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위기와 해법
다시 온 왕국의 꿈
대원군이 처음부터 어린 아들이 져야 할 국정의 부담을 대신 떠맡은 것은 아니다. 물론 그는 어린 아들을 위해(?) 기꺼이 그렇게 하고 싶었겠지만, 남의 이목이 많고 오늘의 그를 있게 해준 조대비가 시퍼렇게 살아 있다. 게다가 공식적으로는 엄연히 대비의 수렴청정이 진행되고 있는 시기가 아닌가? 비록 대비는 대원군에게 모든 사안에 대해 일일이 자문을 구했지만, 젊은 시절 눈칫밥이라면 원 없이 먹은 그는 아직 자신이 나설 때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대원군이 조대비는 고맙고 미더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국태공(國太公)으로 임명하고 창덕궁 출입 전용문까지 만들어주면서 각별히 배려했으며, 국가의 최대 행사인 경복궁 중건 사업도 그에게 일임했다【1865년 봄부터 시작된 이 사업의 기획자는 아마 대원군이었을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지 무려 300년 가까이 지난 시점에서 경복궁을 중건한다는 구상은 사실 뜬금없는 것이지만, 별다른 권력 기반이 없었던 대원군으로서는 오랫동안 실추되어 왔던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 할 처지였다. 그러나 이 사업에는 예상 외로 돈이 많이 먹혀 가뜩이나 좋지 않은 국가 재정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원래 경복궁의 스무 배에 가까운 7천 칸으로 지을 만큼 과욕을 부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듬해에는 상평통보보다 훨씬 큰 명목가치를 가지는 당백전(當百錢, 원래 상평통보와 1:100의 비율로 교환시키기 위해 이런 이름이 붙었으나 실제로는 1:2의 비율이었다)을 새로 발행하면서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는데, 그 후유증은 당연히 격심한 인플레였다. 어쨌거나 그 사업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서울의 대표적인 고궁은 없었을 것이다】.
가급적 매사에 말을 아끼던 그가 처음으로 제 목소리를 낸 것은 1866년 봄 아들에게 아내를 얻어줄 때다. 조대비는 당연히 자기 가문에서 왕비가 나오기를 기대하고 예상한다. 이제 다시 풍양 조씨의 세상이 되면 죽어 조상들 뵐 낯이 있으리라. 하지만 며느리를 보는 것은 조대비가 아니라 대원군이니까 아무래도 불안하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선택한 며느리는 놀랍게도 명망대가와는 전혀 무관한 여흥 민씨 집안의 열다섯 살짜리 계집아이였다. 민씨라면 바로 대원군의 처가가 아닌가? 그럼 아내의 권유일까? 물론 그것도 있다. 하지만 며느리인 동시에 한 나라의 왕비를 아무렇게나 선택할 수는 없는 일, 따라서 그것은 결코 무심하게 내린 결정이 아니었다. 조대비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대원군은 며느리의 조건으로 보잘 것 없는 가문 출신이어야 한다는 것을 최우선으로 내세웠던 것이다. 사실 그의 진의를 생각해보면 그 이유는 알기 어렵지 않다.
그는 자신이 집권하기로 결심한 이상 어떠한 권력 가문도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고 판단했다. 그가 꿈꾸는 조선은 사대부(士大夫)나 세도가문이 권력을 장악하는 체제가 아니라 강력한 왕권이 지배하는 명실상부한 왕국이다. 그랬으니 새 며느리가 친정이 변변치 않은 데다 여덟 살 때 부모를 여의고 혼자 자랐다는 사실은 흠이 아니라 오히려 미덕이다(아마 그는 자신의 옛 처지와 같다는 데서 동병상련도 느꼈음직하다). 그간 세도가문이 조선을 송두리째 말아먹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왕실의 외척이라는 ‘빽’ 때문이 아니었던가? 어쨌거나 자신의 권력 기반도 미약한 처지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권문세가 사돈을 마다하고 굳이 어려운 길을 택한 그의 결단력(아울러 권력 독점욕)은 놀라운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민씨 집안의 고아 소녀는 ‘시아버지 요정’ 덕분에 팔자에도 없던 왕궁에 입성하게 되니 신데렐라가 따로 없다. 게다가 30년 뒤에는 남편 고종(高宗)이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수립하고 황제를 선언한 덕분에 그녀는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95)라는 그럴듯한 시호로 역사 기록에 남게 된다. 그러나, 나중에 보겠지만 대한제국 자체가 괴뢰 제국인 마당에 황후라는 명칭은 그녀에게 과분한 것이므로, 거품을 제거하고 널리 알려진 민비(閔妃)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게 좋겠다.
결과적으로 보면 세도가를 뿌리뽑겠다는 이유로 민비(閔妃)를 선택한 대원군의 판단은 잘못이었다. 쇠붙이라면 모조리 끌어당기는 자석 같은 권력의 속성상, 가문에서 왕비가 나왔다는 소식은 민씨 성붙이들을 총집결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당대의 실권자인 대원군의 아내도 같은 가문이었으니, 그들에겐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결국 세도가와 왕실 외척을 배제하겠다는 대원군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고 그 자신마저도 오히려 그들에게 배척당하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고 당장 대원군이 해결해야 할 문제는 따로 있다.
세도정치(勢道政治)가 공식적으로 막을 내림으로써 모처럼 만에 조선은 다시 왕국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대원군은 아마 정조(正祖)의 꿈과 실험이 아직 완전히 포기된 게 아니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꿈이라면 너무 비현실적이고 실험이라면 너무 늦다. 조선은 이미 개혁은커녕 생존조차 확실히 장담하기 어려운 형편이 되었다. 더구나 생존을 위협하는 요소는 이제 안에만이 아니라 바깥에도 있다. 그래서 대원군은 왕국화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출범시키기 전에 우선 바깥의 문제에 대처해야 했다.
