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이 뿌린 악의 씨
역사와 법, 인문학과 과학 등 각 분야의 학문을 발전시키고, 독자적인 한글을 만들고, 북변의 영토까지 개척한 세종의 활약은 그야말로 종횡무진이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 세종은 조선이라는 컴퓨터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는 물론 통신장비(대외 관계)에 이르기까지 두루 갖추어 명실상부한 유교왕국의 모범 답안을 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세종의 개인적 능력과 집현전 학자들의 성실한 노력이 지대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성과를 순전히 주체 역량의 공로로만 돌릴 수는 없다. 무엇보다 세종은 좋은 무대를 만났기에 좋은 공연을 남길 수 있었다. 대내적으로는 개국공신 사대부들이 물러나고 국왕의 직속 사대부들이 성장하는 세대교체기였기에 그는 처음부터 왕권에 대한 위협을 전혀 받지 않을 수 있었으며, 대외적으로는 명나라가 때마침 조선의 태종 대와 같은 몸살을 앓고 있었기에 세종은 중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독자적으로 중요한 사업들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개국 초까지도 조선의 내정에 사사건건 간섭했던 명나라가 왜 그렇게 태도를 바꾼 걸까? 여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
철권통치로써 강력한 황권을 유지했던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1398년에 죽자 그의 손자인 혜제(惠帝)가 제위에 올랐다【명나라 때부터 중국 황실에서는 시호(諡號)보다 연호(年號)로 황제를 칭하는 전통이 생겨났는데, 이에 따르면 주원장(朱元璋)은 홍무제(洪武帝), 혜제는 건문제(建文帝)가 된다. 원래 중국 황제들은 죽은 뒤 신하들이 시호를 붙이는 게 한나라 때부터의 관례였다. 고황제(고조), 무제 등의 이름이 모두 시호다. 그러다가 당나라 때부터는 태종이나 현종처럼 묘호(廟號)를 쓰게 되는데, 그 이유는 시호가 점점 길어졌기 때문이다(예컨대 당 고조의 시호는 ‘神堯大聖大光孝皇帝’였으니 여기서도 중국황실의 거창한 격식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송나라와 원나라 때까지 묘호가 사용되다가 명나라 때 새로 연호가 황제 명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시호나 묘호, 연호는 모두 황제가 죽은 뒤에 공식적으로 붙는 명칭이다】.
그러나 명나라는 아직 건국한 지 얼마 안 되는 신생국인 데다가 주원장의 아들들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판에 겨우 열여섯 살의 어린 황제가 무사할 리 없다. 건국자가 죽은 뒤 나타나는 개국초기증후군이 있을 것을 미리 염려했던 주원장(朱元璋)은 아들들을 모두 변방의 번왕(藩王)으로 임명해서 수도인 난징에서 멀리 보냈으나 넷째 아들 연왕(燕王)은 애초부터 그럴 생각이 없었다. 과연 그는 얼마 안 가서 1402년에 조카의 제위를 찬탈하고 수도를 자신의 근거지인 베이징으로 옮긴다(통일 왕조로서는 최초로 강남에서 일어났던 명나라도 결국은 화북으로 정치적 중심을 옮겼다. 원래 중국은 역사적으로 강남을 경제적 중심으로 하고 화북을 정치적 중심으로 하는 체제를 취했는데, 오늘날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도 중원 문명이 연속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한 증거다).
당시 혜제는 황궁이 함락되면서 불에 타 죽었는데,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탓에 그가 살아 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아 연왕을 내내 괴롭혔다(그래서 1405년부터 시작된 정화의 유명한 남해원정은 혜제를 찾으려는 목적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조카를 죽인 그 비정한 삼촌이 바로 명나라의 3대 황제인 영락제(永樂帝, 재위 1402~24)다. 그랬으니 불과 2년 전에 자신과 비슷한 과정을 거쳐 조선의 왕위에 오른 태종을 영락제가 쉽게 책봉해준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해서 주원장(朱元璋) 시대에 갈등과 알력을 빚었던 명-조선 관계는 언제 그랬더냐는 듯이 금세 안정된다. 조공 문제에 관한 세종의 개선 요구에도 선뜻 응한 것은 바로 이런 우호적인 관계 덕분이다.
