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허수아비 왕들
무의미한 왕위계승
아무 할 일도 없는 자리지만 순조(純祖)는 그것조차 귀찮았던 모양이다. 1827년에 그는 아직 서른일곱의 젊은 나이였음에도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열여덟 살의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고 일선에서 물러난다. 이후 세자는 3년 동안 대리청정을 하는데, 물론 그에게도 역시 특별히 업무라 할 만한 일은 없다. 그는 스물두 살의 젊은 나이에 죽었으나 그래도 두 가지 업적은 남겼다. 하나는 대리청정 기간 동안 사실상의 국왕이었으므로 죽은 뒤에 익종(翼宗, 1809~30)이라는 왕의 묘호를 받은 일이고, 다른 하나는 안동 김씨 대신 풍양 조씨 가문에서 아내를 취함으로써 이후 세도정치(勢道政治)의 주인이 풍양 조씨로 바뀌게 만든 일이다.
어쨌든 당장 난처해진 것은 순조다. 일찌감치 은퇴해서 아름다운 인생을 즐겨보고자 했던 그는 아들이 뜻하지 않게 일찍 죽음으로써 다시 성가신 국왕 자리를 떠맡게 되었다. 서둘러 익종의 아들, 즉 손자를 세손으로 책봉했지만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뗀 세 살짜리 아이에게 왕위를 안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아들의 자리를 물려받으니, 고려 말 충자 항렬의 왕들이 왕위를 장난처럼 주고, 받았던 장면이 연상되지 않을 수 없다. 예나제나 그에게 오로지 믿을 사람은 정신적 지주이자 장인인 김조순(金祖淳) 뿐, 그러나 그마저 1832년에 죽자 순조(純祖)는 난감한 심정이다. 2년 뒤에 장인의 뒤를 따른 게 아마도 그에게는 다행이 아니었을까?
결국 순조의 세손은 일곱 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어 헌종(憲宗, 1827~49, 재위 1834~49)이 되었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 세 살로 왕위에 올랐더라면 한반도 역사상 최연소 왕이라는 신기록을 세웠겠지만, 4년이 지나 즉위한 탓에 옛날 고구려의 태조왕(太祖王)에 이어 사상 두 번째다(물론 태조왕은 왕계를 믿을 수 없으니까 사실상 헌종이 최연소다). 신화의 시대라면 몰라도 역사시대, 그것도 밝은 문명의 시대에 어린왕이 즉위했다면 적지 않은 문제가 될 것이다. 물론 순조(純祖)의 비인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1857)가 왕대비로 있으니 어린아이에게 국정을 맡기는 일은 없겠지만, 그때까지의 조선 역사를 봐도 이렇게 어린 왕이 들어설 때면 거의 예외없이 왕권을 둘러싼 갈등이 일어나곤 했다(열한 살짜리 왕이었던 단종과 명종이 모두 그랬다).
하지만 헌종(憲宗)은 조선 역사상 가장 어린 임금인데도 이번에는 그런 문제가 전혀 없다. 왜 그럴까? 이제 조선은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룬 안정적인 왕국을 이루었기 때문일까? 물론 그럴 리는 만무하다. 왕위계승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이유는 바로 왕위계승이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세도정치(勢道政治)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조선은 달리 내걸 간판이 없어 왕국이라는 간판을 그냥 유지했을 뿐 사실상 왕국이 아니었다. 그나마 사대부(士大夫) 체제에서는 사대부가 실권을 장악하고 왕이 상징으로 군림하는 비정상적인 왕국의 면모라도 유지했으나, 집권 사대부가 한 가문으로 고착된 세도정치에서는 그럴 필요조차 없어졌다.
이제 왕은 상징마저도 아닌 그저 장식물일 뿐이다. 따라서 왕위계승 자체가 무의미해진 판에 어린 왕이든 무능한 왕이든 아무런 차이도 있을 수 없다. 왕위계승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도가문의 계승’이다.

1841년 순원왕후가 형식적인 수렴청정을 마치고 헌종(憲宗)이 친정을 시작하자 세도가문은 안동 김씨에서 풍양 조씨로 바뀐다. 그 이유는 물론 헌종의 외가가 풍양 조씨이기 때문이다. 하기는, 왕조의 성씨는 바꿀 수 없어도 세도가문의 성씨는 바뀌어야 정상 아닌가? 한 가문이 대대로 왕실 외척이 된다면 유교 예법에도 어긋날 테니까. 비록 왕실 외척이 바뀌면서 세도가문도 교체되었다고는 하지만, 왕보다 더 비중이 큰 권력 주체가 바뀌었으니 여기에도 뭔가 사연이 없을 수 없다. 계기가 된 것은 당쟁 시대가 끝난 이후 첨단(?)의 쟁점으로 등장한 그리스도교다.