철종(哲宗)의 치세 후반부터 유럽의 상선이나 군함이 조선에 와서 통상을 요구하는 경우는 부쩍 잦아졌다【상선은 이해할 수 있지만 군함까지 와서 통상을 요구한 이유는 뭘까? 16세기에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세계 진출에 나설 무렵만 해도 동양에 온 것은 상선들뿐이었다(물론 그 상선에는 대포가 장착되어 있었지만). 그러나 유럽 열강이 제국주의화된 19세기부터는 군함이 전면에 나서게 된다. 그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영국의 예다. 19세기의 세계 최강국인 영국은 예상외로 무역수지가 적자였으나 전체 경상수지는 엄청난 흑자였는데, 그것은 바로 해운업 덕분이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명답게 수많은 선박과 전세계에 항구를 가지고 있었던 영국은 그것을 이용해서 막대한 수입을 올렸던 것이다. 그런데 그 항구를 개척한 것도, 또 해운업이 힘을 쓸 수 있었던 것도 막강한 해군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시대에 해군력은 곧 경제력이었다】. 세계사적으로 보면 그 현상은 자본주의 단계를 지난 유럽 열강이 제국주의적 진출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었으나, 이제 막 왕국으로 옷을 갈아입으려는 대원군의 눈에 그게 어떻게 비쳤을지는 뻔하다. 정조(正祖)의 실험도 서학 때문에 실패했다고 본 그는 서양 세력의 통상 요구를 수락한다면 조선이 존립할 수 없고 설사 존립한다 해도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는 조선 땅에서 서학을 완전히 축출하는 일이다. 그가 서양의 통상 요구를 거부하는 근본적인 이유도 경제적인 득실 때문이 아니라 무역을 빌미삼아 서양 문물이 수입될 것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땅에 서양 세력이 발붙이지 못하게 하려면 우선 그리스도교를 몰아냄으로써 서양 문물이 도입되는 루트를 봉쇄해야만 한다(앞서 말했듯이 선교사들은 흔히 자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안내하는 앞잡이 노릇을 했으므로 그의 판단은 일단 정확했다).
이것이 대원군의 트레이드마크인 척화론(斥和論)이지만, 사실 그가 처음부터 서양 열강에 대해 강경했던 것은 아니다. 젊은 시절의 편력에서도 보듯이, 또 사대부(士大夫) 체제에 대한 혐오에서도 보듯이 그는 원래 개인적 성향에서는 서학에 대해 큰 거부감이 없었다(집권 초기까지 대원군의 목표는 오로지 세도정치(勢道政治)를 종식시키고 조선을 왕국으로 만들겠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조정은 시대가 바뀐 것에 아랑곳없이 여전히 성리학적 중화 이념만을 초지일관 고수하는 자들이 대다수다. 따라서 대원군이 척화로 나간 데는 가급적 중신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갓 잡은 권력을 안정시키려는 의도가 크게 한몫을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 쓸쓸한 경복궁 18세기에 정선이 그린 「경복궁도」다. 경복궁이 중건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이 모습의 경복궁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내내 이렇게 돌담을 두른 채 소나무 숲이 무성했으니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도 당연하다. 설사 창덕궁을 궁성으로 사용하는 데 큰 불편이 없었다 해도 어쨌거나 경복궁은 조선을 창건할 당시의 궁성이 아니었던가?
한 가지 해법: 문 닫기
왕국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균형감각을 유지하면서 여러 가지 방책을 저울질하던 대원군을 한 방향으로 몰고 간 사건은 어찌 보면 우연한 ‘사고’에서 비롯되었다. 1865년 말 두만강 쪽에서 러시아가 통상을 요구해 온 게 그 계기다. 물론 조정의 분위기는 결사 반대인데, 그때 대원군의 측근 인물로 그리스도교도였던 남종삼(南鍾三, 1817~66)이 대원군에게 묘한 제안을 했다. 영국, 프랑스와 결탁해서 러시아의 진출을 막자는 것이다(아마 그는 선교사들을 통해 영국과 프랑스가 유럽과 아시아 곳곳에서 부동항을 확보하려는 러시아의 남진정책을 저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텐데, 그 제안이 옳든 그르든 그는 조정의 개구리들 보다는 훨씬 시대의 흐름에 밝았다고 하겠다). 이이제이(以夷制夷)라면 원래 중화 제국의 전통적인 방책이 아닌가? 솔깃해진 대원군은 남종삼의 의견에 따라 이미 조선에 와 있던 프랑스 선교사 베르뇌(Siméon François Berneux, 1814~66)를 만나기로 약속한다(그는 조선교구장으로 10년 전부터에 밀입국해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원군은 그다지 강경한 척화론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현기증이 날 정도로 급박하게 돌아가는 당시의 정세는 베르뇌가 대원군을 만나러 한양으로 올라오는 짧은 기간마저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공교롭게도 영국군이 중국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는 베이징발 소식이 전해진 것은 바로 그 시점이다. 실은 소식이라기보다는 소문이었고, 그것도 사실이 아닌 오보였으나 당시 조선 정부는 뜬소문만으로도 정책이 뒤바뀔 만큼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렇잖아도 대원군이 사교의 신부를 만난다는 것에 눈을 모로 뜨고 있던 조정 대신들이 거세게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대원군은 노선을 급선회해서 서양 세력과의 타협 없는 투쟁을 선언한다. 그 결과가 바로 1866년 2월의 병인박해(丙寅迫害)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는 이미 여러 차례 있었지만 이번처럼 정부에서 단단히 작정하고 교도들을 대대적으로 잡아들인 적은 없었다. 전통적 처형장인 새남터에서 한양 마포 부근의 산봉우리로 처형장을 옮긴 데서도 정부의 그런 각오를 읽을 수 있다. 서양 오랑캐로 더럽혀진 한강물을 서학교도의 피로 씻어야 한다는 논리였는데, 그래서 오늘날 그 산은 절두산(切頭山)이라는 섬뜩한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이곳에서 ‘절두’된 교도의 수는 남종삼을 비롯해서 1만 명에 가까웠으니 가히 사상 최대규모다. 그러나 그 수천 명의 목숨보다 더 큰 비중을 가지는 것은 베르뇌를 비롯해서 프랑스 신부 아홉 명이 함께 처형되었다는 사실이다. 간신히 탈출한 신부 한 명이 베이징으로 가서 프랑스 함대에게 긴급 지원을 요청하면서 이 사건은 새로운 사태를 낳게 된다(제국주의 시대에 선교사와 군대의 긴밀한 공조 체제를 잘 보여주는 예다).
▲ 야만의 중화 프랑스 신부들이 처형당하는 장면이다(왼쪽), 포교가 불법이라면 마땅히 그들을 국외로 추방했어야 했다. 아무리 전근대적 사회라 해도 이렇게 남의 나라 국민을 재판도 없이 마구잡이로 살해한 것은 전형적인 야만국의 관습이다. 조선이 유일한 중화세계로 자처하면서 최고의 문명국가로 자부한 게 실상 아무런 근거도 없음을 말해준다. 오른쪽은 당시 상황을 재연해 놓은 모형으로 경기도 안성 미리내 성지 안에 있다.
