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유일한 문화군주
결과적으로 보면 사대부의 선택은 옳았다. 즉위 과정에 문제가 있었지만 어쨌든 세종은 뛰어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태종은 그를 세자로 책봉하는 근거로 ‘천성이 총명하고 학문에 부지런하다’는 것과 ‘정치에 관한 큰 줄기를 안다’는 것을 들었는데, 후자의 자질이 그의 즉위를 결정한 요소라면(그 말을 바꾸면 사대부와의 관계가 좋다는 뜻이니까) 전자의 자질은 즉위 후 그의 활약을 예고하는 요소다. 그래서 세종의 치세는 조선 역사상 가장 번영하고 평화로운 시대이자, 한반도 전체 역사로 보면 8세기 초반의 제1기, 11세기 중반의 제2기에 이어 세번째로 맞이하는 ‘팍스 코레아나(Pax Koreana)’의 시대가 된다(그 세 차례의 번영기가 모두 50년을 넘지 못했다는 게 큰 아쉬움이지만), 더구나 앞선 두 차례의 번영기와는 달리 세종의 치세에서는 국왕 개인의 역량이 단단히 한몫했다는 점에서 가장 빛나는 번영기라 하겠다.
세자로 책봉된 지 불과 2개월 만인 1418년 8월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한 세종은 우선 때맞춰 준공된 창덕궁(昌德宮)으로 옮겨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겠다는 결심을 분명히 한다. 사실 그는 개인적 역량도 출중하지만 모든 여건도 최적이었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즉위하던 와 달리 왕위계승과 관련된 잡음이 전혀 없이 출발할 수 있다는 게 최대의 강점이다(여기에는 아버지와 형이 그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준 게 도움이 되었다). 게다가 개국공신이 없다는 것도 좋은 환경이다. 전을 위시하여 조준, 권근 등 조선 건국에 이바지한, 따라서 발언권이 큰 공신들은 이제 죽고 없다. 그래서 세종은 태종이 즉위 초에 권력 안정으로 부심했던 것과는 달리 처음부터 본연의 업무인 통치 행위에 집중할 수 있었으며, 그것도 그 자신이 직접 주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왕이라 해도 모든 일을 혼자 도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종에게 필요한 것은 공신들처럼 사사건건 간섭하지 않으면서 충직하게 왕을 도와 국정을 처리해줄 관료 세력이다. 세종은 마침 개국 초부터 착실히 성장해 온 유학자 풀(pool)이 있으니 그들을 제도적으로 묶어주면 큰 힘이 될 수 있으리라고 판단한다. 집현전(集賢殿)을 활성화시킨 것은 그 때문이다(‘현자들이 모인 집’이라는 뜻이니 이름부터가 좋다. 집현전이라는 기구 자체는 고려 중기부터 있었으나 실제로 국정 운영에 적극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세종 때부터다). 사대부들에게 휘둘리던 전 왕들과는 달리 세종은 이제 거꾸로 사대부들을 직속 부대로 거느리고 조선의 마무리 건국 작업을 진두에서 지휘할 수 있게 되었다. 말하자면 왕권과 신권(臣權)이 최적의 조화를 이루면서 유교왕국의 가장 바람직스런 형태를 취하게 된 것이다. 그 덕분에 유교왕국의 근본 모순은 일단 지연된다.
세종의 전폭적인 지원과 지휘를 받는 집현전 학자들의 활약은 정말 눈부시다. 우선 유학의 경서들을 비롯하여 역사, 지리, 법률, 의학, 문학, 예술, 과학 등에 이르기까지 온갖 서적들이 집필되고 번역되어 간행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심적인 것은 역시 왕조의 근본적 성격과 이념이다. 정도전(鄭道傳)이 편찬한 『경제육전』을 수정 보완해서 『속육전(續六典)』으로 간행한 것은 조선이라는 새 왕조의 법제적 정비를 마무리하려는 작업이다. 또한 사대부적 관점이 많이 투영되어 있는 정도전의 『고려사』를 변계량(卞季良, 1369~1430)에게 개찬하도록 한 것은 조선이 왕국 체제임을 확실히 한 것이다. 나아가 불교를 선종과 교종 두개 종파로 정리하고 사찰 신축을 금지한 것은 조선의 건국 이념이 ‘유교’임을 재차 천명한 것이다. 이 세 가지를 정리하면 조선은 ‘유학을 지배 이념으로 삼는 새 왕국’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세종 대에 이르러 비로소 조선 건국이 완료됐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에 세종은 단순히 감독자로서만 관여한 게 아니라 직접 현장에 뛰어들어 작업자들을 독려했고 때로는 ‘실무’까지도 담당했다. 예를 들어 중국 송대에 나온 역사서인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주해한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를 간행할 때는 50여 명의 집현전 학자들을 투입하고도 세종이 직접 교정까지 보면서 작업을 진행시키기도 했다. 하기야, 경연청(經筵廳) 건물을 새로 짓고 학자들과 스스럼없이 학문적 토론을 나눌 정도의 실력이었으니, 세종은 교정이 아니라 시간이 허락된다면 직접 저술까지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세종은 한반도 역사상 유일무이한 문화군주였다(심지어 그는 젊고 유능한 학자들에게 다른 일은 하지 말고 오로지 공부만 하라는 뜻으로 휴가를 주기도 했는데, 이는 사가독서賜暇讀書라는 제도로 자리잡았다. 오늘날 대학에서 무능한 교수들에게까지 무차별적으로 ‘안식년’이 주어지는 것보다는 훨씬 합리적이다).
