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쟁의 정점
비록 용두사미였으나 그래도 북벌 준비로 바빴던 효종(孝宗)에 비해 현종(顯宗)은 그저 15년 동안 왕으로 무위도식하면서 지내다가 죽었다. 조선의 왕명록에 18대 왕으로 이름을 등재한 게 그의 가장 큰 업적이랄까? 그래도 그의 치세에 관해 사대부들은 할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치세 말기에 예송논쟁으로 남인이 집권했기에 『현종실록』은 남인의 관점을 반영했으나, 이후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으로 개찬되는 등 곡절이 있었으니 말이다. 선조(宣祖)에 이어 두번째로 실록이 수정된 경우다. 그러나 이 전통은 다음 왕들에게도 이어져 『숙종실록』 다음에는 『숙종보궐실록(肅宗補闕實錄)』이, 『경종실록』 다음에는 『경종수정실록(景宗修正實錄)』이 새로 편찬된다. 이 시기 당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말해주는 사실이다(실록의 의미도 왕의 치적이 아니라 왕의 치세에 있었던 ‘사대부들의 치적’을 서술하는 것으로 바뀌어 버린 듯하다).
어머니 인선왕후가 죽은 뒤 6개월 만에 현종(顯宗)도 병으로 죽었으나, 다행히도(?) 그는 맏이였기 때문에 이번에는 그 말썽많던 예송논쟁을 피할 수 있었다. 다음 왕인 숙종(肅宗, 1661~1720, 재위 1674~1720)도 현종의 외아들이니까 앞으로 당분간 예송논쟁 같은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싶다. 그러나 현종의 말기에 가까스로 집권한 남인은 아직 승리를 확신할 수 없으므로 논쟁거리가 더 필요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말도 있듯이, 새로 숙종의 치세가 시작된 참에 그들은 권력을 확실히 다지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은 서인의 총수인 송시열(宋時烈)을 타깃으로 삼는다. 그를 무너뜨린다면 다시 서인에게 눌려 지내는 일은 없으리라. 그래서 송시열은 남인으로부터 집중 포화를 당하는데, 심지어 그를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여러 차례 제출되었으니 하마터면 그는 제 명에 죽지 못할 뻔했다【송시열(宋時烈)은 묘한 이력을 지닌 사람이다. 사실 그는 유명세에 걸맞지 않게 만년에 불과 몇 년 동안 정승직을 지낸 것 이외에는 별다른 관직 생활을 하지도 않았다(젊은 시절부터 그는 숱하게 벼슬을 주겠다는 제의를 받았으나 모두 거절했다). 그러나 예송논쟁에서 보았듯이 늘 재야에 있으면서도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언제나 막강했다(학자 - 관료!), 효종(孝宗)의 스승을 지낸 경력이 있다지만 1년뿐이었고,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다지만 학문적 성취도 대단치 않았다. 게다가 골수 성리학자들이 대개 그렇듯이 인품도 고집스러워 적이 많았으며, 편협하고 보수적인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그에게 조정 대신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문제만 생기면 자문하고, 그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으니 희한한 일이다. 그가 과도한 상품 가치를 지닐 수 있었던 것은 당쟁의 열풍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위기에 빠진 그를 구해준 것은 남인의 분열이다. 예송논쟁의 승리를 주도한 허목은 그 참에 그를 제거하려 했으나 남인 중에서 송시열의 위명을 두려워한 자들은 유배보내는 정도로 그치자는 온건론을 편다. 결국 온건파의 주장이 채택되어 송시열은 다 늙은 나이에 생애 처음으로 유배를 떠났지만, 의도적이든 아니든 적진을 분열시킨 것은 장차 그가 화려하게 컴백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그의 처벌을 놓고 강경파는 청남(淸南)으로, 허적(許積, 1610~80)이 이끄는 온건파는 탁남(獨南)으로 갈렸던 것이다(온건파를 ‘탁하다’고 비난한 것을 보면 그 명명은 허목의 작품인 듯하다).
분열 상태에서도 그 뒤 몇 년 동안 남인은 권력의 단맛을 흠뻑 즐겼다. 특히 영의정이 된 허적은 1678년 역사상 최초의 화폐라 할 상평통보(常平通寶)를 만들어 경제 관료의 자질도 선보였다(조선 최초의 화폐는 세종 때의 조선통보朝鮮通寶지만 거의 유통되지 못했으므로 상평통보가 사실상 최초의 법화法貨다. 우연의 일치지만 한반도 최초의 동전을 만든 고려의 왕도 숙종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 권력의 단맛 때문에 어처구니없는 계기로 실각하고 만다.
