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조선판 중화세계
세계화 시대의 중화란?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이 이제 조선만이 지구상에 홀로 남은 문명 국가라는 허구적 위기감과 허황한 자부심을 키우며 안으로 웅크러들고 있을 무렵, 공교롭게도 지구상의 수많은 지역들은 오히려 속속들이 개방되고 있었다. 바야흐로 유럽 문명이 세계 각지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후대의 동양 역사가들은 이 과정을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극동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고, 인류 문명사 전체로 보면 그 과정은 서로 독립적으로 발생하고 발전해 온 지구상의 모든 문명들이 하나로 통합되는 거대한 ‘세계화’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그 세계화의 완성은 20세기에 이루어진다).
세계 진출에 나선 유럽인들의 전략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토착 문명권의 힘이 약한 곳에서는 무력을 동원해서 가차없이 현지 문명을 짓밟아 없애 버리고 유럽 문명을 완전히 이식한다. 16세기 초 에스파냐인들에 의해 정복된 멕시코의 아스텍 문명과 페루의 잉카 문명이 그런 예다(『종횡무진 서양사』, 「꽃」 1장 참조).
둘째, 기존 문명권의 힘이 어느 정도 강한 곳은 먼저 경제적 진출을 통해 자본주의적 원료 공급지이자 시장으로 만들고 나서 다음에 정치군사적 침략으로 선회한다. 인도와 인도네시아, 인도차이나 등이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데, 이 지역들은 16~17세기까지는 유럽인들과 경제적인 통상을 하다가 18세기부터는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문명과 역사의 전통이 강한 곳에서는 경제적 진출에 그칠 수밖에 없다. 극동 세계가 바로 그경우에 해당한다【그밖에 당시 유럽인들이 진출이나 침략의 의도를 전혀 품지 못한 지역은 두 군데가 있다. 하나는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인데, 이곳은 토착 문명의 힘은 약했으나 워낙 오지였으므로 19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유럽 세계의 침략 대상이 된다(하지만 일단 침략이 시작되자 불과 수십 년 만에 아프리카는 유럽 국가들에 의해 완전히 분할되었다). 또 한 지역은 중동과 북아프리카다(북아프리카는 지리로 보면 아프리카에 속하지만 문명적으로 보면 고대에는 유럽 문명권에, 중세 이후에는 이슬람 문명권에 속한다). 이곳은 유럽 문명의 고향이자 막강한 이슬람 문명권(오스만투르크 제국)의 텃밭이었으므로 유럽인들도 감히 넘볼 수 없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중동은 유럽 문명의 진출에 가장 강력하게 맞서는 지역으로 남아 있다】.
대충 그런 전략적 마인드를 가지고 16세기부터 유럽인들은 극동에 오기 시작했다. 정치적 지배가 가능한 곳이 아니므로 극동 개방의 교두보를 담당한 것은 상인과 선교사들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다. 중국과 일본에는 뻔질나게 드나들었으면서도 유독 조선에만은 상인도, 선교사도 오지 않은 것이다.
일본의 경우 포르투갈 상인은 1543년부터 오기 시작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집권한 16세기 말에 이르면 일본의 여러 항구에서 서양 무역선들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이 상인들의 입을 통해 일본은 유럽 세계에 ‘지팡구(ジパング, Zipangu)’라는 이름으로 제법 알려지게 되었다(지팡구에서 오늘날의 재팬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중국의 경우에는 상인보다 선교사들이 교류를 주도하게 된다. 그 이유는 중화 사상에 물든 명나라 조정에서 다른 모든 나라와의 교역을 조공으로만 인식했으므로 정상적인 무역 관계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륙의 임자가 청나라로 바뀌면서 점차 서양 상인들도 중국과 거래를 트게 된다.
유럽인들이 극동 3국 중 유독 조선에만 오지 않은 이유는 뭘까? 조선이 중화세계가 되었음을 알기라도 한 걸까? 물론 그럴 리는 없다. 그럼 조선의 영토가 작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다. 비록 한반도가 일본보다는 조금 작다 해도 일본과 중국에 자주 왔던 서양의 무역선들이 한반도의 존재 자체를 발견조차 못했을 리는 만무하다.
조선에 서양인이 온 사례가 있기는 하다. 한반도에 처음 온 서양인은 네덜란드 선원 벨테브레(Jan Jansz Weltevree, 朴延, 朴燕)이다. 그는 인조(仁祖)의 치세인 1628년에 왔지만, 원래부터 조선에 오려 한 게 아니라 일본으로 가던 중에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상륙한 것이었다. 동료 두 명과 함께 관원에게 잡힌 그는 서울로 압송되어 박연(朴燕)이라는 조선식 이름까지 받고 훈련도감(訓鍊都監)【훈련도감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임시로 설치되었다가 전란 후에 상설화된 5군영(五軍營) 가운데 하나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 격이지만 어쨌든 이제야 비로소 조선에는 상비군다운 군대가 생겨났다. 기존의 5위를 대체하기 위해 만든 5군영이지만, 실은 이것 역시 전국적인 군 조직은 되었고 수도방위대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청나라의 침략을 맞아서는 제 기능도 하지 못했지만, 참고로 5군영은 수도를 맡은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禁衛營)과 수도 외곽을 맡은 총융청, 수어청(守禦廳)으로 이루어졌는데, 모두 갖춰진 것은 숙종 때다】에서 총포를 제작하는 일에 종사하다가 조선 여자와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았다(다른 두 명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전사했다).
