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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11부 불모의 세기 - 2장 허수아비 왕들, 무의미한 왕위계승(헌종, 김대건, 기해박해)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11부 불모의 세기 - 2장 허수아비 왕들, 무의미한 왕위계승(헌종, 김대건, 기해박해)

건방진방랑자 2021. 6. 21.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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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장 허수아비 왕들

 

 

무의미한 왕위계승

 

 

아무 할 일도 없는 자리지만 순조(純祖)는 그것조차 귀찮았던 모양이다. 1827년에 그는 아직 서른일곱의 젊은 나이였음에도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열여덟 살의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고 일선에서 물러난다. 이후 세자는 3년 동안 대리청정을 하는데, 물론 그에게도 역시 특별히 업무라 할 만한 일은 없다. 그는 스물두 살의 젊은 나이에 죽었으나 그래도 두 가지 업적은 남겼다. 하나는 대리청정 기간 동안 사실상의 국왕이었으므로 죽은 뒤에 익종(翼宗, 1809~30)이라는 왕의 묘호를 받은 일이고, 다른 하나는 안동 김씨 대신 풍양 조씨 가문에서 아내를 취함으로써 이후 세도정치(勢道政治)의 주인이 풍양 조씨로 바뀌게 만든 일이다.

 

어쨌든 당장 난처해진 것은 순조다. 일찌감치 은퇴해서 아름다운 인생을 즐겨보고자 했던 그는 아들이 뜻하지 않게 일찍 죽음으로써 다시 성가신 국왕 자리를 떠맡게 되었다. 서둘러 익종의 아들, 즉 손자를 세손으로 책봉했지만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뗀 세 살짜리 아이에게 왕위를 안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아들의 자리를 물려받으니, 고려 말 충자 항렬의 왕들이 왕위를 장난처럼 주고, 받았던 장면이 연상되지 않을 수 없다. 예나제나 그에게 오로지 믿을 사람은 정신적 지주이자 장인인 김조순(金祖淳) , 그러나 그마저 1832년에 죽자 순조(純祖)는 난감한 심정이다. 2년 뒤에 장인의 뒤를 따른 게 아마도 그에게는 다행이 아니었을까?

 

결국 순조의 세손은 일곱 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어 헌종(憲宗, 1827~49, 재위 1834~49)이 되었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 세 살로 왕위에 올랐더라면 한반도 역사상 최연소 왕이라는 신기록을 세웠겠지만, 4년이 지나 즉위한 탓에 옛날 고구려의 태조왕(太祖王)에 이어 사상 두 번째다(물론 태조왕은 왕계를 믿을 수 없으니까 사실상 헌종이 최연소다). 신화의 시대라면 몰라도 역사시대, 그것도 밝은 문명의 시대에 어린왕이 즉위했다면 적지 않은 문제가 될 것이다. 물론 순조(純祖)의 비인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1857)가 왕대비로 있으니 어린아이에게 국정을 맡기는 일은 없겠지만, 그때까지의 조선 역사를 봐도 이렇게 어린 왕이 들어설 때면 거의 예외없이 왕권을 둘러싼 갈등이 일어나곤 했다(열한 살짜리 왕이었던 단종명종이 모두 그랬다).

 

하지만 헌종(憲宗)은 조선 역사상 가장 어린 임금인데도 이번에는 그런 문제가 전혀 없다. 왜 그럴까? 이제 조선은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룬 안정적인 왕국을 이루었기 때문일까? 물론 그럴 리는 만무하다. 왕위계승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이유는 바로 왕위계승이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세도정치(勢道政治)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조선은 달리 내걸 간판이 없어 왕국이라는 간판을 그냥 유지했을 뿐 사실상 왕국이 아니었다. 그나마 사대부(士大夫) 체제에서는 사대부가 실권을 장악하고 왕이 상징으로 군림하는 비정상적인 왕국의 면모라도 유지했으나, 집권 사대부가 한 가문으로 고착된 세도정치에서는 그럴 필요조차 없어졌다.

 

이제 왕은 상징마저도 아닌 그저 장식물일 뿐이다. 따라서 왕위계승 자체가 무의미해진 판에 어린 왕이든 무능한 왕이든 아무런 차이도 있을 수 없다. 왕위계승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도가문의 계승이다.

 

 

 

 

1841년 순원왕후가 형식적인 수렴청정을 마치고 헌종(憲宗)이 친정을 시작하자 세도가문은 안동 김씨에서 풍양 조씨로 바뀐다. 그 이유는 물론 헌종의 외가가 풍양 조씨이기 때문이다. 하기는, 왕조의 성씨는 바꿀 수 없어도 세도가문의 성씨는 바뀌어야 정상 아닌가? 한 가문이 대대로 왕실 외척이 된다면 유교 예법에도 어긋날 테니까. 비록 왕실 외척이 바뀌면서 세도가문도 교체되었다고는 하지만, 왕보다 더 비중이 큰 권력 주체가 바뀌었으니 여기에도 뭔가 사연이 없을 수 없다. 계기가 된 것은 당쟁 시대가 끝난 이후 첨단(?)의 쟁점으로 등장한 그리스도교다.

