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부 왕국의 시대
이미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는 단순한 관료의 선을 넘어섰다. 그러나 사대부들의 도전은 일단 실패로 끝나고, 조선은 다시 왕국화의 행정을 밟는다.
문제는 세조의 강력한 지배 전략으로 위축된 가운데서도 권력을 향한 사대부들의 야망은 결코 사그러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들은 먼저 자기들끼리의 세력 다툼을 통해 힘을 결집한 다음 사림파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왕권 타도 작업에 들어간다.
1장 왕권의 승리
3차 왕자의 난
세종의 기대와는 달리 ‘조선의 영락제(永樂帝)’는 그의 아버지 태종이 아니라 아들인 수양대군이었다. 태종은 그래도 왕위를 놓고 형제들 간에 다툼을 벌인 것이지만, 수양대군은 바로 50년 전 명나라 영락제가 그랬듯이 조카의 왕위를 빼앗고 조카를 죽인 비정한 삼촌이 된다. 게다.가 그런 그의 행위는 이른바 사육신(死六臣) 사건으로 후대에 더욱 오명을 떨친다. 박팽년(朴彭年, 1417~56), 성삼문, 이개(李塏, 1417~56), 하위지(河緯地, 1412~56), 유성원(柳誠源, ?~1456), 유응부(兪應孚, ?~1456) 등 여섯 명의 충신이 죽음으로써 단종(端宗)에 대한 충의를 지켰다는 데서 나온 사육신이라는 이름은 지금까지도 불의에 항거한 절개의 상징으로 받들어지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실은 그들의 행위를 단순한 정의나 고결한 충절로만 볼 수는 없다.
1450년 세종의 맏아들로 왕위를 이은 문종은 이미 세종의 만년에 병든 아버지를 대신해서 국정을 이끈 경험이 있었으니 왕의 자질이 모자라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비록 우리 현대사를 얼룩지게 만든 어느 머리 없는 위정자의 말이긴 하지만, 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건강은 빌릴 수 없다는 말은 사실인 모양이다. 불행히도 문종은 몸이 약해 재위 3년을 채우지 못하고 죽는다. 이미 문종 즉위년에 그의 아들이 세자로 책봉되어 있었으니 일단 후계 문제는 없으나 그가 겨우 열한 살의 어린아이라는 게 불씨가 된다.
정상 때 같으면, 그러니까 새 왕조가 개창되고 나서 상당한 기간이 지나 자리를 잡은 뒤라면 나이 어린 왕이 즉위한다 해도 크게 문제가 될 건 없다. 일찍이 고구려의 태조왕(太祖王)과 신라의 진흥왕(眞興王)은 일곱 살에 즉위해서 나라를 크게 일군 적도 있지 않던가? 수백 년 전의 일이라서 조선시대와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때처럼 대신들과 섭정이 어린 왕을 잘 보좌한다면 오히려 약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또한 열세 살에 즉위한 고려의 인종도 비록 이자겸(李資謙)에 의해 휘둘리기는 했어도 왕위만큼은 죽을 때까지 24년간이나 유지했으니 왕으로서 실패작은 아니다. 그러나 고구려와 신라, 고려의 그 어린 왕들이 즉위할 무렵은 나라가 중기에 접어들어 적어도 왕계에 관해서는 안정된 시기였던 데 반해, 단종(端宗)이 즉위할 무렵은 아직 조선 왕조가 신생국의 딱지를 완전히 떼지 못한 시기라는 게 문제다. 더구나 태종이 시작하고 세종이 마무리한 2차 건국(사실상의 건국) 작업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어린 왕이 즉위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여러 가지로 불길한 조짐이다.
그래도 조카의 왕위에 흑심을 품은 삼촌이 없었다면, 혹은 그 삼촌이 하나뿐이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린 왕에게는 삼촌이 무려 열일곱 명이나 있었을뿐더러 (세종은 여섯 아내에게서 열여덟 명의 아들을 낳았다) 그 중에서도 첫째와 둘째 삼촌, 그러니까 문종의 바로 아래 동생들인 수양대군과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53)은 조카의 왕위 승계를 인정하는 대신 실권을 장악하려 했다. 말하자면 공식적으로는 아니지만 사실상 단종(端宗)의 섭정을 자처한 셈인데, 어린 왕이 즉위했을 때 삼촌이 섭정을 맡는 것은 오히려 미덕이니까 거기까지는 좋다(원래는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가 정식 섭정을 맡아야 하겠지만 그녀는 단종을 낳고 사흘 만에 죽었다).
조카가 자랄 때까지 서로 사이좋게 권력과 국정을 나누어 맡았다면 아무런 이야깃감도 되지 않았겠으나, 불행히도 두 대군은 권력을 양보할 의사가 없다. 이리하여 끝난 줄 알았던 왕자의 난이 다시 발생한다.
