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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양아치 세상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종횡무진 한국사 -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양아치 세상

건방진방랑자 2021. 6. 18.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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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장 병든 조선

 

 

양아치 세상

 

 

고려의 묘청(妙淸)신돈(辛旽), 조선의 조광조(趙光祖) -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실패한 개혁가라는 사실이다. 세 사람 모두 처음에는 개혁의 필요성을 느낀 국왕에게 중용되었으나 지나치게 개혁을 서둘다가 결국 국왕의 신임을 잃으면서 수구 반대파의 역공에 휘말려 죽음으로 급행료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같은 실패라 해도 고려와 조선의 경우는 서로 다르다. 조광조는 묘청이나 신돈처럼 군사 행동을 일으키거나 실제로 역모를 꾀한 게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당했으니 말하자면 가장 억울한 케이스다.

 

영리하고 유능한(?) 음모가만 있으면 말만의 역모로 반대파의 수많은 인물들을 떼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을 정도로 조선의 병은 깊어졌다. 이런 사건을 사화(士禍)라고 부르니까 뭔가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은 용어를 만들어 붙이기도 낯부끄러울 만큼 한심한 현상이다. 그러나 그런 황폐한 시대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중종(中宗)의 시대에 조선은 사대부(士大夫) 국가로 탈바꿈했으나 사대부의 관점에서 보면 아직 완전하지는 않다. 완성품이 되려면 왕권이 더 약해져야 한다. 중종은 비록 사대부의 손에 의해 즉위했지만 38년간이나 오래 재위했고, 더욱이 반정공신들이 몰락하는 바람에 왕위계승이 비정상적이었던 데 비하면 비교적 상당한 왕권을 누렸다. 그러나 그 왕권이 다음 대에까지 지속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사대부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중종은 자신보다 더 유약한 성품의 세자를 남기고 1544년에 병으로 죽는다. 그의 맏아들은 무려 25년간이나 세자로 지내다가 왕위를 이었는데, 그가 조선의 12대 왕인 인종(仁宗, 1515~45, 재위 1544~45)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한 데다가 어질 ()’이라는 묘호에 어울리게 효심이 깊고 인정이 많았던 인종은 좋은 세상을 만났더라면 역사에 남을 현군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는 난세였고 게다가 그는 성품만이 아니라 몸도 약했다. 현량과(賢良科)를 복원시키고 조광조(趙光祖)의 누명을 벗겨줌으로써 인정 많은 군주임을 보여주는 것만을 유일한 치적으로 남기고 인종은 겨우 재위 8개월 만에 병으로 죽는다. 중종이 병으로 자리에 누웠을 때 아버지가 먹을 약을 반드시 먼저 맛볼 만큼 효자였고,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도 어려서 죽은 누이(효혜공주)를 불쌍하게 여기다 얻은 병이라니까, 아무튼 사람됨은 진국이었던 모양이다. 비슷한 시기 유럽에 득시글거렸던 마케아벨리적 군주라도 풀지 못할 조선의 정국이었으니 때이른 휴머니스트 군주가 오래 살았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지만, 그래도 또 다른 사화(士禍)를 막으려면 그가 좀더 재위했어야 했다.

 

인종(仁宗)이 후사를 남기지 못한 탓에 왕위는 그의 배다른 동생 명종(明宗, 1534~67, 재위 1545~67)이 이어 받았는데, 문제는 그가 겨우 열한 살짜리 소년이라는 점이다. 단종(端宗)과 더불어 그때까지 조선의 군주들 중 최연소인 데다가 시대는 단종의 시절보다 더욱 엄혹하다. 한 가지 그에게 다행스런 점은 단종의 경우처럼 왕위를 노리는 숙부가 없다는 것이지만, 이제 사대부 국가가 된 만큼 왕권 자체도 단종(端宗)의 시대만큼 매력적인 것은 못 된다. 따라서 왕위보다는 왕을 둘러싼 사대부들의 권력다툼이 치열해질 것은 뻔하다.

 

일단 국왕의 나이가 어리다는 단점은 어머니인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65)의 수렴청정으로 보완된다. 하지만 중요한 시기에 수렴청정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을 수 있다. 비록 상징적 존재이기는 하나 그래도 국왕이 버티고 있으면 사대부(士大夫)들의 무질서한 권력 다툼을 어느 정도는 제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왕의 어머니일 뿐 왕은 아니었던 문정왕후는 진흙탕 싸움을 말리기보다는 진흙탕 한가운데로 뛰어들고자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인종(仁宗)이 세자로 있던 시절에 이미 당시의 권신이었던 김안로(金安老, 1481~1537), 윤임(尹任, 1487~1545)의 무리와 한바탕 힘겨루기를 벌인 바 있었다. 당시에는 세자를 끼고 있던 그들에게 호되게 시달림을 당했지만, 이제는 당당한 국왕의 어머니이자 섭정이니까 칼자루의 임자가 바뀐 셈이다김안로는 인종이 아끼던 누이 효혜공주의 시아버지이고 윤임은 인종의 외삼촌이다. 인종이 오랫동안 세자 생활을 하는 기간에 이들은 세자의 외척으로서 권력을 누렸는데, 특히 김안로는 자파 인물로 관직을 도배하는 등 권력형 비리를 많이 저질렀다. 그러나 1534중종(中宗)의 계비인 문정왕후가 아들(명종)을 낳고 세자를 바꾸려 하자 김안로는 세자를 보위하기 위해 왕후를 폐위시키려 했다가 실각하면서 유배되어 죽었다. 이후 김안로의 인맥은 윤임이 떠맡았는데, 불행히도 인종이 일찍 죽는 바람에 그는 권력 기반을 다지는 기간을 충분히 가지지 못한 상태다. 그래서 조선의 중앙정치는 중종의 첫째 계비 (인종仁宗의 어머니) 세력과 둘째 계비(명종의 어머니) 세력이 석양의 결투를 벌이는 3류 서부극으로 전락했다.

 

 

왕실의 불교 어린 아들을 들러리로, 동생을 실권자로 내세우고 권좌에 오른 문정왕후는 조선 왕실이 으레 그렇듯이 유학을 멀리했다. 사진은 그녀가 총애한 승려 보우(普雨, 1515~65)가 주지로 있던 봉은사인데, 현재 서울 강남구에 있다. 이렇듯 왕실과 사대부(士大夫) 사이에 이념적 간극이 남아 있었다는 것은 아직 조선이 완전한 사대부 국가가 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권신의 시대는 가고 외척의 시대가 되었다. 인종(仁宗)에게 윤임이라는 외삼촌이 있다면 명종(明宗)에게는 윤원형(尹元衡, ?~1565)이라는 외삼촌이 있다. 둘 다 윤씨이기에 나중에 명종실록을 엮은 사관들은 윤임을 대윤(大尹), 윤원형을 소윤(小尹)이라 부르는 기지를 발휘했지만, 큰 윤이나 작은 윤이나 조카를 국왕으로, 누나를 대비로 둔 것을 믿고 권세를 휘두르던 자들이니 사실 구분할 가치도 없다.

