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북풍)
사대부에 도전한 국왕
정철(鄭澈)이 이루지 못한 ‘건저(建儲)의 꿈’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마자 실현되었다. 북쪽으로 도망치던 선조(宣祖)는 평양에 이르렀을 때 황급히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한 것이다. 자칫 잘못하다가 왕실 사직이 끊어지면 종계변무(宗系辨誣)를 해결했어도 죽어 조상들을 뵐 수 없으리라는 판단이었을 게다. 광해군(光海君)에게는 친형 임해군이 있었지만, 그는 성질이 포악해서 세자 책봉을 받지 못했다(물론 사대부들의 구미에 맞는 후보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난리 덕분에 세자가 된 광해군은 공교롭게도 그 난리가 끝나면서 세자 자리를 빼앗길 위기에 처한다.
1600년에 의인왕후가 죽은 게 그에게는 큰 불운이다. 어차피 마흔이 넘은 그녀가 아이를 낳을 가능성은 제로였으므로 그는 세자 자리에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죽었으니 혹시 선조(宣祖)가 계비라도 들인다면 알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과연 그 혹시는 역시가 된다. 난리가 가라앉은 1602년에 선조는 주책없이 쉰 살의 나이로 열여덟 살의 계비를 맞아들인 것이다(광해군光海君보다도 아홉 살이나 어린 계비다), 후궁이라면 충분히 있을 수 있겠지만 그 나이에 굳이 계비를 둔 이유는 뭘까? 그 어린 계비인 인목왕후(仁穆王后, 1584~1632)가 4년 뒤 이들 영창대군(永昌大君, 1606~14)을 낳자 광해군은 긴장할 수밖에 없다. 나이는 훨씬 어리더라도 엄연히 왕실 적자 출신이니 서자인 자신과는 신분이 다른 것이다【조선의 국왕은 많은 후궁들을 거느릴 수는 있지만 정비는 하나뿐이다. 정비가 죽었을 때는 계비를 맞을 수 있는데, 후궁들 가운데서 고르거나 궁 밖에서 데려온다. 왕실에서도 서얼의 차이는 있었으므로 정비나 계비가 낳은 아들은 대군(大君)이고 후궁의 아들은 그냥 군(君)이며, 딸은 각각 공주와 옹주(翁主)가 된다(그래서 광해군光海君도 광해대군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많은 아내를 거느렸던 세종도 소헌왕후가 그보다 먼저 죽었을 때 계비를 들이지는 않았으니, 선조(宣祖)가 계비를 들인 것은 확실히 특이한 데가 있다. 나이도 나이인 데다 후궁들이 있으므로 성생활의 문제는 아니다. 그렇다면, 기록에는 없으나 여기에도 광해군에 반대하는 사대부들의 입김이 작용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그간 그는 세자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의주에 붙박힌 채 여차하면 중국으로 넘어갈 차비를 갖추고 있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북도와 남도를 오가며 군대를 모집하고 군량미를 조달했는가 하면, 명나라의 요청으로 국내의 군무를 주관하는 등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았던가? 이제 와서 겨우 갓난아이 하나 때문에 세자 자리를 위협받다니 그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다.
광해군(光海君)의 안타까운 심정과는 달리, 이런 좋은 찬스를 사대부(士大夫)들이 놓칠 리 만무하다. 대북과 소북은 각자 자기 구미에 맞는 북을 골라 두드리기 시작했는데, 큰 북은 광해군이고 작은 북은 영창대군이다. 결과는 1608년에 광해군이 선조(宣祖)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면서 큰 북의 승리로 끝났다. 그와 함께 광해군의 잠 못 이루는 밤도 끝났다.
사대부의 도움으로 세자 자리를 끝까지 보전하고 왕위에까지 오른 광해군의 첫 작업은 당연히 그에 대한 보답이다. 홍여순에 뒤이어 큰북의 보스가 된 이이첨(李爾膽, 1560~1623)의 제안에 따라 그는 우선 형이자 잠재적 라이벌인 임해군을 유배시키고 작은 북 중 가장 소리가 컸던 유영경(柳永慶, 1550~1608)에게 사약을 내렸다(임해군은 이듬해에 역모죄를 뒤집어쓰고 사약을 받았다).
그러나 온갖 풍상을 헤치며 우여곡절 끝에 서른 이 넘은 나이로 왕위에 오른 탓일까? 광해군(光海君)은 중종 이래 사대부들에게 마냥 휘둘려왔던 집안의 쭉정이 조상들과는 인물됨이 달랐다. 아마도 그는 나라와 백성을 황폐하게 만든 난리에서 크게 깨달은 점이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당쟁을 그대로 놔두면 장차 더 큰 난리를 겪게 되리라는 점은 분명히 확신하고 있었던 듯하다. 따라서 그는 100년이 넘도록 사대부(士大夫) 국가를 유지해 온 조선을 다시금 왕국으로 만들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말하자면 국왕이 사대부에게 도전장을 던진 격이다.
왕국을 만들기 위해 국왕도 당파가 필요하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일찍이 세조(世祖)가 그러했듯이 왕국으로 컴백하려면 왕당파라는 측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세조 때와 달리 사대부(士大夫) 체제가 굳어져 있는 지금은 더더욱 측근의 힘이 튼튼해야 한다. 그래서 광해군(光海君)은 자신의 즉위를 도운 세력 중에서 왕당파의 리더를 발탁하고자 한다. 이이첨은 책략이 있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에서 별로 한 게 없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최적임자는 바로 정인홍이다. 연배도 높고 의병장으로 활약한 경력이 있을 뿐 아니라 이황과 더불어 성리학의 최고 권위자였던 조식의 수제자가 아닌가? 게다가 그는 광해군의 즉위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적도 있었다(유영경이 선조가 광해군에게 양위하려 한 사실을 숨기려 했을 때 그것을 적발했다).
과연 정인홍은 광해군의 구미에 딱 맞는 사건을 엮어준다. 1611년 그는 성균관 유생들이 이황과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언적은 명종(明宗) 때 양재역 대자보 사건에 휘말려 유배된 문신이지만, 그보다는 성리학의 지치주의적 정치철학을 발전시킨 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정치 이데올로기에 국한되어 있던 유학에 철학적 성격을 가미했으니 말하자면 주희(朱熹)의 한반도판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비록 그는 경기 출신이지만 이황과 기대승에게 영향을 주어 영남학파의 태동에 간접적으로 기여했다. 성균관 유생들에게 존경을 받은 것은 그 때문이다】의 문묘종사를 지내려 할 때 거세게 반대하고 나선다(앞에서 보았듯이 문묘종사란 국가에서 유학의 거두에게 사당을 지어 주는 것이었으니 오늘날의 무형문화재 이상 가는 영예다). 왜 자기 스승은 제외하느냐는 것인데, 조식의 수제자로서 당연히 할 만한 주장이지만 그렇다고 남의 제사에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는 건 자긍심 강한 성균관 유생들의 비위를 건드리는 결과가 된다. 대학의 자율과 자유는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것. 격분한 유생들은 정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해 버린다. 졸업장 명부에서 제적당한 격이니 정인홍은 열받을 수밖에 없다. 그는 쪼르르 달려가 보스에게 탄원했고 광해군(光海君)은 성균관 유생 전원 제적이라는 극단의 조치를 내렸다.