그 뒤 얼마 지나서 다시 조선에 서양인이 오는데, 이번에도 역시 일본에 가던 네덜란드 무역선이 난파하여 제주도에 상륙한 케이스다. 1653년 네덜란드의 무역선 한 척이 대만에서 일본의 나가사키로 가던 중 폭풍우를 만나 선원 64명 중 28명을 잃고 36명이 제주도에 도착하여 관원들에게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선원들은 이후 14년간이나 조선 정부에 억류되어 있다가 8명이 탈출에 성공하여 1668년에 고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 중 한 명인 하멜은 억류 생활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멜 표류기』를 썼는데, 이 책은 한반도를 서양에 소개한 최초의 문헌이다.
조선인들은 그 서양인들을 어떻게 보았을까? 당시 제주 목사 이원진(李元鎭)은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류한 사건을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배 안에는 약재와 짐승 가죽 따위의 물건을 많이 싣고 있었습니다. 파란 눈에 코가 높고 노란 머리에 수염이 짧았는데, 혹 구레나룻은 깎고 콧수염을 남긴 자도 있었습니다. 그 옷은 길어서 넓적다리까지 내려오고 옷자락이 넷으로 갈라졌으며 옷깃 옆과 소매 밑에 다 이어 묶는 끈이 있었으며 바지는 주름이 잡혀 치마 같았습니다. 왜어(倭語)를 아는 자를 시켜 묻기를 ‘너희는 서양의 크리스천인가?’ 하니, 다들 ‘야야’ 하였고, 우리나라를 가리켜 물으니 고려라 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제주 관헌이 일본어를 하는 자를 시켜서 서양인과 대화를 시도했다는 대목이다. 이것은 하멜 일행이 일본어를 할 줄 알았으며, 당시 조선에서도 일본과 서양이 교역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서양인이 조선에 오지 않으려 했던 것처럼 조선 역시 서양인과 교류할 의도가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게다가 조선 관헌도 상대가 ‘크리스천’임을 알고 있었고, 네덜란드 선원도 이곳이 ‘고려’임을 알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명백하다. 우선 당시 서양인들은 조선을 중국의 일부로 여겼으므로 굳이 조선에까지 올 필요가 없었다. 오늘날 한국과 수교를 맺으러 오는 외교 사절이 서울에도 오고 부산에도 올 필요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한 당시 조선도 역시 중국의 정치적 지배를 인정하고 있었으므로 굳이 별도로 서양인과 접촉할 통로를 열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조선은 서양 문물을 접하는 것도 중국을 통해서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용어로 말한다면, 조선은 외교권과 군사권을 중국에 맡기고 내정의 자치만 가진 나라다. 따라서 조선은 새로운 세계와 독자적으로 접할 권한도 없었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 덕분에 조선은 일본과 중국이 서양 선교사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시기에도 그런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조선은 오로지 청나라와 교류하면 되었을 뿐 특별한 외교 문제에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스스로 우물 안 개구리를 선택한 대가로 얻은 ‘혜택’이다. 하지만 그런 혜택과 안정에만 만족하다가 조선은 장차 서세동점(西勢東漸)이 제국주의로 업그레이드되는 18~19세기에도 동북아의 숨가쁜 국제 정세에 전혀 대비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당하는 호된 대가를 치르게 된다.
어쨌든 북벌을 완전히 포기하고 청나라라는 새 주인을 맞아들임으로써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은 새로 생겨난 ‘중화의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는 좋은 찬스를 잡았다(말하자면 현실을 인정함으로써 이념을 확보한 격이다). 비록 세계화 시대 속의 중화세계지만 당장은 중화의 자부심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마당이 펼쳐진 것이다. 그 마당에서 사대부들이 맨먼저 하고 싶었던 일은 뭘까? 그것은 당쟁이다. 그들은 이제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자유롭게 본격적인 당쟁을 벌일 수 있게 되었다.
▲ 제주도의 푸른 눈 1668년 네덜란드에서는 『하멜 표류기』라는 흥미로운 책이 출간되었다(원래는 다른 제목의 두 권으로 간행되었다). 그림은 거기에 실린 목판화다. 제주도에 난파된 하멜 일행이 이후에 겪은 일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다섯번째 컷에서는 조선 국왕(효종)이 마치 유럽의 국왕처럼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인용
'역사&절기 >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6장 조선판 중화세계, 왕국의 조짐(안용복, 대보단, 만동묘) (0) | 2021.06.21 |
---|---|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6장 조선판 중화세계, 당쟁의 정점(숙종,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 (0) | 2021.06.21 |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5장 복고의 열풍, 소중화의 시작(현종, 기해예송, 갑인예송, 실학) (0) | 2021.06.20 |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5장 복고의 열풍, 허망한 북벌론(소현세자, 봉림대군, 효종, 송시열) (0) | 2021.06.20 |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5장 복고의 열풍, 시대착오의 정신병(소중화) (0) | 2021.06.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