 

굳이 비교하자면 큰 윤보다는 작은 윤이 더 음험하고 흉악한 자였던 듯하다. 윤임은 무관 출신으로 왜구와 싸운 경력도 있는 데다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고자 나름대로 노력했으나, 윤원형은 이미 그 전부터 파벌을 이루어 권력다툼이나 일삼는 양아치였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쓴맛을 보았던 그였으나 이제 자기 세상이 되었으니 두려울 게 없었다. 문제는 어떻게 윤임 일당을 제거할 구실을 만드느냐는 것인데, 과연 그가 짜낸 꾀는 과연 양아치답게 치졸했다. 바로 자신의 첩인 정난정(鄭蘭貞)을 궁중에 들여보내 누나와 조카를 구워삶는 것이었다.

 

시나리오 집필자가 윤원형인지, 정난정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아무튼 그 천박한 시나리오가 통할 만큼 조선의 병은 깊었다. 정난정은 문정왕후에게 윤임이 중종(中宗)의 또 다른 아들 봉성군(鳳城君)을 왕위에 올리려 한다고 모함한다. 게다가 모리배 부부의 시나리오에 따르면 윤임은 전과도 있었다. 인종(仁宗)이 죽을 무렵 명종(明宗)이 왕위를 이을 것을 우려한 윤임이 자신의 조카인 계림군(桂林君)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래저래 윤임은 죽일 놈이 되어 버린다. 어차피 동생이 어떤 시나리오를 만들든 덥석 받아들일 자세였던 문정왕후에게는 난정의 무고가 오히려 바라던 바다. 그녀는 즉각 대윤의 일당을 잡아들이고 역모의 죄를 뒤집어씌운다. 윤임을 비롯한 수십 명이 처형되고 유배되니, 이것이 을사사화(乙巳士禍)라는 사건이다(졸지에 역적으로 몰린 계림군은 운임이 처형되자 도망쳐서 승려로 변장했으나, 곧 잡혀 능지처참형을 당했다)조선 중기의 4사화(士禍)로 불리는 무오, 갑자, 기묘, 을사년의 사화에서 앞의 두 사화는 연산군(燕山君)이 일으킨 것이지만, 중종(中宗)과 명종(明宗) 때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와 을사사화는 사대부(士大夫)들 간의 세력다툼으로 발생한 사건이다. 다시 말해 전자는 왕권 대 신권이 충돌한 것인 데 반해(물론 여기에도 사대부 세력의 음모가 개재되었지만) 후자는 사대부들이 국왕을 조종해 반대파를 숙청한 결과다. 따라서 앞의 두 사화와는 달리 뒤의 사화들은 음모와 술수가 횡행하는 전형적인 말만의 역모로 진행되었다. 조선의 사관들은 폭군 연산군을 마음껏 비난했지만, 차라리 연산군(燕山君) 시대의 사화가 사대부 시대의 사화(士禍)보다 더 도덕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은 사대부(士大夫) 국가가 됨으로써 왕국의 시대보다 더 타락했을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존재 가치가 없는 왕조가 되고 말았다.

 

잔머리를 굴린 대가로 윤원형은 일약 공신의 지위에 올랐다. 양아치에게 공권력이 주어지면 그걸로 어떤 일을 할까? 우선 패거리를 만들고, 평소에 꼽게 보아둔 다른 양아치들을 없앤 다음 나이트클럽의 영업권을 독점하고, 검은 돈을 불리고, 거들먹거리며 살고자 할 게다. 과연 권력을 장악한 윤원형은 500년 뒤의 조폭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이 행동한다. 심복들을 거느리고, 평소에 원한을 맺은 자들을 숙청하고, 온갖 인사 청탁과 뇌물을 받아 배를 불리고, 남의 토지를 마음 대로 빼앗고, 조정 대신들을 수족처럼 부린다. 윤원형이 500년 뒤의 후배들보다 한술 더 뜬 게 있다면 노비 출신이자 기생이었던 정난정(鄭蘭貞)을 정경부인(貞卿夫人)으로 올린 것이다. 정경부인이라면 정ㆍ종 1품 관리의 정식 아내에게만 수여하던 여성 최고의 작위였고, 노비 출신은 물론 서얼 출신의 여성이라도 꿈꾸지 못할 지위다. 이제 공신만이 아니라 정경부인도 인플레 시대를 맞은 걸까? 하기는, 윤원형에게는 정난정이 일등공신일 수밖에 없겠지만.

 

그러나 그래도 그는 만족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자신이 만든 시나리오 내에서 대권 후보로 찍었던 봉성군이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봉성군을 제거하는 데는 시나리오조차 필요가 없었다. 1547년 때마침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 익명의 대자보가 붙었는데, 윤원형에게 그것은 훌륭한 시나리오 대용품이다. 대자보의 내용인즉슨 위에서는 여왕이, 아래에서는 이기(李芑, 1476~1552)가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망할 것은 뻔하다는 것, 여기서 여왕이란 물론 문정왕후를 가리키는 말이고, 이기라는 자는 윤원형의 심복 양아치다. 대자보는 조선의 병을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지만 윤원형은 오히려 그것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불충분했다는 증거로 해석한다. 그래서 봉성군을 비롯해서 수십 명의 반대파가 처형되거나 유배를 떠나는 작은 사화(士禍)가 또 벌어졌다. 이 사건을 정미사화(丁未士禍)라고 부르는데, 이제는 사화마저 인플레될 지경이다.

 

 

 

 

윗물이 흐리면

 

 

양재역에 대자보를 붙인 인물이 지적한 대로 차라리 조선이 곧 망했다면 우리 역사 전체로 볼 때 더 좋았을 것이다. 어떤 왕조, 어떤 체제라 해도 그 무렵의 조선보다는 나았을 테니까. 사실 사대부(士大夫) 국가로 바뀐 조선에서 만약 반란이 일어나 당시 세계적 추세에도 어울리는(그 무렵 서유럽 각국에서는 절대왕정이 탄생되고 있었다) 강력한 왕권의 왕국이 들어섰다면, 한반도는 사회 진화의 정상적 궤도로 복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최소한 얼마 뒤에 벌어지게 될 임진왜란(壬辰倭亂)에서 그토록 무력하게 대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자보의 필자가 전망한 것과는 달리 조선은 중앙정치가 높아가는 가운데서도 망하지 않고 명맥을 유지한다. 그렇게 생명이 질긴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한 가지 이유는 대체 세력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여러 차례의 사화(士禍)가 휩쓸고 지나간 결과 황폐해진 조선의 정치 무대에는 수권 능력을 갖춘 정치 집단이 아예 씨가 말라 버렸다. 설사 반란이 필요한 상황이라 해도 반란을 주동할 만한 세력조차 없는 것이다. 환자로 치면 죽으려 해도 죽을 힘조차 없는 처지라 할까? 사실 윤원형이 말도 안 되는 모함으로 쉽게 집권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터무니없는 모략마저 제동을 걸 만한 집단이 없었던 탓이다. 그런 데다가 얼마 남지 않은 인물들마저 윤원형이 싹쓸이해 버렸으니, 이제 조선 카페는 간판을 접고 싼값에 내놓아도 인수할 업자가 없다(을사사화乙巳士禍 이후 5년 동안 윤원형에 의해 제거된 인물은 두 자릿수를 넘었다).