먼저 선수를 친 것은 동생인 안평대군이다. 그는 이미 문종의 치세에 황표정사(黃票政事)【황표정사란 무슨 기구나 조직이 아니라 문종 대에 있었던 기형적인 인사제도를 가리킨다. 말 그대로 ‘노란 표(황표)’로써 국정을 운영했다는 뜻이다. 몸이 약하면 마음도 약해진다더니, 과연 문종은 재위 시절부터 대가 센 동생들의 등쌀에 힘겨워했다. 그래서 그는 국정에 발언권을 행사하려는 동생들의 요구에 못 이겨 그들이 추천하는 인물을 관료로 임명했다. 하지만 천거하는 인물을 무조건 임용할 수는 없는 일이므로 문종은 그 인명부에서 관리로 발탁할 인물의 이름에 노란 표시를 했는데, 이게 바로 황표다. 정규 임용제도를 무시한 무원칙한 인사행정이었으나 단종(端宗)도 황표정사를 그대로 시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다시 왕자들이 정치 일선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태종과 세종이 맏아들 승계의 원칙을 무시하고 즉위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를 장악해서 조정의 요직에 자신의 인물들을 박아넣고, 장차 병약한 형을 대신할 대권후보임을 천명한 바 있다.
비록 맏형이 죽은 뒤에도 수양대군이 형으로 있지만 아마 안평대군은 형제 서열 따위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할아버지 태종은 다섯째 아들로 즉위했고 아버지 세종은 그의 같은 셋째 아들로서 왕위를 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안평대군이 노리는 것은 왕위 자체가 아니라 실권이니까 형의 눈치를 보고 말고 할 것도 없다.
▲ 안평대군의 꿈 워낙 다재다능한 탓이었을까? 시ㆍ서ㆍ화에 두루 능한 안평대군은 늘 형에게 한발 앞서 있다고 여기며 여유를 보였으나 결국은 경주에서 진 토끼가 되고 말았다. 위가 그가 화가 안견(安堅)에게 자신의 꿈을 그림으로 표현하게 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이고, 아래가 그 그림에 붙인 안평대군의 발문이다. 꿈의 내용은 무릉도원이었으나 그의 운명은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기선을 제압당한 수양대군의 자세는 다르다. 아마 그에게는, 호방한 성격에다 학문은 물론이고 시와 글씨와 그림에 능해 일찍이 삼절(三絶)이라 불리면서 문인들과 폭넓게 교류하는 동생에 대한 콤플렉스가 적지 않았을 터이다. 그런데 권력마저 동생에게 빼앗기니 수양대군은 참담한 심정이다. 여러모로 그에게는 안평대군처럼 막후의 실력자를 택하기보다 왕위 자체를 노릴 만한 동기가 충분하다. 그래서 그는 동생이 미처 신경쓰지 못한 분야, 그러나 조선의 대권후보라면 가장 중시해야 할 분야를 개척한다. 그것은 바로 명나라와의 관계다. 마침 명 황실에서 황태자를 새로 책봉하자 수양은 이게 역전의 계기가 되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레 타진해 본다.
중국의 황태자가 책봉되면 조선에서는 사은사(謝恩使), 즉 ‘은혜에 감사하는 사절’을 보내야 한다【참고로, 조선이 중국에 보내는 사절에는 크게 정기 사절과 임시 사절이 있었다. 정기 사절은 중국 황제 부부의 생일을 축하하는 성절사(聖節使)와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추사(天秋使), 그리고 새해를 맞아 보내는 정조사(正朝使)와 동지에 보내는 동지사(冬至使)를 말한다. 임시 사절로는 황제가 즉위했거나 황태자를 책봉하거나 외적을 물리쳤거나 할 때 보내는 사은사와 진하사(進賀使), 황족 중에 누가 죽었거나 황궁에 불이 났거나 할 때 보내는 진위사(陳慰使)와 진향사(進香使), 특별히 보고해야 할 일이 있을 때 보내는 주청사(奏請使) 등이 있다. 그 가운데 실질적인 업무가 있다는 점에서 정작으로 중요한 것은 주청사였으나, 파견되는 사신의 지위로 보면 오히려 주청사에 비해 다른 사절들이 훨씬 높았다. 동양식 제국 질서의 유교적 허례허식을 보여주는 한 예다】. 그게 조선에게 무슨 은혜를 베푼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좌우간 명나라에 사대하는 조선으로서는 명 황실에 경사가 있으면 무조건 ‘은혜’로 규정할 의무가 있다. 사은사는 중요 사절이므로 보통은 의정부 정승 중 한 명이 가는데, 영의정인 황보인(皇甫仁, ?~1453)은 얼마 전에 중국에 다녀온 적이 있으므로 누구나 생각하는 사은사 후보는 좌의정인 김종서(金宗瑞, 1383~1453)다. 그런데 문제는 황보인이나 김종서가 모두 안평대군의 인맥이라는 점이다.
이번마저 놓치면 수양대군에게는 두 번 다시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놀랍게도 그는 자신이 직접 사은사로 가겠노라고 나선다. 김종서는 너무 늙었다는 게 그가 준비한 구실이다(사실 김종서는 6진을 개척할 때 북변의 여진과 원수진 일 때문에 사신으로 가기를 꺼렸다). 그러자 화들짝 놀란 안평대군은 서둘러 황보인을 찾아가서 자신을 천거하라고 다그친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거기서도 준비해 놓은 카드가 있었다. 안평대군을 보내자고 말하는 황보인에게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국정에 참여하지도 않았으니 두어 달 원행을 한들 어떻겠습니까?” 이것은 명백히 자신을 소외시킨 안평에 대한 불만의 토로이자 경고다.