야당의 입장에 있었던 소북은 그 사건으로 다시 한번 대북에게 두들겨맞았다. 물론 이것도 당쟁이긴 하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미 대북을 왕당파로 만들었으므로 과거의 당쟁과는 다르며, 엄밀히 말해 국왕과 사대부(士大夫)의 대결이다. 서전을 승리로 장식한 국왕에게는 건수로 활용할 만한 사건이 계속 터진다. 이듬해인 1612년에는 황해도에서 허위 역모 사건이 꾸며졌다. 내용인즉슨 터무니없다. 김경립(金景立)이라는 자가 군역을 피하기 위해 사기를 치다가 걸리자 봉산 군수 신율(申慄)은 그를 고문해서 김백함(金百緘)이라는 자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허위 자백을 받아냈다. 김백함을 체포하니 그의 아버지 김직재(金直哉)가 일찍이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아버지의 상중에 술과 고기를 먹었다가 파직된 사연이 드러났다. 역모를 조작할 수 있는 좋은 건수다. 고문에 못 이긴 김백함은 엉뚱하게도 인목왕후의 아버지이자 영창대군의 외조부인 김제남(金悌男, 1562~1613)을 불었고, 때마침 충청도에서 강도질을 하다 잡힌 박응서(朴應犀, ?~1623)라는 자가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려 했다는 사건까지 겹치면서 사태는 일파만파로 번진다【박응서는 선조(宣祖) 초기에 영의정이었던 박순(朴淳)의 서자로, 학문과 재주가 뛰어났으나 서얼 출신이라는 이유로 좌절한 인물이다. 그는 같은 처지의 명문 출신 서자들과 함께 ‘강변 7우’라는 동아리를 만들어 신세를 한탄하다가 광해군(光海君) 즉위 초에 서얼 출신에 대한 차별을 없애 달라고 탄원했으나 거절당했다. 공교롭게도 광해군은 그 자신도 왕실의 서자로 설움을 겪었으면서도 그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서자를 주인공으로 삼은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쓴 허균(許筠, 1569~1618)은 친구인 박응서가 체포된 뒤 신분 해방의 꿈을 접었으나 1618년 반역을 꾀했다가 처형당했다】.
광해군으로서는 가장 큰 라이벌인 영창대군과 소북 세력을 한꺼번에 제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를 빌미삼아 그는 김제남에게 사약을 안기고 그 이듬해에 영창대군을 유배시켰다가 죽였으며, 그밖에 100명이 넘는 소북 세력을 숙청했다. 이로써 반대파는 완전히 제거되었고 광해군(光海君)은 왕당파를 심복으로 삼아 왕권을 단단히 다지는 기반을 마련했다.
▲ 재야의 구심점 조식은 평생 관직에 진출하지 않았으면서도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한 인물이다. 하지만 조선 특유의 학자=관료, 학문=정치의 등식을 알면 그 메커니즘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의 제자들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고 당쟁에도 열심이었으니, 유학에 도가 사상을 가미해서 남명학파(南冥學派, 남명은 조식의 호다)를 이룬 스승의 학풍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할까?
남풍 뒤의 북풍
국왕의 승리일까? 그럼 조선은 왕국으로 되돌아간 걸까? 아직 확실치 않으나 광해군(光海君)은 그렇다고 믿었다. 벌써 100년을 지배해 온 사대부 세력이 그렇듯 쉽게 권력을 내놓을 리는 없지만, 사태를 낙관한 그는 이제야 비로소 국왕 본연의 임무를 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사실 그는 왕권을 다지는 중에도 전란으로 얼룩진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창덕궁과 창경궁의 건축을 서두른 게 상징적인 재건이라면, 즉위하자마자 시행한 대동법(大同法)은 실질적인 국가 재건 사업에 해당한다.
전란으로 국토가 초토화되었으니 가장 시급한 게 토지와 조세제도다. 남아 있는 토지라도 추슬러 놓아야 농업 생산이 이루어질 뿐 아니라 무엇보다 전후 복구를 위해서는 막대한 재정이 필요한데 그 재정은 토지에서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미 전부터 기존의 토지제도가 유명무실해져 있었으니 관리들의 녹봉 체계도 재정비해야만 국가의 기틀이 설 수 있다. 왕국으로 되돌림으로써 일종의 재건국을 시도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새로운 제도를 시행할 만한 조건도 좋다. 그런 배경에서 1608년 그는 경기도를 대상으로 해서 대동법(大同法)을 시범운용한다(처음에는 선혜법宣惠法이라 불렀고 이를 집행하는 기관으로 선혜청宣惠廳이 설립되었다. ‘선혜’라면 은혜를 베푼다는 뜻이지만 실은 백성들을 위한다기보다 국가 재정의 확충을 위해 필요했다).
대동법의 기본 정신은 모든 것을 하나로 통일한다는 그 이름처럼 간단하다. 생산자들이 국가에 납부하는 모든 조세를 한 가지 품목, 즉 쌀로 통일하는 것이다(이 쌀은 당연히 대동미大同米라고 부른다)【사실 대동법은 ‘원조’가 있다. 국내판 원조는 일찍이 이이가 주장한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이다. 이것은 특산물 공납제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공납을 쌀로 통일하자는 구상인데,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끝나고 유성룡이 다시 주장해 잠시 시행된 적이 있다. 해외판 원조는 16세기 초반부터 시행된 명의 일조편법(一條鞭法)이다(아마 대공수미법도 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일조편법은 곡물세[田賦]와 요역의 잡다한 항목들을 단일화하고 마을 단위로 부과하던 세금 양을 옛날처럼 토지와 사람을 기준으로 부과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중국에는 화폐경제가 상당히 발달해 있어서 은납제(銀納制)가 허용되었다는 점을 빼면 대동법(大同法)과 큰 차이가 없다】. 이전까지 농민이 국가에 내는 것은 편의상 통칭해서 조세라고 불렀지만 기본적인 전세(田稅)를 비롯해서 공물, 진상(進上, 특산물), 잡세 등등 다양했다. 생활양식이 다양하니 그랬겠지만 세금을 그렇게 여러 가지로 거두어들여서야 재정 운영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리 없고, 무엇보다 부패한 관리가 임의로 착복하기에 유리한 제도일 수밖에 없다(원래 근대 국가로 진화할수록 조세의 납부 방식은 단일해진다).