원래 종교란 박해가 심할수록 더욱 확산되게 마련이지만, 그 점에서 그리스도교는 어느 종교보다도 독한 데가 있다. 출발부터 로마 제국의 격심한 탄압 속에서 꾸준히 세를 키워 마침내 제국의 국교로 공인을 얻어내지 않았던가? 그런 점에서, 조선의 사대부(士大夫) 정권이 신유박해(辛酉迫害)로 그리스도교의 싹을 잘랐다고 안심했다면 그것은 종교사적 무지에서 나온 커다란 오산이다. 오히려 그 소식을 전해들은 베이징 주교는 즉각 로마 교황청에 선교사들을 조선에 파견해 달라고 요구한다. 여기에는 온갖 박해 속에서도 조선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수가 줄기는 커녕 오히려 늘어나는 놀라운 성과를 보인 것이 컸다. 그 덕분에 1831년 조선 교구는 베이징 교구로부터 독립해서 독자적인 교구를 이루었으며, 최초의 서양인 선교사를 맞아들이게 된다. 1835년 조선에 온 파란 눈의 선교사는 프랑스 신부인 모방이었으며, 그 뒤에 계속해서 샤스탕과 앵베르가 파견된다【이렇게 조선에 처음으로 온 서양인 선교사들이 모두 프랑스인인 이유는 뭘까? 우선은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가 조선의 선교 사업을 프랑스 교구에 전담시켰기 때문이지만, 여기에는 유럽 내의 사정이 연관되어 있다. 17세기부터 동아시아에 오기 시작한 서양의 선교사들이 대부분 에스파냐와 이탈리아의 예수회 소속 사제들이었던 이유는 유럽 대륙을 휩쓴 종교개혁의 여파로 신교에 위축된 구교가 동방 포교를 탈출구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8세기에 유럽의 패권은 영국과 프랑스가 장악하게 되었고, 두 나라는 이후 한 세기 내내 유럽에서만이 아니라 전세계 식민지에서 서로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거기서 승리한 영국이 인도를 차지하고 중국에 아편 무역을 시작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동방 포교의 사업은 두 나라가 계승해야 했는데, 영국은 독자적인 국교회를 이루고 있었으므로 자연히 로마 교황은 프랑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선 정부의 엄중한 탄압 속에서 몇 년 동안 활동하면서 프랑스 선교사들이 중점을 둔 사업은 포교도 포교지만 그보다도 조선인 사제를 양성하는 일이었다. 외국인, 그것도 파란 눈의 서양인으로서 포교하는 데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방은 1830년에 조선의 젊은이 세 명에게 세례를 주고 마카오로 보내 사제 수업을 쌓게 하는데, 그 중 한 명이 나중에 한반도 최초의 신부가 되는 김대건(金大建, 1822~46)이다.
그런데 그들을 호시탐탐 노려보는 눈이 있다. 어차피 수렴청정이 끝나고 헌종(憲宗)이 친정에 나서면 정권을 장악하게 될 풍양 조씨 가문은 미리 분위기도 띄울 겸, 집권 실습도 할 겸 적절한 ‘건수’를 찾고 있었다. 없으면 만든다. 풍양 조씨의 보스이자 헌종의 외할아버지인 조만영(趙萬永, 1776~1846)은 안동 김씨를 확실히 제압하고 가문의 명예를 드높일 계기를 만들기 위해 그리스도교 탄압을 결정한다.
이것이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인데, 신유박해(辛酉迫害)에 이어 또 다시 별다른 꼬투리가 없는데도 정치적인 이유로 탄압령을 내린 경우다. 이 사건으로 프랑스의 세 신부는 주문모에 이어 새남터에서 처형되었으며, 풍양 조씨는 새로운 권력자로서 통치 능력(?)을 선보였다.
그러나 청나라 신부가 죽은 신유박해의 경우와는 달리 이번에는 서양인 선교사들이 피를 본 만큼 사건의 후유증은 만만치 않았다. 원래 선교사를 먼저 보내 종교를 전파한 뒤 경제적 진출을 도모하는 것은 16세기 이래 유럽 열강의 전매특허지만(일부 선교사들은 스스로 본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기도 했다), 19세기 제국주의의 시대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오히려 본말이 전도되어 포교의 문제가 침략의 구실을 만들어 주는 경우가 많았다. 과연, 최초로 서양인 순교자를 낸 기해박해(己亥迫害)도 최초로 서양의 군함이 한반도에 상륙하는 구실이 된다. 1846년 6월 프랑스의 해군 소장 세실이 이끄는 군함 세 척이 조선에 와서 기해박해에 항의하는 공식 서한을 전달하고 간 것은 이제부터 조선이 새로운 사태를 맞게 되리라는 조짐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집권자인 풍양조씨 가문은 여전히 나라 밖 사정에는 관심이 없는 우물 안 개구리이고만 싶다. 그 다음달에 김대건을 체포해 새남터에서 처형한 것은 그들의 그런 초지일관성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 네 명의 사제 왼쪽 두 사람은 조선에 처음으로 온 서양인 신부인 모방과 그의 전도로 최초의 조선인 신부가 된 김대건이고, 오른쪽 두 사람은 앵베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다. 서양인 사제 세 사람이 모두 프랑스인이었으므로 이들이 한꺼번에 처형당한 사건은 외교 문제가 될 게 뻔했지만, 국제관계의 경험이 전무한 조선 정부는 그런 점을 전혀 걱정하지 않고 일을 저질렀다.