1680년 봄 허적은 집안의 경사를 맞았다. 그의 할아버지 허잠(許潛)의 시호가 내려진 것이다(허잠은 생몰년도가 전하지 않으나 당시 일흔인 허적의 나이로 보면 이미 오래 전에 죽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렇게 늦게 시호를 받은 것은 아마도 허적이 힘을 쓴 탓이리라). 사대부(士大夫)라고 해서 누구나 그런 영광을 누리는 게 아니니 당연히 잔치가 없을 수 없는 일, 그런데 하필이면 그 날따라 폭우가 쏟아졌다. 그러자 숙종(肅宗)은 늙은 영의정을 배려해서 유악(油幄, 기름 천막)을 그의 집으로 보내게 했는데, 문제는 거기서 터진다. 비가 오는 것을 보고 허적은 왕의 허락을 받기도 전에 유악을 가져다 사용한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궁중 비품을 가져다 쓴 허적의 방자함에 숙종은 분노했다. 그러나 이제 나이 열아홉인 젊은 군주가 무슨 사건을 엮을 수 있을까? 아마도 별것 아닌 일을 하나의 사건으로 키운 것은 서인들의 작업이었을 것이다. 일단 숙종은 남인 계열의 훈련대장을 경질하고 2차 예송으로 유배되어 있던 서인의 보스인 김수항(金壽恒, 1629~89) 을 불러들여 남인에 대한 경고를 보낸다. 하지만 그 정도에 그칠 거라면 서인들은 애초에 일을 벌이지도 않았을 터이다. 며칠 뒤 허적은 자신의 아들 허견(許堅)이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소식들 듣고 고개를 떨군다. 결국 그들 부자와 윤휴 등 남인의 주요 보스들은 모조리 사약을 받았고, 서인은 재집권에 성공했다. 경신년에 국면이 뒤바뀌었다고 해서 이 사건을 이른바 경신환국(庚申換局)이라 부른다.
아무런 음모나 행동도 없이 말만으로 반대파를 간단히 제거하는 말만의 역모는 이제 다시 본 궤도에 올랐다. 사대부(士大夫) 국가의 ‘전통’이 완전히 부활했다고 할까? 그렇다면 그런 식으로 집권한 서인의 권력도 오래 가지 못하리라고 봐야 할 것이다. 과연 서인이 몰락하는 과정은 남인과 닮은꼴이다. 예송에서 승리한 뒤 송시열의 처벌 문제를 놓고 남인이 두 파로 갈렸듯이 재집권에 성공한 서인도 남인의 처벌 문제를 놓고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었다. 하마터면 남인에 의해 죽을 뻔한 송시열(宋時烈)은 당연히 강경파이고, 그의 제자였으나 사적인 원한으로 사이가 벌어진 윤증(尹拯, 1629~1714) ― 그는 아버지가 죽었을 때 송시열에게 묘지명을 부탁했다가 성의 없는 대우를 당하자 사제지간을 끊었다 ― 과 한태동(韓泰東, 1646~87) 등은 온건파다. 양측의 보스들 간에 연배 차이가 한 세대쯤 나기 때문에 노장파는 노론(老論), 소장파는 소론(少論)이라 불리게 된다【대립의 음영이 깊으면 그 그늘을 활동 무대로 삼는 회색분자가 출현하게 마련이다. 조정이 온통 서인과 남인으로 갈려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박쥐처럼 처신한 김석주(金錫冑, 1634~84)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는 2차 예송 때 허적과 결탁해 서인을 숙청하는 데 앞장섰으나, 유악 사건으로 허적이 실각하자 번개처럼 서인으로 변신해서 허견의 역모를 꾸며내 공신으로 책봉된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한 계기도 실은 그가 마련했다. 그가 남인을 모조리 제거해야 한다고 설치는 바람에 서인의 소장파가 반발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처신할 수 있었던 데는 숙종의 배후 지원이 있었으므로 그를 일종의 왕당파라 볼 수도 있겠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가 죽고 나서부터는 숙종이 정치 무대에 직접 나서서 왕권 강화를 도모하게 된다】.
아직 소론은 ‘의미있는 소수’에 불과할 뿐 정권을 담당할 힘은 없다. 그래서 일단 노론이 주도하는 분위기에서 서인은 한동안 잘 나간다. 그러나 송시열은 편안하고 느긋한 여생을 보낼 팔자는 못 되었다. 비록 만년에 유배 생활을 하기는 했으나 평생토록 승자의 길만을 걸으며 과분한 명예와 권력을 누렸던 송시열(宋時烈)은 팔순이 넘은 나이에 뜻하지 않은 복병을 만나게 된다. 그것도 평소에 전혀 적수로 여기지도 않았던 국왕에게 제동이 걸린 것이다.