사실 그런 문제점은 16세기에도 이미 커다란 공감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세제 개혁의 필요성만 팽배했을 뿐 만연한 당쟁 때문에 뒤로 밀렸고 전란 때문에 또 미뤄졌다. 게다가 공물과 진상은 국왕에 대한 예우라는 또 다른 의미가 있었으므로 쉽게 단일화될 수 없는 항목이었다. 하지만 전란으로 모든 게 망가진 마당에 예우 따위를 따질 여유가 없는 데다 유통망이 발달한 탓에 지방의 특산물 정도는 왕실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게 되었으니 세제를 통일할 조건은 충분하다. 과연 대동법(大同法)이 실시되자 과세의 표준이 확립되었고, 지방관들의 농간도 줄어들었으며, 탈세의 여지도 적어졌고, 면세지가 줄어 국가 재정도 강화되는 당장의 효과를 보았다. 아울러 조세 품목이 쌀로 단일화됨으로써 장차 화폐경제의 도입을 가능케 하는 장기적인 효과도 기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시행되려면 무엇보다 토지 측량, 즉 양전(量田)이 선행되어야 한다. 개국 초기에 실시된 양전사업의 성과는 세월이 흐르면서 이미 오래 전에 유명무실해졌지만, 그나마도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경지의 지도 자체가 송두리째 바뀌었으니 아무 소용도 없다. 그래서 광해군(光海君) 때는 중부지방부터 양전이 이루어지면서 그에 따라 대동법(大同法)도 점차 확대 실시된다. 이렇게 해서 속도는 느리지만 대동법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19세기 말까지 조선의 기본적인 세제로 기능하게 된다【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해결하고 넘어가자. 서양의 경우에는 중세부터 지대(地代)의 개념이 발달했는데, 동양의 역사에서는 왜 지대가 없었을까? 지대의 개념을 적용하면 세금제도는 아주 쉽게 해결된다. 땅의 이용자(농민)는 땅의 소유자(지주)에게 세금을 내고, 지주는 또 그것으로 국가에 세금을 내면 되기 때문이다(현물이든 화폐든 상관없다). 동양 사회에 그런 방식이 적용될 수 없었던 이유는 지주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양식 왕국에서 모든 땅은 왕(국가)의 것이다. 지주라는 용어는 있으나 서양과 달리 동양의 지주는 단지 수조권자 일뿐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지주는 실제 소유자처럼 처신하지만 원칙적으로 왕토 사상이 적용되므로 지대의 발상을 낳기는 어려웠던 것이다(이런 모순 때문에 명나라 후기에는 일전양주一兩主라는 토지 소유의 새로운 개념이 나오는데, 이에 관해서는 『종횡무진 동양사』 287쪽을 참조하라)】.
광해군(光海君)은 왕당파를 움직여 권력을 얻었고 대동법(大同法)을 만들어 민심을 얻었다. 이렇게 해서 혼란스러웠던 국내 상황은 어느 정도 다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광해군이 정작으로 신경을 집중한 분야는 국내 정치가 아니라 나라 바깥의 동태다. 세자 시절에 전란으로 고생했던 경험은 그를 그 전의 어느 왕보다도 국제적 감각에 밝은 군주로 만들어주었다. 조선의 사대부(士大夫)와 백성들이 거의 모두 일본에 대한 원한에 사무쳐 있는 분위기 속에서도 즉위 이듬해인 1609년에 쓰시마 도주와 수교를 복원한 것은 아마도 국제적 감각을 갖춘 그였기에 가능했을 터이다(이 해가 기유년이기에 이를 기유약조己酉約條라 부른다). 게다가 그는 동북아의 풍향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수천 년 동안 동북아 질서의 중심축이었던 중화세계가 약화되고 비중화세계가 도약하고 있는 시대였다(그런 시대적 조류에도 불구하고 중화세계의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이 여전히 지배 이념으로 군림한다는 데 조선의 비극이 있었다). 일본에서 불어닥친 게 남풍이라면 장차 불어올 바람은 북풍일 것이다.
일본이 온몸으로 증명해주었듯이 비중화세계는 이미 중화세계의 끝자락인 조선이 과거처럼 마음대로 교린‘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중화세계가 현실에 안주하며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동안 비중화세계는 결정적인 단점이었던 분열을 극복하고 지역적 통일을 향해 내닫고 있었다. 동북아의 비중화세계라면 단연 일본과 만주다. 먼저 통일을 이룬 일본이 중화세계에 도전장을 내밀었으니 그 다음에는 만주가 뒤를 잇는 게 순서다. 과연 일본과 중화세계의 전쟁이 한창이던 16세기 말부터 만주 지역에도 통일의 바람이 거세게 몰아친다. 통일의 움직임이 있다면 구심점도 있을 게다.
1593년 중국과 조선에게서 건주라 불리던 힘의 공백 지역을 통일한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1559~1626)가 바로 그 구심점이다(원래 여진이라는 이름은 중국인들이 만주 지역의 여러 민족들을 통칭하던 명칭이었으나 이 시기부터의 여진은 보통 만주족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오늘날 중국 한족이 흔히 만족滿族이라 줄여 말하는 게 그들이다).
처음에는 명나라에 사대하며 관작까지 받은 그였으나 애초부터 중화세계에 끝까지 충성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게다가 명나라 조정은 사대부(士大夫)들이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자기들끼리 동림당과 비동림당으로 나뉘어 당쟁을 일삼느라 변방의 사정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었다【조선에 조광조(趙光祖)가 있었다면 명나라에는 장거정(張居正, 1525~82)이라는 개혁가가 있었다. 1572년 신종이 열 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어린 황제를 대신해서 전권을 위임받은 그는 부패하고 무능한 관료들을 축출하여 관료제의 기강을 확립하고, 전국적인 토지 조사를 실시하여 세수에서 누락된 대지주들의 토지를 적발하는 한편 전국 토지의 실제 면적을 정확히 조사했다. 그러나 개혁 정치 10년 만에 그가 사망하자 그의 개혁에 반대하던 사대부(士大夫)들은 동림당을 이루었고 그 반대파는 비동림당을 이루어 당쟁을 시작했다. 조광조(趙光祖)의 개혁이 실패한 이후 당쟁이 가열화된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그 와중에서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맞았으니 명나라의 지원이 부실했던 것도 당연했다】.
