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부 불모의 세기
사대부(士大夫) 체제의 완결판은 결국 황폐한 세도정치였다. 국왕은 완전한 허수아비가 되었고, 사대부들은 사리사욕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아들을 왕으로 앉힌 아버지가 시대착오적인 쇄국을 내세우는가 하면 며느리는 그런 시아버지를 내쫓고 외세를 마구잡이로 끌어들였다.
지배층의 이런 무책임과 무능은 급기야 나라마저 빼앗기는 결과를 빚고 만다.
▲ 영화 [자산어보]의 장면. 신유박해로 체포된 정씨 삼형제들.
1장 사대부 체제의 최종 결론
과거로의 회귀
정조(正祖)는 뚜렷한 병명이 없이 등과 머리에 종기가 돋는 일종의 열병을 앓다가 죽었다. 그런 탓에 한참 뒤까지도 그가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물론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대수롭지 않은 병인 데다가 발병한 지 20일도 채 못 되어서 죽은 과정이 아무래도 미심쩍기는 하다. 그러나 정황상으로 보면 독살의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범인은 노론 벽파밖에 없는데, 만년의 정조는 이미 개혁을 포기했으므로 그들과 갈등을 빚을 만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독살설이 완전히 잦아들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그의 사후 곧바로 모든 체제가 예전 상태로 돌아갔기 때문일 터이다. 정조가 죽자 규장각(奎章閣)은 본래의 기능인 도서관으로 권한이 축소되었으며, 그가
그토록 공을 들였던 장용영(壯勇營)도 허무하게 해체되어 버렸다. 그보다 더 명백한 과거로의 회귀는 노론 벽파가 권력의 일선에 등장한 것이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격이랄까? 정조(正祖)의 치세 내내 야당의 위치에 있었던 벽파가 순식간에 여당으로 탈바꿈했으니, 정조의 사인을 놓고 뒷말이 많을 수밖에 없다.
사실 벽파가 권좌에 컴백한 데는 한 인물의 공이 컸다. 바로 영조(英祖)의 계비였던 정순왕후다. 일찍이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그녀는 정조의 치세에도 줄곧 노론 벽파를 두둔했다. 그런 상황에서 겨우 열 살짜리인 정조의 둘째 아들 순조(純祖, 1790~1834, 재위 1800~34)가 왕위를 계승했으니(맏아들은 어려서 죽었다) 정권이 바뀌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공교롭게도 정조가 왕권을 강화해놓은 것은 오히려 노론이 컴백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여당이었던 시파 세력은 정조(正祖)의 치세에 왕을 보좌하는 역할로만 스스로를 국한시켰기에 정조가 죽음으로써 자연히 여당의 지위마저도 유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은 300년 전 강력한 왕이었던 세조(世祖)가 죽자 그동안 숨죽여 지냈던 사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과 닮은 데가 있다. 당시에도 세조 시절에 왕당파를 이루었던 훈구파는 사림에 비해 유리한 지위에 있었으나 막상 왕이 죽자 권력을 독점하지 못하고 사림의 진출을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는 조선이 사대부(士大夫) 국가로 변질된 것인데, 이번에는 어떻게 될까?】.
대왕대비의 자격으로 증손자의 수렴청정을 맡게 된 정순왕후는 즉각 벽파의 보스인 심환지(沈煥之, 1730~1802)를 영의정에 임명하고 시파의 인물들을 숙청해서 노론의 새 세상, 아니 ‘옛 세상’을 만든다(당시까지 정조의 어머니인 경의왕후와 부인인 효의왕후가 살아 있었고 게다가 경의왕후는 정순왕후보다 나이도 열 살이나 위였지만, 감히 정순왕후에게 도전할 수 없었다. 서열에서 뒤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정순왕후처럼 정치적인 야심이 없었던 데다 노론의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상이 바뀌었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정순왕후는 1801년 자신의 최대 치적을 남기는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단순히 종교적인 쟁점만 있지 않았다.