굳이 사신으로 가겠다는 형의 의도를 간파한 안평은 그것을 좌절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한다. 과연 사은사 자리는 두 왕자가 경쟁을 벌일 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1453년 4월 베이징에서 돌아온 수양은 돌아오자마자 즉각 황표정사를 폐지해 버린다. 여기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으나 모르긴 몰라도 그는 필경 명 황실의 이름을 적절히 활용했을 것이다. 이제 세 번째 왕자의 난은 필연적이다. 다만, 앞서 두 차례 있었던 왕자의 난과 다른 점은 이번의 정변에는 왕실만이 아니라 사대부(士大夫)들까지도 깊숙이 관련된다는 사실인데, 앞으로 이것은 조선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변의 기본 패턴으로 자리잡게 된다.
사육신의 허와 실
단종(端宗)이 즉위하면서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알력이 노골화되자 조정 대신들도 앞다투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어느 줄이 더 길까? 말할 것도 없이 안평의 줄이다. 황보인과 김종서 같은 원로들만이 아니라 집현전 출신의 젊은 학자-관료【여기서 ‘학자-관료’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조선의 경우 학자와 관료의 구분이 없거나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유학의 본성 자체가 국가 경영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인 데다가 조선은 처음부터 유교왕국을 표방하고 나섰으므로 학자와 관료는 이념적으로나 신분적으로 거의 일치한다. 물론 관직에 진출하지 않은 학자들도 있었고, 또 거꾸로 학문적 소양이 깊지 못해 학자라고 불릴 자격에 미달하는 관료들도 있었지만, 이들은 소수였고 정치 엘리트가 되지 못했기에 큰 의미가 없다. 이후 조선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조선사회의 지배층은 줄곧 학자 관료 집단이 담당하게 되는데, 통상 사대부(士大夫)라고 지칭되는 세력이 그들이다】들도 대부분 안평대군을 택했는데, 그가 실세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자가 강한 것이다. 수양은 비록 소수파지만 승리를 꿈꾸고 낙관한다. 다수파와 소수파의 대결에서는 언제나 그렇듯 소수가 다수를 상대하려면 조직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수양은 한명회(韓明澮, 1415~87), 권남(權擥, 1416~65), 홍윤성(洪允成, 1425~75) 등 측근들을 심복으로 만들고 홍달손(洪達孫, 1415~72)을 비롯한 무신들까지 적극 끌어들여 잔뜩 세를 불린다(이런 방식은 안평대군이 관료들을 파트너로 삼은 것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즉 안평이 ‘사랑방 놀음’을 벌였다면 수양은 ‘조폭’들까지 끌어들인 격이니, 여기서 승패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아마 수양으로서는 베이징에 갈 때 서장관으로 거느렸던 신숙주를 회유한 게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신숙주야말로 집현전 출신의 정통 학자 관료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그의 진영으로 들어온 인물이었으니까(두 사람은 동갑내기였으니 몇 개월이나 걸리는 중국 여행에서 충분히 의기투합하지 않았을까?).
기질에서도 비교되듯이 두 대군의 차이는 명백하다. 수양은 대권을 노리지만 안평의 목표는 어린 조카 단종(端宗)을 대신해서 사대부(士大夫)들과 함께 권력을 장악하는 데 있다【나중에 왕위에 오른 뒤 수양대군은 자신이 거사하지 않았다면 김종서와 황보인이 먼저 안평대군을 움직여 선수를 쳤을 거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자신이 왕위 찬탈자가 아니라는 논리를 이끌어내기 위한 궤변일 뿐이다. 더욱이 그 자신도 안평에게 대권 욕심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있다. 수양이 사은사로 가려 했을 때 권남은 그 시기를 틈타 안평대군이 쿠데타를 일으킬까 두려워 만류했는데, 당시 수양은 김종서와 황보인에게는 그만한 호기가 없다면서 껄껄 웃었던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그것은 곧 안평의 세력이 수양의 의도를 몰랐거나 얕보았다는 말도 된다】. 그랬기에 황표정사가 폐지됨으로써 안평은 가장 강력한 무기를 잃었다. 간단히 사태를 역전시키고 동생을 코너로 몰아넣은 뒤 수양은 드디어 최후의 일격을 가한다.
1453년 10월 10일 그는 심복들을 불러모아 거사를 확정했다. 왕에게 먼저 아뢰어야 한다는 일부 무신들의 주장에 수양은 잠시 멈칫했으나 모사꾼 한명회(韓明澮)는 어차피 거사가 성공하면 그들은 자연히 따를 것이라며 부추긴다. 그 날 저녁 수양은 김종서의 집으로 쳐들어가 그를 죽이고 황보인과 그의 일파를 마저 죽여 쿠데타를 성공시킨다. 뒤이어 김종서와 황보인을 따르던 조정 대신들을 모조리 처형하거나 유배보내는데, 이것이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알려진 사건이다.
