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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한국사 -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6장 조선판 중화세계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종횡무진 한국사 -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6장 조선판 중화세계

건방진방랑자 2021. 6. 21. 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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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장 조선판 중화세계

 

 

세계화 시대의 중화란?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이 이제 조선만이 지구상에 홀로 남은 문명 국가라는 허구적 위기감과 허황한 자부심을 키우며 안으로 웅크러들고 있을 무렵, 공교롭게도 지구상의 수많은 지역들은 오히려 속속들이 개방되고 있었다. 바야흐로 유럽 문명이 세계 각지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후대의 동양 역사가들은 이 과정을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극동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고, 인류 문명사 전체로 보면 그 과정은 서로 독립적으로 발생하고 발전해 온 지구상의 모든 문명들이 하나로 통합되는 거대한 세계화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그 세계화의 완성은 20세기에 이루어진다).

 

세계 진출에 나선 유럽인들의 전략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토착 문명권의 힘이 약한 곳에서는 무력을 동원해서 가차없이 현지 문명을 짓밟아 없애 버리고 유럽 문명을 완전히 이식한다. 16세기 초 에스파냐인들에 의해 정복된 멕시코의 아스텍 문명과 페루의 잉카 문명이 그런 예다(종횡무진 서양사, 1장 참조).

둘째, 기존 문명권의 힘이 어느 정도 강한 곳은 먼저 경제적 진출을 통해 자본주의적 원료 공급지이자 시장으로 만들고 나서 다음에 정치군사적 침략으로 선회한다. 인도와 인도네시아, 인도차이나 등이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데, 이 지역들은 16~17세기까지는 유럽인들과 경제적인 통상을 하다가 18세기부터는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문명과 역사의 전통이 강한 곳에서는 경제적 진출에 그칠 수밖에 없다. 극동 세계가 바로 그경우에 해당한다그밖에 당시 유럽인들이 진출이나 침략의 의도를 전혀 품지 못한 지역은 두 군데가 있다. 하나는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인데, 이곳은 토착 문명의 힘은 약했으나 워낙 오지였으므로 19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유럽 세계의 침략 대상이 된다(하지만 일단 침략이 시작되자 불과 수십 년 만에 아프리카는 유럽 국가들에 의해 완전히 분할되었다). 또 한 지역은 중동과 북아프리카다(북아프리카는 지리로 보면 아프리카에 속하지만 문명적으로 보면 고대에는 유럽 문명권에, 중세 이후에는 이슬람 문명권에 속한다). 이곳은 유럽 문명의 고향이자 막강한 이슬람 문명권(오스만투르크 제국)의 텃밭이었으므로 유럽인들도 감히 넘볼 수 없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중동은 유럽 문명의 진출에 가장 강력하게 맞서는 지역으로 남아 있다.

 

 

대충 그런 전략적 마인드를 가지고 16세기부터 유럽인들은 극동에 오기 시작했다. 정치적 지배가 가능한 곳이 아니므로 극동 개방의 교두보를 담당한 것은 상인과 선교사들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다. 중국과 일본에는 뻔질나게 드나들었으면서도 유독 조선에만은 상인도, 선교사도 오지 않은 것이다.

 

일본의 경우 포르투갈 상인은 1543년부터 오기 시작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집권한 16세기 말에 이르면 일본의 여러 항구에서 서양 무역선들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이 상인들의 입을 통해 일본은 유럽 세계에 지팡구(ジパング, Zipangu)’라는 이름으로 제법 알려지게 되었다(지팡구에서 오늘날의 재팬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중국의 경우에는 상인보다 선교사들이 교류를 주도하게 된다. 그 이유는 중화 사상에 물든 명나라 조정에서 다른 모든 나라와의 교역을 조공으로만 인식했으므로 정상적인 무역 관계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륙의 임자가 청나라로 바뀌면서 점차 서양 상인들도 중국과 거래를 트게 된다.

 

 

유럽인들이 극동 3국 중 유독 조선에만 오지 않은 이유는 뭘까? 조선이 중화세계가 되었음을 알기라도 한 걸까? 물론 그럴 리는 없다. 그럼 조선의 영토가 작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다. 비록 한반도가 일본보다는 조금 작다 해도 일본과 중국에 자주 왔던 서양의 무역선들이 한반도의 존재 자체를 발견조차 못했을 리는 만무하다.

