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성장통
우리 역사상 최초의 정복군주였던 대무신왕(大武神王)은 사실 대외적으로만이 아니라 대내적으로도 신생국 고구려를 크게 업그레이드한 왕이다. 특히 좌보와 우보라는 관직을 신설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한 것은 고구려가 고대국가로서의 위상을 지니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제도였다(좌보와 우보는 고구려 고유의 관직인 대보大輔가 분리된 것인데, 조선시대의 좌의정과 우의정이라고 보면 된다). 왕이 전권을 가지는 것까지는 좋지만 모든 국사를 홀로 처리한다면 그것은 왕이 아니라 부족장일 뿐이다. 게다가 당시 고구려에는 대가(한자로는 ‘大加’라고 쓰지만 당시에 어떻게 발음했을지는 확실치 않다)라는 씨족장들이 권력을 분점하고 있어 중앙집권이 시급한 과제였다. 그러므로 관직이 분화된 것은 초보적인 관료제로의 발돋움이며, 부족국가를 탈피하여 왕국‘ 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 신호탄이었다.
그러나 고구려의 새 국가 체제가 안정을 찾으려면 대무신왕(大武神王)이 좀 더 오래 살아야만 했다. 당시로서는 평균 수명이었지만 그가 기원후 44년에 마흔 살의 한창 나이로 죽은 것은【옛날 사람들의 수명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자의 경우 근대에 이르기까지 40세 정도가 고작이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랬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신생아의 사망률이 워낙 높은 탓에 평균을 계산할 때 그렇다는 이야기고, 일단 ‘고비’를 넘기고 나면 중병에 걸리지 않는 한 오늘날과 비슷한 수명을 누렸을 것으로 추측된다. 의학이 발달하지 못했다는 점이 고대인들의 수명을 갉아먹었다면, 환경오염이 없었다는 점은 오히려 현대인보다 장수하는 데 유리했을 터이다】 아직 신생국의 티를 벗지 못한 고구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신생국의 가장 큰 과제는 무엇보다 권력 승계가 안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대무신왕(大武神王)의 아들은 태자로 책봉되고도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다. 삼촌(대무신왕의 동생)인 민중왕(閔中王, 재위 44~48)이 4년 동안 재위한 뒤 태자는 애초의 예정대로 왕위에 올라 모본왕(慕本王, 재위 48~53)이 되지만 그의 운명은 여전히 순탄하지 않다. 불안정한 권력 기반을 다지려 한 것일까? 그는 아버지가 숙제로 남겨둔 랴오둥 정벌을 강행한다. 거기까지는 좋지만 문제는 그 과정에서 귀족들의 반발을 산 데 있다. 랴오둥의 몇 개 현을 공략하고 태수와 강화를 맺는 등 성과는 다소 있었으나, 결국 재위 5년 만인 53년에 그는 귀족들에게 살해 당한다.
역사에는 모본왕이 폭군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원래 쿠데타로 실각한 왕은 그런 평가로 남는 법이다. 혹시 그는 아버지 대무신왕(大武神王)이 이룩한 중앙집권적 행정 개혁의 희생물이 아니었을까? 대무신왕의 카리스마에 눌려 지냈던 귀족들은 그의 젊은 아들에게 대신 화풀이를 한 게 아니었을까? 진실은 아마도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그들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모본왕이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책봉했으나 그들은 그 대신 그의 일곱 살배기 사촌동생을 왕으로 옹립함으로써 왕통을 비틀어 버린 것이다. 이로써 건국시조인 주몽 이래 직계 혈통으로 순조롭게 승계되어 오던 고구려의 왕위는 처음으로 삐걱거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귀족들의 선택은 좋았다. 일곱 살 소년으로 즉위한 고구려 제6대 태조왕(太祖王, 재위 기원후 53~146)은 이후 93년 동안 재위했고 119세를 살아, 고구려는 물론이고 한반도 역대 왕조의 모든 왕들 가운데 가장 오랜 재위에다 최장수를 기록한 왕이 되기 때문이다(그의 기록을 능가한 왕은 가야의 김수로왕인데, 나중에 보겠지만 그의 경우는 신화이므로 믿을 수 없다)【우리 역사상 모든 왕조의 왕들(왕계가 불확실한 가야와 삼한을 제외하면 고구려 28명, 백제 31명, 신라 56명, 발해 15명, 고려 34명, 조선 27명 모두 합쳐 191명이다) 가운데 태조왕은 재위 기간과 수명에서 단연 으뜸이다. 4세기의 장수왕(長壽王)도 워낙 오래 살아 그런 이름이 붙었지만 78년의 재위에 98세밖에(?) 살지 못했다】. 게다가 태조왕(太祖王)은 오랜 치적에 걸맞는 많은 업적을 쌓아 고구려에게서 마침내 신생국이라는 딱지를 떼어내게 된다.
