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사위들
2차 일본 정벌이 전개되기 1년 전인 1279년 남송이 멸망함으로써 고려는 영원한 사대의 대상을 잃었다. 정작 충심을 바쳐 섬기고 싶은 대상인 중국의 한족 왕조가 사라지고 난데없이 오랑캐 몽골을 ‘모국’으로 받들게 되었으니 고려의 신세도 여간 딱한 게 아니다. 그나마 남송처럼 오랑캐의 손에 멸망하는 것보다는 오랑캐의 속국으로라도 존속하는 편이 낫다고 할까? 물론 몽골의 관점에서는 고려가 남송과 달리 변방에 불과했기에 그냥 놔둔 것이지만.
사실 고려 왕실은 불만이 없다. 왕실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원나라가 고맙기 그지없다. 그 덕분에 지긋지긋하던 무신집권을 종식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독립적 왕권? 그런 건 바라지도 않는다. 어차피 개국 초부터 주변 강대국들의 연호를 사용해 왔고 이민족 왕조들에 반강제로나마 사대해 온 처지가 아니었던가? 그런 점에서 오히려 고려의 왕들은 개경 귀족들보다 중화 사상으로부터 훨씬 자유로운 입장이었다.
1274년 6월 아버지가 죽었다는 기별을 받고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大都, 베이징)를 떠나 고려로 돌아오는 원종의 태자는 왕실의 고난이 아버지 대에서 끝났다는 후련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사실 그럴 만도하다. 그는 무려 100년 만에 무신정권의 영향력 없이 즉위하는 왕이니까. 그러나 그는 바로 지난 달에 원 세조의 딸 제국대장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이제 고려의 왕이기에 앞서 제국의 사위라는 신분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그는 그 전까지의 고려 왕들과는 달리 독립국의 왕을 뜻하는 ‘종(宗)’의 묘호를 받지 못하고 ‘왕’의 직함만 인정되어 충렬왕(忠烈王, 재위 1274~1308)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그를 시작으로 공민왕(恭愍王)에 이르기까지 일곱 명의 고려 왕들은 모두 세자 시절에 원 나라에서 살면서 몽골식 이름을 얻고 원나라 황녀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며, 그 중 여섯 명은 죽은 뒤에 충(忠, 충성)자가 붙은 ‘왕’의 시호를 받았다(당시 원나라는 정복국의 왕에게 황녀를 시집보내는 게 관례였으니까 고려만이 ‘부마국’이었던 것은 아니다)【‘충자 항렬’의 여섯 왕들은 모두 태자가 아닌 세자였다. 독립국의 왕위계승자를 태자(太子)라고 부르니까 세자(世子)는 그보다 한 급 낮은 호칭이다. 그밖에도 이 시기의 고려 왕들은 전 시대와 다른 호칭과 용어들을 썼다. 이를테면 왕이 자신을 가리킬 때 쓰는 짐(朕)이라는 말도 고(孤)로, 폐하(陛下)도 전하(殿下)로 격하되었다(폐陛란 계단을 뜻하므로 폐하는 독립 군주의 용어지만 전殿은 황궁을 뜻하므로 전하란 황제 휘하에 있는 군주를 가리킨다). 몽골 지배기에만 이런 용어들을 썼다면 지금 우리에게 그렇듯 익숙하게 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조선시대 내내 왕위계승권자는 태자가 아닌 세자였으며, 왕은 스스로를 ‘고’라 칭했고 신하들은 왕을 ‘전하’라고 불렀다. 게다가 조선은 1897년 일본의 괴뢰 제국인 대한제국 시절을 제외하고는 독자 연호를 쓴 적이 없다. 이렇게 본다면 한반도는 고려 말 이후 20세기 중반까지 독립국이 아니었던 셈이다】.
기대와는 달리 즉위 초부터 일본 정벌 뒷바라지에 시달린 충렬왕이었으나 사위로서 장인의 뜻을 따르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감내할 수밖에 없다. 아닌 게 아니라 재위 기간 중 그는 열 차례 이상이나 원의 황실을 방문할 정도로 정성스럽고 충성스런 사위였다. 따라서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합쳐 첨의부(僉議府)로, 추밀원을 밀직사(密直司)로, 어사대를 감찰사(監察司)로 바꾸고 6부를 4사(司)로 개편한 데는 원의 요구에 따른 것만이 아니라 충렬왕의 뜻도 있었을 것이다(속국이므로 6부六部라는 이름도 6조六曹로 격하되었는데, 이 명칭이 조선시대까지 계속된다). 기관들의 기능은 그대로지만 이름에서 보듯이 성(省)이 부(府)로, 원(院)과 대(臺)가 사(司)로 한 급씩 격하된 것은 속국 행정부의 체제임을 말해준다. 여기에 일본 정벌이 포기된 이후에도 정동행성이 계속 남아서 고려의 내정에 간섭한 것은 부마국임에도 믿을 수 없다는 원나라의 의도를 드러낸 것이랄까?