사실 김종서와 황보인은 사대부(士大夫)들, 특히 소장파에게는 그다지 평판이 좋지 못했으며, 심지어 정인지 같은 일부 원로들에게서도 별로 점수를 따지 못했다. 그 이유는 우선 김종서 일파가 지나치게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던 데 대한 반발감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것은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이 국왕을 바지저고리로 만들면서까지 자신들의 권력을 늘리려 하지는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바꿔 말해 그들은 비록 어린 국왕이긴 하지만, 세종의 치세를 통해 사대부의 본분이 국왕에 대한 충성임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나중에 보겠지만 사대부들은 점차 권력이 증대하고 파벌을 이루면서 자신들이 국왕마저도 교체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인식으로 전환하게 된다).
실권을 손에 쥔 수양대군의 다음 조치는 누가 봐도 편파적이라 할 만큼 분명하고 단호했다. 김종서와 황보인은 현장에서 제거했으나 동생마저 그렇게 다루면 남 보기에 좋지 않다. 그래서 그는 안평대군에게 각종 죄목을 붙여 강화도로 유배 보낸다. 당시의 유배 조치란 곧 분위기를 봐서 죽이겠다는 뜻, 과연 안평은 얼마 못 가서 사약을 마시고 죽는다. 그러나 사약을 받은 안평은 죽음보다 더한 치욕에 몸을 떨었을 것이다. 오래 전부터 왕위를 노리고 있었고 국정을 제 마음대로 주물렀다는 죄목까지는 각오했지만, 그가 숙모를 비롯하여 여염집 여자들과 간통 행각을 벌이고 다녔다는 대목에서는 그저 아연실색할 따름이다(안평의 삼촌, 즉 세종의 동생인 성녕대군은 열네 살 때 홍역으로 죽었는데, 수양의 고발에 따르면 안평은 과부가 된 성녕의 아내와 놀아났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안평의 분방한 기질과 아직 유교 도덕이 일상생활의 영역에까지 뿌리내리지 못한 사정을 감안하면 사실일 수도 있겠다).
그 다음에 진행된 논공행상은 조정을 모조리 수양의 인맥으로 채우는 절차에 불과하다. 수양 자신을 포함하여 모두 43명이 정난공신(靖難功臣)이 되었고(반란을 일으킨 세력이 반란 진압 공신이 되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정인지, 한명회(韓明澮), 권남, 신숙주, 정창손(鄭昌孫, 1402~87), 윤사로(尹師路, 1423~63) 등이 정부의 핵심 요직에 포진했다. 수양과 안평의 차이가 드러나는 것은 이때부터다.
실권자의 지위에 만족했던 동생과는 달리 수양의 목표는 왕위에 있었다. 안평에게 왕위를 노렸다는 죄목을 덮어씌운 것과는 명백히 모순되는 의도였지만 원래 진리나 모순이라는 것은 힘있는 자가 규정하기 나름이 아니던가? 일단 수양은 최고 정승인 영의정이 되었으나(왕실 종친이 정승을 맡은 경우는 그가 유일무이하다) 그가 국왕을 보필하는 정승 본연의 위치에 만족하리라고는 그 자신을 포함하여 누구도 믿지 않았다. 기다리던 그에게 드디어 때가 왔다. 안평대군의 사후 안평의 역할을 대신하려 했던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수양 세력의 덫에 걸려 좌초하고 만 것이 수양에게는 좋은 계기가 된다【앞서 말했듯이 세종의 아들은 무려 열여덟 명이었으니 그 중에 수양의 처사에 반대하는 형제들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비록 수양은 살아남은 형제들 중 맏이였으나 평소에도 안평을 따르는 동생들이 많았으므로 동생들의 지지는 별로 받지 못했다. 그래서 형제들 중 수양을 따르는 소수와 반대하는 다수 간에 알력이 빚어지고 각종 음모가 전개된다. 특히 금성대군과 세종의 넷째 아내인 혜빈 양씨가 반대파를 이끌었는데, 암암리에 군사력을 준비하던 그들이 1455년 6월 발각되어 유배형에 처해진 것은 결정적인 타격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초기 왕자의 난과는 달리 이 시기에는 친형제와 이복형제의 구분이 없었다는 점이다. 금성대군은 수양과 친형제였지만 오히려 반대파였고 당시 수양의 편에 선 계양군(桂陽君)은 수양의 배다른 형제였다. 아버지가 왕이면 어머니는 누구라도 상관없다는 것, 이는 이미 조선 왕실의 혈통이 국왕 중심으로 확고히 안정되었음을 말해준다. 중기에 들어 사대부(士大夫) 세력이 왕을 ‘발탁’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게 된 것은 이런 변화 덕분이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편으로 있던 삼촌이 유배되자 어린 단종(端宗)도 더 이상 왕위를 유지하기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다. 결국 1455년 6월 국왕이 영의정에게 왕위를 양보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면서 수양은 꿈에도 그리던 왕위를 차지하여 조선의 7대 왕인 세조(世祖, 1417~68, 재위 1455~68)가 된다(단종은 일단 상왕上王이 되었지만 사실상 폐위된거나 마찬가지였다).
