕 본연의 임무를 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사실 그는 왕권을 다지는 중에도 전란으로 얼룩진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창덕궁과 창경궁의 건축을 서두른 게 상징적인 재건이라면, 즉위하자마자 시행한 대동법(大同法)은 실질적인 국가 재건 사업에 해당한다.

 

전란으로 국토가 초토화되었으니 가장 시급한 게 토지와 조세제도다. 남아 있는 토지라도 추슬러 놓아야 농업 생산이 이루어질 뿐 아니라 무엇보다 전후 복구를 위해서는 막대한 재정이 필요한데 그 재정은 토지에서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미 전부터 기존의 토지제도가 유명무실해져 있었으니 관리들의 녹봉 체계도 재정비해야만 국가의 기틀이 설 수 있다. 왕국으로 되돌림으로써 일종의 재건국을 시도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새로운 제도를 시행할 만한 조건도 좋다. 그런 배경에서 1608년 그는 경기도를 대상으로 해서 대동법(大同法)을 시범운용한다(처음에는 선혜법宣惠法이라 불렀고 이를 집행하는 기관으로 선혜청宣惠廳이 설립되었다. ‘선혜라면 은혜를 베푼다는 뜻이지만 실은 백성들을 위한다기보다 국가 재정의 확충을 위해 필요했다).

 

대동법의 기본 정신은 모든 것을 하나로 통일한다는 그 이름처럼 간단하다. 생산자들이 국가에 납부하는 모든 조세를 한 가지 품목, 즉 쌀로 통일하는 것이다(이 쌀은 당연히 대동미大同米라고 부른다)사실 대동법은 원조가 있다. 국내판 원조는 일찍이 이이가 주장한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이다. 이것은 특산물 공납제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공납을 쌀로 통일하자는 구상인데,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끝나고 유성룡이 다시 주장해 잠시 시행된 적이 있다. 해외판 원조는 16세기 초반부터 시행된 명의 일조편법(一條鞭法)이다(아마 대공수미법도 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일조편법은 곡물세[田賦]와 요역의 잡다한 항목들을 단일화하고 마을 단위로 부과하던 세금 양을 옛날처럼 토지와 사람을 기준으로 부과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중국에는 화폐경제가 상당히 발달해 있어서 은납제(銀納制)가 허용되었다는 점을 빼면 대동법(大同法)과 큰 차이가 없다. 이전까지 농민이 국가에 내는 것은 편의상 통칭해서 조세라고 불렀지만 기본적인 전세(田稅)를 비롯해서 공물, 진상(進上, 특산물), 잡세 등등 다양했다. 생활양식이 다양하니 그랬겠지만 세금을 그렇게 여러 가지로 거두어들여서야 재정 운영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리 없고, 무엇보다 부패한 관리가 임의로 착복하기에 유리한 제도일 수밖에 없다(원래 근대 국가로 진화할수록 조세의 납부 방식은 단일해진다).

 

사실 그런 문제점은 16세기에도 이미 커다란 공감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세제 개혁의 필요성만 팽배했을 뿐 만연한 당쟁 때문에 뒤로 밀렸고 전란 때문에 또 미뤄졌다. 게다가 공물과 진상은 국왕에 대한 예우라는 또 다른 의미가 있었으므로 쉽게 단일화될 수 없는 항목이었다. 하지만 전란으로 모든 게 망가진 마당에 예우 따위를 따질 여유가 없는 데다 유통망이 발달한 탓에 지방의 특산물 정도는 왕실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게 되었으니 세제를 통일할 조건은 충분하다. 과연 대동법(大同法)이 실시되자 과세의 표준이 확립되었고, 지방관들의 농간도 줄어들었으며, 탈세의 여지도 적어졌고, 면세지가 줄어 국가 재정도 강화되는 당장의 효과를 보았다. 아울러 조세 품목이 쌀로 단일화됨으로써 장차 화폐경제의 도입을 가능케 하는 장기적인 효과도 기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시행되려면 무엇보다 토지 측량, 즉 양전(量田)이 선행되어야 한다. 개국 초기에 실시된 양전사업의 성과는 세월이 흐르면서 이미 오래 전에 유명무실해졌지만, 그나마도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경지의 지도 자체가 송두리째 바뀌었으니 아무 소용도 없다. 그래서 광해군(光海君) 때는 중부지방부터 양전이 이루어지면서 그에 따라 대동법(大同法)도 점차 확대 실시된다. 이렇게 해서 속도는 느리지만 대동법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19세기 말까지 조선의 기본적인 세제로 기능하게 된다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해결하고 넘어가자. 서양의 경우에는 중세부터 지대(地代)개념이 발달했는데, 동양의 역사에서는 왜 지대가 없었을까? 지대의 개념을 적용하면 세금제도는 아주 쉽게 해결된다. 땅의 이용자(농민)는 땅의 소유자(지주)에게 세금을 내고, 지주는 또 그것으로 국가에 세금을 내면 되기 때문이다(현물이든 화폐든 상관없다). 동양 사회에 그런 방식이 적용될 수 없었던 이유는 지주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양식 왕국에서 모든 땅은 왕(국가)의 것이다. 지주라는 용어는 있으나 서양과 달리 동양의 지주는 단지 수조권자 일뿐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지주는 실제 소유자처럼 처신하지만 원칙적으로 왕토 사상이 적용되므로 지대의 발상을 낳기는 어려웠던 것이다(이런 모순 때문에 명나라 후기에는 일전양주一兩主라는 토지 소유의 새로운 개념이 나오는데, 이에 관해서는 종횡무진 동양사287을 참조하라).