하지만 프랑스 함대보다 먼저 들이닥친 것은 미국의 상선이다. 한강의 피비린내가 채 가시지 않은 그 해 7월 미국 국적의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 하구에 와서 통상을 요구한다. 당시 평안도 관찰사였던 박규수(朴珪壽)는 당연히 그 요구를 거부했으나 대포까지 장착한 상선답지 않은 상선은 물러가기는커녕 오히려 대동강을 거슬러오더니 급기야는 선원들이 평양에 무단으로 상륙해서 관민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마침내 조선 군인이 대포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터지자 분노한 박규수는 셔먼 호를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무리 증기선에 대포까지 있다 해도 스물네 명의 선원이 수천 명의 관민들을 당해낼 수는 없다. 결국 군함 같은 상선과 깡패 같은 선원들은 이역만리까지 와서 제 무덤을 팠다.
병인박해(丙寅迫害)는 조선이 일으켰고 제너럴 셔먼 호 사건은 조선이 당한 케이스지만, 둘 다 제국주의 열강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조선은 곧이어 두 사건의 후유증에 시달려야 할 운명이다.
셔먼 호가 화염에 휩싸인 지 한 달 뒤 프랑스 동양함대 사령관인 로즈가 군함 세 척을 거느리고 인천 앞바다로 왔다. 물론 목적은 병인박해에 대한 보복이지만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주의 함대답게 그들은 결코 서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침략의 의도를 깨닫지 못한 조선 관헌들로부터 음식까지 제공받으면서 한 달 동안 인근 섬들의 방어 태세와 한양까지의 수로를 탐사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두 달 뒤인 10월 초 프랑스의 군함 일곱 척과 병력 1천 명이 본격적인 원정에 나섰다. 이것이 병인양요(丙寅洋擾)인데, 침략자들은 “프랑스 신부 아홉 명을 죽인 대가로 조선인 9천 명을 죽이겠다”고 선언했으니 서학교도의 피로 한강물을 씻겠다는 병인박해(丙寅迫害)의 정신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고 할까?
미리 원정지를 답사해둔 덕분에 프랑스군은 곧바로 강화도에 상륙해서 순식간에 섬 전체를 점령하고는 강화 해협을 건너 김포의 문수산성을 공략해 육지 진출의 교두보까지 확보했다. 전광석화와 같은 프랑스군의 기습 공격에 조선 정부는 크게 당황한다. 그러나 뒤이은 조선 정부의 조치는 이번에는 프랑스군을 당황하게 만든다. 정부의 특명을 받은 양헌수(梁憲洙, 1816~88)가 특공대를 이끌고 한밤중에 강화도로 건너가 정족산성을 점령한 것이다. 느닷없는 후방 공격에 크게 놀란 프랑스는 급히 군대를 돌려 정족산성을 공략했으나 조선 특공대가 워낙 결사적으로 방어한 탓에 성을 재탈환하지 못했다. 결국 예상치 못한 조선의 변칙 전술과 악착같은 방어에 질린 프랑스군은 11월 초 함대를 철수하기로 결정했다【정족산성을 공략한 전술은 과연 적의 후방을 교란한다는 의도였을까? 그것은 아니다. 그런 의도였다면 오히려 조선군은 산성을 점령하지도, 방어에 성공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조선이 정족산성의 탈환에 그토록 집착을 보인 이유는 바로 그곳에 역대 왕조실록들을 보관한 사고가 있었기 때문이다(원래는 마니산에 있다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청나라의 공격으로 불타 무너지자 정족산으로 옮겼다). 중화세계에서 역사서라면 국가 최고의 보물이자 비밀인데, 그걸 오랑캐에게 빼앗겼으니 조선 정부가 얼마나 애를 태웠을지 짐작할 만하다. 결과적으로 그 때문에 프랑스를 물리칠 수 있었지만, 진짜 의도가 사고를 탈환하기 위해서였다면 뒷맛이 개운하지는 않다. 하기야, 애당초 강화도에 국가 보물을 보관한 이유도 역사적으로 적의 침략을 당할 때마다 정부가 강화도로 도망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니 누굴 탓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 역사보다 중요한 역사서 강화도에 있던 정족산 사고(史庫)의 옛 모습이다.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예상치 못한 조선의 후방 기습 전술에 프랑스군은깜짝 놀라 후퇴했지만, 아마도 그것은 이 사고를 적의 손에 넘겨줘서는 안 된다는 동기가 있었기 때문일 터이다. 이렇게 해서 조선 정부는 역사서를 되찾았으나 결국 역사는 빼앗기고 말았다.