세종으로서는 필경 아버지 태종과 영락제(永樂帝)가 서로 닮은꼴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제 왕권이 안정되었고 나라가 기틀을 잡았으니, 두 번 다시 명 황실과 조선 왕실을 얼룩지게 만든 ‘왕자의 난’ 같은 사건은 없으리라고 믿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영락제의 치세가 끝난 다음 명나라는 그의 아들들이 순탄하게 제위를 이어가면서 번영기를 맞는다(비록 명나라의 번영기는 역대 어느 제국보다도 짧았지만), 아마 세종은 조선도 그런 길을 걸으리라고 여겼을 것이다. 즉위 초까지만 해도 그는 태종이 의정부의 권한을 축소하고 육조 직속 체제를 강화한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아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면서 각종 프로젝트의 시동을 걸었지만, 대내외의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그의 마음도 한결 느긋해진다. 6진과 4군을 개척해서 영토까지 크게 확장된 1436년에 다시 의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 체제로 복귀한 것은 그런 여유에서였을까?
그러나 조선이 처음부터 사대부 국가로 출발한 데는 그럴 만한 근거가 있었다. 앞서 보았듯이 유교왕국이란 왕과 관료(사대부)라는 권력의 두 축이 절한 조화를 이루어야만 온전하게 유지될 수 있고, 그 균형이 기울어지면 언제든 내재된 모순이 모습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그런데 원래 저울이 균형을 유지하는 기간은 언제나 잠시일 뿐이다. 따라서 그 미묘한 균형이 마냥 지속되리라고 여겼다면 그것은 세종의 착각이다. 명나라도 역시 사대부의 힘을 황제가 성공적으로 제어하는 한에서만 안정을 누리는 것이라고 보면, 그나마 환관이라는 충실한 도구마저 없는 조선의 왕권이 얼마나 오래 갈지는 미지수였다.
가장 큰 장점은 오히려 단점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황희(黃喜, 1363~1452)를 비롯하여 신개(申槩, 1374~1446), 최윤덕, 하연(河演, 1376~1453) 등 인품과 학덕이 모두 뛰어난 정승들을 거느린 세종은 어진 임금 밑에 어진 신하들이 있는 법이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그가 죽은 뒤에도 의정부 정승들이 그를 받들 듯이 다음 왕을 모셔주리라고 기대할 근거는 없었다. 더욱이 그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키운 집현전 학자들은 이제 단순한 연구자‘ 의 차원을 넘어서 있었다. 비록 세종은 학자와 관료를 구분하기 위해 집현전 학자들을 수십 년씩이나 다른 직책으로 전직시키지 않고 집현전에만 묶어두었으나 유교 이념의 속성상, 그리고 유교왕국의 생리상 학문적 권력이 정치적 권력으로 바뀌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적절한 계기만 주어진다면 말이다.
그 계기는 세종의 아들 문종(文宗, 1414~52, 재위 1450~52)이 제공한다. 물론 너그럽고 온유한 데다가 아버지의 위업을 충실히 계승하려는 것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았던 문종이었으니 그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문제는 병약한 그가 너무 일찍 죽는 바람에 열한 살짜리 어린 외아들인 단종(端宗, 1441~57, 재위 1452~55)이 왕위를 물려받으면서 시작된다. 어린 손주가 당할 비극을 미리 예상했더라면 세종은 결코 그렇게 사대부들의 기를 살려주지 않았겠지만, 실은 알았더라도 그가 별로 손을 쓸 여지는 없다. 그가 태종의 셋째 아들로서 즉위했다는 사실 자체가 조선의 왕권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세종이 뿌린 악의 씨는 개국 초부터 잠복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결국 유교왕국의 모순은 팍스 코레아나로 완전히 제거된 게 아니라 잠시 발현이 지연되고 있었던 셈이다.
▲ 행정가 황희 그려시대에 관직에 진출해 조선이 건국되면서 스스로 은거했으나 그의 뛰어난 행정 능력을 인정한 여러 관료들의 천거로 다시 일선 복구했다. 그는 양녕대군의 세자 폐위에 반대할 만큼 건실한 국가관을 가지고 있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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