한양에 간 원범총각
피로 얼룩진 헌종(憲宗)의 치세는 물로도 얼룩졌다. 15년에 이르는 그의 재위 기간 중에서 9년이나 홍수 피해를 입었으니 그 점에서는 순조(純祖)의 치세에 못지 않다. 한 가지 더 닮은 꼴이 있다면 사실상의 통치자(세도가의 보스)가 수를 다하고 죽자 얼마 뒤에 왕도 젊은 나이에 죽었다는 사실이다. 김조순(金祖淳)이 죽고 순조가 뒤를 따랐듯이, 1840년에 조만영(趙萬永)이 죽자 헌종(憲宗)도 3년 뒤에 스물두 살의 나이로 죽었다.
순조(純祖) 부부의 운명은 기구하기도 하다. 일찍이 순조는 아들 익종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다가 아들이 일찍 죽는 바람에 다시 재위하는 고초(?)를 치렀지만, 순조의 아내는 손자인 헌종(憲宗)에게 친정을 맡기면서 수렴청정을 거두었다가 헌종이 일찍 죽는 바람에 다시 수렴을 치고 국정에 임해야 했다. 하지만 그건 이차적인 문제고 당장은 어떻게든 왕통을 이어가야 한다는 게 순원왕후의 고민이다. 헌종은 그 젊은 나이에 계비까지 들였지만 후사를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순조-익종-헌종의 삼대는 워낙 손이 귀했을뿐더러 왕이 요절하는 사태가 잇따르고 보니 아예 왕위계승자의 씨가 말라 버렸다. 어쨌든 순조(純祖)의 직계 혈통은 헌종으로 끝났으므로 순원왕후는 왕실 혈통을 더 거슬러 갈 수밖에 없다【여기서 당시 조선 왕실의 혈통을 정리해보자. 우선 정조(正祖)는 두 아들을 두었지만 맏이가 어릴 때 죽었으므로 순조가 외아들인 셈이다. 또 순조도 딸만 여럿을 두었고 아들은 익종 하나밖에 낳지 못했다. 익종은 워낙 젊어서 죽었으니 헌종 하나라도 낳은 게 다행이다. 그러나 헌종은 아들은커녕 딸도 낳지 못했다. 따라서 헌종이 죽음으로써 순조의 혈통만이 아니라 정조의 혈통마저 모두 끊긴 셈이다】. 왕실 족보를 샅샅이 뒤진 결과 다행히도 그녀는 장헌세자의 후손들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혜경궁 홍씨로부터 비롯된 후손은 맥이 끊겼지만 숙빈 임씨가 낳은 장헌세자의 서자 은언군(恩彦君)의 후손이 있었던 것이다. 순원왕후로서는 금맥을 발견한 기분이었겠지만, 한 나라 왕실의 방계 혈통이 이렇듯 어렵사리 발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뭘까?
은언군의 아들 이광(李㼅, ?~1844)은 출생년도조차 확인할 수 없을 만큼 철저히 잊힌 존재였다. 물론 그럴 만한 사연은 있다. 아버지 은언군은 영조(英祖) 시대에 상인들에게 빚을 지고 유배된 적이 있는가 하면, 형은 모반죄에 연루되어 죽었고, 어머니와 형수는 그리스도교 신도로서 신유박해(辛酉迫害)에서 처형된 것이다. 그 때문에 이광은 어린 시절부터 강화도의 유배지에서 살다가 끝내 거기서 농사꾼으로 죽어야 했다. 아무리 서자 출신이라지만 엄연한 왕실의 혈통임에도 형편이 그럴 정도였다면 당시 조선 왕실의 위상이 어땠는지는 알 만하다. 한미한 사대부(士大夫) 집안의 족보에도 자손들의 출생기록 정도는 보관되어 있게 마련인데, 이광의 가문은 그런 족보조차 없었던 것이다(또한 왕족의 집안에서도 신도가 나왔다는 사실은 당시 그리스도교가 얼마나 널리 퍼져 있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 왕실의 웨딩포토 조선은 형식상 왕국이니까 나라의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왕실 행사가 가장 중요하다. 그림은 1844년 헌종(憲宗)의 호화스런 결혼식 장면을 담고 있는데, 모두 여덟 폭으로 된 병풍의 일부다. 그러나 헌종은 결혼을 했어도 여전히 무능한 왕이었던 데다 젊어서 죽는 바람에 왕실의 손마저 끊는 치적(?)을 남겼다.