 

둘째 이유는 그 전까지 그런 대로 개혁의 성과가 빛을 봤기 때문이다. 인종(仁宗)조광조(趙光祖)의 명예를 회복시켜준 데서 알 수 있듯이 아무리 썩은 조정이라 해도 개혁의 필요성은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었다. 인종이 되살린 현량과(賢良科)명종(明宗) 때인 1552년 정초(旌招)라는 이름으로 부활한 게 그 증거다. 정초란 학덕 있는 유림에서 유능한 인재를 천거하여 관직에 임용하는 제도였으므로 기본 정신은 현량과와 다를 바 없다.

 

또한 비록 양아치가 권신으로 군림하며 윗물을 흐리게 하고는 있지만, 옛날처럼 훈구파가 권력을 완전히 독점하지 못하는 것도 예전과는 달라진 모습이라 할 것이다. 여기에는 사화(士禍)를 일으킨 공로로 공신이 된 자들이 과거 훈구파만큼의 경륜과 실력을 갖추지 못한 탓도 있지만, 조선의 병이 깊어지는 게 누구의 눈에도 뻔했으므로 아무래도 대세는 사림파를 필요로 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사림의 뜻있는 유생들은 혼탁한 중앙정치를 버리고 낙향해서 전국 각지에 서원(書院)을 세우고 제자들을 길러냈는데, 이들이 장차 조선을 이끌어갈 인재로 성장하게 된다(불행히도 그들의 목표는 언제나 성리학적 사대부(士大夫) 국가로 변함이 없었지만). 사실 조선이 붕괴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전적으로 그들 덕분이다조선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세워진 것도 이 무렵이다. 1543년 풍기 군수였던 골수 성리학자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은 한반도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도입한 고려의 학자 안향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건립하고(아마 송나라의 주희가 세운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에서 카피한 이름일 터이다) 이 지역의 유생들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으로 삼았다. 나중에 풍기 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이 이 서원에 국가가 재정 지원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게 채택되어 1550년에 백운동서원은 명종(明宗)이 직접 현판을 써준 소수서원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그것을 계기로 서원 건립이 전국적으로 번져갔는데, 원래는 사립이었으나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재정 지원에 나서서 사실상 국립화된다(이를 사액서원賜額書院이라 부른다).

 

 

국립이 된 사립 사대부(士大夫)들에게 명종은 적시에 등장해 준 못난 왕이었다. 아직 사대부 권력이 확고하지 않았을 무렵 명종이 왕당파를 육성하고 왕권 강화에 나섰더라면 사대부 국가의 성립은 더욱 늦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은 안향을 모신 소수서원인데, 일개 유학자의 제사를 지내는 사립기관에 국가가 재정을 지원했다는 것은 유학 체제로 한 걸음 다가섰음을 말해준다.

 

 

1555년 왜구가 다시 대규모로 남해안을 침략해왔을 때 그럭저럭 토벌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개혁의 자취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이른바 을묘왜변(乙卯倭變)이라 부르는데, 굳이 의의를 찾자면 이를 계기로 임시 기구인 비변사가 상설화되었다는 것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의 전형이지만, 아무튼 그것으로 조선은 최소한의 군사력이나마 보유하게 되었다. 물론 40년 뒤에 쳐들어오는 거대한 왜구를 상대하는 데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윤원형의 권력 기반은 누나인 문정왕후였으니까 1553년 수렴청정이 끝나고 명종(明宗)이 친정에 나서면서는 양아치 세상도 자연히 끝났어야 했다. 아무리 임금을 조카로 두었다 하더라도 성년이 된 임금이 자신의 고유 업무와 권한을 되찾겠다고 나선다면 윤원형이 그걸 가로막을 명분은 없다. 게다가 명종은 혼탁한 국정을 그대로 놔둬선 안 되겠다는, 나름대로 기특하고 갸륵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가 나선다면 비록 윤원형이 처벌까지는 되지 않는다 해도 예전과 같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계속 유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권세를 연장해 준 것은 바로 명종(明宗)이다.

 

외삼촌에게서 국왕 고유의 업무를 환수할 자신이 없었던 못난 왕 명종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이양(李樑, 1519~63)이라는 자에게 대신 맡긴다. 그것은 좋게 말하면 대립 세력을 키워서 윤원형을 제어하려는 것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명백한 직무 유기다. 잘 되어야 양아치의 이름이나 바꾸게 될 테고 못 되면 양아치가 둘로 늘어나게 될 텐데, 그 결과는 예상할 수 있듯이 후자로 나타난다.

 

사실 이양은 명종의 왕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삼촌이었으니 어떤 결과일지는 보지 않아도 뻔한 것이었다. 자신의 외삼촌을 제거하기 위해 처외삼촌을 기용한 것이니 코미디도 그런 코미디가 없다. 이양은 오히려 처조카인 임금이 준 기회를 이용해 자기 아들을 비롯한 자파 인물들을 요직에 임명하고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등 윤원형보다 한술 더 뜬다. 하지만 그가 사림을 송두리째 제거하려 한 것은 잠자는 호랑이의 코털을 건드린 셈이 되었다. 위기감을 느낀 사림파의 소장학자 심의겸(沈義謙, 1535~87, 인순왕후의 동생이다)이 이양의 심복이었던 기대항(奇大垣, 1519~64)을 꼬드겨 이양의 사림파 말살 작전을 알아내고 임금에게 보고함으로써 이양은 10년 권세를 끝내고 축출된다.

 

 

이쯤 되면 고려 말 무신정권기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다. 비록 이제는 권력 주체가 무신이 아니라 문신이지만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권세를 휘두르는 무질서와 하극상의 시대라는 점은 똑같다. 그렇다면 무신정권기에 민란이 많았듯 사대부 정권기의 조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윗물이 흐리면 아랫물도 흐리다. 중앙정치가 높아가자 지방정치도 문란해진다. 부패한 지방 수령들의 학정을 피해 유민들이 늘어나고 그들 중에는 산으로 들어가 화적이 되는 사람도 많아진다만약 서원이 예전의 향교와 같은 역할을 했다면 부패한 지방관을 탄핵함으로써 중앙정치의 타락이 지방에까지 미치는 것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서원은 성격이 바뀐다. 처음 생길 무렵만 해도 서원은 향교를 대신하는 지방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러나 낙향한 사림파의 유생들이 세운 것인 만큼 점차 서원은 순수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일종의 성리학적 정치 이데올로기 교육장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이제 서원의 주 목적은 지방 정치를 감시하고 개선하는 일보다 장차 중앙정치를 사림 세력으로 바꿀 성리학의 전사들을 길러내는 데 있다. 그 결과 서원은 조선을 사대부 체제로 만드는 데 일등공신이 되지만 수가 늘고 타락하면서 당쟁의 온상이 되어 버린다(공교롭게도 중국 송나라에서도 서원은 당쟁의 진원지가 된 바 있다).