대무신왕(大武神王)으로부터 시작된 고구려의 팽창 전략은 태조왕에 이르러 마침내 결실을 맺는다. 마치 자신이 장차 오래 살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태조왕은 결코 서둘지 않는다. 어머니의 섭정이 끝나고 성년이 되자 그는 우선 주변에 아직 남아 있는 작은 나라들을 차례로 복속시켜 고구려의 강역을 최대로 확장한다. 당시 고구려의 국경은 서쪽으로 랴오둥 접경 지대, 북쪽으로는 부여가 있던 만주, 동쪽으로는 동해, 남쪽으로는 청천강에 이르렀으니 이미 마이너의 수준이 아니다. 하지만 고구려에게는 태생적인 불안정이 있었다. 여러 나라가 분립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정세 속에서 고구려가 살아남으려면 어떻게든 계속 팽창해야만 했고, 팽창하려면 반드시 고구려의 진로를 가로막고 있는 북의 랴오둥과 남의 낙랑을 손에 넣어야만 했다. 애초에 대무신왕(大武神王)이 남과 북 두 개의 한나라 군을 정복하려 했던 이유도 바로 그런 점을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재위 56년째를 맞은 해(109년)에 이제 자신이 생겼다 싶은 태조왕(太祖王)은 드디어 마음먹고 랴오둥을 공략한다. 하지만 역시 제국은 썩어도 준치였다. 오히려 랴오둥 태수의 강력한 카운터펀치를 맞고 태조왕은 뼈아픈 첫 패배를 당한다. 다행히도 좌절의 시기는 길지 않았다. 태조왕에게는 오래 전부터 그를 그림자처럼 따르며 크고 작은 정복 전쟁을 수행해 온 인물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그 인물이 공식 무대에 데뷔할 때다. 그는 바로 태조왕의 동생인 수성(遂成)이었다.
한 번 꺾었다는 자신감에설까? 랴오둥 태수 채풍은 121년 초에 거꾸로 고구려를 침범해 온다. 그러나 이번에는 숨은 실력자 수성이 전면에 나와 멋지게 수성(守城)에 성공한다. 고구려 대 랴오둥의 대결이 1 대 1 무승부를 이루었다 싶은 순간 수성은 곧바로 역공을 개시한다. 랴오둥군을 본거지까지 추격한 수성은 드디어 채풍을 잡아죽이고 랴오둥 쟁탈전에서 우승한다. 이 사건에 약이 바짝 오른 중국인들은 『후한서』에 ‘고구려 사람들은 성질이 흉악하고 급하며 힘이 세고 전투를 잘하고 노략질을 좋아한다’는 다분히 주관적인 혹평을 기록함으로써 화를 달랬다.
중국인들이 뭐라 하든 이제 고구려는 생존이라는 과제를 확실히 해결했다. 건국 이후 처음으로 고구려는 랴오둥을 제압했다. 더구나 랴오둥은 한나라의 현직 군인 데다 인근의 소국들을 놓고 고구려와 경쟁하던 라이벌이었으니 남쪽의 전직 군인 낙랑을 물리친 것보다 훨씬 가치가 컸다. 이제 고구려는 화려한 정복국가로 우뚝 섰다. 이런 기세로 나아간다면 장차 고구려는 동북아시아 질서의 중심으로 성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있었다. 무릇 국가라면 대외적 성장과 대내적 안정 간의 균형이 필요한 법이다. 시기와 상황에 따라 어느 한쪽에 힘을 결집하는 것은 물론 필요하고도 중요하지만 지나치게 한쪽으로만 드라이브를 걸면 균형을 잃게 된다.
