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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섞임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최후의 전성기: 해법은 또다시 한화 정책(강희제, 성세자생인정)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섞임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최후의 전성기: 해법은 또다시 한화 정책(강희제, 성세자생인정)

건방진방랑자 2021. 6. 8.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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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법은 또다시 한화 정책

 

베이징을 점령한 뒤에도 청은 한동안 통일 제국의 면모를 갖추지 못했다. 한 번 이민족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는 한족의 저항은 매우 거셌다. 강북은 그런대로 지배할 수 있었으나 강남은 여의치 않았다(남북조시대부터 북방 민족은 중원을 여러 차례 지배했으나 강남까지 손에 넣은 이민족 왕조는 몽골이 유일했다). 그래서 청은 강남에 대해 간접 지배의 형식을 취하기로 했다. 마침 청이 중원을 지배하게 된 데는 투항한 한인들의 공이 컸으니 이들을 이용하면 된다. 청은 오삼계를 비롯해 한인 공신 세 명에게 각각 번국(藩國)을 할당해 그 세 개의 번국으로 강남을 통제했다.

 

한동안 번국들은 거의 독립국이나 다름없이 행세했다. 각자 군사권을 지니고 있었던 데다 청 제국으로부터 막대한 재정 지원까지 받았으니 당연히 세력이 나날이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강남의 윈난 지역을 차지한 오삼계는 마음대로 영향권을 확대하고 독자적인 재정을 꾸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청의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관료들을 임의로 임명하는 등 은근히 청의 지배와 간섭에서 벗어나려 했다. 청의 입장에서도 이제 번국은 중국 통일만이 아니라 중원 지배에도 화근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 상황이 고착되면 강북에는 금, 강남에는 남송이 지배했던 12세기처럼 될지도 모른다.

 

그런 위기 상황에서 즉위한 황제가 바로 강희제(康熙帝)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성조(聖祖, 1654~1722). 강희제는 중국 역사상 최장 기간인 61년 동안 재위하면서 청 제국을 안정시키고 강대국으로 끌어올린 뛰어난 군주였다.

 

화북의 지배에만 만족한다면 제국 자체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강남을 평정하지 않으면 중국 지배가 불가능하고, 3(三審)을 그대로 두고서는 강남을 평정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3번을 철폐하기로 결심했다. 청의 강경한 태도에 번들은 오삼계를 중심으로 힘을 합쳐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각지에서 한인 무장들의 지원을 받아 한때 양쯔 강 너머 화중(華中)까지 세력을 떨쳤다. 청으로서는 대륙 통일을 위한 마지막 시험을 치르는 셈이다.

 

통일 입시에서 강희제는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한다. 뜻하지 않은 반란군의 기세에 부딪히자 청은 처음에 전선을 고착시킨 채 대치했다. 하지만 무릇 반란이라면 단기전에 끝내야만 승산이 있지 장기화되면 견디지 못하는 법이다. 몇 년간 대치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번들 간의 연락이 두절 되면서 반란군 세력은 분산되었다. 이를 틈타 먼저 상대적으로 약한 두 개의 번을 복속시키자 나머지 오삼계의 번도 세력이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그리하여 1681년 강희제는 마침내 반란을 종식시키고 전 중국을 손에 넣었다. 2년 뒤에는 청이 입관할 무렵에 대만으로 도망쳐 명맥을 유지한 명의 잔존 세력마저 제압함으로써 확고부동한 중국 대륙의 새 주인이 되었다.

 

 

곰과 되놈 왼쪽이 재주를 부린 오삼계이고, 오른쪽은 돈을 거둔 되놈강희제다. 강희제는 한인 오삼계를 앞잡이로 이용해 중국 내의 반청 세력들을 하나씩 제거하고 청을 완전한 통일 제국으로 만들었다. 오삼계는 사냥이 끝난 뒤의 사냥개처럼 축출을 당했다.

 

 

기왕 정복 전쟁을 시작한 판에 강희제는 국방을 두루 손보기로 결심했다. 이 과정에서 청은 유럽의 러시아와 처음으로 접촉하게 된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강희제에 못지않은 걸출한 황제인 표트르 대제가 유럽의 후진국 러시아를 일약 강대국으로 끌어올리는 중이었다. 17세기 말부터 시작된 러시아의 팽창정책은 유럽이 주요 무대였지만, 부동항(不東港)을 찾아 동진을 계속하면서 표트르는 시베리아 경략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예전의 중국 왕조, 예컨대 명 제국이었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중국 북쪽에는 몽골이 있었고 만주에는 여진이 있었으므로 이들 북방 민족과 러시아가 접촉했을 테니까. 그러나 만주가 고향인 청이 중국을 지배함으로써 이제 중국의 강역은 만주까지 포함하고 있다. 동진을 계속해온 러시아군과 만주의 청군은 헤이룽 강(黑龍江, 러시아 측 명칭은 아무르 강)에서 맞닥뜨리게 되었다.