 

한반도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화적 두목인 임꺽정(?1562)이 탄생한 것도 그런 배경에서다. 경기도 양주에서 백정의 아들로 태어난 임꺽정은 평소에 익힌 무예를 밑천으로 도둑질과 강도질을 일삼는다. 소설에서 전하는 바와 같이 그가 과연 실제로 신분해방과 인간평등의 사상을 품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설사 그랬다 해도 사회과학적 인식의 결과라기보다는 아마 무질서와 하극상이 판치는 시대적 분위기에서 비롯되었을 터이다. 세력이 늘어나자 그는 한양이 가까운 양주 지역을 버리고 황해도로 가서 구월산에 근거지를 마련한다. 그가 일반적인(?) 산적이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한 듯하다. 황해도의 지주와 부호들을 공격해서 제 몫을 챙기는 것과 더불어 관청을 습격해서 곳간을 열어 백성들이 가져가도록 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정부의 입장에서 임꺽정은 그렇잖아도 무질서한 사회를 더욱 무질서하게 만드는 도둑놈이다. 그러나 두 양아치(윤원형과 이양)가 권세를 휘두르는 조정에서는 신출귀몰한 그의 행적을 도무지 파악하지 못한다. 하기야, 바깥에 대비하는 비변사 외에는 별다른 정규군마저 없었으니 그의 소재를 알았다 해도 잡지 못했을 것이다흔히 말하는 관군이란 오늘날로 치면 군대가 아니라 경찰력에 불과하다. 당시 조선에는 변방을 지키는 비변사 이외에 특별한 군 조직이 없었다. 그저 포도청을 지키는 포졸들이 관군의 주축이었고 대형 사건이 터졌을 때는 여기에 일반 백성들을 보충해서 진압군을 꾸리는 식이었다. 굳이 조선의 정규군이라면 초기에 설치된 5(五衛)가 있었으나 수도방위대의 기능으로만 국한되었고 전국적인 군 조직이 되지는 못했다.

 

1560년부터 임꺽정은 한양에까지 진출하지만 정부는 성문을 굳게 잠가 사후 약방문이나 할 뿐 여전히 속수무책이다. 그러나 아무리 정부가 무능해 보인다 해도 타도해야만 무너뜨릴 수 있다. 임꺽정이 차라리 조직적인 반란을 획책했다면 모르겠으나 마냥 도둑질과 의적질만 계속할 수는 없다. 결국 그 해에 그의 아내와 참모가 체포되면서 임꺽정의 활동은 위축되기 시작한다.

 

그 뒤에도 임꺽정은 1년 이상을 더 버틴다. 권신 이양은 밥값이라도 하고자 1561년 평안도 관찰사로 가서 임꺽정 일당을 잡았다고 큰 소리쳤으나 알고 보니 가짜 임꺽정이었다(이양이 명종의 신임을 잃은 데는 이 사건도 한몫 했을 것이다). 결국 왜구 토벌에 여러 차례 공을 세웠던 뛰어난 무장 남치근(南致勤, ?~1570)이 황해도에 투입되면서 이듬해 1월 임꺽정을 체포하는 데 성공한다.

 

임꺽정은 보름 뒤에 처형되었지만 정작으로 맑아져야 할 윗물은 여전히 흐리다. 조선의 병은 아직 치료를 담당할 의사조차 없는 형편이다. 그나마 더 악화되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는데 그것도 쉽지 않다. 한번 땅에 떨어진 왕권은 좀처럼 본래 주어진 권한을 회복하지 못한다. 이제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에게 왕은 언제나 무시해 버려도 상관없는 존재다. 그런 상황에서 다시 사대부가 옹립한 왕이 탄생한다.

 

 

 

 

동북아 질서의 근본 구조

 

 

영원히 지속될 줄 알았던 윤원형의 권세는 1565년 문정왕후가 죽으면서 끝난다. 조카 명종(明宗)은 외삼촌이 섭섭하다 할 만큼 곧바로 그의 관직을 삭탈하고 유배령을 내렸으며, 정치적 생명을 끝낸 윤원형은 얼마 안 가 유배지에서 생물학적인 생명도 끝냈다. 두 양아치가 죽자 그제서야 명종은 인재를 모으고 어지러운 정국을 수습해 보려 애썼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이제 와서 새삼 조선을 왕국으로 복원한다는 것도 불가능했지만, 그보다도 2년 뒤인 1567년에 서른셋의 한창 나이로 병에 걸려 파란만장한 삶을 마친 것이다. 권신들도 죽고 왕도 죽으면서 오랜만에 사림파는 다시 권력을 장악했다.

 

우선 그들이 할 일은 당연히 세자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는 것이지만,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는 이미 1563년에 열두 살의 어린 나이로 죽었다. 비록 세자가 죽기 전 결혼은 했지만 열두 살짜리가 아이를 낳을 순 없었으니 이제 명종의 대는 끊긴 것이다. 사대부(士大夫)들은 저절로 입이 함지박처럼 커진다. 왕을 누구로 할지는 전적으로 그들에게 달렸다. 예전 같으면 대비가 강력한 발언권을 행사하겠지만, 명종의 비 인순왕후는 친정이 죄인 집안이니 별로 힘을 쓸 수 없다. 따라서 사대부들은 중종(中宗)의 많은 아들들 가운데서 입맛에 맞는 떡을 고르면 된다. 그들이 선택한 후보는 중종의 손자인 이균(李釣)인데, 그가 바로 조선의 14대 왕인 선조(宣祖, 1552~1609, 재위 1567~1608).

 

선조를 발탁하는 과정에서 사대부들의 계산이 얼마나 세심하고 치밀한지를 엿볼 수 있다. 인종(仁宗)명종(明宗), 봉성군이 죽었어도 아직 중종(中宗)의 아들은 최소한 일곱 명이 남아 있으며, 중종이 죽은 해가 1544년이므로 모두 최소한 스물은 넘긴 나이다. 즉 킹메이커가 선택할 후보는 쌔고쌌다. 예를 들어 금원군(錦原君)처럼 외가가 좋지 않은 후보를 제외해도(그는 골수 훈구파였던 홍경주의 외손자다) 후보는 많이 남아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말을 잘 들을 것 같은 후보를 사대부(士大夫)들이 선택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일단 그들은 그런 인물로 덕흥군 이초(李岧, 1530~59)를 선택했다. 그러나 스물이 넘은 왕자를 국왕으로 옹립하는 것은 자칫 불안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이초의 아들, 그것도 맏이가 아닌 셋째 아들인 열다섯 살의 이균(李均)을 차기 왕으로 옹립한다(물론 절차상으로는 병들어 누운 명종이 다음 왕을 선택하는 식이었지만 사실상 사대부들이 낙점한 것이나 다름없다)덕흥군 자신도 한창 젊은데 아들이 왕위에 오른 경우는 역사상 처음이다. 처음이니까 새 직함이 필요할 터, 그래서 덕흥군은 나중에 죽은 뒤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으로 격상되었다. 이것이 대원군이라는 직함의 시작이다. 이후 조선 역사에서 대원군은 세 명이 더 나오게 되는데, 인조(仁祖)의 아버지 정원대원군, 철종(哲宗)의 아버지 전계대원군,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그들이다(그 중 살아 있을 때 대원군으로 책봉받은 사람은 흥선대원군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죽은 뒤 추존되었다). 짐작할 수 있듯이 대원군이라는 직함은 모두 사대부(士大夫)들에 의한 비정상적인 왕위 승계를 말해준다.