대외적 성공으로 한껏 주가를 높인 수성의 경우가 그랬다. 랴오둥을 정벌한 혁혁한 전공을 바탕으로 그는 형인 태조왕(太祖王)을 능가하는 인기와 권력을 누리면서 내치에도 일일이 간섭하게 된다. 여기에는 아마 칠순을 훨씬 넘은 늙은 형의 말없는 양보가 있었으리라. 그러나 수성은 오랜 2인자의 생활을 겪은 뒤에 맛보는 권력의 달콤함에 취해 있었다. 용맹과 포악은 동전의 양면 같은 걸까?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군인이 정치를 하면 안 된다는 걸까? 전장에서 더없이 용맹했던 수성은 권력자가 되자 곧바로 포악한 심성을 드러냈다.
형은 혈육의 처지였으니 동생이 하는 일을 그냥 봐넘겼겠지만 태조왕의 신하들은 그럴 수 없었다. 수성이 사실상의 왕으로 처신하는 것을 두고 보지 못한 태조왕의 우보 고복장은 이윽고 146년에 태조왕에게 수성을 제거하자는 건의를 한다. 그러나 태조왕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혈육도 혈육이지만 이미 그의 나이는 한 세기를 1년 앞둔 아흔 아홉 살이었다. 그는 그럴 바에야 차라리 아우에게 왕위를 넘기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다. 하긴, 그 아우도 이제 일흔다섯의 노인이었으니. 그러나 백 세 노인은 박수칠 때 떠났다고 자부했을지 모르지만 아직 혈기왕성한(?) 칠순 노인의 생각은 달랐다. 실권이야 원래부터 지녔고 이제는 명함상으로도 왕이 된 수성, 즉 차대왕(次大王, 재위 146~165)은 반대파를 모조리 제거해야만 마음을 놓을 만큼 불안한 심정이었다. 결국 그는 일을 저지른다. 고복장을 죽인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지만 태조왕(太祖王)의 두 아들마저 제거한 것은 도를 넘어선 만행이었다. 아직 대외적인 성공에 비해 대내적으로 왕권이 확실히 안정되지 못한 시기였으니 귀족들이 그 사태를 그냥 넘어갈 리 없다. 결국 165년에 귀족의 리더였던 명림답부(明臨答夫, 67~179)가 차대왕을 살해하고 그의 동생 백고를 왕위에 옹립하니 그가 신대왕(新大王, 재위 165~179)이다. 그 공로로 당시 이미 98세였던 명림답부(明臨答夫)는 오늘날의 국무총리격인 국상에 임명되어 113세까지 권력을 누리면서 쿠데타의 단맛을 흠뻑 즐겼다.
한창 뻗어나야 할 시기에 자꾸 내정 불안에 발목이 잡히는 고구려, 그러나 고구려의 ‘성장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6대 태조왕부터 8대 신대왕까지 고구려의 왕계는 벌써 100년이 넘도록 연속해서 형제에게로 이어지고 있다【형제 상속이 뭐가 문제냐고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고대에는 부자 상속이 훨씬 진보적인 왕위계승 방식이다. 물론 전 왕의 아들보다 동생이 나이도 더 많고 경륜도 풍부할 테니 왕위계승에 더 적임자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왕통이 직계로 이어진다는 것은 곧 그만큼 왕권이 강력하다는 것을 뜻한다. 형제와 같은 방계로 왕통이 이어질 경우에는 우선 계속 왕위를 이어가야 할 형제가 결국에는 없어지고 만다. 게다가 형제를 왕으로 옹립하는 과정에서 귀족들의 간섭과 입김이 작용하게 되므로 그만큼 왕권이 약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사실 이 과정의 연대에는 큰 문제점이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85쪽에서 백제, 신라의 경우와 한데 묶어 살펴보기로 하자).
신대왕은 죽은 형의 아들을 관직에 등용하는 회유책으로 들뜬 분위기를 가라앉히는 한편, 왕위의 부자 상속제를 공포함으로써 왕통을 둘러싼 더 이상의 잡음을 없애려 했지만, 해묵은 난제였던 만큼 권력 승계의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 중국사 속의 고구려 아쉽게도 우리에게 알려진 고구려사는 대부분 중국 역사서에 전해지는 내용이다(나중에 보겠지만 김부식의 『삼국사기』도 중국 문헌에 크게 의존했다). 그림은 『삼국지』 「위지(魏志)ㆍ동이전」에서 고구려를 다루고 있는 부분이다. 오나라, 촉나라와는 달리 위나라는 고구려와 접경해 있었으므로 당연히 고구려에 관심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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