이를 틈타 누르하치는 여진의 모든 부족들을 차례로 통합해 나갔으며, 드디어 1616년에는 북방 유목민족의 전통적 황제인 칸(汗)에 오르고 후금(後金)이라는 국호와 천명(天命)이라는 연호를 정한다. 후금이라면 400년 전 송나라(북송)를 멸망시킨 금나라의 후예라는 뜻이며, 천명이라면 하늘의 명령이라는 뜻이 아닌가? 더욱이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했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중국 한족 왕조에 사대하지 않겠다는 정치적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누르하치의 정치적 야망은 단순히 중국에 사대하지 않는 독자적인 제국을 꾸리겠다는 데 있지 않다. 옛 남북조 시대와 몽골제국의 시대에서 보았듯이, 역사는 중원 북방 민족이 장기적으로 존속하려면 중국 대륙을 정복해야만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여진문자를 만들고 전통적인 사냥 방식을 응용해서 독특한 팔기군(八旗軍)을 육성한 것은 장차 중화세계의 심장부를 침략하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다. 광해군(光海君)이 바깥의 정세에 주목한 이유는 바로 이런 북방의 변화를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당시에는 대동법이 더 큰 사건이었겠지만, 광해군(光海君) 시절의 치적(?) 가운데 오늘날까지 중요한 영향을 남긴 것으로 1618년에 일본을 통해 전래된 담배가 있다. 그림은 18세기 후반 신윤복의 「청금상련(聽琴賞蓮)」이란 작품인데, 담뱃대에 잔뜩 멋을 부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담배에 관한 예절도 마치 오랜 전통을 가진 듯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셈이다.
곡예의 끝
만주쪽에서 보기에는 중원보다 더 가까운 게 한반도이며, 중국보다 더 약한 게 조선이다. 누르하치는 물론 조선을 타깃으로 삼고 있지는 않지만, 중국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조선이 걸림돌이라고 판단되면 언제든 공격해 올 것이다. 일단 광해군은 대포를 새로 만들게 하고 북도의 군 지휘관들을 교체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하지만 새 지휘관들이 새 대포를 사용하게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게 그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한편으로 국방을 강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북아의 새로운 정세를 맞아 외교에 주력한다. 그에게는 일찍이 조선의 어느 임금도 해본 적이 없고 할 필요도 없었던 국제 외교라는 새로운 과제가 주어졌다.
알다시피 열강 사이에서 약소국이 벌이는 외교란 줄타기처럼 섬세하고 위험한 곡예일 수밖에 없다. 어느 측으로 기울어져도 안 되고, 물론 줄에서 뛰어내려도 안 된다. 명나라는 서산에 지는 해이고, 후금은 동쪽 바다 위로 뜨는 해다. 하지만 명나라는 아직 후금조차 두려워하고 있는 강대국이며, 전통적으로 조선의 상국이다. 그래서 줄타기는 결코 쉽지 않다. 한 가지 다행스런 전망은 광해군(光海君)이 줄 위에 있는 기간이 그리 길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조만간 늙은 공룡 명나라가 쓰러질 것은 뻔해 보이니까 그때까지만 견디면 된다.
1618년 후금이 중원 진출의 관문에 해당하는 랴오둥을 공략하자 광해군의 줄타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명나라는 황실이 문란해지면서 변방의 주둔군도 이미 녹슬었다. 그런데 명의 조정에서는 묘한 해법을 들고 나온다. 조선의 군대를 징발해서 후금을 막으려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조선에게는 노선을 정하라는 압력이나 다름없다. 이제 광해군(光海君)의 줄타기는 끝난 걸까?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가 온 걸까? 그러나 여기서 광해군은 절묘한 타개책을 찾아낸다. 지원군을 보내되 싸우지는 않는다는 전략이다. 일단 그는 강홍립(姜弘立, 1560~1627)을 원수로 삼아 1만 3천 명의 병력을 파견한다. 이로써 명나라의 명령은 이행했다. 하지만 광해군은 측근들도 모르게 강홍립에게 후금군과 가급적 싸우지 말라는 비밀 지령을 내린다. 알아서 눈치껏 처신하라는 명령인데, 과연 강홍립은 명나라의 제독 유정(劉綎)의 군대와 랴오둥에서 합류한 뒤 싸우는 척하다가 전군을 이끌고 후금에 투항해 버린다. 그러고는 후금 진영에서 명나라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출병했다는 본심을 털어놓는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가 치른 대가는 컸다. 왕의 본의를 알지 못한 조선 조정에서는 강홍립의 관직을 박탈하고 그의 식솔들을 잡아들였으며, 후금 측은 이듬해 병사들을 모두 풀어주면서도 그를 비롯한 지휘관들은 계속 인질로 잡아둔 것이다(아마 그가 처벌된 데는 눈치를 챈 명나라 측의 항의가 있었을 텐데, 그것까지는 광해군(光海君)도 막아주지 못한 듯싶다).
어쨌든 광해군의 줄타기 외교는 멋지게 성공했다. 이제 그는 명나라가 명패를 완전히 내릴 때까지만 줄 위에서 버티면 된다. 그때가 되면 비록 조선은 중국의 새 주인인 후금을 어떻게 대할 것이냐는 과제를 안게 되겠지만 지금까지의 사대관계와는 사뭇 달라질 것이다. 무엇보다 후금은 중화세계의 일원이 아니었고, 이제 조선도 사대부(士大夫) 국가가 아닌 당당한 왕국이 되었으니까.
그러나 광해군(光海君)은 예기치 않은 데서 공격을 받아 줄에서 떨어지게 된다. 바깥의 문제에 신경을 쓴 나머지 안을 추스리지 못한 게 원인이었다. 대북 세력을 왕당파로 육성한 것은 다른 사대부 세력을 견제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원래 그들은 잘 쓰면 약이 되고 잘못 쓰면 독이 되는 존재였다. 그런 점에서, 1617년 인목왕후를 대비 자리에서 폐위시켜야 한다는 대북인들의 주장을 광해군이 쉽게 허락한 것은 명백한 실책이다【실은 대북 세력만이 아니라 광해군도 인목왕후에 대해서는 늘 꺼림칙하게 여겼다. 나이는 그보다 아홉 살이나 아래지만 어쨌든 자신의 계모일 뿐 아니라 광해군은 그녀의 아들인 영창대군을 살해한 도덕적 책임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왕실의 서자 출신으로서 왕위에 오른 경우는 그때까지의 조선 역사상 광해군이 처음이었으니 그로서는 여러 가지로 대비의 존재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칠순의 존경받는 원로 정객인 이항복을 비롯한 여러 대신들이 대비의 폐위는 부당하다고 말했지만 오히려 광해군(光海君)은 그들을 유배하는 조치로 맞섰다. 그러나 아무리 대외 정세에 몰두해 있더라도 그것은 지나친 처사일뿐더러 가뜩이나 코너에 몰린 반대파 사대부(士大夫)들을 더욱 궁지에 몰아넣는 결과였다.