다행히 이광은 박복한 삶을 살았어도 자식복은 있었다. 그가 죽고 나서 얼마 뒤에 아들인 이원범(李元範)이 왕위에 오른 덕분에 그는 사후에라도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으로 추존되는 영광을 얻었다(선조宣祖와 인조仁祖의 아버지에 이어 역사상 세 번째 대원군이다). 열여덟 살의 강화도 총각 이원범은 영문도 모르는 채 한양으로 가서 생면부지였던 할머니 순원왕후를 만나 헌종(憲宗)의 대를 잇는다. 그가 바로 조선의 25대 왕인 철종(哲宗, 1831~63, 재위 1849~63)이다.
순조(純祖)부터 비롯된 새로운 전통에 따르면 철종은 그냥 왕궁에서 놀면 될 뿐 아무런 할 일도 없다. 따라서 다시 수렴을 내리고 청정에 나선 순원왕후가 해야 할 주요 임무도 촌놈 손자를 왕실 법도에 맞게 처신하도록 다듬는 것, 즉 조선판 ‘말괄량이 길들이기’ 밖에 없다. 육순의 나이에 새삼스럽게 ‘육아’를 떠맡은 것은 좀 귀찮았겠지만.
강화도 총각이 왕실에 온 지 2년 뒤, 이제 좀 다듬어졌다 싶자 순원왕후는 손자에게 아내를 얻어준다. 철종에게 총각 딱지를 떼어준 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그것으로 세도가문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새로 궁에 들어온 손주며느리는 순원왕후의 친정인 안동 김씨 집안이었던 것이다. 이로써 한동안 풍양 조씨에게 눌려 지내던 안동 김씨는 화려하게 컴백했다. 권력이 안정되자 그 이듬해인 1852년 왕후는 드디어 수렴을 접었고, 그와 동시에 철종(哲宗)의 장인인 김문근(金汶根, 1801~63)이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으로서 국정을 도맡았다【원래 부원군이라는 명함은 조선 초부터 있었다. 세조(世祖) 때 측근 공신들에게 내준 것인데, 곧 왕의 장인에게도 부여하는 직함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접어든 이 무렵에 부원군의 직함이 마치 새로운 것처럼 등장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조선이 왕국이던 시대와 사대부(士大夫) 국가이던 시대, 즉 18세기까지 부원군은 단지 명예직에 불과했지만, 세도정치(勢道政治) 시대부터는 세도가문의 보스로서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되기 때문이다. 세도정치의 초대 보스인 김조순(金祖淳)의 명함은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이었다】.
자신이 빈농 출신이었던 만큼 철종(哲宗)은 다른 것은 다 몰라도 빈민구호에는 제법 열심이었다. 마침 선혜청이라는 좋은 이름의 관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선혜청의 국고를 부지런히 재해를 입은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게 한다. 그러나 국왕의 이런 시혜를 지방관들은 다르게 해석했다. 물론 빈민구호 때문만은 아니지만 아무튼 그로 인해 가뜩이나 어려운 국가 재정이 더욱 부실해지자 그들은 알아서 제 몫을 챙기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더구나 그들에게는 삼정이라는 좋은 수탈의 도구가 있다. 세도정치(勢道政治) 시대 초기부터 가속화된 삼정의 문란이 극도에 달한 것은 이 무렵이다. 그와 더불어 지방관들의 탐학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의 저항이 본격화된 것도 그 무렵이다.
▲ 조선의 프롤레타리아 궁지에 몰린 사람이 팔 것은 제 몸밖에 없다. 사진은 1862년 어느 빈민이 자신과 아내는 물론 앞으로 태어날 아이까지 팔겠다고 약속한 문서다. 이것을 자매문기(自賣文記), 즉 ‘자신을 파는 문서’라고 부른다.