 

이제 사대부들로서는 가장 바람직스런 시대를 맞았다. 국왕을 자기들의 손으로 만들었으니 왕권이 강화될 우려는 없다. 그렇다고 중종(中宗)처럼 반정을 통해 왕이 교체된 게 아니니까 골치아픈 공신 세력도 없다. 바야흐로 그들이 꿈꿔온 성리학적 이념에 입각한 유교 정치를 화려하게 펼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다. 정치 이데올로기로서는 괜찮지만 철학적 수준에서는 보잘것없었던 성리학이 다소 업그레이드된 것도 그런 배경 덕분이다. 바로 이 시기에 이황(李滉, 1501~70)이이(李珥, 1536~84) 등 사림의 태두들이 등장했고, 근사록(近思錄)소학, 삼강행실(三綱行實)등 후대에까지 성리학의 주요 교과서가 되는 서적들이 널리 권장되기 시작했다(조광조趙光祖가 영의정으로 추존되고, 남곤, 윤원형, 이기 등의 관직이 사후 박탈된 것도 이 시기다).

 

 

이렇게 해서 혼탁했던 윗물은 어느 정도 맑아졌다. 그럼 조선의 병은 드디어 임자를 만난 걸까? 천만의 말씀이다. 일단 상처는 봉합되고 치료되었으나 문제는 바깥에 난 상처에 있지 않다. 권력을 잡은 사림파 사대부(士大夫)들은 그동안 조선사회를 얼룩지게 만든 혼란의 근원이 무질서에 있다고 판단했다. 무질서를 극복하려면 말할 것도 없이 질서를 회복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대내적 질서만 뜻하는 게 아니다. 알다시피 조선은 중국의 명나라를 섬기는 입장, 따라서 근본적인 질서를 세우려면 명의 황제를 정점으로 하고, 그 아래에 제후들이 위치하며(여기에는 물론 조선의 국왕이 포함된다), 또 그 아래에 조선의 사대부들이 자리잡는 일사불란한 수직적 서열 구조를 확립해야만 한다. 이런 성리학적 세계관을 가진 자들이 국정을 맡음으로써 이제부터 조선의 병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그 점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른바 종계변무(宗系辨誣)라 불리는 사건이다. 15883월 선조(宣祖)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 잡고 모화관(慕華館,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곳)모화관이라는 이름부터가 중국()을 숭모()한다는 뜻이니 철저하게 사대주의적이다. 게다가 모화관 앞에 있는 영은문(迎恩門)은 중국 황제의 은총을 환영한다는 뜻이니까 모화관과 아주 잘 어울리는 짝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의 지배층은 그저 중국의 사신만 와도 엄청난 은총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것이다. 나중에 보겠지만 19세기 말에 모화관은 폐지되고 영은문이 있던 자리에는 독립문을 세우는데, 천 년이 넘도록 한반도 역사에 결정적 영향을 미쳐 온 사대주의가 그런 제스처로 하루아침에 달라질 수는 없었다으로 나갔다. 중국에서 오는 사신이나 중국에 다녀온 사신을 맞이하는 일은 보통 세자가 담당하지만, 이번 경우는 국왕이 직접 맡아야 할 특별한 사연이 있었다. 명나라에 파견되었던 사신 유홍(兪泓, 1524~94)이 개찬된 대명회전(大明會典)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대명회전이라면 명나라의 법전인데, 그것을 받는 일에 그렇게 호들갑을 떤 이유는 뭘까?

 

때는 조선 건국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성계의 역성 쿠데타에 반대했던 윤이와 이초는 명 황실에 이성계가 고려 말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아들이라고 보고했다. 정치적으로 신진사대부의 대표인 이성계가 권문세족인 이인임의 아들일 리도 없거니와 이인임은 성주 이씨고 이성계는 전주 이씨니까 말도 되지 않는 보고였지만, 중국의 황실에서 한낱 제후국에 불과한 조선 왕실의 가계까지 일일이 확인할 리는 없다(설사 거짓인 줄 알았다 해도 당시 명나라는 조선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으므로 의도적으로 사실을 무시하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명나라의 사관은 주원장(朱元璋)의 치세를 기록한 태조실록에 이성계를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올려 버린다.

 

가뜩이나 신생국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문제로 부심하고 있었던 이성계는 치밀어오르는 화를 꾹 눌러 참으며 때마침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에게 사실을 수정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도 없다. 이때부터 조선의 역대 왕들은 이 역사 교과서 왜곡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차례 주청사를 보낸다. 하지만 명나라는 태조의 유훈이 실린 대명회전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므로 어쩔 수 없다고 둘러대면서 약을 올린다. 심지어 대명회전에 이성계가 고려의 왕 네 명을 죽였다고 기록된 사실까지 알게 되자 조선 정부는 더욱 애가 탔지만 줄기차게 주청사를 보내는 것 이외에 별다른 방책이 없다.

 

 

그런데 그 문제가 무려 200년 만인 선조(宣祖) 대에 해결되었다. 1584대명회전의 개찬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마침내 이성계의 가계가 바로잡힌 것이다. 책이 완성되자 선조는 즉각 유홍을 보내 대명회전을 가져오라고 명했고, 드디어 그가 돌아오는 날 참지 못하고 모화관으로 달려나갔다. 두 달 뒤인 15885월 선조는 종묘에 나가 뿌듯한 마음으로 조상들에게 수정된 책을 바치며 제사를 올렸다. 그러나 하필이면 선조의 치세에 200년 묵은 숙제가 풀렸다는 사실이 말해주는 것은 뭘까? 성리학의 이데올로기가 가장 화려하게 꽃피웠던 선조의 시대였기에, 그리고 그런 조선의 변화를 중국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당시 선조는 벅찬 감격에 못 이겨 이렇게 말했다. “수백 년 마음 아팠던 응어리가 깨끗이 씻겨, 조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가 없다가 아버지가 있게 되었고, 임금이 없다가 임금이 있게 함으로써, 우리나라 수천 리가 비로소 사람 사는 세상이 되었고 인륜을 되찾았다. 명나라에서 태조 이성계의 혈통을 바로잡아줌으로써 비로소 나라다운 나라, 임금다운 임금이 되었다는 이야기니까 사대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는 발언이다. 하긴 원래 인연에 없던 왕위를 차지한 선조로서는 마치 중국에서 자신에게 정통성을 부여해준 듯한 기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같은 시대 명나라 황제인 신종(神宗, 재위 1572~1620)의 이름자를 피하기 위해 균()이라는 이름을 연()으로 바꿀 정도로(신종의 이름은 익균이다) 사대주의에 충실한 국왕이었다?

 

사실 선조(宣祖)가 종계변무(宗系辨誣)에 특히 신경을 쓴 데는 정상적인 세습을 통해 왕위를 물려받지 못한 탓이 컸다. 사대부(士大夫)들이 임의로 선택한 임금이었기에 선조는 즉위하고 나서도 한동안 조선 국왕이 아닌 권지국사라는 명함을 가지고 있어야 했던 것이다(그 점은 반정을 통해 즉위한 중종中宗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설움을 겪었으니 대명회전을 받고 그가 그토록 감격한 것도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종계변무(宗系辨誣)에 사활을 건 것은 국왕만이 아니라 사대부들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의 실질적 집권자인 사대부들은 동북아 전체가 중국의 천자를 정점으로 하는 동심원적이고 수직적인 질서를 갖추어야만 성리학적 이념에 입각한 완전한 질서가 확립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무엇보다 명나라와 올바른 사대 관계를 맺는 것을 중시했으며,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해묵은 종계변무 문제를 해결하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꿈꾼 동북아의 성리학적 질서는 완전히 시대착오적인 것이었다. 무엇보다 중화세계, 즉 명나라와 조선을 제외한 동북아 나머지 지역에서는 그런 질서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중화세계 내에서도 사대부(士大夫)들은 안정된 질서를 구축하지 못했다. 앞의 문제는 동북아 전체를 휩쓰는 전란의 회오리로 이어지게 되며, 뒤의 문제는 명나라와 조선에서 당쟁이라는 백해무익한 내분을 낳게 된다. 더욱이 이 두 가지 분쟁이 겹치면서 조선사회는 최악의 상태로 빠져든다.