▲ 줄타기 외교 전통의 강국과 신흥 강국 사이에서 광해군(光海君)은 줄타기를 시작했다. 위험하지만 어차피 두 강국 중 하나는 멸망할 테니 잠시만 버티면 된다. 『만주실록』에 실린 이 그림은 누르하치와 강홍립이 만나는 장면이다. 왼편의 글씨에 강홍립의 이름을 ‘姜’이라 표기한 게 보이는데, 아마 발음 차이 때문일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1622년 이이첨이 폐위된 인목왕후를 살해하려다가 실패한 사건은 반대파의 공분을 자아내기에 족했다. 특히 정철(鄭澈)이 실각한 이래 오랫동안 권력 맛을 보지 못한 서인들은 이런 분위기를 틈타 뭔가 일을 엮어내야 한다고 판단한다. 실제로 사대부들의 상당수가 왕당파로 변신해 있었으니 그대로 간다면 조선을 사대부 국가로 되돌릴 가능성은 점점 더 희박해질 것이다. 그래도 늙은 관료들이었다면 노골적으로 나서진 못했을 것이다(게다가 그들의 주무기는 말만의 역모인데, 지금은 그게 통할 상황이 아니다), 그러나 현 정권에 항거했다 관직을 박탈당한 김류(金瑬, 1571~1648), 최명길(崔鳴吉, 1586~1647), 김자점(金自點, 1588~1651), 그리고 성균관 ‘제적생’으로 역시 현 정권에 원한이 깊은 심기원(沈器遠, ?~1644) 등 소장파 서인들은 원로들이라면 꿈꾸지도 못할 과감한 음모를 꾸민다. 연산군(燕山君)을 타도한 중종반정(中宗反正) 이래 처음으로 ‘말만이 아닌 역모’가 계획된다(그들이 거사를 계획하고 칼을 갈아 씻은 곳이 오늘날 서울의 세검정 洗劍亭이다).
반란에 필요한 준비물은 우선 왕으로 내세울 후보이고, 그 다음은 물리력이다. 그들은 어렵지 않게 능양군(陽君)이라는 후보를 낙점한다. 신성군의 조카인 그는 1615년 친동생인 능창군(綾昌君)이 광해군(光海君)에게 살해된 원한에 사무쳐 있다. 양측은 쉽게 계약을 체결한다. 후보는 됐고,
그럼 물리력은 어떻게 할까? 원래 정규군이라 할 만한 것은 없었지만 그나마 조선의 군사력은 북방의 정세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북도에 집결해 있다. 그래서 거사에 필요한 물리력은 황해도 평산 군수인 이귀(李貴, 1557~1633)와 함경도 병마절도사인 이괄(李适, 15871624)이 담당한다(말하자면 전방 사단을 동원해서 권력을 잡으려는 격인데, 이런 경우는 1979년 12월 12일에 재현된다). 골조가 다 짜였으니 이제 모 아니면 도다.
1623년 3월 그들은 약 7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남행길에 올랐다. 때맞춰 경기방어사인 이서(李曙, 1580~1637)가 고양에서 700명의 병력으로 합류하면서 반란군의 규모는 두 배로 늘어난다. 그러나 그들이 한양에 들어올 때까지도 광해군은 반란군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채 궁중에서 연회를 벌이고 있었다. 보안 유지에서도 반란군은 한 수 위였던 셈이다. 손쉽게 궁궐을 장악한 반란군은 서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왕후에게 옥새를 건넨 다음 그녀의 손으로 광해군(光海君)을 폐위시키고 능양군을 왕위에 올리게 했다. 그가 조선의 16대 왕인 인조(仁祖, 1595~1649, 재위 1623~49)이므로 이 사건을 인조반정(仁祖反正)이라 부른다【불과 1500명도 못 되는 병력으로 반란을 성공시켰다는 사실이 당시 조선의 형편을 말해준다. 물론 궁을 점령할 때는 각본에 따라 궁 안의 동조 세력이 내응하기는 했으나, 반란군이 그 정도 규모만으로 북도에서 한양까지 한달음에 내려올 수 있었다면 조선에는 치안 자체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원래 도성을 지키는 중앙군으로는 경군(京軍)이라 불리는 조직이 있었고 또 별도의 왕실 근위대가 편제되어 있었지만,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군제가 사실 상 마비되어 있어 기능을 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 얼마 안 되는 군 조직마저도 반란군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는 것은 곧 광해군(光海君) 치세에도 사대부(士大夫)들이 국정 전반을 장악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광해군의 낙관과는 달리 조선은 왕국으로 되돌아오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조선 역사상 두번째로 반정이 성공했고, 광해군은 연산군(燕山君)에 이어 두번째로 왕의 묘호를 받지 못한 군주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두 가지가 더 있다. 하나는 조선이 사대부(士大夫) 국가로 컴백했다는 사실이다. 광해군(光海君)이 꾀한 왕국의 꿈이 실패하면서 조선은 시대적 조류에 역행하는 수구적 체제로 돌아갔다. 또 하나의 문제는 광해군이 줄에서 떨어짐으로써 조선에 다시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 수구의 칼을 씻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의 주역들이 쿠데타의 칼을 씻었다는 세검정이다. 쿠데타가 성공함으로써 광해군(光海君)의 중립 노선도 끝장나고 말았는데, 당시 반정 세력은 광해군의 가장 큰 죄목을 사대의 예를 다하지 않은 데서 찾았으니 이런 시대착오도 없다. 결국 그 대가는 ‘전란에의 초대’였다.
수구의 대가
역사의 시계추를 되돌리고 왕국을 사대부(士大夫) 국가로 복원시켰다는 점에서 인조반정(仁祖反正)은 100여 년 전의 중종반정(中宗反正)과 같은 이름으로 불릴 만한 자격이 충분하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수많은 공신들이 책봉되는 것은 당연할 터이다. 왕당파를 주도한 대북파의 보스들인 이이첨과 정인홍 등은 처형되었고, 반정을 주도한 소장파 서인들을 비롯해서 50여 명이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새 정권은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부터 삐걱거린다.
사실상 반란의 물리력을 담당하고서도 2등 공신으로 책봉된 데다 중앙 관직이 아닌 평안도로 배속된 이괄은 불만이 가득하다. 굳이 말하자면 새 정권의 의도는 북방의 정세가 워낙 화급한지라 국경 수비를 강화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괄로서는 오랜만에 정권을 잡은 서인들이 일개 변방의 무신에게까지 좋은 보직을 줄 여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판단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렇잖아도 건드리면 터질 듯한 이괄의 심기는 조정에서 자기 아들에게 역모의 혐의를 두자 폭발하고 만다. 그래서 그는 반정 이듬해인 1624년에 조정에서 파견한 수사관을 잡아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하기야 한 번 해봤으니 또 못할 이유도 없다(사실 조정에서는 역모의 혐의가 무고라는 것을 알았으나 서인 정권은 그것을 핑계로 일단 이괄을 잡아들이려 했다).