 

 

광해군(光海君)은 왕당파를 움직여 권력을 얻었고 대동법(大同法)을 만들어 민심을 얻었다. 이렇게 해서 혼란스러웠던 국내 상황은 어느 정도 다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광해군이 정작으로 신경을 집중한 분야는 국내 정치가 아니라 나라 바깥의 동태다. 세자 시절에 전란으로 고생했던 경험은 그를 그 전의 어느 왕보다도 국제적 감각에 밝은 군주로 만들어주었다. 조선의 사대부(士大夫)와 백성들이 거의 모두 일본에 대한 원한에 사무쳐 있는 분위기 속에서도 즉위 이듬해인 1609년에 쓰시마 도주와 수교를 복원한 것은 아마도 국제적 감각을 갖춘 그였기에 가능했을 터이다(이 해가 기유년이기에 이를 기유약조己酉約條라 부른다). 게다가 그는 동북아의 풍향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수천 년 동안 동북아 질서의 중심축이었던 중화세계가 약화되고 비중화세계가 도약하고 있는 시대였다(그런 시대적 조류에도 불구하고 중화세계의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이 여전히 지배 이념으로 군림한다는 데 조선의 비극이 있었다). 일본에서 불어닥친 게 남풍이라면 장차 불어올 바람은 북풍일 것이다.

 

일본이 온몸으로 증명해주었듯이 비중화세계는 이미 중화세계의 끝자락인 조선이 과거처럼 마음대로 교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중화세계가 현실에 안주하며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동안 비중화세계는 결정적인 단점이었던 분열을 극복하고 지역적 통일을 향해 내닫고 있었다. 동북아의 비중화세계라면 단연 일본과 만주다. 먼저 통일을 이룬 일본이 중화세계에 도전장을 내밀었으니 그 다음에는 만주가 뒤를 잇는 게 순서다. 과연 일본과 중화세계의 전쟁이 한창이던 16세기 말부터 만주 지역에도 통일의 바람이 거세게 몰아친다. 통일의 움직임이 있다면 구심점도 있을 게다.

 

1593년 중국과 조선에게서 건주라 불리던 힘의 공백 지역을 통일한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1559~1626)가 바로 그 구심점이다(원래 여진이라는 이름은 중국인들이 만주 지역의 여러 민족들을 통칭하던 명칭이었으나 이 시기부터의 여진은 보통 만주족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오늘날 중국 한족이 흔히 만족滿族이라 줄여 말하는 게 그들이다).

 

처음에는 명나라에 사대하며 관작까지 받은 그였으나 애초부터 중화세계에 끝까지 충성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게다가 명나라 조정은 사대부(士大夫)들이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자기들끼리 동림당과 비동림당으로 나뉘어 당쟁을 일삼느라 변방의 사정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었다조선에 조광조(趙光祖)가 있었다면 명나라에는 장거정(張居正, 1525~82)이라는 개혁가가 있었다. 1572년 신종이 열 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어린 황제를 대신해서 전권을 위임받은 그는 부패하고 무능한 관료들을 축출하여 관료제의 기강을 확립하고, 전국적인 토지 조사를 실시하여 세수에서 누락된 대지주들의 토지를 적발하는 한편 전국 토지의 실제 면적을 정확히 조사했다. 그러나 개혁 정치 10년 만에 그가 사망하자 그의 개혁에 반대하던 사대부(士大夫)들은 동림당을 이루었고 그 반대파는 비동림당을 이루어 당쟁을 시작했다. 조광조(趙光祖)의 개혁이 실패한 이후 당쟁이 가열화된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그 와중에서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맞았으니 명나라의 지원이 부실했던 것도 당연했다.

 

이를 틈타 누르하치는 여진의 모든 부족들을 차례로 통합해 나갔으며, 드디어 1616년에는 북방 유목민족의 전통적 황제인 칸()에 오르고 후금(後金)이라는 국호와 천명(天命)이라는 연호를 정한다. 후금이라면 400년 전 송나라(북송)를 멸망시킨 금나라의 후예라는 뜻이며, 천명이라면 하늘의 명령이라는 뜻이 아닌가? 더욱이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했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중국 한족 왕조에 사대하지 않겠다는 정치적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누르하치의 정치적 야망은 단순히 중국에 사대하지 않는 독자적인 제국을 꾸리겠다는 데 있지 않다. 옛 남북조 시대와 몽골제국의 시대에서 보았듯이, 역사는 중원 북방 민족이 장기적으로 존속하려면 중국 대륙을 정복해야만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여진문자를 만들고 전통적인 사냥 방식을 응용해서 독특한 팔기군(八旗軍)을 육성한 것은 장차 중화세계의 심장부를 침략하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다. 광해군(光海君)이 바깥의 정세에 주목한 이유는 바로 이런 북방의 변화를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당시에는 대동법이 더 큰 사건이었겠지만, 광해군(光海君) 시절의 치적(?) 가운데 오늘날까지 중요한 영향을 남긴 것으로 1618년에 일본을 통해 전래된 담배가 있다. 그림은 18세기 후반 신윤복의 청금상련(聽琴賞蓮)이란 작품인데, 담뱃대에 잔뜩 멋을 부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담배에 관한 예절도 마치 오랜 전통을 가진 듯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셈이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사대부에 도전한 국왕

남풍 뒤의 북풍

곡예의 끝

수구의 대가

중화세계의 막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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