10년 전의 신해박해(辛亥迫害)로 조선의 그리스도교는 일단 크게 제동이 걸렸으나 앞서 본 바와 같이 정조(正祖)가 비교적 관대한 입장에서 중재에 나선 덕분에 존폐의 위기는 넘길 있었다. 물론 이후에도 그리스도교에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한바탕 홍역을 치르고 난 덕분에 그리스도교는 포교 종교 특유의 전파력을 바탕으로 다시 꾸준히 교세를 확장할 수 있었다. 그 결과 1794년에는 최초의 외국인 신부인 주문모(周文謨, 1752~1801)가 청나라에서 들어와 포교 활동을 벌이게 되었다. 그의 비밀 입국으로 인해 이듬해에 다시 박해 사건이 있었지만, 규모가 크지 않았으므로 그런 대로 그리스도교는 조선에 서서히 뿌리를 내려가는 듯 보였다.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가 거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반드시 그리스도교를 뿌리뽑겠다는 의도에서가 아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에게 더 시급한 과제는 오랜만에 되찾은 권력을 공고히 다지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아직 조정에 남아 있는 시파와 신해박해(辛亥迫害) 당시 노론 내에서 신서파를 이루었던 세력을 일망타진해야 한다. 그 도구로 그리스도교만큼 좋은 게 또 있을까? 그래서 왕후와 노론 벽파는 전국의 그리스도교도를 색출해서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린다. 이것이 신유박해(辛酉迫害)인데, 앞서의 종교 탄압과 다른 점은 꼬투리를 잡을 만한 별다른 사건이 없었음에도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그리스도교 탄압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최초의 외국인 신부 주문모는 서울 용산 부근 한강변에 있는 새남터라는 모래사장에서 참수되었고, 몇 차례나 배교 선언을 하면서 용케 살아남았던 이승훈도 이번만은 살아남지 못했으며, 정씨 삼형제도 하나(정약종)가 처형되고 둘은 유배형을 받았다. 그밖에 전국적으로 300여 명의 그리스도교도가 처형당함으로써 이 사건은 한국 그리스도교사에 최초의 대대적인 박해로 기록되었다【그러나 살아남은 교도들이 산간 지방으로 숨어들면서 오히려 이후 그리스도교는 전국 각지로 확산되고 기층 민중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갔다. 그리스도교의 초기 역사에서 보듯이 무릇 종교란 정치적 탄압이 심할수록 더욱 널리 퍼지는 법이다. 이렇게 탄압 속에서 교도가 꾸준히 늘어간 탓에 그 뒤에도 19세기 내내 거의 정기적으로 대규모 종교 박해가 일어나게 된다. 아마 오늘날 한국의 그리스도교가 주로 천박한 기복(祈福) 신앙의 형태로 자리잡게 된 이유는, 초기에는 사대부(士大夫) 층에 퍼졌으나 그러한 각종 탄압으로 인해 결국 기층 민중 속에서만 뿌리를 내린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노론 벽파에게 그런 사교 무리의 대량 살육은 부수적인 성과일 뿐이다. 그들에게는 조정의 반대파를 제거함으로써 마침내 안정적인 권력을 구축하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목적은 이루어졌다. 단일한 계파가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조선의 집권 사대부들은 사상 처음으로 당쟁으로부터 벗어나 단일한 색깔을 가지게 되었다. 낱알들을 체로 거르고 나면 최후에 남는 것은 가장 큰 알갱이들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자기들끼리의 권력다툼을 거치고, 영조(英祖)와 정조(正祖) 두 대에 걸쳐 왕권과의 경쟁도 헤치고 나온 결과 최후에 남은 사대부 세력이 결국 가장 성리학적 이념의 농도가 짙은 노론 일색이라는 것은 자연법칙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역사적 필연이라 해야 할까?
어쨌든 이제 역사의 시계추는 완전히 과거로 회귀했다. 왕이 권력을 독점하던 야만의 시대도 끝났고, 오랑캐에게서 배우려던 ‘무지’의 시대도 끝났으며, 사대부(士大夫)들이 편을 갈라 당쟁을 일삼던 ‘혼란’의 시대도 끝났다. 최후로 살아남은 노론은 마침내 노론이라는 이름마저 버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그들이 할 일은 사대부 체제를 어느 때보다도 완벽하게 구축하는 것이다. 이상적인 사대부 체제란 뭘까? 그것은 바로 국왕이 상징이자 허수아비로 존재하고 사대부들이 실권의 담당자로 역할하면서 국정을 전담하는 체제다.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300년 동안 사대부 체제가 지속되면서 내내 그 결론은 변함없었다. 다만 그 체제가 계속 삐걱거렸던 이유는 그동안 사대부들 간에 이념과 견해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랜 당쟁을 거치면서 결국 그 쟁점마저 정리됨으로써 이제서야 비로소 완벽한 사대부 체제를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순조(純祖)는 그 체제에 어울리는 완벽한(?) 왕이다. 우선 정비가 아니라 후궁을 어머니로 두었다는 결격 사유가 있다(정비인 효의 왕후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게다가 나이도 어리고 성격도 유약하다. 이만하면 훌륭한 허수아비가 될 자질을 갖춘 셈이다. 다만 왕실 세력인 정순왕후가 아직 실세로 버티고 있다는 게 좀 걸리는데, 이 문제는 1804년에 수렴청정이 폐지되고 그 이듬해에 그녀가 죽으면서 저절로 해결된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뭘까? 그것은 바로 사대부(士大夫)들의 보스를 정하는 문제다. 당쟁이 사라졌으니까 이제는 사대부들에게도 보스가 필요하다. 물론 공식적인 지위는 아니지만, 왕이 상징적인 권력자라면 사대부의 보스는 현실적인 권력자이므로 대단히 중요한 자리다. 이런 배경에서 초대 보스로 떠오른 자는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이었다.