▲ 왕권에 도전한 학자들 경복궁에 있는 이 건물의 이름은 수정전(修政殿)이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경복궁을 중건할 당시에 지은 건물인데, 과거에는 이 자리에 집현전이 있었다. 세종 때 학자들은 바로 이곳에서 책을 짓고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머리가 큰’ 학자들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하여 왕권에 도전했는데, 그 지도부가 바로 집현전 학자들이다.
그것으로 수양은 모든 게 끝났다고 믿었다. 비록 삼촌이 조카의 왕위를 물려받은 격이라서 적법한 왕위 승계는 아니지만, 어차피 개국 초부터 장자 승계로만 이루어지지 않았고 더구나 얼마 전에 명나라 영락제(永樂帝)의 선례도 있었으니 그리 허물이 되지는 않으리라고 여겼을 법하다. 그러나 문제는 생각지도 않은 데서 터진다. 집현전 학자 출신의 소장파 관료들이 반기를 든 것이다.
2년 전 계유정난으로 수양이 실권을 차지했을 때만 해도 그들은 중립을 취했다. 왕의 삼촌이 영의정에 올라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한명회(韓明澮)처럼 출신도 모르는 모리배가 권세를 휘두르는 꼴이 결코 보기 좋을 리는 없지만(한명회는 과거에 여러 차례 낙방하고 문음, 즉 음서로 관직에 올랐다), 그래도 그들은 안평대군과 김종서 일당이 다른 세력으로 대체되었다는 정도로 여기고 꾹 참았다. 그러나 단종(端宗)이 폐위되자 그들의 태도는 급변한다. 비록 어지럽고 혼돈스런 정국이지만 그래도 국왕을 모시고 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중심을 유지하는 축이자 마음 한 구석의 자부심이 아니었던가? 세조의 즉위는 그 축과 자부심을 송두리째 뒤집어놓는 것이었다.
특히 성삼문과 박팽년은 박탈감이 심하다. 그도 그럴 것이 성삼문은 예법을 관장하는 예조에 재직하다가 단종(端宗)의 승지(承旨, 비서)로서 예법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박팽년은 충청도 관찰사지만 사법을 관장하는 형조에 몸담은 경력이 있었던 것이다. 단종의 폐위에 흥분해서 자살하려 했던 박팽년은 성삼문의 설득으로 마음을 돌려 함께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기로 결심한다. 이미 세조가 즉위했으니 엄밀히 말하면 쿠데타지만 단종 복위라는 대의명분에 비추어 보면 불의를 응징하는 것이니 양심상 거리낄 게 전혀 없다. 이들은 점차 이개, 유성원, 하위지 등 집현전 출신 관료들과 유응부 등 소장파 무신들을 끌어들여 비밀리에 공작을 전개한다【이들을 사육신(死六臣)이라는 말로 지칭하게 된 것은 나중에 남효온(南孝溫, 1454~92)이 쓴 『추강집(秋江集)』 때문이다. 이 책에 「육신전(六臣傳)」이라는 글이 실려 있어 마치 단종 복위를 꾀한 세력이 이들 여섯 명인 것처럼 보이지만, 추후 세조가 직접 행한 국문(鞠問)에 의하면 적어도 13~17명이 사건에 관련된 게 확실하다. 따라서 그냥 주동자가 성삼문과 박팽년이었다는 정도만 알면 된다. 사육신(死六臣)과 함께 피살된 김문기(金文起, 1399~1456)의 후손들은 1970년대까지도 자기들 조상을 포함시켜야 한다며 법석을 떨기도 했는데, 사육신이든 ‘사칠신’이든 뭐가 그리 대단할까? 참고로, 남효온은 김시습(金時習, 1435~93), 원호(元昊, ?~?), 이맹전(李孟專. 1392~1480), 조여(趙旅, 1420~80), 성담수(成聃壽, ?~1456) 등과 함께 새 정권에 소극적으로 저항한 것으로 이른바 생육신(生六臣)이라 불리지만, 이 사실도 퀴즈쇼 같은 데 나갈 게 아니라면 전혀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명분에만 집착하고 정열에만 호소할 뿐 현실적이고 조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그들이 꾀하는 쿠데타란 어설프기 짝이 없다. 기회는 좋았다. 마침 1456년 6월 1일 명나라 사신을 맞는 연회 자리에 별운검(別雲劍, 어전 행사시에 경비 역할로 참석하는 무관)으로 임명된 무장 세 명이 유응부를 포함하여 모두 그들 일파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기회에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端宗)을 복위하려 한다. 연회장에는 세조와 폐위된 단종이 동석하게 되므로 여러 모로 유리하다. 그러나 하늘이 세조의 편이었는지 불행히도 세조는 공간이 좁다는 이유로 별운검을 들이지 말라고 명한다. 이렇게 해서 쿠데타는 불발되었는데, 더 큰 문제는 그 다음이다.