 

 

독립문과 모화관 중종(中宗)에 이어 선조는 두 번째로 사대부(士大夫)들의 낙점을 받아 즉위한 왕이었으니 자신의 대에 왕실의 숙제였던 종계변무(宗系辨誣) 문제가 해결된 것에 더더욱 기뻐했을 법하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국왕이 고작 책 한 권을 받기 위해 모화관으로 뛰어나간 꼴은 어떨까? 사진의 한가운데 있는 건물이 모화관인데, 그 뒤에는 정반대의 의미를 지니는 독립문이 서 있으니 묘한 불일치다.

 

 

사대부들의 집안 싸움

 

 

국왕마저 선택할 만큼 권력을 확고히 장악했고, 숙적인 훈구파와 외척도 사라진 데다가, 이념도 성리학으로 완전 통일되었다. 그렇다면 사대부(士大夫)들 간의 권력다툼은 더 이상 없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이제부터 사이좋게 권력을 분담하고 조선을 지배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실제의 역사는 전혀 그렇지 않다. 다툴 이유가 모두 사라졌는데도 사대부들은 오히려 전보다 더욱 큰 규모로, 더욱 심하게 다투기 시작한다. 외부의 적이 없어졌는데도 그들은 자기들끼리 파당을 만들어 싸운다. 이것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당쟁이고, 세련된 용어로 포장하면 붕당정치(朋黨政治).

 

차라리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무장 조직을 동원해서 내전을 벌이는 거라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니다. 차라리 왕권을 빼앗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는 거라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것도 아니다. 사대부들은 주먹다짐 같은 것도 없이 입만 가지고 싸우며, 왕이 되려는 게 아니라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놓고 막후 실력자가 되기 위해 싸운다. 전 시대와 같은 양아치 정치가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보다도 더 치사하고 시시하다. 세계 어느 나라의 역사를 봐도 내전과 반란은 흔하지만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처럼 시시콜콜하게 말꼬리나 잡으며 박터지게 싸운 경우는 없다.

 

사대부들은 일찍이 예종(睿宗) 때 남이의 사건을 시작으로 해서 여러 차례의 사화(士禍)를 거치며 말만으로 반대파를 제거하는 화려한 말솜씨를 갈고 닦아왔다. 이 탁월한 재능을 유감없이 선보인 무대가 바로 당쟁이다. 그렇다면 처음에 당쟁이 시작되는 과정에서부터 치졸한 말싸움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권신 이양을 축출하는 데 공이 컸던 심의겸은 인순왕후의 동생이라는 신분상의 한계(사림의 세상에서는 왕실 외척이라는 게 오히려 단점이다)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공정하게 일을 처리했으므로 사대부들 간에 명망이 높았고 선ㆍ후배들과의 관계도 좋았다. 승지와 대사간, 이조참의 등 순탄하게 관직 생활을 하면서 그는 촉망받는 소장 관료이자 미래의 정승감으로 꼽힌다. 그러나 그런 그의 심기를 뒤틀어놓는 일이 일어났다. 1572년 느닷없이 김효원(金孝元, 1532~90)이라는 자가 이조전랑(吏曹銓郞)으로 추천을 받은 것이다. 이조는 문관 최고의 부서이고 전랑은 인사권을 담당하는 관직이니까 출세가 보장된 직책이다. 따라서 소장 관료라면 누구나 탐내지 않을 수 없는 자리다. 일찍이 심의겸은 윤원형이 권세를 휘두르던 시절에 그의 집에 갔다가 김효원의 침구가 있는 것을 보고 공부깨나 한 자가 권력에 아부한다며 멸시한 적이 있었으니 김효원에 대해 감정이 좋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그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김효원은 전랑 자리를 꿰어차고 만다. 피차 간에 원한을 품을 만한 사연이 발생했다.

 

3년 뒤인 1575년 이번에는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沈忠謙, 1545~94)이 이조전랑에 추천되자 김효원이 딴지를 걸고 나선다. “척족(戚族, 외척)에게 어떻게 전랑 자리를 맡길 수 있느냐?”는 게 그 근거다. 김효원의 책동으로 동생이 이조전랑을 따내지 못하자 심의겸은 입이 잔뜩 부르튼다. 이제 두 사람은 단순한 라이벌이 아니라 아예 원수지간이 된다. 그러나 분쟁은 두 사람만의 대립에 그치지 않는다. 일찍이 심의겸의 도움을 받아 관직에 오른 자들은 서대문 부근의 정동에 있는 그의 집으로 모였고, 그에게 반대하는 신진 사대부들은 도성 동쪽의 낙산(지금의 종로구, 동대문구, 서대문구에 걸쳐 있는 산)에 있는 김효원의 집으로 모였다. 그들을 각각 서인(西人)과 동인(東人)으로 부르게 되면서 당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당쟁이라는 거친 용어 대신 붕당정치로 표현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흔히 사대부들 간의 파벌싸움이 학문적 견해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건 치졸한 권력다툼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용어일 뿐이므로 오히려 그 의도가 수상스럽다(당쟁이 시작되는 과정 어디에서도 철학적인 입장 차이 같은 건 볼 수 없다). 굳이 말하자면 학맥이라 할 만한 건 있다. 당쟁을 주도한 사대부(士大夫)들은 대개 이황조식(曺植, 1501~72)의 제자였기 때문이다(심의겸과 김효원은 둘 다 이황의 제자다). 관직 생활을 했던 이황과 달리 조식은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오로지 제자들만 길러냈다는 점이 특이하지만, 이는 조선 특유의 학자 - 관료 지배 체제를 반영하는 것이므로 실은 이상할 게 없다. 이황과 조식은 모두 당대에 큰 존경을 받은 인물들이지만, 결국 제자들이 당쟁을 일삼았으니 자신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당쟁의 배후 조종자였다고 할 수 있다.

 

양측의 대립이 격화되자 자연히 중개에 나서서 화해와 사태 수습을 도맡은 인물들도 생겨나게 된다. 이이노수신(盧守愼, 1515~90) 같은 사람들이 그들이다. 이이는 서인의 계열이긴 하지만 아홉 차례나 과거에 장원을 했던 당대의 천재였으니 영향력이 크고, 노수신은 을사사화(乙巳士禍)와 양재역 대자보 사건으로 사화(士禍)의 피해를 당한 경험이 있었으니 서인과 동인의 정치적 반목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들의 노력으로 심의겸이 한동안 한양을 떠나 지방관으로 근무하면서 당쟁은 냉각기를 갖게 된다. 아울러 말썽많은 이조전랑 자리의 추천제가 폐지된 것도 당쟁의 불씨를 억누르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한양으로 돌아온 심의겸이 1584년에 이이가 죽은 뒤 동인의 조직적인 반격을 받아 파직당하면서 당쟁의 열기는 더 후끈 달아오른다.