 

조선에 서양인이 온 사례가 있기는 하다. 한반도에 처음 온 서양인은 네덜란드 선원 벨테브레(Jan Jansz Weltevree, 朴延, 朴燕)이다. 그는 인조(仁祖)의 치세인 1628년에 왔지만, 원래부터 조선에 오려 한 게 아니라 일본으로 가던 중에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상륙한 것이었다. 동료 두 명과 함께 관원에게 잡힌 그는 서울로 압송되어 박연(朴燕)이라는 조선식 이름까지 받고 훈련도감(訓鍊都監)훈련도감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임시로 설치되었다가 전란 후에 상설화된 5군영(五軍營) 가운데 하나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 격이지만 어쨌든 이제야 비로소 조선에는 상비군다운 군대가 생겨났다. 기존의 5위를 대체하기 위해 만든 5군영이지만, 실은 이것 역시 전국적인 군 조직은 되었고 수도방위대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청나라의 침략을 맞아서는 제 기능도 하지 못했지만, 참고로 5군영은 수도를 맡은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禁衛營)과 수도 외곽을 맡은 총융청, 수어청(守禦廳)으로 이루어졌는데, 모두 갖춰진 것은 숙종 때다에서 총포를 제작하는 일에 종사하다가 조선 여자와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았다(다른 두 명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전사했다).

 

그 뒤 얼마 지나서 다시 조선에 서양인이 오는데, 이번에도 역시 일본에 가던 네덜란드 무역선이 난파하여 제주도에 상륙한 케이스다. 1653년 네덜란드의 무역선 한 척이 대만에서 일본의 나가사키로 가던 중 폭풍우를 만나 선원 64명 중 28명을 잃고 36명이 제주도에 도착하여 관원들에게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선원들은 이후 14년간이나 조선 정부에 억류되어 있다가 8명이 탈출에 성공하여 1668년에 고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 중 한 명인 하멜은 억류 생활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멜 표류기를 썼는데, 이 책은 한반도를 서양에 소개한 최초의 문헌이다.

 

 

 

 

조선인들은 그 서양인들을 어떻게 보았을까? 당시 제주 목사 이원진(李元鎭)은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류한 사건을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배 안에는 약재와 짐승 가죽 따위의 물건을 많이 싣고 있었습니다. 파란 눈에 코가 높고 노란 머리에 수염이 짧았는데, 혹 구레나룻은 깎고 콧수염을 남긴 자도 있었습니다. 그 옷은 길어서 넓적다리까지 내려오고 옷자락이 넷으로 갈라졌으며 옷깃 옆과 소매 밑에 다 이어 묶는 끈이 있었으며 바지는 주름이 잡혀 치마 같았습니다. 왜어(倭語)를 아는 자를 시켜 묻기를 너희는 서양의 크리스천인가?’ 하니, 다들 야야하였고, 우리나라를 가리켜 물으니 고려라 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제주 관헌이 일본어를 하는 자를 시켜서 서양인과 대화를 시도했다는 대목이다. 이것은 하멜 일행이 일본어를 할 줄 알았으며, 당시 조선에서도 일본과 서양이 교역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서양인이 조선에 오지 않으려 했던 것처럼 조선 역시 서양인과 교류할 의도가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게다가 조선 관헌도 상대가 크리스천임을 알고 있었고, 네덜란드 선원도 이곳이 고려임을 알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명백하다. 우선 당시 서양인들은 조선을 중국의 일부로 여겼으므로 굳이 조선에까지 올 필요가 없었다. 오늘날 한국과 수교를 맺으러 오는 외교 사절이 서울에도 오고 부산에도 올 필요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한 당시 조선도 역시 중국의 정치적 지배를 인정하고 있었으므로 굳이 별도로 서양인과 접촉할 통로를 열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조선은 서양 문물을 접하는 것도 중국을 통해서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용어로 말한다면, 조선은 외교권과 군사권을 중국에 맡기고 내정의 자치만 가진 나라다. 따라서 조선은 새로운 세계와 독자적으로 접할 권한도 없었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 덕분에 조선은 일본과 중국이 서양 선교사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시기에도 그런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조선은 오로지 청나라와 교류하면 되었을 뿐 특별한 외교 문제에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스스로 우물 안 개구리를 선택한 대가로 얻은 혜택이다. 하지만 그런 혜택과 안정에만 만족하다가 조선은 장차 서세동점(西勢東漸)제국주의로 업그레이드되는 18~19세기에도 동북아의 숨가쁜 국제 정세에 전혀 대비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당하는 호된 대가를 치르게 된다.