비록 규모는 크지 않은 전투였지만 중국과 일본이 모두 실패한 제국주의 열강과의 교전에서 조선은 일단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그게 과연 진짜 승리일까? 사실 프랑스군은 마음만 먹는다면 야포를 동원해서 산성을 재점령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애초에 조선을 정복할 목적으로 온 게 아닌 이상(그랬다면 겨우 1천 명의 병력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실제로 베이징에 돌아간 로즈는 성공적인 전투였다고 자평했다). 더욱이 조선은 승자였으면서도 잃은 게 훨씬 많았다. 전쟁의 사상자보다도 더 큰 손실은 프랑스군이 철수하면서 300여 권의 도서들을 가져갔다는 사실이다. 오늘날까지도 프랑스와의 외교에서 숙제로 남아 있는 ‘외규장각 도서 반환 문제’는 바로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래도 병인박해(丙寅迫害)가 부른 병인양요(丙寅洋擾)는 그럭저럭 극복했으나 그 다음의 시험은 쉽지 않았다. 이번의 시험문제는 제너럴 셔먼 호를 수장시킨 대가를 어떻게 치를 것이냐다. 1871년 봄 로저스가 이끄는 미국의 군함 다섯 척과 1200명의 병력이 또 다시 인천 앞바다에 나타난다. 5년 전 상황과의 차이는, 처음부터 응징과 보복을 부르짖었던 프랑스와 달리 미국은 이미 침몰한 배는 어쩔 수 없으니 그 대신 통상을 하자고 나섰다는 점이다. 물론 군함을 보낸 것을 보면 단순히 거래를 트자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상대방의 태도가 그러하니 일단 조선 측에서도 교섭 대표를 미국함선에 보낸다. 그러나 트집을 잡아서 힘으로 굴복시킨 다음 유리한 조건에서 통상 협상을 벌인다는 게 제국주의적 침략의 기본 공식이 아닌가? 게다가 조선 정부도 실은 서양 오랑캐와 통상할 의도 따위는 전혀 없다. 이렇게 서로 간의 속셈이 다르니 교섭 협상이란 구실일 따름이다(실제로 미국 함대는 일본 해역에서 보름 동안 기동훈련을 실시하고 조선으로 온 것이었다). 과연 로저스는 협상 대표의 지위가 낮다는 이유로 함대를 강화도로 진격시켰고, 5년 전의 악몽을 떠올린 조선군은 먼저 대포를 쏘았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신미양요(辛未洋擾)는 결과를 따지기가 애매하다. 우선 전쟁으로 보면 화력에서 앞선 미국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강화도에 성조기를 꽂기까지 했다. 그러나 미국은 결국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고, 얼마 안 가서 철군하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여느 제국주의 열강이 모두 그렇듯이 미국은 조선 본토는커녕 강화도조차 영토적으로 차지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의도는 일차적으로 조선의 개항이었고, 이차적으로는 미국에 유리한 조건에서의 개항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그와 정반대로 강화도는커녕 조선 본토까지 적에게 정복된다 해도 개항을 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그랬으니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도 두 손 들고 물러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강화도의 복군? 제너럴 셔먼 호는 미국의 미끼였고, 조선은 그 미끼를 덥석 물었다. 사진은 강화도에 상륙해서 공략하는 미군의 모습이다. 마치 남북전쟁의 한 장면 같은데, 남북전쟁이 난 지 불과 6년밖에 안 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미군은 강화도를 손에 넣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계속 점령하지는 못했다.
두 차례의 양요를 겪으면서 조선 정부의 노선은 더욱 분명해졌다. 서양 오랑캐와의 싸움에서 이기든 지든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통상이든 뭐든 그들과 일체의 대화나 교섭도 하지 않는 것이다. 대원군 정권의 유명한 쇄국정책(鎖國政策)은 이렇게 해서 완성된다【마침 그 무렵에는 대원군 자신도 서양인들에 대해 개인적인 원한을 품을 만한 사건이 있었다. 제국주의의 앞잡이답게 통상의 의도를 관철시키지 못한 것에 책임을 느낀 프랑스 신부 페롱은 조선의 교도들에게서 대원군에게 가장 소중한 게 바로 아버지의 묘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독일의 상인 오페르트는 1868년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파내서 유골과 부장품을 가지고 통상 협상을 벌이려는 계획을 꾸미고 각국 국적으로 이루어진 140명의 도굴단을 조직했다. 묘가 워낙 견고해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 사건은 천륜을 무시한 행위였으므로 대원군만이 아니라 조선 국민 전체를 경악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심지어 동양처럼 조상신의 천륜을 모르는 서양인들조차 이 사건을 마뜩찮게 여겨 이후 프랑스와 미국 정부는 거기에 가담한 신부와 자국인들을 소환하고 처벌했다】.
한 나라가 아니라 개인이라 해도 무릇 정책이라면 주변 정황이나 객관적인 정세를 고려하는 게 기본이라고 보면, 바깥에 대해서 아예 눈을 꽉 감아 버린 쇄국정책을 과연 정책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의문이지만, 어쨌든 이제는 조정 대신들만이 아니라 대원군 자신도 그것만이 조선이 살 길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물론 그가 생각하는 조선이 조선인들의 나라가 아닌 ‘국왕과 사대부(士大夫)들의 정권’이었기에 가능한 발상이다.
▲ 야만의 제국주의 신미양요 때 광성진 공방전에서 전사한 아군 병사들의 참혹한 모습이다. 통상이라는 명분으로 자행된 제국주의 만행은 오히려 조선의 문을 닫아걸게 만들어 쇄국정책이라는 강력한 빗장수비를 초래했다.
격변기의 비중화세계
대원군 자신도 병인양요(丙寅洋擾)가 끝나고부터는 쇄국의 결심을 굳혔다. 그렇다면 조정의 분위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항로(李恒老, 1792~1868), 기정진(奇正鎭, 1798~1879) 등 원로대신들은 물론이고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유인석(柳麟錫, 1842~1915) 등 소장파와 유생들까지 일제히 존화양이(尊華洋夷, 중화를 숭상하고 서양 오랑캐를 배척한다는 정신)를 목청껏 외친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모두 실학의 냄새마저도 없는 골수 성리학자들이었으니, 말하자면 실로 오랜만에 수구 대통합이 이루어진 셈이다(더욱이 그들은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사업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이제는 그런 갈등도 사라졌다). 중화세계라는 자신들의 ‘지구’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나선 이 ‘독수리 형제들’의 구호는 거창하게도 위정척사(衛正斥邪), 즉 정의를 수호하고 불의를 배척한다는 것이다. 이런 결속의 분위기를 축하라도 하듯이 대원군은 신미양요(辛未洋擾)가 끝난 직후 한양과 강화를 비롯해서 전국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웠는데, 거기에 새겨진 문구는 ‘서양 오랑캐의 침략에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짓’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이었다.
얼핏 생각하면 그런 입장은 난세를 맞아 조선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이며 민족 주체성의 발로인 듯도 하다(실제로 그렇게 주장하는 역사학자도 많이 있다), 하지만 나라 바깥을 모조리 한 가지 색깔로 칠해놓고 오로지 타도해야 할 적으로만 취급하는 정신병적인 태도를 최선의 방책이며 주체적인 자세로 본다면, 조선 역사상 모든 정신나간 위정자들도 다 민족주의자라고 칭송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주체’란 중화세계일 뿐이고 그들의 ‘민족’이란 중화세계에 사는 사람만을 뜻하므로 그들의 입장은 소아병에 다름아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아이 같은 심성과 습성을 버리지 못하는 게 소아병이라면, 조선의 지배층은 아이 정도가 아니라 아예 200년 전으로 되돌아간 격이다. 이 정도 정신병이라면 가히 불치병이 아닐까?
