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병든 조선
양아치 세상
고려의 묘청(妙淸)과 신돈(辛旽), 조선의 조광조(趙光祖) -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실패한 개혁가라는 사실이다. 세 사람 모두 처음에는 개혁의 필요성을 느낀 국왕에게 중용되었으나 지나치게 개혁을 서둘다가 결국 국왕의 신임을 잃으면서 수구 반대파의 역공에 휘말려 죽음으로 급행료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같은 실패라 해도 고려와 조선의 경우는 서로 다르다. 조광조는 묘청이나 신돈처럼 군사 행동을 일으키거나 실제로 역모를 꾀한 게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당했으니 말하자면 가장 억울한 케이스다.
영리하고 유능한(?) 음모가만 있으면 ‘말만의 역모’로 반대파의 수많은 인물들을 떼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을 정도로 조선의 병은 깊어졌다. 이런 사건을 사화(士禍)라고 부르니까 뭔가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은 용어를 만들어 붙이기도 낯부끄러울 만큼 한심한 현상이다. 그러나 그런 황폐한 시대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중종(中宗)의 시대에 조선은 사대부(士大夫) 국가로 탈바꿈했으나 사대부의 관점에서 보면 아직 완전하지는 않다. 완성품이 되려면 왕권이 더 약해져야 한다. 중종은 비록 사대부의 손에 의해 즉위했지만 38년간이나 오래 재위했고, 더욱이 반정공신들이 몰락하는 바람에 왕위계승이 비정상적이었던 데 비하면 비교적 상당한 왕권을 누렸다. 그러나 그 왕권이 다음 대에까지 지속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사대부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중종은 자신보다 더 유약한 성품의 세자를 남기고 1544년에 병으로 죽는다. 그의 맏아들은 무려 25년간이나 세자로 지내다가 왕위를 이었는데, 그가 조선의 12대 왕인 인종(仁宗, 1515~45, 재위 1544~45)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한 데다가 어질 ‘인(仁)’이라는 묘호에 어울리게 효심이 깊고 인정이 많았던 인종은 좋은 세상을 만났더라면 역사에 남을 현군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는 난세였고 게다가 그는 성품만이 아니라 몸도 약했다. 현량과(賢良科)를 복원시키고 조광조(趙光祖)의 누명을 벗겨줌으로써 인정 많은 군주임을 보여주는 것만을 유일한 치적으로 남기고 인종은 겨우 재위 8개월 만에 병으로 죽는다. 중종이 병으로 자리에 누웠을 때 아버지가 먹을 약을 반드시 먼저 맛볼 만큼 효자였고,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도 어려서 죽은 누이(효혜공주)를 불쌍하게 여기다 얻은 병이라니까, 아무튼 사람됨은 진국이었던 모양이다. 비슷한 시기 유럽에 득시글거렸던 마케아벨리적 군주라도 풀지 못할 조선의 정국이었으니 때이른 휴머니스트 군주가 오래 살았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지만, 그래도 또 다른 사화(士禍)를 막으려면 그가 좀더 재위했어야 했다.
인종(仁宗)이 후사를 남기지 못한 탓에 왕위는 그의 배다른 동생 명종(明宗, 1534~67, 재위 1545~67)이 이어 받았는데, 문제는 그가 겨우 열한 살짜리 소년이라는 점이다. 단종(端宗)과 더불어 그때까지 조선의 군주들 중 최연소인 데다가 시대는 단종의 시절보다 더욱 엄혹하다. 한 가지 그에게 다행스런 점은 단종의 경우처럼 왕위를 노리는 숙부가 없다는 것이지만, 이제 사대부 국가가 된 만큼 왕권 자체도 단종(端宗)의 시대만큼 매력적인 것은 못 된다. 따라서 왕위보다는 왕을 둘러싼 사대부들의 권력다툼이 치열해질 것은 뻔하다.