 

어쨌든 북벌을 완전히 포기하고 청나라라는 새 주인을 맞아들임으로써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은 새로 생겨난 중화의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는 좋은 찬스를 잡았다(말하자면 현실을 인정함으로써 이념을 확보한 격이다). 비록 세계화 시대 속의 중화세계지만 당장은 중화의 자부심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마당이 펼쳐진 것이다. 그 마당에서 사대부들이 맨먼저 하고 싶었던 일은 뭘까? 그것은 당쟁이다. 그들은 이제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자유롭게 본격적인 당쟁을 벌일 수 있게 되었다.

 

 

제주도의 푸른 눈 1668년 네덜란드에서는 하멜 표류기라는 흥미로운 책이 출간되었다(원래는 다른 제목의 두 권으로 간행되었다). 그림은 거기에 실린 목판화다. 제주도에 난파된 하멜 일행이 이후에 겪은 일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다섯번째 컷에서는 조선 국왕(효종)이 마치 유럽의 국왕처럼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쟁의 정점

 

 

비록 용두사미였으나 그래도 북벌 준비로 바빴던 효종(孝宗)에 비해 현종(顯宗)은 그저 15년 동안 왕으로 무위도식하면서 지내다가 죽었다. 조선의 왕명록에 18대 왕으로 이름을 등재한 게 그의 가장 큰 업적이랄까? 그래도 그의 치세에 관해 사대부들은 할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치세 말기에 예송논쟁으로 남인이 집권했기에 현종실록은 남인의 관점을 반영했으나, 이후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으로 개찬되는 등 곡절이 있었으니 말이다. 선조(宣祖)에 이어 두번째로 실록이 수정된 경우다. 그러나 이 전통은 다음 왕들에게도 이어져 숙종실록다음에는 숙종보궐실록(肅宗補闕實錄), 경종실록다음에는 경종수정실록(景宗修正實錄)이 새로 편찬된다. 이 시기 당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말해주는 사실이다(실록의 의미도 왕의 치적이 아니라 왕의 치세에 있었던 사대부들의 치적을 서술하는 것으로 바뀌어 버린 듯하다).

 