여러모로 그는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걸맞는 최적임자였다. 영조(英祖) 초기에 이른바 노론 4대신의 하나였던 김창집의 후손이니 노론의 성골인 셈이고, 1802년 그의 딸이 순조(純祖)의 아내가 되었으니 당당한 왕실 외척의 신분이다. 게다가 그는 정조(正祖)의 신임을 받았고 장차 순조를 도와 국정을 살펴달라는 정조의 유언까지 받았으므로 권좌에 오르는 것도 자연스럽다. 그가 사실상의 집권자로 공인되면서 조선의 새로운 체제는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오랜 사대부 체제의 전통이 낳은 최종적인 결론, 성리학적 세계관이 빚어낸 최후의 산물, 역사상 가장 완벽한 사대부 체제, 그것은 바로 세도정치(勢道政治)다.
▲ 한국의 남녀? 중국은 일찍부터 유럽에 알려졌고, 일본도 15세기에 포르투갈의 상인과 선교사들이 출입했지만, 조선은 18세기까지 서양인 선교사가 발붙인 적 없는 순결한(?) 곳이었다(물론 그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서양인들이 조선을 중국의 일부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조선에 관해 완전히 무지했는데, 위의 그림이 그 점을 잘 보여준다. 1806년 어느 프랑스 화가의 판화 작품으로, 제목은 「한국의 남녀」다.
혼돈의 시작
개인적으로 보면 김조순(金祖淳)은 품성이 너그럽고 권력욕이 없을뿐더러 탕평책(蕩平策)의 지지자였던 탓에 정조(正祖)에게서도 두터운 신임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세도정치(勢道政治)의 초대 보스가 되었다는 사실은 세도정치가 어느 개인이나 집단의 발명품이 아니라 수백 년간 진화해 온 사대부(士大夫) 체제의 피할 수 없는 결론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따라서 세도정치의 책임을 김조순에게 묻거나, 그의 가문이자 나중에 세도정치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안동 김씨 집안에게 전가할 수는 없겠다(무사안일주의적 성향 때문에 기생 출신의 첩실이 국정을 주무르는 것을 용인했으니 김조순(金祖淳)의 잘못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역사학자들은 흔히 세도정치의 기원을 정조(正祖) 초기에 집권했던 홍국영이라고 말하는데, 마찬가지 맥락에서 그것도 역시 옳지 않은 이야기다. 세도정치의 사전적인 정의는 국왕의 총신이나 왕실 외척이 국정을 장악하고 독재를 일삼았다는 것이지만, 지금까지 보았듯이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사대부 체제는 사실상 그런 정치를 지향해 왔으므로 세도정치(勢道政治)는 결코 19세기 초반에 느닷없이 출현한 체제라고 볼수는 없다. 물론 특정한 개인 또는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게 된 것은 세도정치 시대만의 특징이지만, 그것은 사실 사대부(士大夫) 지배 체제의 연장이며 최종적인 결과라고 봐야 할 것이다】.
1804년부터 순조(純祖)는 친정에 나섰으나 어른이라 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분위기인 판에 열네 살짜리 소년왕이 무슨 일을 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게다가 아버지와는 영 딴판으로 그 아이는 국왕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려는 의지조차 없었다. 따라서 말이 친정일 뿐 사실상의 국정 운영은 모두 김조순(金祖淳)의 가문인 안동 김씨들이 도맡게 된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국정 수행에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정부 요직을 그들의 일가붙이들이 몽땅 독차지하는 것이었다. 나라일보다 그 일을 더 열심히 한 탓에 김조순(金祖淳)의 바로 윗 항렬인 김이익(金履翼)과 김이도(金履度), 그리고 같은 항렬인 김희순(金羲淳)과 김달순(金達淳) 등 안동 김씨 가문의 남자들은 대사헌, 홍문관 제학,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지금의 서울시장 격), 6조의 판서 자리를 자기들끼리 사이좋게 주고받으며 각자 모두 화려한 커리어를 쌓게 된다. 오늘날로 치면 입법부-사법부 행정부를 한 가문이 주름잡은 격이니 이런 이력서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아주 드물다.
