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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부 불모의 세기 - 2장 허수아비 왕들, 한양에 간 원범 총각(철종)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11부 불모의 세기 - 2장 허수아비 왕들, 한양에 간 원범 총각(철종)

건방진방랑자 2021. 6. 21.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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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양에 간 원범총각

 

 

피로 얼룩진 헌종(憲宗)의 치세는 물로도 얼룩졌다. 15년에 이르는 그의 재위 기간 중에서 9년이나 홍수 피해를 입었으니 그 점에서는 순조(純祖)의 치세에 못지 않다. 한 가지 더 닮은 꼴이 있다면 사실상의 통치자(세도가의 보스)가 수를 다하고 죽자 얼마 뒤에 왕도 젊은 나이에 죽었다는 사실이다. 김조순(金祖淳)이 죽고 순조가 뒤를 따랐듯이, 1840년에 조만영(趙萬永)이 죽자 헌종(憲宗)3년 뒤에 스물두 살의 나이로 죽었다.

 

순조(純祖) 부부의 운명은 기구하기도 하다. 일찍이 순조는 아들 익종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다가 아들이 일찍 죽는 바람에 다시 재위하는 고초(?)를 치렀지만, 순조의 아내는 손자인 헌종(憲宗)에게 친정을 맡기면서 수렴청정을 거두었다가 헌종이 일찍 죽는 바람에 다시 수렴을 치고 국정에 임해야 했다. 하지만 그건 이차적인 문제고 당장은 어떻게든 왕통을 이어가야 한다는 게 순원왕후의 고민이다. 헌종은 그 젊은 나이에 계비까지 들였지만 후사를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순조-익종-헌종의 삼대는 워낙 손이 귀했을뿐더러 왕이 요절하는 사태가 잇따르고 보니 아예 왕위계승자의 씨가 말라 버렸다. 어쨌든 순조(純祖)의 직계 혈통은 헌종으로 끝났으므로 순원왕후는 왕실 혈통을 더 거슬러 갈 수밖에 없다여기서 당시 조선 왕실의 혈통을 정리해보자. 우선 정조(正祖)는 두 아들을 두었지만 맏이가 어릴 때 죽었으므로 순조가 외아들인 셈이다. 또 순조도 딸만 여럿을 두었고 아들은 익종 하나밖에 낳지 못했다. 익종은 워낙 젊어서 죽었으니 헌종 하나라도 낳은 게 다행이다. 그러나 헌종은 아들은커녕 딸도 낳지 못했다. 따라서 헌종이 죽음으로써 순조의 혈통만이 아니라 정조의 혈통마저 모두 끊긴 셈이다. 왕실 족보를 샅샅이 뒤진 결과 다행히도 그녀는 장헌세자의 후손들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혜경궁 홍씨로부터 비롯된 후손은 맥이 끊겼지만 숙빈 임씨가 낳은 장헌세자의 서자 은언군(恩彦君)의 후손이 있었던 것이다. 순원왕후로서는 금맥을 발견한 기분이었겠지만, 한 나라 왕실의 방계 혈통이 이렇듯 어렵사리 발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뭘까?

 

은언군의 아들 이광(李㼅, ?~1844)은 출생년도조차 확인할 수 없을 만큼 철저히 잊힌 존재였다. 물론 그럴 만한 사연은 있다. 아버지 은언군은 영조(英祖) 시대에 상인들에게 빚을 지고 유배된 적이 있는가 하면, 형은 모반죄에 연루되어 죽었고, 어머니와 형수는 그리스도교 신도로서 신유박해(辛酉迫害)에서 처형된 것이다. 그 때문에 이광은 어린 시절부터 강화도의 유배지에서 살다가 끝내 거기서 농사꾼으로 죽어야 했다. 아무리 서자 출신이라지만 엄연한 왕실의 혈통임에도 형편이 그럴 정도였다면 당시 조선 왕실의 위상이 어땠는지는 알 만하다. 한미한 사대부(士大夫) 집안의 족보에도 자손들의 출생기록 정도는 보관되어 있게 마련인데, 이광의 가문은 그런 족보조차 없었던 것이다(또한 왕족의 집안에서도 신도가 나왔다는 사실은 당시 그리스도교가 얼마나 널리 퍼져 있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왕실의 웨딩포토 조선은 형식상 왕국이니까 나라의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왕실 행사가 가장 중요하다. 그림은 1844헌종(憲宗)의 호화스런 결혼식 장면을 담고 있는데, 모두 여덟 폭으로 된 병풍의 일부다. 그러나 헌종은 결혼을 했어도 여전히 무능한 왕이었던 데다 젊어서 죽는 바람에 왕실의 손마저 끊는 치적(?)을 남겼다.