더 큰 불행은 불치병 환자가 된 조선을 보살펴줄 보호자가 주변에 없다는 것이다. 영원한 사대와 흠모의 대상이었던 중국도, 언제까지나 교린의 어깨 동무라고 여겼던 일본도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조선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이 일부러 조선을 왕따로 만든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조선은 어느덧 동아시아에서도 외톨이가 되어 있었다(하긴, 200년 전부터 유일한 중화의 나라로 남았으니 그렇게 된 것도 자업자득이지만). 그러나 같은 비중화세계 출신이라 해도 19세기에 중국과 일본이 걸어온 과정은 사뭇 달랐으며, 따라서 이후 조선에 미치는 두 나라의 영향도 사뭇 달라진다.
▲ 화친은 매국이다 두 차례의 양요를 겪고 난 뒤 대원군이 전국 각지에 세우게 한 척화비다. 사람 키만 한 높이의 비석에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 옆에는 이 교훈을 만 년 동안 대대로 명심하고 지켜나가라고 쓰여 있으나 척화비는 불과 6년 뒤 대원군이 실각하자 곧 철거된다.
우선 중국은 앞서 잠시 보았듯이 18세기 말 건륭제(乾隆帝)의 치세 말기부터 날개 없는 추락을 거듭했다. 주요 수출품을 모직물에서 아편으로 바꾸면서 영국은 그 신상품의 ‘약발’ 덕에 그간의 중국차 수입으로인한 적자를 완전히 해소하고 막대한 무역흑자를 올리기 시작했다. 견디다 못한 중국이 1839년 인도산 아편 2만 상자를 압수해 불태운 사건은 오히려 영국이 본격적인 침략 노선으로 전환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이를 빌미로 영국은 아편전쟁을 일으켜 중국을 굴복시키고 최초의 불평등조약인 난징조약을 맺는 데 성공한다【이 조약으로 영국은 홍콩을 할양받고 중국의 다섯 항구를 개항시켰는데, 이때부터 홍콩은 영국령이 되어 150년 뒤인 1997년 7월 1일에야 중국에 반환된다. 그밖에 영국은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받아내고 아편 문제는 제기하지도 못하게 했으니 그런 적반하장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치명적인 것은 관세 결정권을 영국이 가지기로 한 점이었다. 전쟁에서 진 탓도 있지만 중화세계의 질서에만 익숙했던 청나라 정부가 근대적인 관세 개념을 전혀 몰랐던 탓이다. 더구나 그런 불평등조약에도 불구하고 청나라 정부는 오로지 서양 오랑캐와 국제 조약이라는 것을 맺었다는 사실만을 씻지 못할 굴욕으로 여겼으니, 중화 이데올로기의 독소가 얼마나 뿌리깊은 것인지를 보여준다】.
마치 영국이 중국의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난징조약 이후 서양의 열강은 앞다투어 중국으로 달려와서 각종 불평등 조약을 연달아 맺는다. 나라 꼴이 이 모양이니 가뜩이나 소수의 만주족 지배에 입이 부어 지냈던 한족들이 가만 있을 리 없다(중국식 제국의‘진화론’에 따르면, 열강의 침략이 없었어도 어차피 건륭제(乾隆帝)의 치세가 끝난 뒤에는 청나라가 멸망하고 한족 왕조가 들어서야 할 시점이었다). 공교롭게도 조선에서 최제우가 동학(東學)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포교하던 무렵에 중국에서는 홍수전(洪秀全, 1814~1864)이라는 자가 등장해서 그리스도교와 중국의 전통 사상을 적당히 버무려 상제교(上帝敎, ‘상제’란 옥황상제를 뜻한다)라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고 반(反)만주족지배와 반외세를 구호로 내건다. 이것이 중국판 동학 운동, 즉 태평천국운동이다(홍수전이 최제우보다 10년쯤 먼저 시작한 걸 보면 아마 최제우는 그를 모델로 삼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동학을 태평천국의 조선 버전이라 해야 할까?).
태평천국군은 전국민적 지지를 받으며 급속히 세력을 키워 강남 전역을 손에 넣고 난징을 수도로 삼아 화북까지 노린다. 하지만 이미 중국의 실제 주인은 서양 열강이었으니 그들이 그 반란을 내버려둘 리가 없다. 일단 중국 내부의 정치적 문제인지라 그들은 직접 전면에 나서지 않고 청나라 정부군에게 서양식 무기를 제공하고 서양식 편제와 훈련을 실시한 다음 반란 진압에 투입했는데, 과연 그것은 효과 만점이었다. 10년 동안이나 반란군에 쩔쩔 매던 정부군은 이후 연전연승을 거두면서 파죽지세로 반란군을 몰아붙여 1864년 마침내 난징을 탈환하고 중국 역사상 최장기의 반란을 종식시켰다.
중국의 지배층이 크게 각성한 것은 바로 그 무렵이다. 진압군의 지휘관으로 참전한 진압군의 지휘관 증국번(曾國藩, 1811~72)과 이홍장(李鴻章, 1823~1901)은 자기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서양의 힘에 감탄하면서 어서 빨리 중국도 그 마법을 배워야 한다고 느낀다. 그래서 이때부터 19세기 말까지 약 30년 동안 중국에서는 서양의 우수한 과학 기술을 적극 도입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자는 양무운동(洋務運動)이 활발히 전개된다. 그 일환으로 광산업과 조선업 등 군수 산업을 중심으로 한 근대적 중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했으며, 서양식 무기와 군사 제도를 본받는 데서 더 나아가 유능한 인재를 서양에 보내 군사학과 군사 훈련을 이수하게 하는 등 다양한 자강책이 실시된다. 대원군이 쇄국을 공식 정책으로 선언했을 때 중국에서는 이처럼 서양을 본받자는 양무운동(洋務運動)이 한창이었으니, 조선에서 골수 성리학자들이 득세한 것도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이제 조선은 중국으로부터 배울 게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사대와 흠모는커녕 더 이상 중국과 교류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다.
▲ 수난의 섬 강화도 병인양요(丙寅洋擾)와 신미양요(辛未洋擾) 당시 프랑스군과 미국군의 침입 경로를 보여주는 지도다. 프랑스와 미국은 일단 강화도를 점령해 서울 침략의 교두보로 활용하고자 했다(특히 프랑스는 한달 동안이나 강화도를 지배했다). 외침만 있으면 망명정부가 들어섰던 강화도가 최초의 침탈지가 되었으니 아이러니다.