일단 국왕의 나이가 어리다는 단점은 어머니인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65)의 수렴청정으로 보완된다. 하지만 중요한 시기에 수렴청정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을 수 있다. 비록 상징적 존재이기는 하나 그래도 국왕이 버티고 있으면 사대부(士大夫)들의 무질서한 권력 다툼을 어느 정도는 제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왕의 어머니일 뿐 왕은 아니었던 문정왕후는 진흙탕 싸움을 말리기보다는 진흙탕 한가운데로 뛰어들고자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인종(仁宗)이 세자로 있던 시절에 이미 당시의 권신이었던 김안로(金安老, 1481~1537), 윤임(尹任, 1487~1545)의 무리와 한바탕 힘겨루기를 벌인 바 있었다. 당시에는 세자를 끼고 있던 그들에게 호되게 시달림을 당했지만, 이제는 당당한 국왕의 어머니이자 섭정이니까 칼자루의 임자가 바뀐 셈이다【김안로는 인종이 아끼던 누이 효혜공주의 시아버지이고 윤임은 인종의 외삼촌이다. 인종이 오랫동안 세자 생활을 하는 기간에 이들은 세자의 외척으로서 권력을 누렸는데, 특히 김안로는 자파 인물로 관직을 도배하는 등 권력형 비리를 많이 저질렀다. 그러나 1534년 중종(中宗)의 계비인 문정왕후가 아들(명종)을 낳고 세자를 바꾸려 하자 김안로는 세자를 보위하기 위해 왕후를 폐위시키려 했다가 실각하면서 유배되어 죽었다. 이후 김안로의 인맥은 윤임이 떠맡았는데, 불행히도 인종이 일찍 죽는 바람에 그는 권력 기반을 다지는 기간을 충분히 가지지 못한 상태다. 그래서 조선의 중앙정치는 중종의 첫째 계비 (인종仁宗의 어머니) 세력과 둘째 계비(명종의 어머니) 세력이 석양의 결투를 벌이는 3류 서부극으로 전락했다】.
▲ 왕실의 불교 어린 아들을 들러리로, 동생을 실권자로 내세우고 권좌에 오른 문정왕후는 조선 왕실이 으레 그렇듯이 유학을 멀리했다. 사진은 그녀가 총애한 승려 보우(普雨, 1515~65)가 주지로 있던 봉은사인데, 현재 서울 강남구에 있다. 이렇듯 왕실과 사대부(士大夫) 사이에 이념적 간극이 남아 있었다는 것은 아직 조선이 완전한 사대부 국가가 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권신의 시대는 가고 외척의 시대가 되었다. 인종(仁宗)에게 윤임이라는 외삼촌이 있다면 명종(明宗)에게는 윤원형(尹元衡, ?~1565)이라는 외삼촌이 있다. 둘 다 윤씨이기에 나중에 명종실록을 엮은 사관들은 윤임을 대윤(大尹), 윤원형을 소윤(小尹)이라 부르는 기지를 발휘했지만, 큰 윤이나 작은 윤이나 조카를 국왕으로, 누나를 대비로 둔 것을 믿고 권세를 휘두르던 자들이니 사실 구분할 가치도 없다.
굳이 비교하자면 ‘큰 윤’보다는 ‘작은 윤’이 더 음험하고 흉악한 자였던 듯하다. 윤임은 무관 출신으로 왜구와 싸운 경력도 있는 데다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고자 나름대로 노력했으나, 윤원형은 이미 그 전부터 파벌을 이루어 권력다툼이나 일삼는 ‘양아치’였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쓴맛을 보았던 그였으나 이제 자기 세상이 되었으니 두려울 게 없었다. 문제는 어떻게 윤임 일당을 제거할 구실을 만드느냐는 것인데, 과연 그가 짜낸 꾀는 과연 양아치답게 치졸했다. 바로 자신의 첩인 정난정(鄭蘭貞)을 궁중에 들여보내 누나와 조카를 구워삶는 것이었다.