 

이제는 탐색전도 없이 본격적인 격투다. 서인과 동인은 무리의 주도자들과 무관하게 독자적인 당파를 이루었고 당쟁 역시 독자적인 생명력을 얻은 것이다.

 

 

동과 서의 글씨 위쪽은 서인의 시작인 심의겸의 글씨고, 아래쪽은 동인의 원조인 김효원의 글씨다. 서로 바뀌었다고 해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비슷한 글씨체인데, 실제로 당시 사대부(士大夫)들은 글씨만이 아니라 학문과 사상, 정치 이념에서도 거의 차이가 없었다. 따라서 그들이 당쟁을 시작한 것은 흔히 잘못 알려져 있는 것처럼 철학이나 세계관의 차이 때문이 아니다.

 

 

당쟁의 사상적 뿌리

 

 

심의겸과 김효원의 인물됨을 비난할 필요는 없다. 치졸한 당쟁을 시작했다고 해서 그들이 치졸한 인물이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심의겸은 내내 검소하게 생활했고, 특별히 권세를 부리지도 않았으며, 공명정대하게 모든 일을 처리하고자 했다. 또한 김효원 역시 나중에는 당쟁의 발생이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을 느끼고 스스로 자중하여 지방관으로 일하다 죽었다. 따라서 당쟁의 책임을 그들 개인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당쟁은 왜 일어났을까? 그것은 사실 조선이 사대부(士大夫) 국가로 접어든 데 따르는 필연적인 현상이다(같은 시기 명나라에서도 역시 사대부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당쟁이 격화되었다는 사실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중종(中宗) 대에 이르러 국왕은 실권이 없는 상징적인 존재로 전락했고, 명종(明宗)선조(宣祖) 대를 거치면서 그 상징성마저도 더욱 격하되었다. 권력의 중추가 사라졌으니 사실상 왕국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이 공화국인 건 더더욱 아니며, 실권 사대부들은 왕국이라는 정체(政體)를 부인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지배 집단 간에 권력 독점을 위한 경쟁이 일어날 것은 불가피한 현상이다. 그게 하필이면 당쟁이라는 치졸한 형태를 취한 이유는 성리학이라는 황폐한 지배 이념을 바탕에 깔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이 왕국인 이상 국왕은 형식상으로 절대권력자이며, 따라서 사대부들이 입안하고 집행하는 모든 명령은 왕명의 형식을 취해야 한다(속된 말로 모든 일에 왕의 이름을 팔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모든 국정을 사대부(士大夫)들이 처리한다는 점에서 보면 국왕은 사대부들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이렇듯 국왕이 상징적 절대자이자 꼭두각시라는 이중적 지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대부들은 자기들끼리의 권력다툼에서 무엇보다 명분’(더 고상한 표현을 쓴다면 상징조작이라고 할까?)을 최우선으로 삼을 수밖에 없게 된다. 여기에 생리적으로 명분을 중시하는 성리학적 정치 이념이 더해지면서 조선의 사대부 정치는 거의 명분 다툼으로만 전개된다. 말만의 역모와 허울만의 반역자가 양산되고 각종 사화(士禍)와 옥사가 빚어지는 조선 특유의 정치문화는 바로 그런 권력구조의 메커니즘과 성리학의 이념이 결합되어 생겨난 결과다. 그런데 명분의 정당성이란 원래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게 아니므로 사대부들은 자신의 명분이 다수 의견으로 채택되도록 하기 위해 자파의 세력을 늘리는 데 부심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당쟁이다. 결국 당쟁은 조선의 정치 역학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선조(宣祖) 때 정치적인 당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이미 명종(明宗) 때부터 사상적인 당쟁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제법 철학적인 양상을 띠며 진행되었는데, 대표적인 게 이황과 기대승(奇大升, 1527~72)이 벌인 사단칠정(四端七情)에 관한 논쟁이다. 사단이란 인(), (), (), ()로 대표되는 유교적 인간 본성의 네 가지 단서, 즉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를 뜻하며, 칠정이란 인간 본성이 사물을 접했을 때 나타나는 일곱 가지 감정, 즉 희(), (), (), (), (), (), ()을 뜻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바꾼다면 사단은 주로 이성적 측면이고 칠정은 감정적 측면인 데, 중요한 것은 양자가 어떤 관계를 가지느냐는 문제다.

 

이에 관해 이황은 처음에 사단은 이()의 발현이고 칠정은 기()의 발현이라고 도식화했다()와 기()의 관계도 독자적인 쟁점이 되지만, 쉽게 봐서 이는 형이상학적인 본질이고 기는 형이하학적인 현상이라고 이해해도 되겠다. 이가 원리이고 존재라면, 기는 그 원리의 양태이며 그 존재의 생성이다. 이가 없으면 당연히 기가 발현될 수 없지만 이는 또한 기의 발현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내게 되므로 양자는 상호의존적이다. 이렇듯 인간과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가 둘이므로 둘 중 어느 쪽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학자들 간에 의견이 대립하는 것은 당연한데, 이를 강조하면 주리론(主理論)이 되고 기를 강조하면 주기론(主氣論)이 된다(흔히 동양 철학은 일원론이라고 보기 쉬운데, 실은 이원론적 경향이 강하다). 서양 철학에 비유하자면 전자는 플라톤 철학에 가깝고 후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가깝다고 하겠다. 그러나 후배인 기대승은 사단과 칠정을 그렇듯 확연히 분리하는 게 옳으냐고 공박한다(인간에게서 이성과 감정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것을 연상하면 쉽다). 그러자 이황은 사단과 칠정, 이와 기를 온통 뒤섞어 놓으면서 모호한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기대승은 그런 결론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이황에게 명확한 개념 정립을 요구하면서 사단과 칠정은 둘 다 기에서 발현된다는 자신의 입장을 피력한다. 그가 죽자 이번에는 이이가 대타로 나선다. 이황의 중심이 실은 기보다 이에 있음을 간파한 이이는 이가 아니라 기를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기론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면서 사단을 칠정에 포함시킨다. 여기에 대해서 다시 이황의 제자인 성혼(成渾, 1535~98)이 나서 주리론적 입장에서 사단을 이에, 칠정을 기에 귀속시키며 이이와 2차 논쟁을 전개한다.

 

언뜻 복잡해 보이지만 간단히 생각하면 인간의 이성과 감정이 어디에서 비롯되며, 이와 기의 배분을 어느 정도로 할 것이냐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이다. 양측의 논쟁은 치열했으나 그래도 철학 논쟁답게 서신을 매개체로 할 만큼 점잖았으며, 서로 상대방을 헐뜯는 식으로 전개되지는 않았다. 철학 논쟁치고는 쟁점이 지나치게 소박하고 조악해진 이유는, 성리학이 그 생리상 심성론과 연관된 철학으로서 출발한 게 아니라 유교 이념에 입각한 사회ㆍ정치 질서를 구축한다는 정치 이데올로기로서 출발했던 탓에 추후에 철학적 옷을 입혀 체계화하는 과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주희성리학을 창시한 본래 목적은 금나라 오랑캐의 지배를 받게 된 중국의 상황을 이데올로기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단칠정에 관한 논쟁은 이후 18세기까지도 무릇 학자라면 누구나 한마디씩 거드는 주제가 되는데, 이 과정을 거치며 성리학은 어느 정도 철학적 체계화를 이루지만 정치 이데올로기의 본바탕은 사라지지 않는다(현대의 동양 철학이 철학적으로 서양 철학에 비해 크게 뒤진 이유는 그런 태생적 한계 때문이다).