반정 때보다도 훨씬 대규모인 1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이괄이 평안도에서 내려오자 더럭 겁이 난 인조(仁祖)와 사대부(士大夫)들은 잽싸게 충청도 공주로 피난한다【외적의 침략도 아닌 국내의 반란으로 국왕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친 사건은 역사상 최초의 사건이었으므로 당시 관리들과 백성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수십 년 전 일본의 침략을 받아 선조(宣祖)가 버선발로 도망친 일은 있으나 그래도 그건 국가 비상사태의 경우니까 차라리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내란으로 국왕이 꽁무니를 뺀 이번 사건은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다. 광해군(光海君)이 주도한 왕국화의 노선이 붕괴하면서 국왕의 체통도 완전히 무너진 셈이다. 하지만 조선 백성들은 그로부터 불과 10여 년 뒤 국왕이 적 앞에서 무릎을 꿇는 광경까지 목격하게 된다】. 쉽게 한양에 입성한 이괄은 옛 경복궁 터에서 선조(宣祖)의 서자인 흥안군(興安君)을 왕으로 옹립하는데, 조선 역사상 반란군이 별도의 왕을 추대한 것도,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이 한양을 장악한 것도 모두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나 그의 시대는 채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이괄의 난에 동참하지 않은 북방의 수비 병력이 대거 남하하자 이괄은 무악재에서 한바탕 교전을 벌이는데, 대패하고 만다(흥안군은 인조와 함께 공주로 가던 중에 도망쳐서 이괄의 무리에 합류했는데, 반란이 실패하자 처형당했으니 결과적으로 판단 미스였다).
한양으로 돌아온 인조(仁祖)는 다시 진무공신(振武功臣) 30여 명을 책봉한다. 치세가 시작된 지 1년 만에 벌써 공신 인플레 현상이 심각할 지경이다. 이후 별다른 일이 없었더라면 아마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은 다시 공신 세력이 훈구파를 이루고 나머지 세력이 반대파를 이루어 한 바탕 멋지게(?) 당쟁을 펼쳤을 것이다.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북방에서 더 끔찍한 사태가 터졌기 때문이다(이미 충분히 예고되어 있었지만).
이괄의 난이 진압될 무렵 일부 반란자들은 후금으로 넘어가 조선의 사정을 알렸다. 비록 지금으로 치면 매국노이자 앞잡이 노릇을 한 것이지만, 그들이 전란의 초대자인 것은 아니다. 또한 1626년 누르하치의 아들로 후금의 2대 황제로 즉위한 홍타이지(皇太極, 1592~1643)는 조선에 대한 강경 노선을 취했지만, 그도 역시 전란의 근본 원인은 아니다. 조선 전역을 다시 또 전란의 회오리로 몰아넣은 진짜 원인 제공자는 바로 당시 조선의 집권자인 사대부(士大夫)들, 즉 서인 세력이다.
광해군(光海君)을 줄타기에서 떨어뜨린 그들은 아예 외교 자체를 포기한다. 그도 그럴 것이, 광해군의 곡예는 그들의 성리학적 세계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세상에 중화와 오랑캐를 두고 저울질을 하다니, 그런 망국적인 사고방식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문명 세계와 원시ㆍ야만의 세계를 비교한다는 발상 자체가 그들에겐 없다. 그래서 그들은 전통적인 사대의 자세로 회귀한다. 굳이 명명하자면 친명배금(親明排金), 즉 명에 사대하고 금을 배격한다는 게 되겠지만 실은 그런 이름조차 필요없다. 그냥 좋았던 옛날, 중화세계가 동북아 질서의 축이었던 세상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니까. 그러나 그런 시대착오적인 정책 때문에 조선은 수구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게 된다.
▲ 정규군의 필요성 인조반정(仁祖反正) 직후에 설립된 총융청(摠戎廳)인데, 사실상 조선 최초의 정규군이라 할 수 있다. 수구적인 반정 세력이 각성한 것일까? 그보다는 전통적으로 군사권을 맡겨왔던 중국의 한족 왕조가 사라졌기 때문일 터이다. 하지만 뒤늦게 엉성한 군 조직을 꾸렸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전란은 아니었다.
중화세계의 막내
홍타이지는 조선이 적대관계로 돌아서지 않는 한 조선을 침략할 의도는 없었다. 원래 역사적으로도 북방의 비중화세계는 중화세계의 본진인 중원을 정복 대상으로 삼았을 뿐 한반도를 타깃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후금의 조상인 금나라 시절에도 그들은 고려가 사금(事金, 금나라에 사대함)의 자세로 돌아서자 곧바로 말머리를 돌려 중원으로 쳐들어가지 않았던가? 한반도를 공격한 것은 오히려 중화세계였지 비중화세계가 아니었다(고대에 한족 왕조인 수와 당이 고구려를 침략한 게 그것이다). 고려시대에 거란과 몽골의 공격을 받은 이유는 고려가 이상하리만큼 중화세계에 강한 소속감을 보이면서 그들을 적대시했기 때문이다(왕건의 「훈요 10조」가 그런 예다). 따라서 그때도 고려가 최소한 중립적인 입장이라도 취했다면 전란의 화는 충분히 면할 수 있었다.
당시 사정은 그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전혀 다르지 않았다. 조선이 중화세계의 막내라는 허울을 아예 벗어 버리거나, 아니면 적어도 광해군(光海君)처럼 중립 외교를 펼쳤더라면 홍타이지는 굳이 중원 공략 사정은 그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전혀 다르지 않았다. 조선이 중화세계에 막내라는 허울을 아예 벗어 버리거나, 아니면 적어도 광해군처럼 중립외교를 펼쳤더라면 홍타이지는 굳이 중원 공략에 투입할 병력을 소모해 가면서까지 조선을 침략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반정을 주도한 서인 정권이 수구로 돌아서면서 모든 사정이 변해 버렸다.
1627년 1월 홍타이지는 아민(阿敏)이라는 부하에게 3만의 병력을 주면서 공격 명령을 내린다. 이른바 정묘호란(丁卯胡亂)의 시작이다. 예상했던 사태였으나 막상 뚜껑이 열리자 집권 사대부(士大夫)들은 도대체 뭘 믿고 친명 노선으로 회귀했는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허둥댔다. 3년 전에 설치한 어영청(御營廳, 수도경비대)은 무용지물이었고 광해군(光海君)이 애써 육성했던 북변 수비대 역시 곳곳에서 후금군의 남하를 막으려 애썼으나 단 한 차례의 전투에서도 승리하지 못했다【당시 상황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의 경우보다 더 불리했다. 일본군은 남쪽에서 치고 올라 왔으므로 조선이 명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할 수 있었지만, 적이 북쪽에서 내려오는 이번 전쟁에서는 두 나라가 분리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명나라와 조선이 강하다면 오히려 양측에서 협공함으로써 전황을 유리하게 가져갈 수도 있겠으나 그렇지도 못한 게 또 문제다. 후금군은 주력군을 조선에 파견하고도 일부 병력을 빼서 랴오둥 방면의 명나라 군을 막아낼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모문룡(毛文龍)이 지휘하는 명군은 조선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후금군의 역공을 받아 신미도로 도망쳐야 했다】. 한 달도 채 못 되어 후금군은 파죽지세로 황해도까지 밀고 내려왔다(그때 적군의 길잡이를 맡은 자는 바로 강홍립이었다. 광해군이 재위하고 있었더라면 그가 침략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일은 없었으리라).
