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11부 불모의 세기 - 3장 위기와 해법, 다시 온 왕국의 꿈(당백전, 민비)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11부 불모의 세기 - 3장 위기와 해법, 다시 온 왕국의 꿈(당백전, 민비)

건방진방랑자 2021. 6. 21. 22:34
728x90
반응형

 3장 위기와 해법

 

 

다시 온 왕국의 꿈

 

 

대원군이 처음부터 어린 아들이 져야 할 국정의 부담을 대신 떠맡은 것은 아니다. 물론 그는 어린 아들을 위해(?) 기꺼이 그렇게 하고 싶었겠지만, 남의 이목이 많고 오늘의 그를 있게 해준 조대비가 시퍼렇게 살아 있다. 게다가 공식적으로는 엄연히 대비의 수렴청정이 진행되고 있는 시기가 아닌가? 비록 대비는 대원군에게 모든 사안에 대해 일일이 자문을 구했지만, 젊은 시절 눈칫밥이라면 원 없이 먹은 그는 아직 자신이 나설 때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대원군이 조대비는 고맙고 미더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국태공(國太公)으로 임명하고 창덕궁 출입 전용문까지 만들어주면서 각별히 배려했으며, 국가의 최대 행사인 경복궁 중건 사업도 그에게 일임했다1865년 봄부터 시작된 이 사업의 기획자는 아마 대원군이었을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지 무려 300년 가까이 지난 시점에서 경복궁을 중건한다는 구상은 사실 뜬금없는 것이지만, 별다른 권력 기반이 없었던 대원군으로서는 오랫동안 실추되어 왔던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 할 처지였다. 그러나 이 사업에는 예상 외로 돈이 많이 먹혀 가뜩이나 좋지 않은 국가 재정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원래 경복궁의 스무 배에 가까운 7천 칸으로 지을 만큼 과욕을 부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듬해에는 상평통보보다 훨씬 큰 명목가치를 가지는 당백전(當百錢, 원래 상평통보와 1:100의 비율로 교환시키기 위해 이런 이름이 붙었으나 실제로는 1:2의 비율이었다)을 새로 발행하면서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는데, 그 후유증은 당연히 격심한 인플레였다. 어쨌거나 그 사업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서울의 대표적인 고궁은 없었을 것이다.

 

가급적 매사에 말을 아끼던 그가 처음으로 제 목소리를 낸 것은 1866년 봄 아들에게 아내를 얻어줄 때다. 조대비는 당연히 자기 가문에서 왕비가 나오기를 기대하고 예상한다. 이제 다시 풍양 조씨의 세상이 되면 죽어 조상들 뵐 낯이 있으리라. 하지만 며느리를 보는 것은 조대비가 아니라 대원군이니까 아무래도 불안하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선택한 며느리는 놀랍게도 명망대가와는 전혀 무관한 여흥 민씨 집안의 열다섯 살짜리 계집아이였다. 민씨라면 바로 대원군의 처가가 아닌가? 그럼 아내의 권유일까? 물론 그것도 있다. 하지만 며느리인 동시에 한 나라의 왕비를 아무렇게나 선택할 수는 없는 일, 따라서 그것은 결코 무심하게 내린 결정이 아니었다. 조대비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대원군은 며느리의 조건으로 보잘 것 없는 가문 출신이어야 한다는 것을 최우선으로 내세웠던 것이다. 사실 그의 진의를 생각해보면 그 이유는 알기 어렵지 않다.

 

그는 자신이 집권하기로 결심한 이상 어떠한 권력 가문도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고 판단했다. 그가 꿈꾸는 조선은 사대부(士大夫)나 세도가문이 권력을 장악하는 체제가 아니라 강력한 왕권이 지배하는 명실상부한 왕국이다. 그랬으니 새 며느리가 친정이 변변치 않은 데다 여덟 살 때 부모를 여의고 혼자 자랐다는 사실은 흠이 아니라 오히려 미덕이다(아마 그는 자신의 옛 처지와 같다는 데서 동병상련도 느꼈음직하다). 그간 세도가문이 조선을 송두리째 말아먹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왕실의 외척이라는 때문이 아니었던가? 어쨌거나 자신의 권력 기반도 미약한 처지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권문세가 사돈을 마다하고 굳이 어려운 길을 택한 그의 결단력(아울러 권력 독점욕)은 놀라운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민씨 집안의 고아 소녀는 시아버지 요정덕분에 팔자에도 없던 왕궁에 입성하게 되니 신데렐라가 따로 없다. 게다가 30년 뒤에는 남편 고종(高宗)이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수립하고 황제를 선언한 덕분에 그녀는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95)라는 그럴듯한 시호로 역사 기록에 남게 된다. 그러나, 나중에 보겠지만 대한제국 자체가 괴뢰 제국인 마당에 황후라는 명칭은 그녀에게 과분한 것이므로, 거품을 제거하고 널리 알려진 민비(閔妃)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게 좋겠다.