 

 

다행히 이광은 박복한 삶을 살았어도 자식복은 있었다. 그가 죽고 나서 얼마 뒤에 아들인 이원범(李元範)이 왕위에 오른 덕분에 그는 사후에라도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으로 추존되는 영광을 얻었다(선조宣祖인조仁祖의 아버지에 이어 역사상 세 번째 대원군이다). 열여덟 살의 강화도 총각 이원범은 영문도 모르는 채 한양으로 가서 생면부지였던 할머니 순원왕후를 만나 헌종(憲宗)의 대를 잇는다. 그가 바로 조선의 25대 왕인 철종(哲宗, 1831~63, 재위 1849~63)이다.

 

순조(純祖)부터 비롯된 새로운 전통에 따르면 철종은 그냥 왕궁에서 놀면 될 뿐 아무런 할 일도 없다. 따라서 다시 수렴을 내리고 청정에 나선 순원왕후가 해야 할 주요 임무도 촌놈 손자를 왕실 법도에 맞게 처신하도록 다듬는 것, 즉 조선판 말괄량이 길들이기밖에 없다. 육순의 나이에 새삼스럽게 육아를 떠맡은 것은 좀 귀찮았겠지만.

 

강화도 총각이 왕실에 온 지 2년 뒤, 이제 좀 다듬어졌다 싶자 순원왕후는 손자에게 아내를 얻어준다. 철종에게 총각 딱지를 떼어준 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그것으로 세도가문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새로 궁에 들어온 손주며느리는 순원왕후의 친정인 안동 김씨 집안이었던 것이다. 이로써 한동안 풍양 조씨에게 눌려 지내던 안동 김씨는 화려하게 컴백했다. 권력이 안정되자 그 이듬해인 1852년 왕후는 드디어 수렴을 접었고, 그와 동시에 철종(哲宗)의 장인인 김문근(金汶根, 1801~63)이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으로서 국정을 도맡았다원래 부원군이라는 명함은 조선 초부터 있었다. 세조(世祖) 때 측근 공신들에게 내준 것인데, 곧 왕의 장인에게도 부여하는 직함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접어든 이 무렵에 부원군의 직함이 마치 새로운 것처럼 등장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조선이 왕국이던 시대와 사대부(士大夫) 국가이던 시대, 18세기까지 부원군은 단지 명예직에 불과했지만, 세도정치(勢道政治) 시대부터는 세도가문의 보스로서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되기 때문이다. 세도정치의 초대 보스인 김조순(金祖淳)의 명함은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이었다.

 

자신이 빈농 출신이었던 만큼 철종(哲宗)은 다른 것은 다 몰라도 빈민구호에는 제법 열심이었다. 마침 선혜청이라는 좋은 이름의 관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선혜청의 국고를 부지런히 재해를 입은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게 한다. 그러나 국왕의 이런 시혜를 지방관들은 다르게 해석했다. 물론 빈민구호 때문만은 아니지만 아무튼 그로 인해 가뜩이나 어려운 국가 재정이 더욱 부실해지자 그들은 알아서 제 몫을 챙기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더구나 그들에게는 삼정이라는 좋은 수탈의 도구가 있다. 세도정치(勢道政治) 시대 초기부터 가속화된 삼정의 문란이 극도에 달한 것은 이 무렵이다. 그와 더불어 지방관들의 탐학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의 저항이 본격화된 것도 그 무렵이다.

 

 

조선의 프롤레타리아 궁지에 몰린 사람이 팔 것은 제 몸밖에 없다. 사진은 1862년 어느 빈민이 자신과 아내는 물론 앞으로 태어날 아이까지 팔겠다고 약속한 문서다. 이것을 자매문기(自賣文記), 자신을 파는 문서라고 부른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무의미한 왕위계승

원범 총각, 한양에 가다

총체적 난국

서학에서 동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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