적이 코앞에까지 다가왔으니 인조(仁祖)와 조정의 사대부(士大夫)들은 어떻게 했을까? 물론 도망쳤다. 다만 이번의 피난처는 장소가 바뀌어 남쪽이 아니라 인천 앞바다의 강화도였다. 강화도라면 몽골 침략 때 고려 왕실이 송두리째 옮겨갔던 유서깊은(?) 피난처가 아닌가? 이제 남풍이 불면 의주로 달아나고 북풍이 불면 강화도로 도망치는 게 아예 공식으로 자리잡았다. 한 가지 다행스런 점은 남풍이 불던 때처럼 이번에도 역시 관군이 하지 못한 몫을 의병이 해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한양까지 치고 내려올 줄 알았던 후금군이 황해도 평산에서 갑자기 발길을 멈춘 것은 의병들의 저항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후금의 입장에서는 내친 김에 한양을 점령해 버리면 좋겠지만 그러려면 그들의 피해도 적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조선은 최종 타깃이 아니니까 무리하게 힘을 쏟을 필요는 없다.
그래서 후금은 황해도에 주둔한 채 강화도의 피난 정부에 화의를 제안한다. 그들의 요구 조건은 간단하다.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지 말고 조선 왕실의 왕자를 인질로 보내라는 것인데, 그들이 침략해 온 이유가 뭔지를 명백히 말해주는 요구다. 즉 후금은 장차 명나라를 칠 때 후방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의도다. 승전국의 입장에서 요구하는 게 그 정도라면, 조선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다행이다. 그러나 강화도 정부는 그것을 수락하는 데도 난항을 겪는다. 명과의 전통적인 사대 관계라는 대의명분이 걸림돌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결국 반정공신 1등인 최명길이 나서서 매듭을 푼다. 일부 주전론자가 있었지만 실력자가 주화론으로 기울면서 노선이 결정된다. 후금군이 철수하는 조건으로 후금과 조선은 형제관계가 되었고, 왕자는 아직 나이가 어리므로 대신 왕족 가운데 한 명을 인질로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가장 미묘한 사안인 명과의 관계 문제는 애매하게 합의된다. 기존의 사대관계는 단절하되 명에 적대하지는 않겠다는 게 조선의 입장이다. 물론 그 뜻은 장차 후금이 명나라를 공격할 때 군대까지 동원해 가면서 지원할 수는 없다는 것인데, 후금으로서는 후방 다지기에만 성공하면 되니까 일단은 통과된다.
여기까지만 봐도 600년 전 거란이 고려를 침입해 왔을 때와 너무도 흡사하다. 당시에도 거란은 중국의 송나라를 치기 위한 후방 다지기의 일환으로 고려를 침략했고, 고려에게 송의 연호를 쓰지 말라면서 중국과의 관계 단절을 요구했으며, 고려 정부가 그것을 수락하자 철군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의 사태 전개도 과거와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거란이 물러간 뒤 고려 정부가 다시 거란에게 적대적인 자세로 돌아갔듯이 조선도 본심에서 형제관계를 맺은 게 아니었기 때문에 후금을 ‘형의 나라’로 받들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수백 년 전에 그랬듯이 이번에도 전란이 그것으로 끝나지 않을 게 분명하다.
사실 서인 정권은 집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불안정한 데다 워낙 후금의 힘이 막강해 잔뜩 겁을 집어먹은 상태였다. 그래서 성리학적 세계관에 골수까지 젖어 있음에도 그것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후금의 강화 조건에 크게 반발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눈앞에서 적이 물러가자 그들은 얼마 전에 닥쳤던 위기를 어느새 잊고 본연의 자세로 돌아간다(조선의 사대부들은 기억력도 형편없다). 마치 전쟁을 유도하기라도 하듯, 조선의 그런 태도를 더욱 부추긴 것은 후금이었다.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착각한 후금은 걸핏하면 조선에게 군량을 보내라고 요구하는가 하면 조선 북변을 제집 드나들 듯 마음대로 오가며 백성들을 약탈했다. 아니나 다를까? 마침내 후금은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업그레이드하자고 요구해 왔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여기서 꼭지가 돌았다.
부모를 버리는 아픔으로 중국에 대한 사대도 끊었다. 또 중국 침략에 사용될 걸 뻔히 알면서도 후금이 요구하는 조공도 바쳤다. 그런데 1636년 2월 인열왕후(仁烈王后, 인조仁祖의 비)의 문상 차 조선에 온 후금의 사신들이 군신의 예를 갖추라고 강요하자 조선 정부에서는 그동안 참고 참았던 울분이 터져나왔다. 사대부(士大夫)들은 일제히 일전 불사를 외쳤고 겁쟁이 인조마저도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기개일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무릎 꿇고 살기보다 차라리 서서 죽겠다는 것은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고결한 자세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으로서 칭찬받을 덕목이지 위정자로서 취할 태도가 아니다. 사회주의 혁명의 지도자였던 레닌이 말했듯이, 정치란 환자 한 명의 병을 고치는 의사의 ‘기술’이 아니라 수백만의 목숨을 좌우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굴욕을 참지 못하겠다고 해서 이기지 못할 전쟁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조선의 사대부들은 기술(craft)과 예술(art)의 차이를 착각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들의 자존심은 실상 중화세계에 대한 비굴한 존경심과 비중화세계에 대한 오만한 경멸감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니, 참된 기개라 보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조선의 태도를 확인한 홍타이지는 우선 1636년 4월에 국호를 중국식 이름인 청(淸)으로 바꿔 중원 정복의 의지를 분명히 한다(그래서 나중에 그의 묘호도 중국식의 태종太宗이 되니까 이때부터는 그를 청 태종이라 불러도 되겠다). 스케줄이 확실히 잡힌 만큼 후방을 다지는 일은 9년 전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가 되었는데, 일단 그가 취한 조치는 외교의 형식이다. 조선의 왕자를 인질로 보내고 아울러 청에 대해 호전적인 태도를 가진 주전론자들을 압송하라는 게 그의 주문이다. 그러나 그도 예상했겠지만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이 그 요구를 받아줄 리 없다. 드디어 그 해 12월 청 태종은 직접 12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조선 침략에 나서는데, 이것이 이른바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전쟁의 양상은 9년 전과 거의 다를 바 없다. 불과 보름 만에 청군은 평양을 거쳐 개성 부근까지 내려왔고, 조선의 사대부들은 또 다시 도대체 뭘 믿고 호전적인 태도를 보였는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한 가지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 정부의 무능함을 익히 알고 있는 백성들이 서둘러 피난 보따리를 샀다는 점이다. 왕실과 조정 대신들은 백성들보다 더 잽싸게 짐을 꾸리는 한편, 지방의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군대를 수도로 황급히 불러들였다. 강화도로 피난하는 동안 시간을 끌자는 전략이다. 그러나 왕실의 부녀자들을 먼저 강화도로 보내고 인조(仁祖)가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45)와 함께 그 뒤를 따르려는 순간 한밤중에 급보가 전해졌다. 청군이 이미 홍제원(弘濟院)까지 들어왔으며, 일부는 서쪽으로 이동해서 강화로 가는 길목을 차단했다는 것이다【홍제원은 말하자면 국립 호텔 격인데, 지금의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에 있었다. 여기서 무악재만 넘으면 바로 영은문과 모화관이다. 위치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홍제원은 주로 중국 사신들이 한양에 올 때 들러 휴식을 취하고 예복을 갈아입는 곳이었다. 참고로, 서대문에서 홍제동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지금도 의주로(義州路)라고 부르는데, 그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이 도로가 멀리 평양을 거쳐 압록강변의 의주에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이 도로는 정치ㆍ군사적으로 상당히 중요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선조(宣祖)가 의주로 도망칠 때도, 그리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청군이 남침할 때도 이 도로를 이용했으니까】.