총체적 난국
밖에서는 서양 열강의 군함과 상선들이 돌아다니고 안에서는 백성들의 조짐이 심상치 않다. 조선은 점점 총체적인 난국으로 빠져든다. 어찌 보면 정부가 무능하고 부패한 탓만도 아니다. 환곡의 폐단을 없앨 방법을 모색하고, 뇌물을 받는 지방관에게 가중처벌법을 적용하고, 방납(防納)【방납이란 조선 초부터 성행한 것으로서, 중앙 관청의 서리들이 지방에서 올라 오는 공물을 가지고 농간을 부려 이익을 사취하는 행위다. 그 절차를 보면, 지방에서 올라오는 공물을 갖가지 구실을 달아 퇴짜를 놓은 다음 공물 납부를 대행해주겠다면서 그 과정에서 떡고물을 받아 먹는 식이다. 물론 불법이지만 정부에서는 서리들에게 따로 급료를 주지 않았으므로 알고서도 묵인해주었으니 관례나 다름없었다(말하자면 ‘공인된 불법’인 셈인데, 이것도 조선사회에 고질적인 체제 모순의 하나다). 광해군(光海君) 때 대동법(大同法)이 시행된 이후 이런 폐단은 크게 줄어들었으나 세도정치(勢道政治) 시대에 들어 중앙권력이 약해지면서 다시 고개를 든 것이다】을 금지하는 등 조정에서는 나름대로 개혁을 위해 안간힘을 썼다(물론 사정은 수십 년 전과 또 달라져서 이제는 더 나은 사회를 위한 개혁이 아니라 생존이 달린 개혁이다). 하지만 조선의 병은 갑자기 생겨난 게 아니라 수백 년째 내려온 체제 모순이 집적된 결과였으니 슈퍼맨이 나타난다 해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1862년 2월 드디어 가장 우려했던 사태가 터졌다. 사회적 피라미드의 맨 아래층에 있는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50년 전 홍경래(洪景來)의 꿈이 부활한 걸까? 하지만 사태는 그때보다. 더 심각하다. 그때는 조선시대 내내 지역 차별을 당하던 서북인들이 봉기한 것이지만 이번에는 조선 사회의 중추에 해당하는 남도인들이 들고 일어났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때는 봉기를 구상하고 준비한 거사 주체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조차도 없이 민중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사건이다.
문제는 고질화된 지방관의 학정에 있었다. 경상도 우병사(右兵使)인 백낙신(白樂莘)이 미리 국고를 삥땅쳐먹고 진주 농민들에게 호별로 부담금을 할당해서 메우려 한 게 사건의 계기가 된 것이다(이런 방식을 도결이라 부르는데, 앞에 나온 방납과 마찬가지로 원래는 서리들이 주로 쓰는 편법이었으나 이제 정식 지방관까지 가세할 만큼 사회가 부패해 있었다). 이에 격분한 유계춘(柳繼春, ?~1862)이라는 농민은 동네 장정들을 모아 거사를 급조하는데, 이것이 진주민란(晉州民亂)이라 알려진 사건이다. 조선 역사상 변방의 장수나 사대부(士大夫), 혹은 산적 두목이 반란을 일으킨 적은 있었어도 이렇게 기층 민중이 학정에 못 이겨 들고 일어난 경우는 처음이다.
불과 며칠 만의 모의로 거사한 것치고는 상당히 면밀하고 조직적인 봉기였다. 시위대는 우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인근의 장터로 달려가서 장을 취소하고 규모를 불렸다. 초군(樵軍, 나무꾼 부대)이라는 이름으로 자칭한 것에 어울리게 그들은 이마에 흰 수건을 두르고 농기구를 무기로 움켜쥐었으니, 오늘날 역사 기록화에 흔히 등장하는 전형적인 농민군의 모습이다. 게다가 그들은 봉기에 불참하는 농민들에게서는 벌금을 받고 반대하는 농민들에게는 보복을 가하는 등 급조된 시위대답지 않은 노련미를 과시했다. 이렇게 해서 수가 크게 늘어난 농민군은 곧바로 진주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최종 목표가 그것일 수밖에 없다는 게 애초부터의 한계였다.
백낙신에게서 도결을 철폐한다는 결정을 받아내고, 탐학을 일삼던 그의 부하들과 하급 관리들을 처단하고, 관청과 결탁해서 농민들을 착취하던 부호들에게서 재물을 빼앗는 등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린 뒤 농민군은 그것에 만족하고 자진 해산했다. 중앙정부에서 사태 수습에 나선 것은 그 다음이다. 안핵사(按覈使, 안핵이란 사태를 진정시키고 실상을 조사한다는 뜻이다)로 파견된 박규수(朴珪壽, 1807~76)는 겨우 나흘 동안에 벌어진 사태를 이후 석 달이나 걸려 수습했는데, 농민들은 유계춘 등 주도자 10명이 참수된 것을 포함해서 약 100명이 처벌받은 데 비해 관리들 중 처벌된 자는 스무명도 채 못 되었으니, 농민군은 본전도 건지지 못했다고 하겠다【박규수는 박지원(朴趾源)의 손자로서 할아버지의 실학 사상을 충실히 계승한 인물이었으므로 우리가 보기에는 실망스런 판결이지만, 당시의 체제로서는 불가피한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조정에 올린 보고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금번 진주의 난민들이 소동을 일으킨 것은 오로지 전 우병사 백낙신이 탐욕을 부려 침학(侵虐)한 까닭으로 연유한 것이었습니다. …… 난민들의 무도한 행동은 통분스럽습니다만, 진실로 그 이유를 따져보면 실은 스스로 빚은 일입니다.” 원래 안핵사란 난을 수습하기 위해 임명한 임시직책이었던 탓에 책임지기를 꺼려 누구도 맡고 싶어하지 않았으니, 박규수로서는 최대한 성의를 다한 셈이다】.