 

원래 종교란 박해가 심할수록 더욱 확산되게 마련이지만, 그 점에서 그리스도교는 어느 종교보다도 독한 데가 있다. 출발부터 로마 제국의 격심한 탄압 속에서 꾸준히 세를 키워 마침내 제국의 국교로 공인을 얻어내지 않았던가? 그런 점에서, 조선의 사대부(士大夫) 정권이 신유박해(辛酉迫害)로 그리스도교의 싹을 잘랐다고 안심했다면 그것은 종교사적 무지에서 나온 커다란 오산이다. 오히려 그 소식을 전해들은 베이징 주교는 즉각 로마 교황청에 선교사들을 조선에 파견해 달라고 요구한다. 여기에는 온갖 박해 속에서도 조선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수가 줄기는 커녕 오히려 늘어나는 놀라운 성과를 보인 것이 컸다. 그 덕분에 1831년 조선 교구는 베이징 교구로부터 독립해서 독자적인 교구를 이루었으며, 최초의 서양인 선교사를 맞아들이게 된다. 1835년 조선에 온 파란 눈의 선교사는 프랑스 신부인 모방이었으며, 그 뒤에 계속해서 샤스탕과 앵베르가 파견된다이렇게 조선에 처음으로 온 서양인 선교사들이 모두 프랑스인인 이유는 뭘까? 우선은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가 조선의 선교 사업을 프랑스 교구에 전담시켰기 때문이지만, 여기에는 유럽 내의 사정이 연관되어 있다. 17세기부터 동아시아에 오기 시작한 서양의 선교사들이 대부분 에스파냐와 이탈리아의 예수회 소속 사제들이었던 이유는 유럽 대륙을 휩쓴 종교개혁의 여파로 신교에 위축된 구교가 동방 포교를 탈출구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8세기에 유럽의 패권은 영국과 프랑스가 장악하게 되었고, 두 나라는 이후 한 세기 내내 유럽에서만이 아니라 전세계 식민지에서 서로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거기서 승리한 영국이 인도를 차지하고 중국에 아편 무역을 시작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동방 포교의 사업은 두 나라가 계승해야 했는데, 영국은 독자적인 국교회를 이루고 있었으므로 자연히 로마 교황은 프랑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선 정부의 엄중한 탄압 속에서 몇 년 동안 활동하면서 프랑스 선교사들이 중점을 둔 사업은 포교도 포교지만 그보다도 조선인 사제를 양성하는 일이었다. 외국인, 그것도 파란 눈의 서양인으로서 포교하는 데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방은 1830년에 조선의 젊은이 세 명에게 세례를 주고 마카오로 보내 사제 수업을 쌓게 하는데, 그 중 한 명이 나중에 한반도 최초의 신부가 되는 김대건(金大建, 1822~46)이다.

 

그런데 그들을 호시탐탐 노려보는 눈이 있다. 어차피 수렴청정이 끝나고 헌종(憲宗)이 친정에 나서면 정권을 장악하게 될 풍양 조씨 가문은 미리 분위기도 띄울 겸, 집권 실습도 할 겸 적절한 건수를 찾고 있었다. 없으면 만든다. 풍양 조씨의 보스이자 헌종의 외할아버지인 조만영(趙萬永, 1776~1846)은 안동 김씨를 확실히 제압하고 가문의 명예를 드높일 계기를 만들기 위해 그리스도교 탄압을 결정한다.

 

이것이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인데, 신유박해(辛酉迫害)에 이어 또 다시 별다른 꼬투리가 없는데도 정치적인 이유로 탄압령을 내린 경우다. 이 사건으로 프랑스의 세 신부는 주문모에 이어 새남터에서 처형되었으며, 풍양 조씨는 새로운 권력자로서 통치 능력(?)을 선보였다.

 

그러나 청나라 신부가 죽은 신유박해의 경우와는 달리 이번에는 서양인 선교사들이 피를 본 만큼 사건의 후유증은 만만치 않았다. 원래 선교사를 먼저 보내 종교를 전파한 뒤 경제적 진출을 도모하는 것은 16세기 이래 유럽 열강의 전매특허지만(일부 선교사들은 스스로 본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기도 했다), 19세기 제국주의의 시대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오히려 본말이 전도되어 포교의 문제가 침략의 구실을 만들어 주는 경우가 많았다. 과연, 최초로 서양인 순교자를 낸 기해박해(己亥迫害)도 최초로 서양의 군함이 한반도에 상륙하는 구실이 된다. 18466월 프랑스의 해군 소장 세실이 이끄는 군함 세 척이 조선에 와서 기해박해에 항의하는 공식 서한을 전달하고 간 것은 이제부터 조선이 새로운 사태를 맞게 되리라는 조짐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집권자인 풍양조씨 가문은 여전히 나라 밖 사정에는 관심이 없는 우물 안 개구리이고만 싶다. 그 다음달에 김대건을 체포해 새남터에서 처형한 것은 그들의 그런 초지일관성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네 명의 사제 왼쪽 두 사람은 조선에 처음으로 온 서양인 신부인 모방과 그의 전도로 최초의 조선인 신부가 된 김대건이고, 오른쪽 두 사람은 앵베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다. 서양인 사제 세 사람이 모두 프랑스인이었으므로 이들이 한꺼번에 처형당한 사건은 외교 문제가 될 게 뻔했지만, 국제관계의 경험이 전무한 조선 정부는 그런 점을 전혀 걱정하지 않고 일을 저질렀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무의미한 왕위계승

원범 총각, 한양에 가다

총체적 난국

서학에서 동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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