결국 인조(仁祖)와 조정 대신들은 ‘이산가족’이 되는 것을 감수하고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지방에서 오는 군대도 자연히 남한산성으로 집결하면서 이곳은 조선의 임시 수도가 되었는데, 일찍이 옛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이 이곳을 도성으로 삼은 이래 무려 1300년 만의 일이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피난처였기에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긴다. 1만 명 넘게 불어난 성의 수비대를 감안할 때 비축 식량으로는 두 달을 채 버틸 수 없었다. 그 사실을 아는 청 태종은 굳이 성을 공략하려 하지 않는다. 이제 20만으로 늘어난 군대로 성을 포위한 채 지방에서 올라오는 조선군을 경기도 일대에서 차단하면서 기다릴 뿐이다.
그동안 산성 내의 ‘임시정부’에서는 뻔한 결론을 두고 격론이 벌어진다. 항복하는 것 이외에 달리 도리가 없는데도 항복과 항전을 놓고 논쟁이 벌어진 것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애초에 승산이 제로인데도 청에게 호전적인 태도를 취했던 사대부들이었음을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현실주의자인 최명길을 비롯해서 다수는 주화론의 입장이고, 이른바 청서파(淸西派, 인조반정에 가담하지 않은 서인들)의 보스인 김상헌(金尙憲, 1570~1652) 등 노장 세력은 주전론자다. 주화론을 취할 바에야 애초에 왜 전란의 빌미를 만들었을까? 또 주전론을 주장할 바에야 왜 도성을 버리고 남한산성까지 기어들어갔을까? 무엇보다도, 그런 문제라면 전란이 있기 전에 진작 합의할 일이지 왜 이제 와서 그런 논쟁을 벌일까?
어이없고 무의미한 그 논쟁을 종식시킨 것은 강화도에서 들려온 소식이다. 일단 강화도에 들어가는 데 성공한 왕족과 관료들은 그곳이 남한산성보다 훨씬 안전할 것으로 믿었다【아마 그들은 400년 전 몽골 지배기에도 고려 정부가 강화도에서 30년이나 버티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겠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침략군의 의지가 그때와는 달랐던 것이다. 당시 몽골군은 이미 중국 대륙을 정복한 마당에 굳이 고려 정부를 끝까지 핍박할 필요와 의지가 없었다(일설에 전하는 바처럼 몽골군이 뱃길에 약해 강화도를 공격하지 못했다는 주장은 사실로 믿기 어렵다. 일본 정벌에서도 보듯이 그들은 현해탄도 건넜을 뿐 아니라 중국 대륙을 공략하면서 바다처럼 넓은 큰 강들을 건넌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청군은 한시바삐 조선의 항복을 받아내야만 중국 정복에 나설 수 있었기에 그보다는 다급한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건너편 해변에서 쏘는 청군의 대포알이 바다 건너 강화도 해변까지 날아오자 그들은 잔뜩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덕분에 해변에 아무도 나가지 못하게 되니 청군이 배를 타고 오는 건 시간문제였다. 남한산성에서 논쟁이 주화론으로 정리되어 갈 무렵인 1637년 1월 하순 드디어 청군은 배로 인천 앞바다를 건넜다. 이 소식을 들은 인조(仁祖)의 빈궁들이 서둘러 원손(元孫, 왕세자의 맏아들)을 내시들에게 맡겨 배 편을 통해 충청도 당진으로 떠나게 하자 곧 청군이 들이닥쳤다.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비보는 남한산성 임시정부의 행보를 더욱 빠르게 만들었다. 주전론을 굽히지 않던 김상헌과 정온(鄭蘊, 1569~1641)은 자살하려다 실패했고(청 태종이 주전론자들을 보내라고 했으므로 그들은 어차피 적에게 끌려갈 운명이었다), 나라보다 가족들 걱정이 먼저인 인조는 적의 요구를 무조건 수락하고 항복을 결정했다. 1637년 1월 30일 인조(仁祖)가 세자와 함께 삼전도(三田渡, 현재 서울의 송파구 삼전동)에 나가 청 태종에게 항복의 예를 올림으로써 두 달 동안의 전란은 끝났다.
항복의 조건은 기본적으로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와 다르지 않다. 명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앞으로는 청에게 사대하라는 것이라든가, 왕족과 조정 대신들의 자제를 인질로 보내고 조공을 바치라는 것은 전과 똑같은 요구다. 달라진 게 있다면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바꾸고, 청이 중국을 공격할 때 지원군을 파견하라는 조항이 정식으로 포함된 것인데, 이것은 정묘호란 이후 청 측이 줄곧 주장하던 내용이다. 결국 조선은 애초부터 청의 모든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는 처지였는데도 쓸데없이 난리만 불러들인 격이다.
청 태종은 궁극적 목표였던 중국 정복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모든 준비는 그의 시대에 갖추어졌다. 그가 죽고 1년 뒤인 1644년에 청나라는 드디어 장성을 넘어 베이징에 입성한다. 이로써 중국의 한족 왕조인 명나라는 276년의 사직을 끝으로 멸망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와 더불어 중화세계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실로 오랫동안 동북아 질서의 구심점이었던 중화세계가 해체되었으니 이제 동북아에는 ‘앙시앵 레짐’을 대체하는 새로운 질서가 자리잡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한반도에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난다. 동북아 전역이 새롭고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가득한 그때 조선에서는 그 반대로 수구와 복고의 물결이 거세게 일어나기 시작한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중화세계가 멸망했다고 믿지 않고, 오히려 중화세계가 조선으로 옮겨왔다고 믿는다. 이제 조선은 중화세계의 막내가 아니라 맏이가 된 것이다.
▲ 국치의 기념품 무모한 항전은 결국 보람 없이 끝났다. 사진은 인조가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을 기념하는 치욕의 유물이다. 높이 4미터에 달하는 이 비석은 청 태종 공덕비인데, 흔히 삼전도비라고 부른다. 사실 예전에도 그런 식의 공덕비는 많았는데(관구검, 소정방, 유인원 등), 유독 삼전도비를 치욕으로 여기는 이유는 역시 중화사상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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