그러거나 말거나 충렬왕에게 더 중요한 신분은 고려의 왕보다 황제의 사위다. 1297년 아내인 제국대장공주가 죽었을 때 그 점은 분명히 드러난다. 당시 몽골에 가 있던 세자가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고려로 달려왔는데, 자신의 슬픔을 달래는 방식이 좀 색달랐다. 아버지가 아끼는 애첩과 그 배후 세력을 모조리 잡아죽인 것이다. 아마도 세자는 어머니가 마흔 살도 못 되어 죽은 탓이 그들에게 있다고 믿었겠지만, 졸지에 아내와 애인을 모두 잃은 충렬왕은 만사에 흥미를 잃고 이듬해 왕위를 세자에게 넘겨준다. 하긴, 요즘 정치인들이 골프라면 미치는 것처럼 몽골에 있을 때 익힌 매 사냥에 빠져 있었던 그였으니 왕위 따위에 초연(?)한 태도가 오히려 당연할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도 왕위에 오르게 된 충선왕(忠宣王, 재위 1298, 1308~13)은 적어도 아버지처럼 무기력한 인물은 아니었다. 즉위 직후 그는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안을 마련하고 대대적으로 실행하고자 했다. 정방을 폐지하고 한림원을 사림원(詞林院)으로 고쳐 인사권을 부여한 것이라든가, 귀족과 호족들의 권력형 비리와 부패를 척결하고자 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자들이 출세하는 루트를 차단한다든가, 새 행정기관들을 신설해서 속국 이전의 체제로 돌아가려는 제스처를 보인 것은 당연히 모국의 제재를 받을 수밖에 없다. 때마침 아내인 계국대장공주가 질투까지 하는 바람에 그는 개혁의 시동도 제대로 걸지 못한 채 드라이브를 중단하게 된다【몽골의 공주는 충선왕과 왕비 조씨의 금슬이 좋은 것에 불만을 품었는데, 실은 조씨가 먼저 충선왕과 결혼했으니 후처가 전처를 시기한 셈이다(그래도 정실은 엄연히 몽골 공주였으므로 그녀가 낳은 아들만 세자가 될 수 있었다). 충선왕은 1292년에 고려에서 조씨와 결혼했고, 3년 뒤 원나라에 가서 계국대장공주를 아내로 맞이들였다. 그러나 귀국하고 나서 충선왕이 조씨와 더 가까이 지내는 것을 보고 공주는 원 황실에 서신을 보내 조씨가 자신을 저주한다고 모함했다. 일개 아녀자의 질투라면 모르겠으되 몽골 공주의 불평이었기에 문제가 되었다. 결국 조씨는 친정아버지와 함께 옥에 갇혔다가 대도로 압송되는 비극을 당했고 충선왕에게까지 불똥이 튀었다. 당시 개경 궁궐에는 조씨가 공주를 저주한다는 익명의 대자보가 나붙었는데, 여기에는 아마 친원파 귀족들의 책동이 있었을 것이다】. 결국 7개월 만에 그는 원나라에 소환되었고 충렬왕이 다시 복위되었다. 이렇게 아버지가 아들의 왕위를 이어받은 경우는 아마 세계사적으로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고려 왕실의 웃지 못할 해프닝은 그 다음에도 연출된다. 1308년 충렬왕이 죽은 뒤 충선왕(忠宣王)은 몽골에서 돌아와 다시 왕이 되었지만, 겨우 두 달만에 원나라로 돌아가 버린다. 고려 왕은 다시 궐위 상태가 되었고, 더구나 국왕의 호사스런 해외 생활비를 대느라 국가 재정도 엉망진창이다. 그래서 고려 정부만이 아니라 원나라 황실에서도 왕의 귀국을 종용했으나 충선왕은 5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잠시 귀국해서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절차를 밟은 다음 원나라로 돌아가 죽을 때까지 귀국하지 않았다.