어머니 인선왕후가 죽은 뒤 6개월 만에 현종(顯宗)도 병으로 죽었으나, 다행히도(?) 그는 맏이였기 때문에 이번에는 그 말썽많던 예송논쟁을 피할 수 있었다. 다음 왕인 숙종(肅宗, 1661~1720, 재위 1674~1720)도 현종의 외아들이니까 앞으로 당분간 예송논쟁 같은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싶다. 그러나 현종의 말기에 가까스로 집권한 남인은 아직 승리를 확신할 수 없으므로 논쟁거리가 더 필요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말도 있듯이, 새로 숙종의 치세가 시작된 참에 그들은 권력을 확실히 다지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은 서인의 총수인 송시열(宋時烈)을 타깃으로 삼는다. 그를 무너뜨린다면 다시 서인에게 눌려 지내는 일은 없으리라. 그래서 송시열은 남인으로부터 집중 포화를 당하는데, 심지어 그를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여러 차례 제출되었으니 하마터면 그는 제 명에 죽지 못할 뻔했다송시열(宋時烈)은 묘한 이력을 지닌 사람이다. 사실 그는 유명세에 걸맞지 않게 만년에 불과 몇 년 동안 정승직을 지낸 것 이외에는 별다른 관직 생활을 하지도 않았다(젊은 시절부터 그는 숱하게 벼슬을 주겠다는 제의를 받았으나 모두 거절했다). 그러나 예송논쟁에서 보았듯이 늘 재야에 있으면서도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언제나 막강했다(학자 - 관료!), 효종(孝宗)의 스승을 지낸 경력이 있다지만 1년뿐이었고,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다지만 학문적 성취도 대단치 않았다. 게다가 골수 성리학자들이 대개 그렇듯이 인품도 고집스러워 적이 많았으며, 편협하고 보수적인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그에게 조정 대신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문제만 생기면 자문하고, 그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으니 희한한 일이다. 그가 과도한 상품 가치를 지닐 수 있었던 것은 당쟁의 열풍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위기에 빠진 그를 구해준 것은 남인의 분열이다. 예송논쟁의 승리를 주도한 허목은 그 참에 그를 제거하려 했으나 남인 중에서 송시열의 위명을 두려워한 자들은 유배보내는 정도로 그치자는 온건론을 편다. 결국 온건파의 주장이 채택되어 송시열은 다 늙은 나이에 생애 처음으로 유배를 떠났지만, 의도적이든 아니든 적진을 분열시킨 것은 장차 그가 화려하게 컴백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그의 처벌을 놓고 강경파는 청남(淸南)으로, 허적(許積, 1610~80)이 이끄는 온건파는 탁남(獨南)으로 갈렸던 것이다(온건파를 탁하다고 비난한 것을 보면 그 명명은 허목의 작품인 듯하다).

 

분열 상태에서도 그 뒤 몇 년 동안 남인은 권력의 단맛을 흠뻑 즐겼다. 특히 영의정이 된 허적은 1678년 역사상 최초의 화폐라 할 상평통보(常平通寶)를 만들어 경제 관료의 자질도 선보였다(조선 최초의 화폐는 세종 때의 조선통보朝鮮通寶지만 거의 유통되지 못했으므로 상평통보가 사실상 최초의 법화法貨. 우연의 일치지만 한반도 최초의 동전을 만든 고려의 왕도 숙종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 권력의 단맛 때문에 어처구니없는 계기로 실각하고 만다.

 

 

 

 

1680년 봄 허적은 집안의 경사를 맞았다. 그의 할아버지 허잠(許潛)의 시호가 내려진 것이다(허잠은 생몰년도가 전하지 않으나 당시 일흔인 허적의 나이로 보면 이미 오래 전에 죽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렇게 늦게 시호를 받은 것은 아마도 허적이 힘을 쓴 탓이리라). 사대부(士大夫)라고 해서 누구나 그런 영광을 누리는 게 아니니 당연히 잔치가 없을 수 없는 일, 그런데 하필이면 그 날따라 폭우가 쏟아졌다. 그러자 숙종(肅宗)은 늙은 영의정을 배려해서 유악(油幄, 기름 천막)을 그의 집으로 보내게 했는데, 문제는 거기서 터진다. 비가 오는 것을 보고 허적은 왕의 허락을 받기도 전에 유악을 가져다 사용한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궁중 비품을 가져다 쓴 허적의 방자함에 숙종은 분노했다. 그러나 이제 나이 열아홉인 젊은 군주가 무슨 사건을 엮을 수 있을까? 아마도 별것 아닌 일을 하나의 사건으로 키운 것은 서인들의 작업이었을 것이다. 일단 숙종은 남인 계열의 훈련대장을 경질하고 2차 예송으로 유배되어 있던 서인의 보스인 김수항(金壽恒, 1629~89) 을 불러들여 남인에 대한 경고를 보낸다. 하지만 그 정도에 그칠 거라면 서인들은 애초에 일을 벌이지도 않았을 터이다. 며칠 뒤 허적은 자신의 아들 허견(許堅)이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소식들 듣고 고개를 떨군다. 결국 그들 부자와 윤휴 등 남인의 주요 보스들은 모조리 사약을 받았고, 서인은 재집권에 성공했다. 경신년에 국면이 뒤바뀌었다고 해서 이 사건을 이른바 경신환국(庚申換局)이라 부른다.