그러나 중앙정치는 그렇게 말아먹을 수 있다 해도 지방행정까지 그런 식으로 주무를 수는 없다. 아무리 번식력이 왕성하다 해도 한 가문에 속한 남자의 개체 수에는 엄연히 생물학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한 가지 방법을 고안하는데, 그것은 바로 뇌물을 받고 관직을 팔아먹는 것이다. 매관매직이라 알려진 이 ‘비법’을 통해 안동 김씨 가문은 재산을 증식하고, 자파의 인물들을 지방관에 임명하고, 나라의 행정조직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으니, 꿩 먹고 알 먹고 털 팔기란 바로 그런 것을 가리키는 말일 게다.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자리를 잡으면서 그나마 지배 이데올로기이자 도덕적 규준으로서 체면치레를 해왔던 성리학적 이념의 탈은 이제 아무런 쓸모도 없어졌다. 또한 그나마 객관적이고 공평한 관리 임용제도였던 과거제(科擧制)는 그야말로 과거의 유물이 되어 버렸다. 정점에 올랐으면 내려가는 게 자연 법칙이듯이 가장 완벽한 사대부(士大夫) 체제가 완성되는 순간(바꿔 말해 목표를 달성하는 순간) 조선의 사대부들은 모든 것을 개판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그런 코스가 예정되어 있었다고 해도 어쩌면 그렇게 순식간에 송두리째 무너질 수 있을까?
▲ 백성들의 삶 사대부 체제의 결정판인 세도정치 시대에 접어들자 조선사회의 모든 모순은 마치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그 최대의 피해자는 단연 농민들이다. 그림은 19세기 초반의 화가 김득신이 그린 풍속화인데, 토속적인 멋보다는 당시 조선 백성들의 피폐한 삶이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시작된 지 불과 5~6년 만에 조선 사회는 완전한 혼돈의 구렁텅이로 빠져든다. 기존의 토지제도가 무너진 이후 대토지 겸병이 유행처럼 번져 자영농이 대부분 소작농으로 바뀐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 그래도 백성들의 삶이 그럭저럭 모양새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대동법과 균역법(均役法) 등의 개혁적인 제도들이 임시방편으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앙과 지방의 정치가 극도로 문란해지면서 대동법(大同法)과 균역법도 기능 마비 상태에 이른다. 그나마 대동법은 중앙으로 오는 대동미가 지나치게 많아진 탓에 지방에서 다시 요역을 부과하는 제도로 역행하면서 자체 붕괴하는 식이었지만, 균역법은 애초부터 권력이 청렴하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는 제도였기에 세도정치(勢道政治) 하에서는 도저히 제 기능을 할 수 없다. 이처럼 조세제도가 붕괴하자 마치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지방관들의 탐학은 절정에 달한다.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정(還政)의 이른바 삼정이 무너지면서 가뜩이나 어려운 백성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진다【전정은 토지에서 나오는 조세를 수취하는 것이고 군정은 군역을 가리킨다. 정확히 대응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대동법(大同法)은 전정과, 균역법(均役法)은 군정과 관련이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환정이란 춘궁기에 농민들에게 곡식을 빌려주었다가(이 곡식을 환곡還穀이라 불렀다) 추수기에 갚도록 하는 조치를 말한다. 따라서 원래는 구빈(救貧) 행정이었지만, 다른 제도들도 그렇듯이 국가 체제가 엉망이 되면서 환정도 본래의 취지는 사라지고 오히려 빈민의 처지를 이용해 국가 재정을 늘리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말하자면 정부가 환곡에 이자를 붙이기 시작한 것인데, 16세기에는 이자율이 1/10이었다가 점차 늘어 19세기에는 50퍼센트에 달할 만큼 높아지게 된다. 더욱이 지방관들의 농간으로 강제 대여를 하기도 했으니, 국가가 앞장서서 고리대금업을 한 셈이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아마 국가 재정의 손실이 빚어졌다는 게 가장 큰 걱정이었을 것이다.
1808년 함경도에서 소규모의 민란이 일어났다. 이듬해에는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홍수가 발생했고, 또 그 이듬해에는 역시 북도 지방에서 겨울에는 지진, 여름에는 홍수가 일어났다. 1811년 2월에는 황해도 곡산에서 백성들이 관청을 습격하고 감옥을 부수는 사건이 터졌다. 북부의 흉흉한 사정을 보여주는 이 일련의 사건들은 그 다음에 일어날 대형 사건을 예고하는 조짐이었다. 1811년 12월에 일어난 홍경래(洪景來, 1780~1812)의 난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홍경래는 이미 10여 년 전부터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과거에 낙방한 뒤 관직의 꿈을 접고 지관이 되어 전국을 떠돌아 다니던 그는 평안도 가산(嘉山)의 부호인 이희저(李禧著)의 집에서 우군칙(禹君則, 1776~1812)이라는 동업자를 만난다. 시국을 논하면서 자연스럽게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시국을 논하기만 할 게 아니라 아예 바꾸면 어떻겠냐는 생각을 품게 된다. 마침 그들에게는 새 세상을 건설하는데 필요한 이념도 있다. 그것은 바로 지관들의 성서나 다름없는 『정감록』의 사상이다. 비록 정감록』에서 새 세상의 군주라고 예언한 정진인(鄭眞人, 정씨 진인)은 아직 찾지 못했지만 홍진인(洪眞人)인들 어떠랴? 사대부(士大夫) 세상인 이씨 조선을 끝장내고 새 세상을 이룬다면 『정감록』의 예언은 이루어지리라.