그런 만큼 그의 폭넓은 관심과 지식은 정치와 인문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조선은 뭐니뭐니해도 농업국가, 따라서 국왕이 농업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그 당연한 일을 전대의 왕들은 하지 못했지만). 세종의 명을 받아 1429년 드디어 정초(鄭招, ?~1434)가 『농사직설(農事直說)』을 저술하는데, 종합 농사 교과서라 할 이 책은 지금까지 전하는 농서들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이다. 그 전까지 한반도에서는 내내 중국의 농서들에 의존해오다가 이 책이 간행되면서 비로소 중국 농사법에서 탈피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 역사적 의의는 대단히 크다. 그 덕분에 이 책은 후대의 모든 농서들에 영향을 주면서 일본에까지 수출되었으며, 같은 시기에 간행된 의학서인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과 함께 통시대적인 베스트셀러가 된다【『향약집성방』도 역시 『농사직설』과 마찬가지 맥을 따르고 있다. 즉 중국의 약재에 의존해 오던 관행을 탈피해서 한반도에서 생산되는 약재들을 총정리한 문헌이다. 단순히 약재만이 아니라 제약법, 각종 질병의 분류, 침술까지 두루 다루고 있으므로 이를테면 의학백과 대사전쯤 된다. 정치 이념이나 철학이라면 모르겠지만 농사법과 의약학은 어느 분야보다도 지역마다 달리 적용되어야 하는 실용적 학문이라는 점에서 세종은 그 서적들의 출간이 시급하다고 보았을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그런 실용서까지도 유학자들이 편찬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에 말하는 유학이란 요즘식으로 말해서 특정한 ‘학문 분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서양 중세에 신학이 모든 학문의 근원이었듯이 조선시대에 유학은 특정한 학문의 이름이 아니라 학문 자체를 가리키는 용어였다】.
이렇듯 세종 대에 서적 간행이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었던 데는 고려시대에 이미 인쇄술과 활자 제조술이 발달해 있었던 덕택이 크다. 유럽의 구텐베르크보다 200년이나 앞서 금속활자를 만들었을 정도로 인쇄술이 발달했으나, 정작 그 활자를 이용한 서적 보급에는 거의 무관심했던 게 고려였다. 원래 서적이란 일반 백성이 보는 게 아니라고 여기면서, 인쇄술이 개발되었어도 ‘장서용’ 역사서나 찍어서 서고에 보관하는 게 고작이었던 동양의 전통에서【이 점에서 서양의 경우는 사뭇 다르다. 세종의 시대, 그러니까 15세기 중반 유럽에서는 구텐베르크가 활판인쇄술을 발명한 지 50년도 못 되어 유럽 전역에 서적이 널리 보급되었다. 그 결과 일반 민중이 성서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종교개혁가들의 공통적인 모토는 바로 ‘성서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동양에서는 문자의 특성상 목판인쇄가 유리했고 또 실제로 일찍부터 목판인쇄술이 발달했으나 활판인쇄술에서도 동양이 앞섰다는 것은 당시 세계 문명의 판도를 말해준다. 그러나 정치가 사회의 모든 것을 장악한 동양에서는 인쇄술이 지배층의 도구로만 이용되면서 (예컨대 ‘보관용’ 역사서를 인쇄한다든가) 사실상 사장되고 말았다. 인쇄술과 함께 이른바 동양의 4대 발명품으로 불리는 종이, 나침반, 화약 등도 비슷한 운명을 겪었으니, 여기서 동서양의 역관계는 역전된 것이다】 세종은 농서나 의약서와 같은 실용서를 인쇄하여 보급하는 혁신적 사고를 지닌 군주였던 것이다.
▲ 출판 왕국 위쪽은 『농사직설』, 아래쪽은 『향약집성방』의 일부다. 원래 농학과 의학은 다른 어느 학문보다도 ‘토착적’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두 책의 간행은 세종 대의 획기적인 출판사업이었다. 게다가 이 책들은 후대에도 계속 내용이 보강되면서 여러 차례 간행되었으므로 조선의 통시대적 베스트셀러라고 할 수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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