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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6장 조선판 중화세계, 왕국의 조짐(안용복, 대보단, 만동묘)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6장 조선판 중화세계, 왕국의 조짐(안용복, 대보단, 만동묘)

건방진방랑자 2021. 6. 21.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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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국의 조짐

 

 

숙종(肅宗)의 치세는 당쟁의 정점이라 할 만큼 사대부(士大夫)들의 극심한 정쟁로 조정이 얼룩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임진왜란(壬辰倭亂)병자호란(丙子胡亂)이 남긴 후유증이 완전히 극복된 시기이기도 했다. 광해군(光海君) 때부터 시작된 양전사업이 완성을 본 것도, 대동법(大同法)이 전국적으로 실시된 것도, 5군영이 최종적으로 완비된 것도 모두 이 시기의 일이다. 상평통보가 유통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사회경제적 배경이 숙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시기에는 압록강변의 무창(茂昌)과 자성(慈城)2진을 설치하고 청나라와 국경을 명확히 설정했으며, 일본에 오랜만에 통신사를 보내 교역을 재개했고, 어부 안용복(安龍福)의 노력으로 울릉도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다(안용복은 일본의 바쿠후 정권으로부터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다짐을 받아냈으며, 1696년에는 울릉도 해역에서 조업중인 일본 어선을 붙잡아 문책하기도 했으니, 무능한 정부가 못한 일을 대신한 민간인이다)이로써 울릉도는 완전히 조선의 소유가 되었다. 이와 대비되는 게 독도다. 울릉도와 달리 독도는 원래 무인도였던 탓에 오늘날까지도 분쟁거리로 남아 있다. 영토국가개념이 확실치 않았던 시대에 무인도의 임자는 사실상 없었다고 봐야 한다(지리적으로 독도는 한반도에 가깝지만 고려와 조선이 왜구의 침략 때문에 전통적으로 해안지대와 섬을 비우는 공도空島 정책을 썼기 때문에 소유권이 더욱 애매해졌다). 따라서 지금 한일 양국이 역사적인 소유권을 주장한다면 그건 모두 무리다. 이를테면 세종실록지리지에 독도가 언급되어 있다고 해서, 혹은 다케시마라는 이름이 오래 전부터 사용되었다고 해서 한국이나 일본이 독도 소유권을 주장하는 논리는 모두 문제가 있다. 굳이 말하자면 독도는 1952년 대통령 이승만이 미국의 애치슨 라인을 모방한 이른바 이승만 라인으로 영토화함으로써 한국의 소유가 되었다고 봐야 한다.

 

이 모든 변화의 근저에 관류하는 흐름은 왕국으로의 발돋움이다. 대동법(大同法)으로 국가 재정과 백성들의 삶이 안정되었으며, 군제 개편이 완료되고 국경이 확정되고 외교가 재개된 것은 사실상 재건국이나 다름없는 커다란 변화다. 이제 조선은 평화를 되찾고 오랜만에 번영기를 맞았다(바로 전의 번영기라면 세종의 치세를 꼽을 수 있으니 무려 350년 만의 안정이다). 그토록 극심했던 당쟁이 잦아든 것은 그런 대내외적 안정이 정치에도 영향을 준 탓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집권한 노론 세력이 비교적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덕분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 무렵은 동북아 전체가 함께 번영을 맞은 시기였다. 우선 동북아 질서의 중심인 중국이 자리를 잡았다. 1662년에 즉위한 강희제(康熙帝, 재위 1662~1722)는 만주족의 지배에 반발하는 모든 세력을 차례차례 정복한 다음, 이를 바탕으로 적극적인 한화(漢化) 정책을 구사하면서 국내 통합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몽골의 경우에서도 보았듯이 중국의 정복 왕조는 한화에 성공해야만 오래 존속할 수 있다). 이렇게 정치가 안정되면서 중국은 향후 100년이 넘게 지속될, 이른바 강희-건륭시대라 불리는 오랜 번영기의 문턱에 접어든다. 1711년 강희제는 즉위 50주년을 기념해서 이듬해부터 출생하는 백성들을 성세자생인정(盛世滋生人丁, 번영의 시대에 출생한 인구)이라 부르며 인두세를 부과하지 않는 정책까지 구사할 정도였다.

