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Myth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철학적 사유가 발생하기 전까지 인간은 미토스(mythos)【여기서 신화(myth)라는 말이 나왔다】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모든 것의 원인과 결과, 시작과 끝은 신이었으므로 인간은 신을 믿고 숭배하면 될 뿐 자연과 자신의 존재에 관해 일체의 의문을 품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초기 철학자들은 미토스를 부정하고 로고스(logos)를 앞세웠다.
이치와 이성을 뜻하는 로고스는 마법과 주술을 강조하는 미토스와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인간의 지적 세계가 로고스를 중심으로 형성되면서 미토스는 점점 영향력을 잃었고 문명적 사유의 대열에서 물러났다. 미토스, 즉 신화는 완전히 무의미해진 걸까?
신화와는 전혀 무관할 것 같은 현대 사회에도 신화는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종교다. 신을 섬기는 현대의 모든 종교는 고대의 미토스적 사유와 크게 달라진 바 없다. 종교에서는 여전히 모든 것의 원인과 목적을 신에게로 돌리며, 삶의 과정과 목표도 신에게 두고 있다. 심지어 로고스가 지배하는 현실마저 신의 뜻으로, 즉 미토스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뿐 아니라 현대 사회에는 신이 없는 신화도 있다. 이른바 테크놀로지(Technology) 신화나 미디어(Media) 신화가 그런 예다. 테크놀로지 신화는 외계인이나 사차원, 텔레파시(telepathy) 등 첨단 과학에서 소재를 따온 황당무계한 내용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신화는 과학을 표방하지만 과학적으로 검증되지도 않았다. 그리고 사실 검증보다 대중의 관심을 끄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런 목적을 가진다는 점에서 미디어 신화도 마찬가지다. 미디어는 유명한 운동선수나 영화배우를 신비화하고 영웅화함으로써 신화에 필요한 신적 존재의 대체물을 만든다【그 인물은 대중에게 문화권력을 행사한다】. 때로는 실존하지 않는 영화나 소설 속의 캐릭터를 우상화하는 경우도 있다.
프랑스의 기호학자인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에 의하면 그런 현대의 신화는 계급적 이해관계를 고착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바르트가 말하는 신화는 ‘누구나 당연시하고 넘어가는 것’을 뜻한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자명한 것이라서 아무도 의문부호를 달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현대의 신화다【고대의 신화도 신의 존재를 의문시하지 않았고 신이 인간 세계에 개입하는 것을 당연시했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다】.
당연시된다는 것은 곧 무의식적으로 작용한다는 의미다. 바르트는 현대의 신화가 고대의 신화와 달리 배후에 뭔가를 숨기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고대의 신화가 자연적으로 생겨나 사회의 맥락 속에서 자연스럽게 기능한 반면에 현대의 신화는 똑같이 무의식적이면서도 신화를 만든 주체와 의도가 숨어 있다. 그래서 바르트는 현대의 신화를 계급적 지배 이데올로기의 한 형태라고 간주한다.
현대 사회는 부르주아 사회이므로 신화의 이데올로기는 당연히 부르주아지의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목적을 지닌다. 과거의 신분사회에서는 지배계급이 신분에서부터 달랐으므로 계급적 지배가 공공연했고, 또 그래도 괜찮았다. 그런데 자본주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적어도 공식적인 차원에서는 신분이 사라졌기 때문에 과거와 같은 노골적인 지배 방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이런 이유에서 신화의 개발이 필요해진다.
바르트에 따르면 부르주아지는 ‘이름을 원치 않는 계급’이다. 마치 부자가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것처럼 부르주아지는 사실상 사회를 전일적으로 지배하면서도 중간계급들을 포함시켜 자신을 무형화한다【여론조사에서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가장 많다는 것은 부르주아지의 책략이 성공적임을 증명한다】.
“언론, 영화, 문학, 의례, 사법, 외교, 대화, 감동적인 결혼 등등 일상생활에서의 모든 것들은 부르주아지가 소유하고 있으며, 이들의 관점은 인간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표상으로 작용한다. 그러면서도 그 기원을 쉽게 숨길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부르주아지의 지배는 불필요한 주의를 끌지 않는다. 부르주아지의 규범은 마치 자연적인 질서의 법칙인 것처럼 간주된다. -바르트, 『신화학』”
이렇게 부르주아지는 이름을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기원을 잃어버리고 신화가 된다. 신화가 당연시되고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듯이 신화로 위장된 부르주아지의 계급적 지배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정당화되고 앞으로도 영원히 지속되리라는 착각을 빚어낸다.
바르트는 이 신화의 가면을 벗겨내기 위해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가 말한 기표와 기의의 개념(→ 차이)을 도입한다. 바르트의 신화학에서 기표는 신화의 형태이고, 기의는 신화의 내용이며, 기표와 기의가 합쳐져 구성되는 기호는 신화의 기능을 나타낸다.
바르트는 프랑스 군복을 입고 국기에 경례하는 한 흑인의 사진을 예로 든다. ‘군복 차림으로 경례하는 흑인의 사진’이라는 기호는 신화 체계 안으로 들어오면서 하나의 기표가 되고 제국주의라는 기의와 만나 새로운 기호를 형성한다. 그 의미는 바로 프랑스 제국주의의 깃발을 보고 무조건적인 충성을 맹세하는 제국주의 옹호의 상징이다【병사가 흑인이라는 점은 제국주의 이데올로기가 인종이나 계급과 무관하게 언제나 통하는 진리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데 기여한다】.
과거의 신화학자는 신화의 연구를 통해 과거 사회의 조직원리와 삶의 방식을 파악하고자 했다. 그러나 현대의 신화학자는 신화에서 현대 사회에 관한 지식과 정보를 알아내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는 현대의 신화를 당연시하지 않고 그 안에 담긴 의미와 형태를 파악해 그 허구성을 폭로하는 것이 신화학자의 임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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