시나리오 집필자가 윤원형인지, 정난정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아무튼 그 천박한 시나리오가 통할 만큼 조선의 병은 깊었다. 정난정은 문정왕후에게 윤임이 중종(中宗)의 또 다른 아들 봉성군(鳳城君)을 왕위에 올리려 한다고 모함한다. 게다가 ‘모리배 부부’의 시나리오에 따르면 윤임은 ‘전과’도 있었다. 인종(仁宗)이 죽을 무렵 명종(明宗)이 왕위를 이을 것을 우려한 윤임이 자신의 조카인 계림군(桂林君)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래저래 윤임은 죽일 놈이 되어 버린다. 어차피 동생이 어떤 시나리오를 만들든 덥석 받아들일 자세였던 문정왕후에게는 난정의 무고가 오히려 바라던 바다. 그녀는 즉각 대윤의 일당을 잡아들이고 역모의 죄를 뒤집어씌운다. 윤임을 비롯한 수십 명이 처형되고 유배되니, 이것이 을사사화(乙巳士禍)라는 사건이다(졸지에 역적으로 몰린 계림군은 운임이 처형되자 도망쳐서 승려로 변장했으나, 곧 잡혀 능지처참형을 당했다)【조선 중기의 4대 사화(士禍)로 불리는 무오, 갑자, 기묘, 을사년의 사화에서 앞의 두 사화는 연산군(燕山君)이 일으킨 것이지만, 중종(中宗)과 명종(明宗) 때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와 을사사화는 사대부(士大夫)들 간의 세력다툼으로 발생한 사건이다. 다시 말해 전자는 왕권 대 신권이 충돌한 것인 데 반해(물론 여기에도 사대부 세력의 음모가 개재되었지만) 후자는 사대부들이 국왕을 조종해 반대파를 숙청한 결과다. 따라서 앞의 두 사화와는 달리 뒤의 사화들은 음모와 술수가 횡행하는 전형적인 ‘말만의 역모’로 진행되었다. 조선의 사관들은 폭군 연산군을 마음껏 비난했지만, 차라리 연산군(燕山君) 시대의 사화가 사대부 시대의 사화(士禍)보다 더 도덕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은 사대부(士大夫) 국가가 됨으로써 왕국의 시대보다 더 타락했을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존재 가치가 없는 왕조가 되고 말았다】.
잔머리를 굴린 대가로 윤원형은 일약 공신의 지위에 올랐다. 양아치에게 공권력이 주어지면 그걸로 어떤 일을 할까? 우선 패거리를 만들고, 평소에 꼽게 보아둔 다른 양아치들을 없앤 다음 나이트클럽의 영업권을 독점하고, 검은 돈을 불리고, 거들먹거리며 살고자 할 게다. 과연 권력을 장악한 윤원형은 500년 뒤의 ‘조폭’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이 행동한다. 심복들을 거느리고, 평소에 원한을 맺은 자들을 숙청하고, 온갖 인사 청탁과 뇌물을 받아 배를 불리고, 남의 토지를 마음 대로 빼앗고, 조정 대신들을 수족처럼 부린다. 윤원형이 500년 뒤의 후배들보다 한술 더 뜬 게 있다면 노비 출신이자 기생이었던 정난정(鄭蘭貞)을 정경부인(貞卿夫人)으로 올린 것이다. 정경부인이라면 정ㆍ종 1품 관리의 정식 아내에게만 수여하던 여성 최고의 작위였고, 노비 출신은 물론 서얼 출신의 여성이라도 꿈꾸지 못할 지위다. 이제 공신만이 아니라 정경부인도 인플레 시대를 맞은 걸까? 하기는, 윤원형에게는 정난정이 일등공신일 수밖에 없겠지만.
그러나 그래도 그는 만족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자신이 만든 시나리오 내에서 대권 후보로 찍었던 봉성군이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봉성군을 제거하는 데는 시나리오조차 필요가 없었다. 1547년 때마침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 익명의 대자보가 붙었는데, 윤원형에게 그것은 훌륭한 시나리오 대용품이다. 대자보의 내용인즉슨 “위에서는 여왕이, 아래에서는 이기(李芑, 1476~1552)가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망할 것은 뻔하다”는 것, 여기서 여왕이란 물론 문정왕후를 가리키는 말이고, 이기라는 자는 윤원형의 심복 양아치다. 대자보는 조선의 병을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지만 윤원형은 오히려 그것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불충분했다는 증거로 해석한다. 그래서 봉성군을 비롯해서 수십 명의 반대파가 처형되거나 유배를 떠나는 작은 사화(士禍)가 또 벌어졌다. 이 사건을 정미사화(丁未士禍)라고 부르는데, 이제는 사화마저 인플레될 지경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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