그러나 한 번 치솟은 민란의 불길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 해 9월에는 바다 건너 제주에서 바통을 이어받았다. 봉기의 계기도 진주의 경우에 비해 한층 진일보한 것이어서 이번에는 지방관의 탐학 때문이라기보다는 과중한 세금에 항의하고 나섰으니, 국가의 기틀 자체를 뒤흔드는 사건이다. 산간을 일구어 만든 화전에까지 제주 목사 임헌대(任憲大)가 과도한 세를 부과하자 농민 몇 명이 조세 수납을 담당한 서리의 집을 찾아가 때려 부수고 그동안 받아먹은 뇌물들을 불사른 게 제주민란(濟州民亂)의 신호탄이 된다. 순식간에 1천 명으로 늘어난 시위대는 폐단을 시정하겠다는 목사의 약속을 받아내고 일단 해산했으나 이제 문제는 단순히 조세에 있지 않다.
이 소식이 제주 인근으로 퍼져 나가면서 시위대는 수만 명으로 늘어난다. 이제 뇌물을 착복한 관리들과 부호들의 집을 때려부수는 것은 기본 코스고, 거기서 더 나아가 농민들은 목사에게 부패의 주범인 서리 다섯 명을 처단하라고까지 요구한다. 농민들의 서슬에 겁을 잔뜩 집어먹은 목사가 관청을 버리고 도망치자 농민들은 목사 대신 행정을 맡아 처리하니, 10년 뒤 프랑스의 파리에서 생겨나는 코뮌이라는 시민 자치체의 원조격이다. 결국 이듬해 봄에 중앙에서 안핵사가 파견된 뒤에야 사태를 간신히 수습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처형된 지방관의 수와 농민 지도부의 수가 스무 명 내외로 엇비슷해졌는데, 이것도 진주민란(晉州民亂)에 비해 진일보한 결과라고 해야 할까?
▲ 난세의 지도 남도에서 민란의 조짐이 커지고 있을 무렵인 1861년 김정호(金正浩)는 오랜 기간 발로 뛴 결실을 얻었다. 최초의 상세한 한반도 지도인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가 탄생한 것이다. 위에서 보듯이 오늘날의 지도와 대체로 차이가 없는 모습이다.
애초에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왕위에 올랐던 철종(哲宗)은 재위 중에도 자신의 뜻과는 달리 민란으로 얼룩진 시대를 보내고서 1863년에 죽었다. 그는 익종, 헌종(憲宗)과 달리 서른을 넘겨 살았지만 딸 하나만 두었을 뿐 후사를 남기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미 철종의 경우에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어 이제는 조정에서도 전혀 당황하지 않는다. 이제는 공식이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왕실의 또 다른 후손을 찾아낸 다음 ‘국왕 과외’를 교습시키고, 그동안 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다가 왕을 장가보내 외척을 붙여주고 친정을 하도록 독립시키는 게 그 공식이다.
각본은 있으니 캐스팅만 하면 된다. 대비의 역할은 익종의 과부인 신정왕후(神貞王后, 1808~90)다. 그녀는 오랫동안 시어머니 순원왕후의 그늘에 가려 별로 역할을 하지 못했으나 이제는 왕실에서 가장 지체 높은 어른이 되어 있다. 따라서 다음으로 중요한 왕의 캐스팅에 관한 권한은 신정왕후가 지니고 있다(원래의 의미와는 다르지만 이런 게 바로 진짜 ‘캐스팅보트casting vote’가 아닐까?). 조만영(趙萬永)의 딸이므로 우리에게는 ‘조대비’로 잘 알려진 신정왕후는 당연히 안동 김씨인 순원왕후에 의해 몰락한 자신의 가문을 부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왕의 캐스팅에 더욱 열심으로 노력한 결과 적임자를 찾아낸다.