숙종(肅宗)은 1680년에 첫 아내가 두 딸만 남기고 죽은 뒤 계비인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1701)를 들였지만 후사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바람을 피운 것은 반드시 후사를 낳겠다는 마음보다 아직 이십대의 젊은 혈기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본능이었을 것이다(게다가 왕에게는 얼마든지 ‘외도’의 권리가 있었다), 그가 건드린 여자는 후궁도 아니고 역관(譯官) 집안 출신의 미천한 궁중 나인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왕과 연애한 덕분에 그녀는 숙원(淑媛)을 거쳐 소의(昭儀)로 수직 상승한다. 이윽고 그녀는 1688년에 아들까지 낳아 숙종(肅宗)의 총애를 한몸에 받으면서 희빈(嬉嬪)의 지위에까지 오른다. 정비의 이름조차 실록에 전하지 않으니 그녀의 이름은 알 수 없지만 후대에 장희빈(張嬉嬪)으로 유명세를 떨친 여인이 바로 그녀다.
비록 왕자인 것은 사실이나, 왕비는 물론 정식 후궁의 소생도 아니므로 그 왕자를 세자로 책봉할 수 있느냐는 것은 당연히 논란거리가 된다.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한 집권 서인들은 왕비에게서 소생이 나올지 모르니 세자 책봉을 미루자고 한다. 실제로 인현왕후의 나이는 아직 이십대 초반이니까 충분히 일리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숙종은 장희빈과의 애정도 있거니와 국왕의 고유 권한에까지 사대부(士大夫)들이 일일이 간섭하는 현상에 이제 신물이 난 상태다. 이런 왕의 심기 변화를 야당인 남인들이 그냥 흘려보낼 리 없다. 남치훈(南致雲, 1645~1716)과 이익수(李益壽, 1653~1708) 등 소장파 남인들은 그런 숙종(肅宗)의 마음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결심을 굳힌 숙종은 노론을 대거 숙청하고 송시열과 김수항에게 사약을 내렸는데, 이것이 이른바 기사환국(己巳換局)이다.
국왕의 의지일까, 남인의 책동일까? 어느 쪽이라고 확실히 잘라 말할 수는 없으나 아무튼 전과는 달리 국왕의 의지가 상당히 개입된 사건인 것만은 분명하다. 나아가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위시키고 장희빈을 정비로 삼았는데, 미천한 출신에다 교활한 성품의 새 왕비에 대해 아마 남인들도 적잖이 반발했을 것이라고 본다면, 숙종의 각오가 야무지긴 했던 모양이다. 이 점은 얼마 뒤 그의 마음이 변하면서 다시금 정국이 바뀌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아들만 낳았다고 왕비가 되는 건 아니다. 아무리 신분이 달라져도 역시 출신 성분은 속일 수 없다. 이런 마음이었을까? 숙종은 갈수록 간교함이 심해지는 장희빈에게 점차 싫증을 느낀다. 그럴수록 애틋해지는 게 조강지처다. 이번에도 역시 집게의 마음을 읽고 공생하려는 말미잘이 있다. 야당이 되면서 노론과 소론의 구별이 희미해진 서인들이 힘을 합쳐 인현왕후의 복위를 도모한다. 1694년 이 사건이 발각되어 집권 남인들이 들고 일어났지만 철퇴를 맞은 것은 오히려 그들이다. 숙종(肅宗)은 5년 전과 정확히 반대되는 조치를 내린다. 남인들이 일제히 숙청되었고 서인들이 재집권했으며, 장희빈이 폐위되고 인현왕후가 복위되었다. 이른바 갑술환국(甲戌換局)인데, 벌써 몇 번째 환국인지 셈하기도 골치아플 정도다. 다만 전과 다른 점은 환국이 거듭될 수록 국왕의 개입 정도가 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조선은 다시 왕국으로 부활할 수 있을까?
▲ 중화의 세계지도 둘 다 조선에서 그린 세계지도인데, 위쪽은 15세기 초반의 것이고, 아래쪽은 19세기 초반의 것이다. 400년이라는 시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계의 중심은 중국이고 조선은 두번째로 큰 나라다(15세기에는 없던 유럽이 19세기의 지도에는 아주 작게 그려져 있다). 중화의 세계관은 이렇듯 시대착오적일 뿐 아니라 정신병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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