그러나 이념만 가지고 될 일이 아니다. 거사가 성공하려면 그에 필요한 인력과 경제력과 물리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잔반(殘班, 몰락한 양반)들을 비롯해서 체제에 대한 불만을 품은 인물들을 끌어모으고, 중앙의 대상인들과 갈등 관계에 있던 현지 상인들과 중소 부호들을 규합하는 한편, 광산노동자와 빈농, 유랑민들을 군대로 조련했다. 이렇게 해서 김사용(金士用), 김창시(金昌始) 등이 중간 보스로 가담했고, 우군칙과 이희저의 재력은 거사 자금이 되었으며, 홍총각(洪總角)과 이제초(李濟初)를 비롯한 뛰어난 무사들이 반란군의 무력을 담당하게 되었다【홍경래는 잔반, 우군칙은 서얼, 이희저는 노비, 홍총각은 양인 출신이었으니 반란 세력은 그야말로 각계각층을 망라했다고 볼 수 있다. 비록 반군은 『정감록』에 사상적 기반을 두었다고는 하나, 그토록 신분이 다양했다는 사실은 성리학적 이념의 귀결이라 할 세도정치(勢道政治) 시대에 오히려 신분 해체가 가속화되었다는 아이러니를 말해준다. 이희저는 원래 역노(驛奴)였다가 당시 성행하던 청나라와의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인물이고, 홍총각은 물고기와 소금을 말에 싣고 다니며 파는 상인이었는데, 힘과 무용을 갖춘 장정들을 물색하던 홍경래의 눈에 띄어 반군지도자로 발탁되었다】. 이렇듯 10여 년에 걸쳐 조직적인 준비가 진행되는 동안 중앙정부가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할 정도였다면, 반란 주체의 능력도 능력이겠지만 그보다는 정부의 무능을 탓해야 할 것이다.
조선 역사상 이런 반군은 없었다. 일찍이 이처럼 철저한 준비 과정을 거치고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성리학 이념과 사대부(士大夫) 체제에 조직적으로 맞선 반군은 없었으며, 심지어 노동자와 빈농들로 이루어진 병사들을 급료까지 주면서 정식으로 고용한 반군도 없었다. 과연 출발부터 남달랐던 이들은 봉기한 후 열흘 만에 청천강 이북을 완전히 장악하는 데 성공했고, 가는 곳마다 백성들은 물론 하층 관리들에게서까지 적극적인 호응을 받았다.
그러나 무릇 역사상 첫 시도란 아무래도 위험이 따르게 마련이다. 성분이 다양한 만큼 반군 세력은 이념이나 행동에서 일치를 이루기가 쉽지 않았다. 양반과 부농으로 이루어진 지도부와 소농과 빈농 출신인 병사들은 이해관계가 상당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세도정치로 썩어가는 중앙정부와 전통적인 북도 차별 정책을 비판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적극적인 대안을 내놓지 못한 것은 반란이 장기화될 경우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었다(반군이 예언한 것처럼 정진인이 곧 등장하지 않은 것도 당시로서는 큰 문제였을 것이다. 새로운 지도자가 나타나야 이씨 조선을 대체할 새 왕조를 표방할 수 있을 테니까), 이런 문제점들이 잠재되어 있었기에 정신을 차린 관군이 반격을 가하자 반군은 곧 수세에 몰려 정주성으로 퇴각하게 된다.
내분의 요소가 있는 한 장기적인 농성이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군은 이후 4개월이나 정주성에서 버텼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저항의 주체가 급료를 받는 반군의 ‘정식’ 병사들이 아니라 인근의 소농민들이었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지지를 얻기보다 오로지 반란을 진압하겠다는 일념으로 관군은 대대적인 초토화 전술을 폈는데, 이 과정에서 농민들은 농토를 잃었을 뿐 아니라 관군의 태도에 적개심을 품은 것이다. 반군을 따라 성 안으로 들어온 그들은 오히려 반군 주력군보다 더 적극적으로 항전했다. 하지만 반군이 정주성으로 퇴각하는 순간 이미 대세는 결정되어 있었다. 한동안 공성하는 측과 농성하는 측은 대등하게 맞서는 듯하다가 결국 관군이 화약으로 성벽을 무너뜨리면서 전세가 확연히 기울었다.
비록 이 반란은 새 왕조를 건설하지도, 세도정치(勢道政治)를 끝장내지도 못했지만, 사건의 후유증은 컸다. 무려 2천 명에 가까운 반군 일당을 처형했어도 정부는 흉흉해진 민심을 다잡을 수 없었다. 심지어 홍경래는 관군이 성을 공략할 때 총에 맞아 전사했는데도 그가 어디론가 도피해서 살아 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고 나돌 정도였다.