 

아무런 음모나 행동도 없이 말만으로 반대파를 간단히 제거하는 말만의 역모는 이제 다시 본 궤도에 올랐다. 사대부(士大夫) 국가전통이 완전히 부활했다고 할까? 그렇다면 그런 식으로 집권한 서인의 권력도 오래 가지 못하리라고 봐야 할 것이다. 과연 서인이 몰락하는 과정은 남인과 닮은꼴이다. 예송에서 승리한 뒤 송시열의 처벌 문제를 놓고 남인이 두 파로 갈렸듯이 재집권에 성공한 서인도 남인의 처벌 문제를 놓고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었다. 하마터면 남인에 의해 죽을 뻔한 송시열(宋時烈)은 당연히 강경파이고, 그의 제자였으나 사적인 원한으로 사이가 벌어진 윤증(尹拯, 1629~1714) 그는 아버지가 죽었을 때 송시열에게 묘지명을 부탁했다가 성의 없는 대우를 당하자 사제지간을 끊었다 과 한태동(韓泰東, 1646~87) 등은 온건파다. 양측의 보스들 간에 연배 차이가 한 세대쯤 나기 때문에 노장파는 노론(老論), 소장파는 소론(少論)이라 불리게 된다대립의 음영이 깊으면 그 그늘을 활동 무대로 삼는 회색분자가 출현하게 마련이다. 조정이 온통 서인과 남인으로 갈려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박쥐처럼 처신한 김석주(金錫冑, 1634~84)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는 2차 예송 때 허적과 결탁해 서인을 숙청하는 데 앞장섰으나, 유악 사건으로 허적이 실각하자 번개처럼 서인으로 변신해서 허견의 역모를 꾸며내 공신으로 책봉된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한 계기도 실은 그가 마련했다. 그가 남인을 모조리 제거해야 한다고 설치는 바람에 서인의 소장파가 반발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처신할 수 있었던 데는 숙종의 배후 지원이 있었으므로 그를 일종의 왕당파라 볼 수도 있겠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가 죽고 나서부터는 숙종이 정치 무대에 직접 나서서 왕권 강화를 도모하게 된다.

 

아직 소론은 의미있는 소수에 불과할 뿐 정권을 담당할 힘은 없다. 그래서 일단 노론이 주도하는 분위기에서 서인은 한동안 잘 나간다. 그러나 송시열은 편안하고 느긋한 여생을 보낼 팔자는 못 되었다. 비록 만년에 유배 생활을 하기는 했으나 평생토록 승자의 길만을 걸으며 과분한 명예와 권력을 누렸던 송시열(宋時烈)은 팔순이 넘은 나이에 뜻하지 않은 복병을 만나게 된다. 그것도 평소에 전혀 적수로 여기지도 않았던 국왕에게 제동이 걸린 것이다.

 

 

숙종(肅宗)1680년에 첫 아내가 두 딸만 남기고 죽은 뒤 계비인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1701)를 들였지만 후사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바람을 피운 것은 반드시 후사를 낳겠다는 마음보다 아직 이십대의 젊은 혈기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본능이었을 것이다(게다가 왕에게는 얼마든지 외도의 권리가 있었다), 그가 건드린 여자는 후궁도 아니고 역관(譯官) 집안 출신의 미천한 궁중 나인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왕과 연애한 덕분에 그녀는 숙원(淑媛)을 거쳐 소의(昭儀)로 수직 상승한다. 이윽고 그녀는 1688년에 아들까지 낳아 숙종(肅宗)의 총애를 한몸에 받으면서 희빈(嬉嬪)의 지위에까지 오른다. 정비의 이름조차 실록에 전하지 않으니 그녀의 이름은 알 수 없지만 후대에 장희빈(張嬉嬪)으로 유명세를 떨친 여인이 바로 그녀다.