 

 

결과적으로 보면 세도가를 뿌리뽑겠다는 이유로 민비(閔妃)를 선택한 대원군의 판단은 잘못이었다. 쇠붙이라면 모조리 끌어당기는 자석 같은 권력의 속성상, 가문에서 왕비가 나왔다는 소식은 민씨 성붙이들을 총집결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당대의 실권자인 대원군의 아내도 같은 가문이었으니, 그들에겐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결국 세도가와 왕실 외척을 배제하겠다는 대원군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고 그 자신마저도 오히려 그들에게 배척당하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고 당장 대원군이 해결해야 할 문제는 따로 있다.

 

세도정치(勢道政治)가 공식적으로 막을 내림으로써 모처럼 만에 조선은 다시 왕국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대원군은 아마 정조(正祖)의 꿈과 실험이 아직 완전히 포기된 게 아니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꿈이라면 너무 비현실적이고 실험이라면 너무 늦다. 조선은 이미 개혁은커녕 생존조차 확실히 장담하기 어려운 형편이 되었다. 더구나 생존을 위협하는 요소는 이제 안에만이 아니라 바깥에도 있다. 그래서 대원군은 왕국화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출범시키기 전에 우선 바깥의 문제에 대처해야 했다.

 

철종(哲宗)의 치세 후반부터 유럽의 상선이나 군함이 조선에 와서 통상을 요구하는 경우는 부쩍 잦아졌다상선은 이해할 수 있지만 군함까지 와서 통상을 요구한 이유는 뭘까? 16세기에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세계 진출에 나설 무렵만 해도 동양에 온 것은 상선들뿐이었다(물론 그 상선에는 대포가 장착되어 있었지만). 그러나 유럽 열강이 제국주의화된 19세기부터는 군함이 전면에 나서게 된다. 그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영국의 예다. 19세기의 세계 최강국인 영국은 예상외로 무역수지가 적자였으나 전체 경상수지는 엄청난 흑자였는데, 그것은 바로 해운업 덕분이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명답게 수많은 선박과 전세계에 항구를 가지고 있었던 영국은 그것을 이용해서 막대한 수입을 올렸던 것이다. 그런데 그 항구를 개척한 것도, 또 해운업이 힘을 쓸 수 있었던 것도 막강한 해군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시대에 해군력은 곧 경제력이었다. 세계사적으로 보면 그 현상은 자본주의 단계를 지난 유럽 열강이 제국주의적 진출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었으나, 이제 막 왕국으로 옷을 갈아입으려는 대원군의 눈에 그게 어떻게 비쳤을지는 뻔하다. 정조(正祖)의 실험도 서학 때문에 실패했다고 본 그는 서양 세력의 통상 요구를 수락한다면 조선이 존립할 수 없고 설사 존립한다 해도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는 조선 땅에서 서학을 완전히 축출하는 일이다. 그가 서양의 통상 요구를 거부하는 근본적인 이유도 경제적인 득실 때문이 아니라 무역을 빌미삼아 서양 문물이 수입될 것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땅에 서양 세력이 발붙이지 못하게 하려면 우선 그리스도교를 몰아냄으로써 서양 문물이 도입되는 루트를 봉쇄해야만 한다(앞서 말했듯이 선교사들은 흔히 자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안내하는 앞잡이 노릇을 했으므로 그의 판단은 일단 정확했다).

 

이것이 대원군의 트레이드마크인 척화론(斥和論)이지만, 사실 그가 처음부터 서양 열강에 대해 강경했던 것은 아니다. 젊은 시절의 편력에서도 보듯이, 사대부(士大夫) 체제에 대한 혐오에서도 보듯이 그는 원래 개인적 성향에서는 서학에 대해 큰 거부감이 없었다(집권 초기까지 대원군의 목표는 오로지 세도정치(勢道政治)를 종식시키고 조선을 왕국으로 만들겠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조정은 시대가 바뀐 것에 아랑곳없이 여전히 성리학적 중화 이념만을 초지일관 고수하는 자들이 대다수다. 따라서 대원군이 척화로 나간 데는 가급적 중신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갓 잡은 권력을 안정시키려는 의도가 크게 한몫을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쓸쓸한 경복궁 18세기에 정선이 그린 경복궁도. 경복궁이 중건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이 모습의 경복궁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내내 이렇게 돌담을 두른 채 소나무 숲이 무성했으니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도 당연하다. 설사 창덕궁을 궁성으로 사용하는 데 큰 불편이 없었다 해도 어쨌거나 경복궁은 조선을 창건할 당시의 궁성이 아니었던가?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다시 온 왕국의 꿈

한 가지 해법(문 닫기)

격변기의 비중화세계

잘못 꿴 첫 단추

또 하나의 해법(문 열기)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