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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11부 불모의 세기 - 1장 사대부 체제의 최종 결론, 과거로의 회귀(순조, 세도정치, 신유박해)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11부 불모의 세기 - 1장 사대부 체제의 최종 결론, 과거로의 회귀(순조, 세도정치, 신유박해)

건방진방랑자 2021. 6. 21.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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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사대부 체제의 최종 결론

 

 

과거로의 회귀

 

 

정조(正祖)는 뚜렷한 병명이 없이 등과 머리에 종기가 돋는 일종의 열병을 앓다가 죽었다. 그런 탓에 한참 뒤까지도 그가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물론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대수롭지 않은 병인 데다가 발병한 지 20일도 채 못 되어서 죽은 과정이 아무래도 미심쩍기는 하다. 그러나 정황상으로 보면 독살의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범인은 노론 벽파밖에 없는데, 만년의 정조는 이미 개혁을 포기했으므로 그들과 갈등을 빚을 만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독살설이 완전히 잦아들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그의 사후 곧바로 모든 체제가 예전 상태로 돌아갔기 때문일 터이다. 정조가 죽자 규장각(奎章閣)은 본래의 기능인 도서관으로 권한이 축소되었으며, 그가

그토록 공을 들였던 장용영(壯勇營)도 허무하게 해체되어 버렸다. 그보다 더 명백한 과거로의 회귀는 노론 벽파가 권력의 일선에 등장한 것이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격이랄까? 정조(正祖)의 치세 내내 야당의 위치에 있었던 벽파가 순식간에 여당으로 탈바꿈했으니, 정조의 사인을 놓고 뒷말이 많을 수밖에 없다.

 

사실 벽파가 권좌에 컴백한 데는 한 인물의 공이 컸다. 바로 영조(英祖)의 계비였던 정순왕후다. 일찍이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그녀는 정조의 치세에도 줄곧 노론 벽파를 두둔했다. 그런 상황에서 겨우 열 살짜리인 정조의 둘째 아들 순조(純祖, 1790~1834, 재위 1800~34)가 왕위를 계승했으니(맏아들은 어려서 죽었다) 정권이 바뀌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공교롭게도 정조가 왕권을 강화해놓은 것은 오히려 노론이 컴백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여당이었던 시파 세력은 정조(正祖)의 치세에 왕을 보좌하는 역할로만 스스로를 국한시켰기에 정조가 죽음으로써 자연히 여당의 지위마저도 유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은 300년 전 강력한 왕이었던 세조(世祖)가 죽자 그동안 숨죽여 지냈던 사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과 닮은 데가 있다. 당시에도 세조 시절에 왕당파를 이루었던 훈구파는 사림에 비해 유리한 지위에 있었으나 막상 왕이 죽자 권력을 독점하지 못하고 사림의 진출을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는 조선이 사대부(士大夫) 국가로 변질된 것인데, 이번에는 어떻게 될까?.

 

대왕대비의 자격으로 증손자의 수렴청정을 맡게 된 정순왕후는 즉각 벽파의 보스인 심환지(沈煥之, 1730~1802)를 영의정에 임명하고 시파의 인물들을 숙청해서 노론의 새 세상, 아니 옛 세상을 만든다(당시까지 정조의 어머니인 경의왕후와 부인인 효의왕후가 살아 있었고 게다가 경의왕후는 정순왕후보다 나이도 열 살이나 위였지만, 감히 정순왕후에게 도전할 수 없었다. 서열에서 뒤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정순왕후처럼 정치적인 야심이 없었던 데다 노론의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상이 바뀌었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정순왕후는 1801년 자신의 최대 치적을 남기는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단순히 종교적인 쟁점만 있지 않았다.

 