한편 비중화세계라는 점에서는 청나라보다 원조격인 일본에서는 중국이 거친 단계와 과정이 한층 더 압축적으로 진행된다. 사실 신미양요(辛未洋擾)에서 미국이 조선을 거의 제압했으면서도 조선의 개항을 포기하고 물러간 데는 일본에서의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20여 년 전인 1854년에 미국의 페리 제독은 군함 네 척만으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간단히 일본을 개항시키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조선은 대원군 집권기의 10년 동안만 쇄국기였지만 일본은 에도 바쿠후가 성립된 17세기 초 이후 개항될 때까지 무려 250년이나 공식적인 쇄국을 유지했다. 조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쇄국을 가져 온 것도 서양의 그리스도교였다. 처음에 에도 바쿠후의 창건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리스도교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으나 측근 인물들까지도 서양의 종교를 믿는 것에 놀라 탄압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일본은 이후 쇄국을 유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 문물을 수입하는 루트를 완전히 봉쇄하지는 않았다. 특히 네덜란드에게는 계속 무역 특혜를 주었는데, 조선에 처음 온 서양인 (벨테브레와 하멜)이 모두 네덜란드 상인이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일본에는 네덜란드풍의 근세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랬는데 조선에서는 상당한 규모의 전투를 치에도 전혀 개항할 의지를 보이지 않았으니 미국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것도 이해할 만하다.
일본이 그렇듯 쉽게 문호를 열 수 있었던 것은 중국과 에도 바쿠후 정권이 오랜 집권으로 부패할 대로 부패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패와 무능이라면 조선의 집권 세력도 결코 안 뒤지는데, 왜 조선은 일본과 다른 경로를 걸었을까? 그 이유는 역시 성리학적 중화 이념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유교 국가가 아니었던 일본은 지배 권력이 부패하면 얼마든지 반란이나 쿠데타가 일어나 새 정권으로 교체될 수 있었던 데 비해, 조선은 원래부터 골수 성리학 국가인 데다 17세기부터는 유일한 중화세계로 남았기에 정권 교체가 원리적으로 불가능했던 것이다(조선에서는 반역과 개혁이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는 점을 상기하라).
게다가 일본은 천황이라는 상징적 중심이 있었으므로 쿠데타 세력이 등장해서 바쿠후 정권을 거부한다 해도 천황에 대한 반역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정치적 메커니즘이 있기 때문에 개항 이후 일본에서는 시시(志士)라고 불리는 젊은 정치 개혁 세력이 등장해서 미국의 군함 몇 척에 무력하게 굴복한 바쿠후 정권을 타도하는 데 앞장서게 된다. 존왕양이(尊王洋夷, 여기서 ‘왕’이란 물론 천황을 가리킨다)를 구호로 내건 반바쿠후 세력은 1868년에 드디어 바쿠후 정권을 무너뜨리고 무려 1천 년 만에 왕정복고를 이룬다. 당시 천황이 바로 열여섯 살의 메이지 천황이다.
후대에 그의 이름이 유명해진 것은 그의 이름에서 나온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때문이다.1868년부터 시작된 이 개혁 운동은 물론 소년 천황이 직접 주도한 게 아니라 메이지 정부의 젊은 관료들이 입안하고 집행한 것이지만, 어쨌든 일본이 오랜 바쿠후 체제(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조선의 사대부(士大夫) 체제와 같은 위상이다)에서 벗어나 명실상부한 중앙집권 국가로 컴백했기에 가능한 개혁이다. 유신의 바람은 새로 태어난 일본 전역에 새 바람을 불어넣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유신의 이념은 부국강병이고, 이를 위한 수단은 서구화를 통한 근대화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히 일본적인 기반에 뿌리를 둔 서구화이고 근대화였다는 점에서 중국의 양무운동(洋務運動)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당시 일본인들은 그 정신을 화혼양재(和魂洋才), 즉 일본의 혼에 바탕을 두고 서양의 재주를 도입한다는 말로 표현했다(和란 전통적으로 일본을 가리키는 글자다. 일본 고대를 ‘大和’라고 부른 데서 나온 말인데, 지금도 일본식 음식을 흔히 화식和食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우리에게 유신이라면 1970년대 박정희 독재정권이 더 익숙하다. 물론 유신이라는 말은 원래 『논어(論語)』에 나오니까 족보에 있는 용어지만, 박정희는 바로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서 자신의 유신을 따왔다. 그렇다면 화혼양재는 박정희가 주창한 토착 자본주의에 해당한다. 그러나 박정희의 토착 자본주의는 자본주의보다 ‘토착’에 더 중점을 둔 나머지 천민자본주의의 길로 빠져들어 정상적이고 균형적인 발전의 길을 가로막았으니, 화혼양재(和魂洋才)보다도 크게 뒤지는 개념이라 하겠다】.
▲ 우리도 할 수 있다! ‘제국주의로 입은 손해를 제국주의로 벌충하자.’ 이 정한론을 결의하는 일본 정부의 모습이다. ‘짝퉁’ 제국주의답게 서양의 시사만화풍으로 그려져 있다.
나이가 많아봤자 사십대이고 주류가 삼십대인 유신 정부의 관료들은 젊은 나이에 어울리게 청렴했고 의욕적이었다. 그들은 48명의 사절단을 1년 동안이나 미국과 유럽에 파견해서 서양의 모든 제도와 문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했으며, 그 결과 교육, 군사, 철도, 체신, 사법 등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단기간에 전면적인 서구화를 이루었다. 서양에서 수백 년씩 걸린 일을 불과 십수 년 만에 해치우는 초고속적인 압축 행정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그 엄청난 속도의 이면에는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군사적 성격이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유신정부가 모델로 삼은 서양 열강을 빠른 속도로 따라잡으려면 모든 근대화 과정을 군대식 편제와 절차에 따라 추진해야만 한다. 게다가 실제로 개혁의 내용에서도 언제나 군사 부문이 최우선의 고려 사항이다. 이처럼 서양을 모델로 삼되 군대식으로 근대화를 추진하는 게 유신의 기본 노선이라면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는 뻔하다. 일단 서양식 근대화니까 일차 결론은 제국주의다. 그러나 여기에 일본 특유의 군대식 형식과 내용이 가미되면 이차 결론이자 최종 결론이 나온다. 그것은 다름아닌 ‘일본식 제국주의’, 즉 군국주의다.