 

사상적 당쟁이 정치적 당쟁으로 이어지는 접점에 해당하는 인물은 이이와 성혼이다. 비록 학문적 견해는 달랐어도 두 사람은 이황으로 대표되는 영남학파(지방색을 떼어 버리려면 이황의 호를 딴 퇴계학파退溪學派라고 불러도 된다)에 맞서 기호학파(畿湖學派), 즉 경기와 호서(충청도) 출신 인물들을 중심으로 하는 학파를 구성했다. 어디까지나 학파였던 만큼 정치적 당파는 아니었으나 이렇게 학문의 영역에서조차 무리를 이루어 대립하는 양태는 당쟁의 시대가 본 궤도에 올랐음을 말해주는 사실이다원래 학문의 발전이란 주로 학자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는 게 보통이다(학문을 문화의 한 부문으로 포함시키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물론 기존의 학문으로부터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주목할 만한 학문적 성과는 학자 개인의 관심과 연구를 통해 나오게 마련이다. 그런데 조선의 경우 집단적인 학파가 형성된 이유는 유학의 근저에 놓인 정치 이데올로기적 속성 때문이다(그래서 사대부를 학자-관료라고 부른 바 있다). 앞서 말했듯이 조선의 학술 문헌들이 대부분 집단 창작물인 것도 개인의 연구 작업이 중시되지 않은 데서 나온 전통이다. 개인 연구든 집단 창작이든 장단점이 있겠지만 그런 전통 때문에 오늘날에도 학맥이 판치고 있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사상적 당쟁과 정치적 당쟁이 함께 어우러지면 뭔가 사건이 터져나올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1589년 드디어 서인과 동인은 한 차례 크게 맞부딪쳐 이른바 기축옥사(己丑獄事)라는 대형 사건을 일으킨다.

 

학문적으로는 라이벌이지만 학파로는 동지였던 이이와 성혼은 정파로도 서인에 속하는 동지다. 그런데 그들 두 사람의 주목과 관심 속에서 성장하던 정여립(鄭汝立, 1546~89)이라는 제자가 묘한 행적을 보인다. 스승인 이이를 배반하고 동인 편으로 붙는가 싶더니 이이가 죽자 서인의 단독 거두가 된 성혼을 거세게 비판한 것이다(그가 이이를 배신한 것은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이이가 반대한 탓이었으니, 이래저래 이조전랑은 골치아픈 자리다). 그러나 당시는 서인이 득세하고 있었으므로 정여립은 곧 서인들에게 밀려 중앙 관직을 얻지 못하고 고향인 전주로 낙향한다. 물론 서인의 촉망 받는 신인이었다가 편을 바꾸었으니 동인들에겐 혜성같이 나타난 슈퍼스타다. 스타가 된 덕분에 고향에서 관직도 없이 지내는 그에게 동인에 속한 지방관들이 줄줄이 꼬여든다.

 

자신의 신세를 처량히 여기던 정여립이 그것을 반전의 기회로 여긴 것은 당연하다. 그는 주변 인물들로 대동계(大同契)라는 일종의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매달 한 차례씩 활쏘기 대회를 여는 등 지역의 유지라는 신분을 넘어선 정치활동을 활발히 전개한다. 게다가 승려와 규합해서 전주에서 장차 왕이 탄생할 것이라는 등, 목자(木子)가 망하고 전읍(奠邑)이 흥할 것이라는 둥 터무니없는 소문들을 민간에 퍼뜨린다(‘木子이고 奠邑이란 이니 —— 과 같다 —— 말할 것도 없이 이씨가 망하고 정씨인 자신이 왕위에 오르리라는 이야기다). 심지어 그들이 기축년(1589) 말에 한양에까지 진격할 것이며, 구체적인 책임 부서까지 정해놓았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이와 관련해서 조선 초기부터 나돌던 정감록(鄭鑑錄)이라는 책이 있다. 정도전이 지었다는 설이 있는 이 책은, 도참설과 풍수지리 등 민간 신앙을 바탕으로 깔고 은유와 파자(破字)를 많이 써가면서 장차 정씨 성을 지닌 진인(眞人)이 나타나 이씨 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상을 구하리라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 때문에 정여립의 사건을 비롯해서 이후에 일어난 민란들 중 상당수가 정감록과 정신적인 연관을 가지게 된다(물론 모두 이씨 조선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던 탓인데, 이를 바꿔 말하면 사대부(士大夫) 국가가 아닌 진정한 왕국을 꿈꾸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소문을 들은 서인이 가만 있을 리 없고, 이성을 가진 선조(宣祖)가 그냥 놔둘 리 없다. 서인 세력과 선조는 즉각 동인과 정여립 일당에 대해 일망타진에 나선다. 한양에서 선전관(宣傳官, 왕명을 집행하는 무관)과 의금부(義禁府, 반역ㆍ모반 같은 중죄를 담당한 수사기관) 도사가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정여립은 그간의 기세에 어울리지 않게 금세 꼬리를 내리고 자살했으나, 파장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동인이 여당이었던 시절에 동인의 탄핵을 받아 죽어지낼 동안 관동별곡(關東別曲)사미인곡(思美人曲)같은 노래나 지으며 신세를 한탄했던 정철(鄭澈, 1536~93)은 이 사건을 특별히 담당하는 우의정으로 임명되어, 동인의 보스인 이발(李潑, 1544~89)을 비롯해서 수십 명의 동인 측 사대부들과 그 가족들을 처형하고 유배보내며 오랜만에 마음껏 분풀이를 했다.

 

정여립이 실제로 역모를 꾀했는지는 지금까지도 논란거리지만, 역모가 사건으로 표면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대규모 옥사가 빚어졌으니, 역시 말만의 역모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정여립 모반 사건은 앞서의 사화(士禍)들과 궤를 같이 한다. 다만 사화의 경우와 다른 점은 이제는 개혁파와 수구파의 대립이 아니라 사대부들 간의 사적인 친분 관계(당파)조차 쉽게 대형 사건으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왕실 외척들끼리 세력다툼을 벌인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제외하면, 그동안 말만의 역모는 국왕 대 사대부(士大夫)의 대결(무오사화戊午士禍, 갑자사화), 개혁파와 수구파의 대결(기묘사화)을 거쳐 당파 간의 무한 대결로까지 발전(?)했다. 이제 사대부 정치는 올 데까지 왔고 타락할 데까지 타락했다. 그 다음은 뭘까?

 

 

구름 속의 논쟁 이황과 기대승의 논쟁은 그때까지 성리학에 철학적 뿌리가 없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러나 뒤늦게 학자들이 성리학을 포장하기 위해 애쓰고 있을 무렵 일반 사회에서는 이미 체제의 모순이 폭발하고 있었다. 홍길동과 임꺽정이 바로 이 시기에 활약했다. 왼쪽은 17세기에 소설화된 홍길동전의 표지이고, 오른쪽은 20세기에 신문 연재된 임꺽정전의 삽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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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동양사 / 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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