10년 전의 신해박해(辛亥迫害)로 조선의 그리스도교는 일단 크게 제동이 걸렸으나 앞서 본 바와 같이 정조(正祖)가 비교적 관대한 입장에서 중재에 나선 덕분에 존폐의 위기는 넘길 있었다. 물론 이후에도 그리스도교에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한바탕 홍역을 치르고 난 덕분에 그리스도교는 포교 종교 특유의 전파력을 바탕으로 다시 꾸준히 교세를 확장할 수 있었다. 그 결과 1794년에는 최초의 외국인 신부인 주문모(周文謨, 1752~1801)가 청나라에서 들어와 포교 활동을 벌이게 되었다. 그의 비밀 입국으로 인해 이듬해에 다시 박해 사건이 있었지만, 규모가 크지 않았으므로 그런 대로 그리스도교는 조선에 서서히 뿌리를 내려가는 듯 보였다.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가 거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반드시 그리스도교를 뿌리뽑겠다는 의도에서가 아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에게 더 시급한 과제는 오랜만에 되찾은 권력을 공고히 다지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아직 조정에 남아 있는 시파와 신해박해(辛亥迫害) 당시 노론 내에서 신서파를 이루었던 세력을 일망타진해야 한다. 그 도구로 그리스도교만큼 좋은 게 또 있을까? 그래서 왕후와 노론 벽파는 전국의 그리스도교도를 색출해서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린다. 이것이 신유박해(辛酉迫害)인데, 앞서의 종교 탄압과 다른 점은 꼬투리를 잡을 만한 별다른 사건이 없었음에도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그리스도교 탄압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최초의 외국인 신부 주문모는 서울 용산 부근 한강변에 있는 새남터라는 모래사장에서 참수되었고, 몇 차례나 배교 선언을 하면서 용케 살아남았던 이승훈도 이번만은 살아남지 못했으며, 정씨 삼형제도 하나(정약종)가 처형되고 둘은 유배형을 받았다. 그밖에 전국적으로 300여 명의 그리스도교도가 처형당함으로써 이 사건은 한국 그리스도교사에 최초의 대대적인 박해로 기록되었다그러나 살아남은 교도들이 산간 지방으로 숨어들면서 오히려 이후 그리스도교는 전국 각지로 확산되고 기층 민중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갔다. 그리스도교의 초기 역사에서 보듯이 무릇 종교란 정치적 탄압이 심할수록 더욱 널리 퍼지는 법이다. 이렇게 탄압 속에서 교도가 꾸준히 늘어간 탓에 그 뒤에도 19세기 내내 거의 정기적으로 대규모 종교 박해가 일어나게 된다. 아마 오늘날 한국의 그리스도교가 주로 천박한 기복(祈福) 신앙의 형태로 자리잡게 된 이유는, 초기에는 사대부(士大夫) 층에 퍼졌으나 그러한 각종 탄압으로 인해 결국 기층 민중 속에서만 뿌리를 내린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노론 벽파에게 그런 사교 무리의 대량 살육은 부수적인 성과일 뿐이다. 그들에게는 조정의 반대파를 제거함으로써 마침내 안정적인 권력을 구축하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목적은 이루어졌다. 단일한 계파가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조선의 집권 사대부들은 사상 처음으로 당쟁으로부터 벗어나 단일한 색깔을 가지게 되었다. 낱알들을 체로 거르고 나면 최후에 남는 것은 가장 큰 알갱이들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자기들끼리의 권력다툼을 거치고, 영조(英祖)정조(正祖) 두 대에 걸쳐 왕권과의 경쟁도 헤치고 나온 결과 최후에 남은 사대부 세력이 결국 가장 성리학적 이념의 농도가 짙은 노론 일색이라는 것은 자연법칙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역사적 필연이라 해야 할까?

 

어쨌든 이제 역사의 시계추는 완전히 과거로 회귀했다. 왕이 권력을 독점하던 야만의 시대도 끝났고, 오랑캐에게서 배우려던 무지의 시대도 끝났으며, 사대부(士大夫)들이 편을 갈라 당쟁을 일삼던 혼란의 시대도 끝났다. 최후로 살아남은 노론은 마침내 노론이라는 이름마저 버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그들이 할 일은 사대부 체제를 어느 때보다도 완벽하게 구축하는 것이다. 이상적인 사대부 체제란 뭘까? 그것은 바로 국왕이 상징이자 허수아비로 존재하고 사대부들이 실권의 담당자로 역할하면서 국정을 전담하는 체제다.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300년 동안 사대부 체제가 지속되면서 내내 그 결론은 변함없었다. 다만 그 체제가 계속 삐걱거렸던 이유는 그동안 사대부들 간에 이념과 견해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랜 당쟁을 거치면서 결국 그 쟁점마저 정리됨으로써 이제서야 비로소 완벽한 사대부 체제를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순조(純祖)는 그 체제에 어울리는 완벽한(?) 왕이다. 우선 정비가 아니라 후궁을 어머니로 두었다는 결격 사유가 있다(정비인 효의 왕후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게다가 나이도 어리고 성격도 유약하다. 이만하면 훌륭한 허수아비가 될 자질을 갖춘 셈이다. 다만 왕실 세력인 정순왕후가 아직 실세로 버티고 있다는 게 좀 걸리는데, 이 문제는 1804년에 수렴청정이 폐지되고 그 이듬해에 그녀가 죽으면서 저절로 해결된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뭘까? 그것은 바로 사대부(士大夫)들의 보스를 정하는 문제다. 당쟁이 사라졌으니까 이제는 사대부들에게도 보스가 필요하다. 물론 공식적인 지위는 아니지만, 왕이 상징적인 권력자라면 사대부의 보스는 현실적인 권력자이므로 대단히 중요한 자리다. 이런 배경에서 초대 보스로 떠오른 자는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이었다.

 

여러모로 그는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걸맞는 최적임자였다. 영조(英祖) 초기에 이른바 노론 4대신의 하나였던 김창집의 후손이니 노론의 성골인 셈이고, 1802년 그의 딸이 순조(純祖)의 아내가 되었으니 당당한 왕실 외척의 신분이다. 게다가 그는 정조(正祖)의 신임을 받았고 장차 순조를 도와 국정을 살펴달라는 정조의 유언까지 받았으므로 권좌에 오르는 것도 자연스럽다. 그가 사실상의 집권자로 공인되면서 조선의 새로운 체제는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오랜 사대부 체제의 전통이 낳은 최종적인 결론, 성리학적 세계관이 빚어낸 최후의 산물, 역사상 가장 완벽한 사대부 체제, 그것은 바로 세도정치(勢道政治).

 

 

한국의 남녀? 중국은 일찍부터 유럽에 알려졌고, 일본도 15세기에 포르투갈의 상인과 선교사들이 출입했지만, 조선은 18세기까지 서양인 선교사가 발붙인 적 없는 순결한(?) 곳이었다(물론 그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서양인들이 조선을 중국의 일부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조선에 관해 완전히 무지했는데, 위의 그림이 그 점을 잘 보여준다. 1806년 어느 프랑스 화가의 판화 작품으로, 제목은 한국의 남녀.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과거로의 회귀

혼돈의 시작

불모의 땅에 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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