알다시피 제국주의라면 식민지가 필요하다. 그런데 일본이 타깃으로 삼을 식민지 후보라면 한반도의 조선 이외에 또 있을까? 과연 유신의 성과로 어느 정도 자신감을 얻게 되자 유신 정부에서는 즉각 정한론(征韓論)이 제기된다. 말할 것도 없이 한반도를 정복하자는 주장인데, 당시 유신 세력이 정신적 지도자로 여겼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59)의 말에 따르면 이런 논리다. “러시아, 미국과 화의가 맺어지면 우리로서는 비록 오랑캐와의 약속일지라도 신의를 지켜야 한다. 우리는 그 사이에 국력을 배양하여 손쉬운 상대인 조선, 만주, 중국을 취함으로써 교역에서 러시아와 미국에게서 잃은 것을 보충해야 한다.” 제국주의 열강에게 입은 손해를 식민지에 전가하라, 이 탁월한 아(亞)제국주의적 가르침은 곧바로 유신 정권의 대외 진출을 위한 기본 노선이 된다.
조선이 신미양요(辛未洋擾)의 혼란에 빠져 있던 1871년 일본은 중국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그 내용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으나 이 조약은 유사 이래 최초로 일본과 중국이 대등한 입장에서 맺은 외교 관계라는 점에서, 작지만 엄청난 한 걸음이었다. 이제 일본은 조선의 종주국인 중국과 같은 위상이므로 조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일본의 구상은 5년 뒤에 현실로 드러난다.
▲ 진정한 극일을 위해 중화세계가 몰락하고 비중화세계가 떠오르는 상황에서 쇄국이란 곧 정치적 자폐와 같았다. 사진은 17세기 광해군(光海君) 시대에 만들어진 일본어 학습서인 『첩해신어(捷解新語)』인데, 자폐증에서 벗어나려는 당시의 노력은 결국 사대부(士大夫) 정권의 빗장수비에 걸려 빛을 보지 못했다.
잘못 꿴 첫 단추
대원군과 위정척사파의 밀월관계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서양 열강의 침략으로 국란을 맞았을 때는 이해관계가 같으니까 서로 의기투합할 수 있다. 그러나 애초부터 중앙집권적 왕국을 꿈꾸는 대원군과 사대부 체제의 좋았던 옛날에 향수를 품고 있는 조정 대신들이 언제까지나 찰떡궁합이기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과연 위기가 그런 대로 가라앉고 나서 갈등은 즉각 표면화되기 시작한다. 먼저 시비를 건 쪽은 대원군이다. 신미양요(辛未洋擾)가 끝나자마자 전국의 서원을 철폐하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대원군으로서는 골수 성리학자들의 고리타분한 입장도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만 그보다도 전후 복구와 경복궁 재건축 등으로 돈 들 데가 많은 마당에 여전히 많은 토지를 지닌 데다 면세의 혜택까지 누리고 있는 서원들이 못마땅했을 것이다. 그러나 10년 독재에 자신감이 붙은 탓일까? 그는 반대 세력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더구나 서원 철폐는 조정 대신들만이 아니라 성균관 유림 세력의 반발까지 부를 만큼 과격한 조치였으니 분란이 빚어지지 않을 수 없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건 사람은 최익현이다. 이미 경복궁 중건 시업에도 반대한 바 있었던 그는 1873년 대원군이 명니라 신종의 사당인 만동묘마저 철폐하지 격렬한 비판을 담은 상소를 올린다. 물론 대원군이 예전처럼 아들을 꽉 잡고 있었다면 그의 상소는 별로 보람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고종(高宗)의 나이도 스물이 넘은 데다가 그에게는 야망과 더불어 아이를 가진 아내가 있었다. 일단 과격한 상소를 올린 최익현은 유배형을 받았으나 집중 탄핵을 받은 대원군도 결국 그 해 11월에 실각하고 만다【이후 대원군은 한양 인근의 양주로 낙향해서 은거하다가 한참이 지난 뒤에야 자기 집인 운현궁(雲峴宮, 지금 서울의 운니동에 있었는데 건물은 일제 강점기에 파괴되었다)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대원군을 퇴출시키는 절차다. 집권 기간 중에도 대원군은 특별한 관직을 맡지 않았으므로 고종(高宗)으로서는 아버지를 퇴출시킬 방법이 없었다(앞서 보았듯이 일찍이 세조(世祖)는 수양대군 시절에 영의정을 잠시 지낸 바 있으나 초기에나 가능했던 일이고 사대부(士大夫) 체제로 들어선 이후 조선에서는 왕실 종친에게 정식 관직을 제수한 경우가 없다). 그래서 고종(高宗)은 조대비가 대원군에게 만들어준 창덕궁 전용문을 잠가 버림으로써 해임 통보를 대신한다. 조선의 모호한 권력구조를 잘 보여주는 예다】.
▲ 마지막 수구 중화 이념의 화신과 같았던 최익현이다. 그는 대원군의 쇄국도, 개화파의 개항도, 동학 농민군도 모조리 반대하고 오로지 옛 중화 세계만을 이상향으로 고집했다.
사실 고종(高宗)은 정조(正祖) 이후의 역대 왕들이 그렇듯이 그냥 하는 일 없이 왕위에 눌러앉아 있기만 하면 되는 팔자 좋은(?) 왕인 데다 실제로 그런 팔자에 어울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고종이 아버지를 퇴출시키는 과감한 조치를 내린 데는 그 자신의 의사보다 남편이 친정에 나설 것을 강력히 권유한 민비의 책동이 크게 작용했다. 그렇잖아도 그녀는 대원군의 정적이 된 조대비 세력은 물론이고 조정의 원로대신들과 안동 김씨, 성균관 유생들과 결탁하고 있었으니, 가히 ‘반(反)대원군 연합전선’을 구축했다고 할 수 있겠다(그것으로 미루어보면 아마 최익현의 상소도 예정된 코스였는지 모른다).
게다가 당시 민비(閔妃)는 임신중이었으므로 남편과 왕실에 대한 발언권이 더욱 컸다. 만약 그녀가 아들을 낳는다면 누대에 걸쳐 후사가 없던 왕실에서 일약 스타로 떠오를 것은 분명하다. 과연 민비에게는 아직 신데렐라의 마법이 발효중이었다. 1874년 2월 그녀는 거뜬히 아들을 낳아, 1827년 헌종(憲宗)이 태어난 이래 50년 만에 왕실에서 처음으로 후사가 탄생하는 경사의 주인공이 된다. 대원군이 실각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조정으로 몰려든 민씨 일가붙이들은 원자의 탄생으로 권력을 쥔 손에 더욱 힘이 실렸다.