▲ 반역 or 충절 세조의 즉위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건 엄연히 왕실 내부의 일이다. 그럼에도 왕권에 도전한 학자들이 왜 후대에 반역자로 남지 않고 충절의 대명사가 된 걸까? 그 이유는 나중에 조선이 사대부(士大夫) 체제로 형질이 변경되기 때문이다. 사진은 서울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死六臣)묘인데, 이들이 품은 사대부 국가의 꿈은 50년 뒤에 실현된다.
애초부터 조직력이 부족했던 쿠데타 세력은 좋은 기회가 무산되자 급속히 무너진다. 게다가 성삼문은 조급했거나, 아니면 지휘자감이 못 되는 인물이었던 듯하다. 결국 그의 경솔한 행동으로 그들 세력이 세조에게 노출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거사가 시도해 보지도 못하고 실패로 끝난 것은 오히려 기회주의자들에게 노선을 정해준 셈이 된다. 그 중 하나가 정창손의 사위인 김질(金礩, 1422~78)이다. 6월 2일 그는 장인과 함께 세조에게 달려가서 전에 들은 성삼문의 음모를 털어놓는다. 원래 성삼문은 세조의 인맥인 정창손을 끌어들이려는 목적으로 김질을 회유하려 했으나, 무릇 정치 세력의 리더라면 확실히 자기 편으로 만들지 못할 인물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짓은 피했어야 하지 않을까?
세조의 고문을 받은 성삼문은 결국 다른 사람들을 불었고 그들이 줄줄이 엮여 들어오면서 사태는 쉽게 종결된다. 사실 세조로서는 비록 그들이 반역을 꾀했다고는 하나 용서할 여지가 충분했다. 우선 그들의 쿠데타는 불발로 끝났다. 또한 그들은 고문과 추궁을 받으면서도 의연한 기개를 보일 만큼 나름대로 대의명분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세조는 그들과 군신관계에 앞서 젊은 시절부터 친하게 지낸 사이였다(세조는 성삼문, 박팽년, 이개, 신숙주 등 집현전의 소장학자들과 같은 연배다). 그러나 그로서는 무엇보다 갓 잡은 왕권에 대한 도전을 한치도 용납하지 않는 게 중요했을 것이다. 체포된 지 겨우 7일 만에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은 그 때문이다(박팽년은 고문을 받아 옥중에서 죽었고 유성원은 집에서 자결했다)【성삼문이 죽은 뒤 그의 집을 조사해보니 가재도구도 변변한 게 없고 방바닥에는 거적이 깔려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청렴하고 기개 있는 선비였지만, 예나 지금이나 청렴과 기개는 정치적 자질과 무관한 요소인 모양이다. 그는 김질과 이야기하면서 필요 이상으로 자신의 조직과 계획에 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오히려 침착했던 것은 교활한 기회주의자인 김질이다. 그는 성삼문이 평소에 과장된 말투를 자주 구사한다는 것을 알고 짐짓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느냐?”고 물어 다른 사람들의 명단을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성삼문이 세조의 추궁에 끝내 함구하지 못한 이유도 실은 김질에게 이미 다 말해 버렸기 때문이다. 어쨌든 김질은 이후 장인과 함께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면서 영화를 누렸는데, 약삭빠른 자가 출세하는 것은 특히 우리 역사에서 흔히 보는 일이다】.
하지만 세조는 후환의 뿌리를 근절하지 않으면 언제든 그런 일이 재발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뿌리란 말할 것도 없이 단종(端宗)이다. 그래서 세조는 이듬해인 1457년 6월 무늬만의 상왕이었던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시키고 강원도 영월로 유배보낸다. 유배 생활 몇 개월이면 사약이 내려지는 게 관례, 아마 각오하고 있었을 단종의 명을 더욱 짧게 만든 것은 그의 삼촌이었다. 그가 영월로 출발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그러니까 유배지로 가고 있을 무렵, 2년 전부터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이 모반을 준비하다가 발각되는 사태가 일어난다. 결국 그 해 10월 세조는 동생에게 사약을 내리고 조카도 죽여 피비린내 나는 가족사의 한 장을 마감했다.
▲ 소년 왕의 마지막 안식처 단종은 삼촌에게 왕위를 빼앗긴 이후에도 몇 년 동안 궁궐 안에서 상왕의 신분으로 살았다. 말이 상왕이지 그런 가시방석도 없었을 것이다. 1457년 결국 그는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사진에서 보는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로 유배를 떠나게 되는데, 아마 마음만은 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금성대군의 반란이 탄로나자 단종은 서인으로 더 강등되었고 끝내 이곳에서 사약을 받았다.
3차 건국
성삼문은 아마 세조에 대해서보다 그 측근들에 대해 더 큰 분노를 품었던 듯하다. 김질에게도 그는 한명회(韓明澮) 같은 무리를 처단해야 하며 신숙주는 오랜 친구지만 죽어 마땅하다고 토로한 바 있다. 그가 그렇듯 분노한 이유는 명백하다. 불사이군(不事二君), 세조 앞에서도 당당히 밝혔듯이 신하의 몸으로 두 임금을 섬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임금을 기꺼이 섬기는 한명회나 신숙주가 오히려 세조보다 더 미웠을 것이다. 물론 그의 충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여기에는 의문점이 남는다. 어쨌거나 세조는 현직 왕이므로 그의 거사는 반역이요 쿠데타다. 그렇다면 단종(端宗) 복위라는 그의 대의명분은 과연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는 걸까?