 

비록 왕자인 것은 사실이나, 왕비는 물론 정식 후궁의 소생도 아니므로 그 왕자를 세자로 책봉할 수 있느냐는 것은 당연히 논란거리가 된다.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한 집권 서인들은 왕비에게서 소생이 나올지 모르니 세자 책봉을 미루자고 한다. 실제로 인현왕후의 나이는 아직 이십대 초반이니까 충분히 일리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숙종은 장희빈과의 애정도 있거니와 국왕의 고유 권한에까지 사대부(士大夫)들이 일일이 간섭하는 현상에 이제 신물이 난 상태다. 이런 왕의 심기 변화를 야당인 남인들이 그냥 흘려보낼 리 없다. 남치훈(南致雲, 1645~1716)과 이익수(李益壽, 1653~1708) 등 소장파 남인들은 그런 숙종(肅宗)의 마음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결심을 굳힌 숙종은 노론을 대거 숙청하고 송시열과 김수항에게 사약을 내렸는데, 이것이 이른바 기사환국(己巳換局)이다.

 

국왕의 의지일까, 남인의 책동일까? 어느 쪽이라고 확실히 잘라 말할 수는 없으나 아무튼 전과는 달리 국왕의 의지가 상당히 개입된 사건인 것만은 분명하다. 나아가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위시키고 장희빈을 정비로 삼았는데, 미천한 출신에다 교활한 성품의 새 왕비에 대해 아마 남인들도 적잖이 반발했을 것이라고 본다면, 숙종의 각오가 야무지긴 했던 모양이다. 이 점은 얼마 뒤 그의 마음이 변하면서 다시금 정국이 바뀌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아들만 낳았다고 왕비가 되는 건 아니다. 아무리 신분이 달라져도 역시 출신 성분은 속일 수 없다. 이런 마음이었을까? 숙종은 갈수록 간교함이 심해지는 장희빈에게 점차 싫증을 느낀다. 그럴수록 애틋해지는 게 조강지처다. 이번에도 역시 집게의 마음을 읽고 공생하려는 말미잘이 있다. 야당이 되면서 노론과 소론의 구별이 희미해진 서인들이 힘을 합쳐 인현왕후의 복위를 도모한다. 1694년 이 사건이 발각되어 집권 남인들이 들고 일어났지만 철퇴를 맞은 것은 오히려 그들이다. 숙종(肅宗)5년 전과 정확히 반대되는 조치를 내린다. 남인들이 일제히 숙청되었고 서인들이 재집권했으며, 장희빈이 폐위되고 인현왕후가 복위되었다. 이른바 갑술환국(甲戌換局)인데, 벌써 몇 번째 환국인지 셈하기도 골치아플 정도다. 다만 전과 다른 점은 환국이 거듭될 수록 국왕의 개입 정도가 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조선은 다시 왕국으로 부활할 수 있을까?

 

 

중화의 세계지도 둘 다 조선에서 그린 세계지도인데, 위쪽은 15세기 초반의 것이고, 아래쪽은 19세기 초반의 것이다. 400년이라는 시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계의 중심은 중국이고 조선은 두번째로 큰 나라다(15세기에는 없던 유럽이 19세기의 지도에는 아주 작게 그려져 있다). 중화의 세계관은 이렇듯 시대착오적일 뿐 아니라 정신병적이었다.

 

 

왕국의 조짐

 

 

숙종(肅宗)의 치세는 당쟁의 정점이라 할 만큼 사대부(士大夫)들의 극심한 정쟁로 조정이 얼룩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임진왜란(壬辰倭亂)병자호란(丙子胡亂)이 남긴 후유증이 완전히 극복된 시기이기도 했다. 광해군(光海君) 때부터 시작된 양전사업이 완성을 본 것도, 대동법(大同法)이 전국적으로 실시된 것도, 5군영이 최종적으로 완비된 것도 모두 이 시기의 일이다. 상평통보가 유통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사회경제적 배경이 숙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시기에는 압록강변의 무창(茂昌)과 자성(慈城)2진을 설치하고 청나라와 국경을 명확히 설정했으며, 일본에 오랜만에 통신사를 보내 교역을 재개했고, 어부 안용복(安龍福)의 노력으로 울릉도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다(안용복은 일본의 바쿠후 정권으로부터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다짐을 받아냈으며, 1696년에는 울릉도 해역에서 조업중인 일본 어선을 붙잡아 문책하기도 했으니, 무능한 정부가 못한 일을 대신한 민간인이다)이로써 울릉도는 완전히 조선의 소유가 되었다. 이와 대비되는 게 독도다. 울릉도와 달리 독도는 원래 무인도였던 탓에 오늘날까지도 분쟁거리로 남아 있다. 영토국가개념이 확실치 않았던 시대에 무인도의 임자는 사실상 없었다고 봐야 한다(지리적으로 독도는 한반도에 가깝지만 고려와 조선이 왜구의 침략 때문에 전통적으로 해안지대와 섬을 비우는 공도空島 정책을 썼기 때문에 소유권이 더욱 애매해졌다). 따라서 지금 한일 양국이 역사적인 소유권을 주장한다면 그건 모두 무리다. 이를테면 세종실록지리지에 독도가 언급되어 있다고 해서, 혹은 다케시마라는 이름이 오래 전부터 사용되었다고 해서 한국이나 일본이 독도 소유권을 주장하는 논리는 모두 문제가 있다. 굳이 말하자면 독도는 1952년 대통령 이승만이 미국의 애치슨 라인을 모방한 이른바 이승만 라인으로 영토화함으로써 한국의 소유가 되었다고 봐야 한다.