순원왕후가 은언군의 후손에서 철종(哲宗)을 발굴해냈다면, 조대비는 은언군의 동생인 은신군(恩信君)을 맥으로 삼았다. 은신군의 손자인 이하응(李昰應, 1820~98)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마흔 살이 넘었으니 왕실의 대를 잇기에는 너무 늙은 나이다. 그렇다면 다른 후보를 찾아 나서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그에게는 명복(名福)이라는 열한 살짜리 둘째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이하응의 맏아들은 열여덟 살이었으므로 왕이 되기에는 너무 ‘고령’이다), 조정에 아직 버티고 있는 안동 김씨 세력을 축출하려는 조대비와 아들을 왕위에 올릴 절호의 기회를 맞은 이하응, 이 두 사람이 의기투합한 결과 명복 소년은 조선의 26대 왕인 고종(高宗, 1852~1919, 재위 1863~1907)으로 즉위하게 된다(정조 이후 조선의 여섯 왕은 모두 장헌세자의 직계 후손이었기에 나중에 고종은 장헌세자를 장조로 추존했다)【이하응은 십대 시절에 부모를 모두 여읜 뒤 안동 김씨의 탄압을 피해 숱한 고초를 겪었으니 안동 김씨에 반대하는 심정은 결코 조대비에 뒤지지 않았다. 특히 안동 김씨가 권좌에 컴백한 철종(哲宗)의 치세에 그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 일부러 시정잡배들과 어울려 방탕한 생활을 보냈으며, 심지어 안동 김씨 가문들을 찾아다니며 밥을 빌어먹다시피 한 탓에 온갖 멸시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는 가운데서도 야심을 버리지 않았던 그는 조대비의 조카에게 접근해서 대비를 소개받았고, 마침내 아들을 왕위에 올린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왕족으로서 밑바닥 생활까지 해본 처지였기에, 장차 권력을 손에 쥐면 세상을 한번 자기 뜻대로 만들어보겠다는 야망을 품을 수 있었을 것이다】.
▲ 기구한 왕후 순원왕후의 칠십 평생은 기구하기 짝이 없었다. 남편(순조), 아들(익종), 손자(헌종)를 차례로 보낸 뒤 만년에는 왕통이 끊기자 강화도령(철종)에게 왕실 과외까지 시켜야 했다. 사진은 그녀가 쓴 한글 편지들인데, 19세기 한글의 어휘와 서체를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다.
서학에는 동학으로
순조(純祖) 때부터 전통으로 자리잡은 ‘국왕 = 허수아비’의 등식이 있으니 고종(高宗)은 열한 살이 아니라 스물한 살이라 해도 아무런 실권을 가질 수 없다. 그럼 또 다시 풍양 조씨가 컴백한 걸까? 그런데 여기서부터 사정이 달라진다.
일단 캐스팅에 성공하면서 자신의 뜻을 이룬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는 것으로 고종(高宗)의 치세는 시작되었다. 그러나 한 번 가세가 몰락한 풍양 조씨는 대비의 소망과는 달리 세력을 회복하지 못한다(아무리 무도한 세도가문이라 해도 세도를 휘두를 만한 ‘인재’가 필요한 법이다). 그래서 권력은 자연히 그녀의 파트너인 이하응에게로 옮겨온다. 그가 바로 조선의 마지막 대원군이자 그 전까지의 대원군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실권을 지닌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다(그도 그럴 것이 그는 살아 있을 때 아들이 왕위에 오른 유일한 대원군이다). 따라서 그를 그냥 대원군이라 불러도 되겠다.
일단 집권자가 세도가문에서 왕실로 옮겨 왔으므로 60여 년 동안 조선의 정치와 사회를 황폐하게 만들었던 세도정치(勢道政治) 시대는 공식적으로 종말을 고했다. 하지만 시절이 시절이니만큼 대원군은 권좌에 오르자마자 권력을 행사하기에 앞서 지난 시대가 남긴 상처에서 비롯된 호된 신고식부터 치러야 했다. 그것은 바로 조선 역사상 가장 새롭고주체적인 종교 이념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우선 이름부터가 동학(東學)이니까 심상치 않다. 알다시피 서양의 | 사상과 문물은 서학이라 불렸으므로 동학이라면 필경 서학에 반대하는 입장일 게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름과 달리 동학이 주요 타깃으로 삼은 것은 서학이라기보다 유학이었다【동학이라는 이름은 서학을 대표하는 그리스도교가 천주교(天主敎)라는 이름으로 불렸기 때문에 생겨났다(‘예수’를 음차해서 ‘야소교耶蘇敎’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현재 사용하는 기독교基督敎의 기독이란 ‘그리스도’의 음차어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동학에서 모시는 신도 바로 천주다. 동학은 시천주(侍天主), 즉 천주를 모시는 신앙으로 출발했기 때문이다. 신의 이름이 같으니 민중이 혼란을 겪을 것은 뻔한 일, 따라서 동학은 이름에서 서학과의 차별화를 꾀한 것이다. 하지만 천주의 방향을 달리 설정했을 뿐 개념은 그대로 유지했다는 점에서 동학이 탄생하는 데는 100년 전부터 조선에 보급된 서학의 영향이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무릇 종교라면 다 그렇듯이 동학도 창시자가 있다. 잔반 가문에서 태어난 최제우(崔濟愚, 1824~64)는 일찌감치 전국 각지를 떠돌면서 장사도 하고, 의술과 점술 같은 잡기도 배웠다(아무리 몰락한 가문이라지만 양반 신분에 그럴 정도였다면 신분 해체가 전사회적 현상이었다는 이야기다). 삼십대에 들어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고 자각한 그는 여러 산을 돌아다니며 기도와 수련과 명상을 거듭하던 중 1860년 봄에 신의 부르심을 받는 신비한 종교 체험을 하게 된다. 이후 1년 동안 이념과 교리를 만든 뒤 1861년부터 그는 새 종교의 마케팅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한다.