사실 조선 건국 이후 세조까지 일곱 임금 가운데 정상적으로, 즉 맏아들에게 순조로이 왕위 승계가 이루어진 경우는 문종과 단종밖에 없다. 나머지는 모두 일종의 변칙적인 승계를 통해 즉위한 왕들이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사육신(死六臣) 세력이 세조의 왕위 승계를 부정하고 나선 이유는 뭘까? 물론 멀쩡한 현직 왕을 폐위하고 즉위한 경우는 세조가 처음이지만, 다른 성씨의 인물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면 또 몰라도 엄연히 왕실 내의 사건이므로 사대부(士大夫)가 관여할 일은 아니다(그랬기에 명나라의 영락제(永樂帝)도 쉽게 권력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렇다면 사육신 사건이 말해주는 것은 한 가지다. 즉 조선의 사대부가 이제 왕권에 간섭하는 문턱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정도전(鄭道傳)을 비롯한 개국공신 세력이 왕권에 의해 박살났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사대부 국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세종 때 왕권과 찰떡궁합을 이루며 착실하게 성장한 결과 사대부 세력은 어느새 다시 건국 당시의 힘을 되찾았다(그런 점에서 단종의 비극은 세종이 씨앗을 뿌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종이 사대부(士大夫) 세력을 확실히 ‘관료’로만 키웠다면 그런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세조는 그들의 도전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지만 앞으로 조선의 임금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사대부들의 눈치를 봐야 할 것이다. 유교왕국의 모순은 이제 상당히 증폭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사육신(死六臣) 세력이 세조의 측근들을 타깃으로 삼은 것은 합당하다 하겠다. 장차 사대부의 진정한 적은 임금이 아니라 견해를 달리 하는 다른 사대부가 될 것이므로.
어쨌든 그건 나중의 일이고 일단 타이틀의 방어에 성공한 세조는 사실상 나라를 새로 건국한 것이나 다름없다(태조와 태종에 이어 벌써 세 번째 건국이다). 『경제육전』과 『속육전』을 확대ㆍ증보해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하기 시작한 것은 그런 자신감에서다. 제목부터가 앞서의 두 문헌보다 훨씬 거창하게 나라를 경영하는 책이니 비정상적으로 집권한 세조로서는 당연히 애착을 보일 수밖에 없다. 그는 최항(崔恒, 1409~74)과 노사신(盧思愼, 1427~98)에게 편찬을 맡기고서도 직접 교정까지 봐가면서 작업을 독려했으나 완간은 그의 사후로 미뤄야 했다. 1470년에 완성된 『경국대전은 이후 수백 년 동안 조선 왕조의 국가 운영 지침서로 기능하다가 18세기의 『속대전(續大典)』, 19세기의 『대전회통(大典會通)』으로 이어지게 된다.
▲ 경국대전 건국 이후 법과 제도가 여러 차례 바뀐 탓에 ‘국법’이 안정되지 못했다. 그러나 세조가 확립한 『경국대전』은 이후 200년 동안이나 수정 없이 적용된다. 그런 점에서 세조는 또 한 명의 ‘건국자’로 볼 수 있다.
1466년에 시행된 직전법(職田法)도 세조의 3차 건국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다. 앞서 보았듯이 태종과 세종 대에 이르러 이미 과전법(科田法)은 붕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근본적인 문제는 과전으로 지급된 토지가 세습되는 데 있다. 원래 명목이야 만들기 나름이므로, 현직 관리가 죽어도 그에게 주어진 과전은 수신전(守信田, 관리의 과부에게 수절을 지키라고 주는 토지), 휼양전(恤養田, 관리의 어린 자식들을 구호하기 위한 토지) 등 각종 명목으로 유가족에게 자연스럽게 세습된다. 게다가 관직이 없는 양반, 즉 산관(散官)에게도 과전이 지급되니 가뜩이나 부족한 토지는 더욱 부족해진다. 그래서 세조는 현직 관리들에게만 과전을 지급한다는 원칙을 다시금 강조하는 데, 그게 바로 직전법이다. 실은 개국 초의 정신으로 되돌아가는 이야기니까 굳이 직전법(職田法)이라는 명칭을 다는 것조차 우습긴 하지만 세조가 또 다른 ‘건국자’가 아니라면 시행하기 어려운 제도다.
그런데 개국 초로 돌아가는 게 토지제도의 모순을 해결하는 데 반드시 유리한 건 아니다. 세조가 나라를 다시 건국했다면 공신들도 새로 생겨난 것은 당연하다. 아닌 게 아니라 계유정난과 사육신(死六臣)의 난을 겪으면서 공신들의 수도 자꾸 늘어간다. 원래 개국 초에 공신에게 주어진 공신전은 세습이 허용되는 데다가 면세의 혜택까지 누린 바 있지 않던가? 따라서 공신의 수가 크게 늘어난 것은 토지 부족 현상을 더욱 부추겼으므로 세조가 직전법을 제정하면서까지 노력한 것과 비교하면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세조 자신도 전혀 예상치 못했겠지만 그런 공신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사대부(士大夫)들의 세력 판도에는 커다란 지각 변동이 일어나게 되며, 이는 이후 조선의 역사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점이다.