 

이 모든 변화의 근저에 관류하는 흐름은 왕국으로의 발돋움이다. 대동법(大同法)으로 국가 재정과 백성들의 삶이 안정되었으며, 군제 개편이 완료되고 국경이 확정되고 외교가 재개된 것은 사실상 재건국이나 다름없는 커다란 변화다. 이제 조선은 평화를 되찾고 오랜만에 번영기를 맞았다(바로 전의 번영기라면 세종의 치세를 꼽을 수 있으니 무려 350년 만의 안정이다). 그토록 극심했던 당쟁이 잦아든 것은 그런 대내외적 안정이 정치에도 영향을 준 탓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집권한 노론 세력이 비교적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덕분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 무렵은 동북아 전체가 함께 번영을 맞은 시기였다. 우선 동북아 질서의 중심인 중국이 자리를 잡았다. 1662년에 즉위한 강희제(康熙帝, 재위 1662~1722)는 만주족의 지배에 반발하는 모든 세력을 차례차례 정복한 다음, 이를 바탕으로 적극적인 한화(漢化) 정책을 구사하면서 국내 통합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몽골의 경우에서도 보았듯이 중국의 정복 왕조는 한화에 성공해야만 오래 존속할 수 있다). 이렇게 정치가 안정되면서 중국은 향후 100년이 넘게 지속될, 이른바 강희-건륭시대라 불리는 오랜 번영기의 문턱에 접어든다. 1711년 강희제는 즉위 50주년을 기념해서 이듬해부터 출생하는 백성들을 성세자생인정(盛世滋生人丁, 번영의 시대에 출생한 인구)이라 부르며 인두세를 부과하지 않는 정책까지 구사할 정도였다.

 

한편 또 다른 비중화세계인 일본도 17세기 초부터 에도 바쿠후의 집권 아래 착실하게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우선 실질적 지배자인 쇼군이 도쿠가와 가문으로 순조로이 세습되면서 중앙권력이 안정된 것이 번영의 토대가 되었다(1천 년이 넘도록 전개되어 온 내전이 완전히 종식된 것은 바로 이 시기다). 정치가 안정되자 일본의 상인들은 자연히 대외 무역에 손길을 돌려 동남아시아의 여러 섬들과 인도차이나 방면으로 활발하게 진출하면서 막대한 무역 이득을 취했다당시 일본의 해상 진출은 눈부셨다. 1613년 태평양을 건너 멕시코의 아카풀코 해안까지 일본의 선박이 갔다는 기록이 전할 정도다. 특히 동남아시아로의 진출이 대단히 활발했는데, 무역만이 아니라 일본인들도 수만 명씩 대량으로 이주했다. 어쩌면 이런 역사가 훗날 일본 제국주의의 이른바 대동아공영(大東亞共榮)이라는 전략으로 이어졌는지도 모른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의 무역선은 조선에도 정기적으로 드나들었으나 조선의 상선은 한 번도 일본에 가지 않았다는 점이다(상선이라 할 만한 것도 없었지만), 일본과 달리 조선에는 여전히 대외무역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이런 사실은 이후 19세기에 두 나라의 힘이 현저한 차이를 보이는 하나의 원인이 된다.