그 뒤에도 순조(純祖)의 치세에는 제주와 경기도에서도 민란이 일어났고,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는 대자보 사건이 여러 차례 있었으며, 전국 각지에서 도적과 거지들이 들끓었다. 게다가 인심에 이어 천심마저 잃었는지 순조의 치세 34년 동안 무려 19번의 여름이 대홍수로 얼룩졌는가 하면 전염병도 크게 번졌다.
이씨 조선은 엄청나게 운이 좋거나, 아니면 억세게도 명이 질긴 왕조였다. 망국적인 당쟁으로 늘 지배층이 분열되어 있었고, 대규모의 외침을 수 차례나 받은 데다가 이제는 기층 민중이 조직적으로 들고 일어났는데도 이씨 조선의 철밥그릇은 좀처럼 깨어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다른 관점으로 보면 이 무렵에 조선은 사실상 멸망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왕실의 명맥만 유지되었을 뿐 국가의 기능은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선 조세제도가 마비되면서 국가 재정이 거덜났다. 또 백성들은 자영농에서 소작농으로, 소작농에서 화전민으로, 화전민에서 유랑민으로 바뀌면서 국가의 관할에서 벗어났다. 아무리 왕조시대라고 하지만 이처럼 주권과 국민이 사라진 국가를 국가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무것도 자랄 수 없는 불모의 땅이 되어 버린 조선에 마지막 꽃을 피우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은 그 무렵이다. 거의 시들어가는 실학의 끝자락을 움켜쥐고, 비록 실천되지 못할 이론이지만 문헌상으로나마 개혁의 모든 사상과 총론을 집대성하려 했던 정약용(丁若鏞)의 꿈이 바로 그것이다. 그가 제기한 대안들이 50년 전에만 실행에 옮겨졌더라도 조선의 19세기는 그토록 황폐한 시대가 되지 않았으리라.
▲ 정주성의 대치 조선 백성들만큼 지배층을 편하게 해주는 민족이 또 있을까. 당쟁만 일삼으며 모든 면에서 철저히 무능했던 집권 사대부(士大夫)들을 내내 용서해주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무능을 넘어 부패에까지 이르자 드디어 민중이 들고 일어났다. 그림은 정주성으로 들어간 홍경래 군을 진압하기 위해 중앙에서 파견된 군대의 모습이다.
불모의 땅에 핀 꽃
난세를 살았던 만큼 정약용의 사상은 혼란스러울 정도로 복잡다단하다. 우선 그는 무척 폭넓은 오지람을 자랑한다. 지금의 학문 분류로 말하면 그는 철학, 문학, 역사, 언어학 등 인문학은 물론이고 정치학, 행정학, 법학, 경제학 등 사회과학, 나아가 과학기술과 종교 분야까지 아우르는 백과사전적 지식인에 속한다. 사실 정약용이 실제 이상으로 과대포장된 데는 그렇듯 분야를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으로 활약한 덕택이 크다.
물론 처음부터 정약용(丁若鏞)이 박학다식과 팔방미인을 자랑했던 것은 아니다. 무릇 조선의 학자-관료라면 거의가 그렇듯이 그도 역시 관리로 재직하던 젊은 시기까지는 학문이라 해봤자 ‘과거용’ 유학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라면 거의가 다 그렇듯이 그도 역시 정쟁에 휘말려 유배 생활을 겪어야 했는데, 그 기간을 잘 활용한 덕분에 학문의 너비와 사색의 깊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본다면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는 비록 그 자체로는 조잡한 음모와 책략이었어도 역사적으로는 의도하지 않았던 큰 성과를 낳았다고 해야 할까? 그 사건으로 1818년까지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정약용은 대부분의 주요 저술을 남길 수 있었으니 말이다.
무릇 과거의 위대한 사상가가 남긴 학문적 업적은 어느 것이든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당대의 현안에 관련된 이론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적 가치를 지니는 이론이다. 물론 사상가는 당대의 관심과 문제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사상과 이론을 구성하지만, 후대의 사람들은 거기서 통시대적 의미를 가지는 내용을 추출할 권리와 자유가 있다. 그 결과물을 보통 고전이라 부른다.
당대의 현안에 관련된 정약용(丁若鏞)의 사상은 주로 경제학의 영역에 속한다. 당대의 핫이슈는 단연 토지와 조세에 관한 문제였으므로 우선 이 분야에 관한 견해가 없을 수 없다. 그동안 실학자 진영에서 제출된 대표적인 토지제도 개혁론은 유형원의 ‘균전론’과 이익의 ‘한전론’이다(그밖에도 여러 가지 이름이 붙은 이론이 등장하지만 모두 거기서 갈라진 변주곡들일 뿐이다), 이 두 가지 주장은 비록 초점에서는 약간 차이가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토지를 균등하게 배분하고 토지의 관리를 경작자의 재랑에 맡기자는 내용이다. 요컨대 지주들의 대토지 겸병이나 소작농의 증가 등 그동안 있었던 토지제도의 모든 문제는 경작자와 소유자가 분리된 현상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으므로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충실하자는 내용이다.