세조가 3차 건국의 기분을 유감없이 만끽한 분야는 아마 국가의 이념일 것이다. 지배 이데올로기를 택하는 것은 원래 건국자의 고유 권한이다. 천륜과 인륜을 어기면서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그였으니 유교 이념이 마음에 들 리 없다. 그렇다고 개국 초부터, 아니 멀리는 고려시대부터 차근차근 닦아온 유교왕국의 길에서 완전히 이탈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유교 이념의 색채를 다소나마 탈색시키고 싶은 게 그의 심정이다. 집현전의 문을 닫고 경연을 폐지한 게 그 구도의 서곡이라면, 단군과 기자, 동명왕 등 한반도 고대 건국자들(말하자면 세조의 ‘동업자들’)의 신위를 격상시키고 1457년 정월을 맞아 원구단(圓丘壇)을 설치한 것, 그리고 도교의 제사 의식을 주관하는 소격서(昭格署)를 설립한 것은 주제곡에 해당한다【원구단은 천제(天祭)를 지내기 위한 제천단이다. 원래 고려 성종(成宗) 때 처음 설치된 바 있으나 조선은 스스로 중국의 제후국이라는 지위를 자각한 왕조였으므로 당연히 처음부터 원구단 설치는 인정되지 않았다(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중국 천자만의 특권이다). 물론 세조가 원구단을 쌓고 원구제를 지낸 목적은 중국에 대해 자주성을 주장하려는 게 아니라 과거 정권과의 단절을 표방하려는 데 있었으므로 원구단은 몇 년 동안만 사용되다 곧 용도폐기되었다】.
그 마무리는 불교 중흥이다. 일찍이 왕자 시절에 『석보상절』을 지은 이력도 있을 만큼 개인적으로도 불교에 심취했던 세조였으나, 1461년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해서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계획을 추진한 것은 유교 일변도인 국가 이념에 변화를 주고자 한 의도가 담겨 있음에 틀림없다.
구분 | 과전법(科田法) | 직전법(職田法) |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 |
시기 | 고려 말 공양왕 | 조선 세조 | 조선 성종 |
목적 | 사대부의 경제 기반 마련 | 지급할 토지의 부족 해결 | 국가의 토지 지배권 강화 |
지급대상 | 전직, 현직 관리 | 현직 관리 | 국가의 수조권 대행 |
결과 | 토지 제도의 모순 해소 | 농장 확대의 계기 | 토지 사유화 현상 진전 |
그런 노력 덕분에 세조는 조선의 역대 왕들 가운데 유교 이념의 농도가 가장 옅은 왕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그만큼 강력한 왕권을 지닌 왕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 왕권의 행정적인 표현은 중앙집권과 문치주의의 강화로 나타난다(송 태조 조광윤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모름지기 강력한 전제군주는 그 두 가지를 정국 안정의 주무기로 삼게 마련이다), 그 결과가 바로 지방 군정의 총책임자인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중앙의 문신으로 임명한 것이다.
병마절도사는 수신(帥臣)이나 주장(主將)이라는 별칭에서 보듯이 유사시에는 지역의 군사권을 완전히 장악해서 작전에 임할 수 있는 직책으로서 원래는 중앙에서 임명하는 것이었으나, 세조는 무신 대신 문신을 기용한 점이 다르다. 당연히 지방의 토호 세력은 반발한다. 특히 한반도 북부, 즉 북도(北道)는 여진과 대치하고 있는 지역적 특수성 때문에 전통적으로 현지 출신을 병마절도사로 삼는 게 관례였으니 박탈감이 더 심하다. 1467년 함길도에서 이시애(李施愛)가 중앙에서 병마절도사로 파견한 강효문(康孝文)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킨 원인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러나 세조는 석 달 만에 거뜬히 반란을 진압하고, 오히려 그것을 계기로 물리력에서도 중앙집권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임을 입증한다. 이제 조선은 명실상부한 ‘왕국’으로 컴백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왕국의 시대는 얼마 가지 못한다. 조선은 비록 내내 왕국임을 표방해왔지만, 체질적으로 순수한 왕국이 못 되므로 조선이 왕국일 수 있는 것은 왕다운 왕이 재위할 때뿐이다.
▲ 탈유교 노선 사육신(死六臣)의 홍역을 치렀으니 아마 세조는 유학과 사대부(士大夫)라면 지긋지긋했을 법하다. 그래서 그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원구단을 쌓았다. 중화를 숭배하는 유학이라면 천제란 감히 생각할 수 없다. 사진에 보이는 원구단은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고치면서 새로 지은 것인데(그는 여기서 황제 대관식을 치렀다), 일제에 의해 헐려 지금은 그 자리에 조선호텔이 들어섰고 팔각정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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