 

18세기 초반 에도(江戶)의 인구는 무려 50만이 넘었으며, 세계 최대의 도시인 영국의 런던과 맞먹을 정도였다. 미쓰이나 스미토모 등 오늘날까지 일본 경제의 중핵을 담당하고 있는 재벌들은 바로 이 무렵의 번영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

 

 

 

 

한동안 동북아시아를 뒤흔들었던 전란의 조짐이 종식된 것은 청나라와 일본의 비중화세계가 동북아의 패권을 완전히 장악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제 중화세계가 사라졌다고 믿었다. 그들이 보기에는 아무리 조선이 중화세계의 유일한 보루로 나섰다 해도 과거의 진짜 중화세계처럼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므로 전혀 신경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조선이 왕국으로의 길을 순조롭게 걸을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그 덕분이다. 청나라는 분명 조선의 상국이지만 국제적 서열상으로만 그러할 뿐이고 과거처럼 조선이 존경과 복종과 충성을 보여야 할 사대의 대상은 아니다. 또한 청나라의 입장에서 볼 때 조선은 비록 계속 중화세계를 부르짖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국에 중화세계가 부활하는 것은 아니므로 그냥 내버려둬도 된다. 이런 사정 때문에 두 나라는 과거보다 한층 대등한 입장에서 처음으로 정상적인 국제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숙종이 명나라를 드러내놓고 추앙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분위기에서다. 1704년에 그는 송시열의 수제자인 권상하(權尙夏, 1641~1721)에게 명해서 궁성 안에 대보단(大報壇)이라는 커다란 제단을 놓게 했다. 대보단이라면 큰 은덕에 보은한다는 뜻일 텐데, 누구의 은덕일까? 바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명 나라의 황제였던 신종의 은덕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이미 100년이 넘은 시점에서 새삼스럽게 그런 정치적 제스처를 취한 이유는 명백하다. 옛날의 중화 제국 명나라를 기림으로써 현재의 비중화 제국인 청나라를 진심으로 받들지는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어쨌든 막상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맞아서는 조선에 별로 은혜를 베푼 게 없었던 신종은 숙종(肅宗)의 지극한 정성 덕분에 중국도 아닌 한반도에서 1894년까기 200년 가까이 해마다 2월이면 제삿밥을 얻어먹을 수 있게 되었다대보단과 더불어 권하는 신종을 섬기는 만동묘(萬東廟)라는 사당을 충청도 괴산에 건립했다. 숙종(肅宗)은 이 사당에 면제전과 노비를 주었는데, 말하자면 조선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죽은 명나라 황제를 지극 정성으로 섬긴 셈이다. 이는 숙종은 대보단과 만동묘를 지어놓고 마냥 뿌듯했던 모양이다. 숙종실록에는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유독 우리 동방이 대대로 100년을 지켰으니, 뒷날 중국이 다시 맑아지면 길이 천하 추세에 말할 수 있는 것이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기대와는 반대로 중국은 다시 맑이지지않았으므로 결국 조선이 명나라에 의리를 지킨 보람은 전혀 없었다.

 

그밖에도 숙종은 사육신(死六臣)의 명예를 회복해주고 전국적으로 서원 건립을 장려하는 등 유교왕국의 이념을 정비하는 각종 사업을 추진했다. 안으로는 당쟁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고 밖으로는 비중화세계와의 갈등들이 진정되었으니, 이게 조선을 명실상부한, 그리고 세계적으로 유일한 유교왕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게 그의 목표다. 덕분에 조선에는 왕국의 조짐이 뚜렷해졌으나 불행히도 그것은 가장 수구적이고 가장 퇴행적인 왕국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황제를 위하여 100년 전의 명나라 황제인 신종은 오로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재위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조선 정부에게서 으로 받들어졌다. 그림은 19세기 초반에 제작된 동궐도(東闕圖)의 일부인데, 맨 위쪽의 정사각형 건물이 신종에게 제사를 올리기 위해 쌓은 대보단이다. 중국에서 사라진 중화는 조선에서 완전히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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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 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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