신흥 종교답지 않게 포교는 대성공이었다. 불과 몇 개월 만에 교도의 수는 크게 늘었고 그 다음부터는 기존의 교도들이 새 교도들을 포섭하면서 동학의 교세는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했다. 도대체 마케팅 포인트 가 뭐길래 그토록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을까? 그것은 간단하다. 최제우는 바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가르친 것이다. 사회적 신분도 다르고 경제적 계급도 다른데 어떻게 모든 사람이 평등할까? 누구나 자기 안에 천주, 즉 한울님(하느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신분과 계급이라는 인간 세상의 기준으로 어찌 하늘이 내린 평등을 막을 수 있을까?
▲ 세상을 구하는 교주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의 초상이다. 어릴 때부터 학문에 밝았고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지만 한낱 종교의 교주에 불과한 사람이 ‘구세주’로 나설 만큼 조선의 병은 깊다.
개인권과 평등의 이념이 당연시되는 오늘날 같으면 특별할 게 없는 사상이지만, 당시 그런 주장은 엄청난 충격이고 대단한 파격이었다. 성리학적 질서, 중화적 질서에 따르면 이 세상은 신분의 구분이 당연한 것이다. 중국의 천자가 북극성이라면 사대부(士大夫)와 제후들은 그 주변을 날마다 한 바퀴씩 도는 별자리들이며, 백성들은 우주 곳곳에 흩어진 뭇별들에 해당한다. 이것은 하늘이 정해준 질서, 즉 천명이자 순리이므로 아무도 거역할 수 없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이나 한반도의 역대 왕들이 노상 입에 올리는 말이 바로 천명이 아니던가? 그런데 동학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게 오히려 하늘의 질서라고 주장했으니 그야말로 천지개벽할 사상이 아닐 수 없다(실제로 이후 동학東學에서는 개벽開闢을 모토로 삼게 된다).
이 새로운 종교를 바라보는 정부의 관점은 모호할 수밖에 없다. 서학과는 분명 다르다. 예수를 신으로 모시지 않을뿐더러 신부나 교회도 없으니까. 그러나 동학에서도 천주를 주장한다. 천주가 하늘에 있지 않고 사람 안에 있다는 점에서 뜻은 정반대지만 어쨌든 동학도 일종의 천주교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동학을 서학의 변종으로 간주함으로써 탄압의 구실을 만들어낸다. 물론 탄압의 진정한 이유가 동학(東學)이 서학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보다는 주장하는 내용이 성리학적 질서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지극히 불순한 것이었기 때문임은 말할 것도 없다.
최제우는 이제 정부의 추적을 피해 몸을 숨겨야 하는 처지가 되었으나 그렇다고 교세 확장을 중단하려 했다면 애초에 시작하지도 않았다. 1863년에 그는 전국 각지에 접(接)이라는 조직을 두고 접주를 임명하는 한편, 자신의 뒤를 이을 2대 교주로 최시형(崔時亨, 1827~98)을 지목해서 유사시에 대비했다. 과연 종교의 창시자답게 그것은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는 듯한 조치였다. 그 해 말에 결국 그는 일찍이 수련하던 시절에 기거했던 경주에서 제자 스무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듬해 1월 그는 효수되었는데, 말하자면 그게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의 데뷔작인 셈이다【최제우의 죄목은 사도난정(邪道亂正), 즉 사악한 믿음을 가지고 정의를 어지럽혔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의 사상은 수천 년 동안 동아시아를 지배해 온 중화세계의 유교 질서를 부정하는 것이었으니, 유일한 중화로 남은 조선 지배층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적절한 죄목이라 하겠다. 그가 갑자기 처형되는 바람에 동학교도들은 그가 평소에 써놓은 글들을 모아 『동경대전』이라는 책으로 엮었고, 그가 지은 노래들을 모아 『용담유사』라는 노래집을 펴냈다 (용담은 최제우가 수련한 경주의 연못이다). 노래집은 좀 특이한데, 아마도 동학교도들이 서학(그리스도교)의 성서와 성가집을 염두에 두고 책을 편찬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출범 초기부터 어려움을 겪은 그는 이후 집권 시기 내내 온갖 시련에 맞닥뜨리게 된다.
▲ 경전과 노래집 위쪽은 동학의 기본 경전인 『동경대전(東經大全)』이고, 오른쪽은 한글로 된 포교 가사집인 『용담유사(龍潭遺詞)』다. 경전과 노래집이라면 아무래도 그리스도교의 성서와 찬송가집이 연상된다. 게다가 서학에 맞선다는 이름에서나 인본주의를 주장한 교리로 볼 때 동학이 그리스도교에서 힌트를 얻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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