이쯤 되자 고려 왕위는 권력을 행사하고 누리는 자리가 아니라 성가시고 부담스런 자리가 되었다. 아버지가 떠맡긴 왕위를 영문도 모르고 덥석 받은 충숙왕(忠肅王, 재위 1313~30, 1332~39)은 아마도 후회스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왕위가 더 싫어지게 만드는 사건이 일어난다. 만주의 여러 민족들 때문에 늘 골머리를 앓던 원 황실은 고려가 그들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자 새로운 방책을 구상했다. 만주를 관장하는 별도의 왕, 즉 심양왕(瀋陽王)을 두는 것이다(瀋陽을 중국어로 읽으면 지금 중국 랴오닝성의 도시 선양이 된다). 최초의 심양왕은 바로 1308년 충렬왕이 죽었을 때 귀국하지 않고 버틴 충선왕이다. 그러나 고려 왕위까지 마다한 그가 심양왕이라고 제대로 맡을 리 없다. 그는 곧 조카인 연안군 고(暠)에게 왕위를 물려줬는데, 충숙왕이 고려의 왕위를 잇게 되자 ‘두 왕’ 사이에 마찰이 일어날 건 불을 보듯 뻔하다.
사실 충숙왕은 아버지처럼 튀려 하지 않고 황실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면서 최대한 편하게 재위할 작정이었다. 그래서 옷 색깔로 백성들의 신분을 구별하라는 원의 명령에도 그대로 따랐고, 사심관을 폐지하라는 지시도 그대로 실천했다. 그러나 심양왕 고가 고려 왕위에 흑심을 품고 황실에 그를 무고하는 사태가 일어나자 그만 그런 정도의 직무 수행마저도 싫증이 난다. 게다가 그 때문에 황실의 소환령을 받아 5년간이나 대도에서 살다가 와보니 더욱 짜증나는 상황이 벌어진다. 심양왕이 원 황실에 아예 고려라는 국호를 없애고 고려를 원나라에 합병하자는 제안까지 냈던 것이다. 왕위에 초연한 것은 할아버지로부터 내려온 내력이 아니던가? 결국 충숙왕은 1330년 아들에게 왕위를 넘기고 원나라로 가 버린다【그런 분위기에서는 거의 실현 불가능한 가정이긴 하지만, 만약 당시 고려 왕실에서 정신을 바짝 차렸더라면 오늘날 만주는 중국 땅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사실 원나라가 고려를 합병하지 않은 이유는 고려로 하여금 만주의 민족들이 반란을 꾀하지 않게 제어하도록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원나라는 랴오둥과 한반도 북부까지는 영토화하는 데 성공했으나 중국의 역대 제국들이 그랬듯이 만주까지는 확실히 제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려면 고려가 만주의 여러 민족들을 함께 아우를 만한 역량이 있어야 했겠지만, 세계 제국 원나라의 공식적인 위임을 받은 위상으로 보면 그 일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랬더라면 원나라가 몰락한 이후 자연스럽게 만주는 한반도와 한 몸이 되었을 터이다. 비록 고려는 속국의 신분이긴 했으나 당시 만주는 원나라에게나, 몽골을 타도한 명나라에게도 중요한 지역이 아니었으므로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심양왕은 고려가 고구려의 영토적 계승을 현실화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이렇게 해서 열다섯 살에 왕이 된 충혜왕(忠惠王, 재위 1330~32, 1339~44)에게 나라를 다스릴 경륜은커녕 황실의 꼭두각시 역할을 수행할 능력조차 기대할 수 없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주색잡기와 사냥에 빠져 있던 충혜왕은 결국 2년간 재위한 뒤 폐위되었고, 아버지 충숙왕이 컴백했다가 7년 뒤에 죽자 다시 왕위에 올랐다. 결국 충렬왕부터 충혜왕까지 식민지 시대 네 명의 왕들은 모두 두 번씩이나 왕위에 오르는 기록을 남겼다. 왕위가 ‘적성’에 맞지 않았으니 그들 개인적으로도 불운이었겠지만, 그런 왕들을 둔 당시 고려 백성들과 그런 기록을 지닌 우리 역사는 더욱 불운하다고 하겠다. 왕실을 둘러싼 해프닝은 그것으로 끝났으나, 이후 충목왕(忠穆王, 재위 1344~48)과 충정왕(忠定王, 재위 1349~51)도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불과 몇 년밖에 재위하지 못했으므로 중 자가 들어간 왕치고 이름값이라도 한 인물은 하나도 없었던 셈이다.
▲ 몽골에 맞선 일본 세계를 정복한 몽골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일본 전역이 몸을 떨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전란을 피해 강화도로 달아난 고려의 무신정권과 달리 일본의 동업자는 과감히 몽골군에 맞섰다. 물론 강력한 몽골 기마병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일본이 중국에 사대하지 않고 독자적인 황제(천황)를 모시는 독립국이라는 자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림은 그 전투 장면인데, 이 선박은 고려 백성들이 건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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