 

만약 그때 유럽과 아시아의 두 신흥 강국이 맞붙었다면 승부는 어찌 되었을까? 하지만 현명한 강희제는 자칫 위기가 될 수 있는 사건을 슬기롭게 넘어갔다. 1689년 그는 표트르에게 친서를 보내 헤이룽 강을 양측의 국경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북방에 모든 힘을 기울일 수 없는 청의 입장에서나, 유럽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러시아의 입장에서나 불만일 수 없는 조건이다. 이리하여 역사상 최초로 동양과 서양은 네르친스크 조약이라는 정식 국제 관계를 맺었다. 이 조약으로 표트르는 동방 진출을 단념하고 유럽 무대에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최북단의 문제를 해결한 뒤 강희제는 이제 마음 놓고 변방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서북쪽으로 가서 오이라트의 후예인 중가르족을 평정하고, 그 남쪽의 투르키스탄 동부까지 복속시켰다. 여기까지만 보면 강희제는 명의 영락제(永樂帝)와 동급의 정복 군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도 문무에 모두 능한 팔방미인 강희제는 자신의 위엄을 떨치는 데 급급했던 영락제보다 여러모로 한 수 위였다. 이 점은 그의 대내 정치에서도 확인된다.

 

 

장신의 러시아 차르 1689년 형과 함께 러시아를 다스리던 열일곱 살의 청년 차르인 표트르 대제는 강희제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고 청과 러시아의 국경을 확정했다. 그는 키가 2미터가 넘는 거인이었을 뿐 아니라 조국 러시아를 유럽의 후진국에서 강대국으로 끌어올린 거목이기도 했다.

 

 

우선 그는 그동안 정복 사업에 가려 미루어져온 통치 제도를 손보았다. 입관 이전 후금 시대의 통치 제도는 일종의 부족 연맹체인 사왕회의제(四王會議制)였다가 태종 시절에 중앙집권화가 추진되면서 의정왕대신회의(議政王大臣會議)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것은 최고 결정 기구일 뿐이므로 실무를 위한 중앙 기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강희제는 중국식 내각을 도입하고 영락제(永樂帝)를 본받아 내각대학사를 두었다.

 

또한 강희제는 유학의 지식인들을 존중하고 학문을 장려했다(다만 명대에 발달한 양명학보다는 그 전대의 주자학을 더 중시했는데, 아무리 포용력이 넓다 해도 적국의 학문을 지지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명의 역사서인 명사(明史), 한자들을 총정리한 강희자전(康熙字典), 특히 중국식 백과사전인 1만 권의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등이 모두 그의 명으로 편찬된 문헌들이었다원래 중국에서는 새로 들어선 왕조가 그 전대 왕조의 역사를 편찬하는 게 전통이었다. 우리 역사에서도 왕명에 따라 고려의 김부식삼국사기, 조선의 정도전고려사를 썼다.

 

강희제의 치세에 청은 비로소 완전한 통일 제국의 기틀을 마련하고 번영을 구가했다. 희망에 찬 새 시대를 맞아 그는 1711년에 즉위 50주년을 기념하면서 획기적인 조치를 발표했다. 그 이듬해인 1712년부터 출생하는 백성들에게는 인두세를 부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그때부터 새로 증가하는 인구를 성세자생인정(盛世滋生人丁, 번영의 시대에 증가한 인구)’이라 불렀는데, 자신이 지배하는 시대를 스스로 성세라 말할 정도로 자신의 치적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최초의 만주족 왕조라고 해서 예전의 이민족 왕조와 특별히 다르지는 않았다. 청의 기본 노선은 중국식 통치 제도를 도입하고, 유학을 장려하고, 과거제(科擧制)를 실시하는 등 한족의 선진적인 제도와 문화를 바탕으로 제국을 다스리는 것이었다. 사실 초기에 청의 중국 지배는 언제 다시 3번의 반란과 같은 사건이 일어날지 모를 만큼 토대가 불안정한 상황이었다(실제로 반청복명反淸復明의 구호는 청대 전체에 걸쳐 지속적으로 터져 나온다). 특히 중화사상(中華思想)에 물든 한족의 지식인들은 힘에 눌려 제압당했을 뿐 오랑캐의 지배를 여전히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원래 정복은 무력으로 해도 지배는 문화로 하는 법이다. 강희제의 한화 정책은 한편으로 중국의 선진 문화를 흡수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족의 반발을 회유하고 무마하려는 의도도 컸다. 그러나 노회한 강희제는 강압책도 병용했다. 만주식 변발을 전 국민에게 강요하고, 청의 중국 지배에 반발하는 내용의 책을 금서로 묶었다. 그는 자신의 지배에 자신감을 가지게 된 뒤에도 소수의 이민족이 다수의 한족을 지배한다는 긴장감을 결코 내려놓지 않았다.

 

 

성세를 찬양하는 그림 강희제는 자신의 즉위 50주년을 기념해 1711년에 성세자생조처를 내렸다. 이 그림은 건륭제 때 그려진 성세자생도(盛世滋生圖)의 일부다. 그림에서 보듯이 번영의 시대인 것은 틀림없었으나, 강희제의 의도는 태평성대를 기념한다는 것 이외에 인두세를 단순화하고자 하는 취지가 있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급변하는 만주

해법은 또다시 한화 정책

아이디어맨 옹정제

현대의 중국 영토가 형성되다

장수의 비결

안정 속의 쇠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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