정약용도 경자유전의 이념에서는 의견을 같이한다. 그러나 그는 이념을 확인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절차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균전론이나 한전론은 토지의 면적만을 과세의 표준으로 삼는 결부법(結負法)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정약용이 주장한 여전론(閭田論)은 단순한 면적이 아니라 토지의 지세나 자연 조건을 고려해서 여(閭)라는 복합적인 단위를 기준으로 설정한다. 각 여마다 여장을 한 명씩 두어 토지를 관리하게 하고, 여민들에게 조세와 생산물을 할당하고 배분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듯 여는 공동체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므로 유사시에는 군대 조직으로 전환될 수도 있다【사실 이러한 내용은 종전의 전제 개혁론에 비해 진일보한 것이기는 하나 그다지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우선 정약용(丁若鏞) 자신도 크게 의지했던 옛 주나라의 이상적인 토지제도인 정전법(井田法)의 냄새가 강하다. 토지를 농민들에게 고르게 나눈 다음 조세를 공제하고 산출물을 고르게 배분한다는 공동체적 정신이 바로 정전법이 아니던가? 이렇게 보면 여전론은 정전법에 손발을 붙인 것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여전론에서는 중국과 한반도의 역대 왕조들이 전통적으로 사용했던 병농일치의 개념이 재차 강조되고 있다. 당나라의 부병제(府兵制)도 그렇지만 아마 정약용(丁若鏞)은 명나라와 청나라에서 시행한 이갑제(里甲制)를 크게 참고한 듯하다. 이갑제란 한 지역의 농가들을 100호의 갑수호(甲首戶, 일반 농가)와 10호의 이장호(里長戶)로 묶고 이장호들이 돌아가며 조세와 치안을 맡는다는 제도인데, 행정의 측면이 더 중시되기는 하지만 여전론의 정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여기서 정약용(丁若鏞)은 그 전까지 다양한 전제 개혁론을 주장한 다른 실학자들과 같은 착각을 범하고 있다. 토지의 실제 경작자와 명목상 소유자가 다르다는 게 토지제도의 근본적인 문제점이라는 지적은 옳다. 그러나 그 문제를 개선하려면 조선의 체제 자체가 송두리째 바뀌어야만 한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아니면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거나).
조선만이 아니라 한반도의 역대 왕조들, 나아가 중국의 역대 왕조들까지 중화세계에 존재했던 모든 왕조들은 예외없이 모든 토지가 왕 또는 국가의 소유라는 왕토(王土)의 이념을 토대로 하고 있었다(토지만이 아니라 나라 안의 모든 게 왕의 소유였으므로 사유재산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셈이다). 비록 그것은 형식적인 규정이었고 언제나 토지의 실소유자는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공식과 비공식이 크게 다르다는 점은 토지제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데 결정적인 걸림돌이 된다. 그 때문에 전시과(田柴科)나 과전법(科田法)에서도 관리에게 녹봉을 지급하기 위해서는 수조권(收租權)이라는 애매한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지 않았던가(이에 반해 중세 유럽의 봉건제에서는 상위 영주가 하위 영주에게 토지의 소유권 자체를 양도하거나 계약을 통해 빌려주는 식이었으므로 일찍부터 사유지estate와 지대rent의 개념이 발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조선의 국체와 정체를 인정하는 한 농민들은 결코 토지의 소유자가 될 수 없었다. 비록 제한적이나마 경자유전의 원칙이 현실에 적용되려면 최소한 토지의 사적 소유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야만 한다. 결국 실학자들과 정약용(丁若鏞)이 토지 개혁론의 골간으로 삼았던 경자유전이란 단지 개혁 정도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게 아니라 오로지 체제 자체를 바꾸는 ‘혁명’을 통해서만 실현할 수 있는 이념이었던 것이다.
이런 한계는 토지 개혁론에 비해 더 고전적인 가치를 지니는 분야, 즉 정약용의 정치 사상에서도 드러난다. 앞서 실학도 유학의 한 갈래라는 것을 보았듯이 그의 모든 학문 역시 유학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래서 그도 군주의 자질과 덕목으로서 무엇보다 중시하는 것은 역대 사대부(士大夫)들이 늘 국왕에게 요구했던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자세다. 군 주도 먼저 스스로를 바르게 닦고 나서 남을 다스려야 한다는 이념, 바로 그것이 조선 국왕으로 하여금 강력한 왕권을 주장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던 이념적 족쇄가 아니던가?