 

한편 또 다른 비중화세계인 일본도 17세기 초부터 에도 바쿠후의 집권 아래 착실하게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우선 실질적 지배자인 쇼군이 도쿠가와 가문으로 순조로이 세습되면서 중앙권력이 안정된 것이 번영의 토대가 되었다(1천 년이 넘도록 전개되어 온 내전이 완전히 종식된 것은 바로 이 시기다). 정치가 안정되자 일본의 상인들은 자연히 대외 무역에 손길을 돌려 동남아시아의 여러 섬들과 인도차이나 방면으로 활발하게 진출하면서 막대한 무역 이득을 취했다당시 일본의 해상 진출은 눈부셨다. 1613년 태평양을 건너 멕시코의 아카풀코 해안까지 일본의 선박이 갔다는 기록이 전할 정도다. 특히 동남아시아로의 진출이 대단히 활발했는데, 무역만이 아니라 일본인들도 수만 명씩 대량으로 이주했다. 어쩌면 이런 역사가 훗날 일본 제국주의의 이른바 대동아공영(大東亞共榮)이라는 전략으로 이어졌는지도 모른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의 무역선은 조선에도 정기적으로 드나들었으나 조선의 상선은 한 번도 일본에 가지 않았다는 점이다(상선이라 할 만한 것도 없었지만), 일본과 달리 조선에는 여전히 대외무역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이런 사실은 이후 19세기에 두 나라의 힘이 현저한 차이를 보이는 하나의 원인이 된다.

 

18세기 초반 에도(江戶)의 인구는 무려 50만이 넘었으며, 세계 최대의 도시인 영국의 런던과 맞먹을 정도였다. 미쓰이나 스미토모 등 오늘날까지 일본 경제의 중핵을 담당하고 있는 재벌들은 바로 이 무렵의 번영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

 

 

 

 

한동안 동북아시아를 뒤흔들었던 전란의 조짐이 종식된 것은 청나라와 일본의 비중화세계가 동북아의 패권을 완전히 장악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제 중화세계가 사라졌다고 믿었다. 그들이 보기에는 아무리 조선이 중화세계의 유일한 보루로 나섰다 해도 과거의 진짜 중화세계처럼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므로 전혀 신경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조선이 왕국으로의 길을 순조롭게 걸을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그 덕분이다. 청나라는 분명 조선의 상국이지만 국제적 서열상으로만 그러할 뿐이고 과거처럼 조선이 존경과 복종과 충성을 보여야 할 사대의 대상은 아니다. 또한 청나라의 입장에서 볼 때 조선은 비록 계속 중화세계를 부르짖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국에 중화세계가 부활하는 것은 아니므로 그냥 내버려둬도 된다. 이런 사정 때문에 두 나라는 과거보다 한층 대등한 입장에서 처음으로 정상적인 국제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숙종이 명나라를 드러내놓고 추앙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분위기에서다. 1704년에 그는 송시열의 수제자인 권상하(權尙夏, 1641~1721)에게 명해서 궁성 안에 대보단(大報壇)이라는 커다란 제단을 놓게 했다. 대보단이라면 큰 은덕에 보은한다는 뜻일 텐데, 누구의 은덕일까? 바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명 나라의 황제였던 신종의 은덕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이미 100년이 넘은 시점에서 새삼스럽게 그런 정치적 제스처를 취한 이유는 명백하다. 옛날의 중화 제국 명나라를 기림으로써 현재의 비중화 제국인 청나라를 진심으로 받들지는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어쨌든 막상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맞아서는 조선에 별로 은혜를 베푼 게 없었던 신종은 숙종(肅宗)의 지극한 정성 덕분에 중국도 아닌 한반도에서 1894년까기 200년 가까이 해마다 2월이면 제삿밥을 얻어먹을 수 있게 되었다대보단과 더불어 권하는 신종을 섬기는 만동묘(萬東廟)라는 사당을 충청도 괴산에 건립했다. 숙종(肅宗)은 이 사당에 면제전과 노비를 주었는데, 말하자면 조선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죽은 명나라 황제를 지극 정성으로 섬긴 셈이다. 이는 숙종은 대보단과 만동묘를 지어놓고 마냥 뿌듯했던 모양이다. 숙종실록에는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유독 우리 동방이 대대로 100년을 지켰으니, 뒷날 중국이 다시 맑아지면 길이 천하 추세에 말할 수 있는 것이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기대와는 반대로 중국은 다시 맑이지지않았으므로 결국 조선이 명나라에 의리를 지킨 보람은 전혀 없었다.

 

그밖에도 숙종은 사육신(死六臣)의 명예를 회복해주고 전국적으로 서원 건립을 장려하는 등 유교왕국의 이념을 정비하는 각종 사업을 추진했다. 안으로는 당쟁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고 밖으로는 비중화세계와의 갈등들이 진정되었으니, 이게 조선을 명실상부한, 그리고 세계적으로 유일한 유교왕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게 그의 목표다. 덕분에 조선에는 왕국의 조짐이 뚜렷해졌으나 불행히도 그것은 가장 수구적이고 가장 퇴행적인 왕국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황제를 위하여 100년 전의 명나라 황제인 신종은 오로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재위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조선 정부에게서 으로 받들어졌다. 그림은 19세기 초반에 제작된 동궐도(東闕圖)의 일부인데, 맨 위쪽의 정사각형 건물이 신종에게 제사를 올리기 위해 쌓은 대보단이다. 중국에서 사라진 중화는 조선에서 완전히 부활했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세계화 시대의 중화란?

당쟁의 쟁점

왕국의 조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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