그러나 정약용(丁若鏞)이 수기치인을 말하는 근거는 약간 다르다. 그는 놀랍게도 백성이 군주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군주가 백성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군주가 참되게 백성들을 다스리려면 먼저 수기치인을 해야 한다는 ‘참신한’ 왕도론(王道論)을 전개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같은 시대에 서유럽에서 성장하고 있던 자유주의 사상과 같은 맥락이 아닌가? 정약용은 과연 근대적 국민주권 개념을 주장한 걸까? 그렇지는 않다. 사실 그 전까지 조선의 사대부들이 군주에게 그런 덕목을 요구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한 가지 암묵적인 전제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조선의 국왕 역시 중국 천자와의 관계에서는 하나의 제후, 즉 사대부(士大夫)와 같은 입장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천하의 주인인 중국의 황제 이외에는 그 누구도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천자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정약용(丁若鏞)은 국왕에게 수기치인을 요구할 수 있는 근거를 백성으로 새롭게 설정했을 뿐이다【그 결과 정약용의 왕도론은 국민주권의 개념과 얼추 비슷해졌지만, 실은 크게 다르다. 우선 그의 사상은 순수한 이념적 산물이지만, 서유럽의 자유주의는 시민 계급이라는 물적 토대를 바탕으로 해서 역사적으로 성장했다는 차이가 있다. 비교적 동양식 왕조와 비슷한 왕국이 생겨났던 서유럽의 절대주의 시대에는 절대 군주와 관료 세력만이 아니라 신흥 부르주아지 계급이 상업과 산업을 통해 경제력을 키우면서 장차 미래 사회를 주도할 세력으로 떠올랐다(아마 절대군주도 동양의 유학을 알았더라면 몹시 부러워했으리라. 유학만큼 군주의 절대적인 지위와 권력을 보장해주는 이념은 없을 테니까). 이들이 주창하고 나선 게 바로 자유주의 사상이며, 정치적으로는 참정권과 국민주권의 개념이다. 물론 동양의 역사에서는 일찍부터 군주가 백성들을 존중해야 한다는 이념이 있었으나, 그것은 군주가 만백성의 ‘주인’으로서 시혜를 베풀어야 한다는 뜻이므로 국민주권의 개념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래도 전제 개혁론과 왕도론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정약용은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으로부터 크게 벗어나 있었다(아마 그는 당대의 집권자이자 세도정치(勢道政治)의 문을 연 노론 세력과는 의식적으로라도 입장을 달리 하고 싶었을 것이다). 옛 주나라의 정전법(井田法)에서 영향을 받아 여전론을 전개한 것이라든가, 맹자(孟子)를 원조로 하는 왕도정치의 이념을 주창한 것은, 비록 유학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해도 최소한 성리학보다는 더 이전의 유학과 맥을 같이 한다. 바로 정조(正祖) 치세에서 시파 세력의 이념이었던 육경학이 그의 사상을 낳은 뿌리다(정약용이 정조와 개인적 친분을 쌓을 수 있었던 것도 그런 학문적 동질감 덕분이다).
하지만 정약용은 시파보다도 한 걸음 더 앞서갔다. 이를테면 150년 전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성동론과 인물성이론 간의 철학 논쟁에 대해서도 그는 쉽게 문제를 해결하고 넘어간다. 인간에게는 지성적 측면과 신체적 측면(이것을 그는 ‘영지靈知의 기호’와 ‘형구形軀의 기호’라고 표현한다)이 공존한다는 양성론(兩性論)이 그것이다. 인간의 이성과 감정을 동시에 인정한다는 내용이니까 지금 보면 별것 아닌 주장이지만, 그 간단한 해법을 받아들이지 않은 탓에 터무니없는 논쟁이 얼마나 열띠게 진행되었던가? 정약용이 그리스도교를 비롯한 서학과 서양 문물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것도 쓸데없는 문제를 고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정약용(丁若鏞)은 학문적으로만 ‘종합지식인’일 뿐 아니라 사상적으로도 크로스오버와 퓨전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당대의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은 물론이고 그에 선행하는 원시 유학, 즉 육경학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서학에 대해서도 폭넓은 관심과 해박한 지식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지적 한계는 그 자신의 탓이 아니라 바로 그 시대의 한계다. 또한 그가 내놓은 무수한 이론들 중 어느 것도 실제로 적용되지 못했다는 사실도 시대의 한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가 백과사전적 학자로서 온갖 학문 분야에 손을 댔다는 사실 자체가 시대적 한계인지도 모른다. 학문 체계가 제대로 자리잡고 있었다면, 그가 그렇듯 모든 영역에서 전문가적인 태도를 가지고 대안을 제시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 최후의 백과전서파 정조(正祖)의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정약용은 현실 정치에서 꽃을 피우지 못했지만, 오히려 그랬기에 수많은 저술 활동으로 후대에 더 큰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철학과 역사에서부터 종교와 과학에 이르기까지 그는 서유럽의 계몽사상가들처럼 박학다식을 자랑한 팔방미인이었다. 위쪽 그림은 정약용(丁若鏞)이 화성을 축조할 때 고안한 거중기인데, 이 기계 덕분에 건설비가 크게 절감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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