▲ 자금 조달, 경복궁 중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대원군은 만동묘(위)를 철회하고 당백전(아래)을 발행했다. 왕권강화를 위한 조치였으나 그 결과는 유림의 반발로 들었다.
어쨌거나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끝장난 것은 일단 다행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잖아도 바깥 정세가 급박하면서도 어수선하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권력의 핵심이 교체되었다는 것, 그것도 일인 독재에서 다수 독재로 바뀌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조짐이 영 좋지 않다. 아니나 다를까, 졸지에 세상이 바뀐 덕분에 정권을 쥔 풋내기 민씨들은 처음부터 대내외 정책에서 질척거린다. 대원군이 물러난 뒤에도 유생들의 상소가 잇따르자 상소 금지라는 엉뚱한 조치를 내리는가 하면, 일본에서 정한론이 논의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일본과의 관계를 어떻게 푸느냐를 놓고도 갈팡질팡만 할 뿐 좀처럼 일관된 정책을 정하지 못한다.
일본이 노린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조선의 내부 혼란이다. 정한론(征韓論)을 실행할 조건은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아직 정한론이 시기상조라고 주장했던 일부 반대파의 목소리도 조선에서 대원군이라는 강력한 구심점이 사라진 이상 입을 닫을 수밖에 없다. 이제 노선은 정해졌고 다만 방법이 문젠데, 마침 일본에게는 좋은 벤치마킹의 대상이 있다. 20년 전 미국의 페리에게 당한 바 있었던 서양 제국주의의 단골 수법이 그것이다. 두 차례의 양요를 통해 조선도 이미 겪은 경험이지만 이번에는 연출자가 낯선 서양 열강에서 낯익은 일본으로 바뀐 데다 독불장군 대원군이 실각했으니 충분히 먹힐 가능성이 있다. 그런 의도에서 1875년 가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자랑스런 산물인 일본의 근대식 증기 군함 운요호(雲揚號)가 강화도 해상으로 온다.
앞서 프랑스와 미국은 침략의 구실이라도 있었으나 일본은 그것조차 없다. 그러나 구실이야 만들면 되는 게 아닌가? 어차피 바깥이라면 무조건 예민해지는 조선은 어떤 미끼를 던져도 덥석 물 테니까 구실을 만드는 건 전혀 어렵지 않다. 식수를 구한다는 이유로 함선에서 보트를 내려 선원 수십 명을 강화도에 상륙시킨 게 그 미끼다. 명백한 무단 침범이므로 조선의 수비대가 사격을 가한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으로 조선은 일본의 덫에 걸려든다.
각본대로 운요 호는 함포 사격으로 응수하는 한편 수십 명의 전투 병력까지 풀어 정식 교전을 유도했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 36명이 전사한 데 비해 일본 측의 손실은 경상자 두 명뿐이었으니 그것만도 조선 측으로서는 큰 손실이었지만, 정작 조선이 입게 될 손실과 일본이 노린 이득은 그 뒤에 가시화된다. 이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조선에 대사를 파견하면서 책임을 전가한 것이다. 이렇게 전쟁을 먼저 벌인 뒤 외교를 통해 유리한 협상 고지를 차지하는 솜씨는 과연 일본이 후발 제국주의 국가라는 게 사실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노련하고 교활한 것이었다【사실 이 전형적인 제국주의적 수법의 원조는 당시 프로이센의 재상이었던 비스마르크다. 1860년대에 그는 전쟁에 대하는 프로이센 의회의 출석을 미룬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덴마크를 공격했다. 그리고는 주변국들의 중립 약속을 받아내고 오스트리아마저 제압한 다음 의회에 나가 사후 승인을 얻어냄으로써 전쟁과 외교의 절묘한 조합을 선보였다. 곧이어 그는 프랑스에게 똑같은 수법을 구사해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을 유도한 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독일제국을 성립시켰다. 일본이 비스마르크의 특허에서 한 수 배웠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유신 정부는 나중에 독일의 흠정헌법을 모방해서 제국헌법을 만들 정도로, 같은 후발 제국주의 국가였던 독일을 열렬히 추종했기 때문이다】.
▲ 이상하게 생긴 배 위쪽은 미국의 제너럴 셔먼 호이고 아래쪽은 일본의 운요 호다. 둘 다 대포를 장착한 증기선인데, 조선인들은 19세기 초부터 이런 배를 이양선(異樣船), 즉 이상한 모습의 배라고 불렀다. 서양인들만 가진 줄 알았던 이 이양선을 일본인들이 몰고 왔으니 조선 정부가 겁을 집어먹은 것도 당연하다.
일본의 의도대로 이듬해인 1876년 1월 강화도에서 양측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표면상으로는 지난해에 있었던 ‘불미스런 사건’의 뒷처리를 하자는 것이었지만, 조선이나 일본이나 협상의 진정한 목적이 통상 여부의 결정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물론 협상 반대의 목소리도 컸다. 아직 정부에 남아있는 대원군 세력과 성균관 유림은 모처럼 만에 다시 한 목소리를 냈고, 유배형을 마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최익현도 오랑캐와의 협상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다시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대세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재야의 대원군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최익현은 또 다시 유배를 떠나야 했다. 그 반면 베이징에 가서 양무운동(洋務運動)의 효과를 목격한 적이 있는 박규수(朴珪壽)와 오경석(吳慶錫, 1831~79) 등은 협상만이 아니라 개항까지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그들의 의견보다 중요했던 것은 청나라가 개항을 권유했을 뿐 아니라 민씨 정권이 대원군 정권과의 차별을 보이려면 어차피 개항의 노선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정이었다.
결국 얼마 간의 협상을 거친 뒤 1876년 2월 2일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국제 조약인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다(정식 명칭은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인데, 병자수호조약이라고도 부른다). 얼핏 보면 조약의 내용은 그다지 불평등하지 않은 듯하다. 이를테면 영국이 패전국 중국에게 강요한 난징조약에서처럼 전쟁 배상금 같은 것은 없으며, 조선의 항구를 할양하거나 조차한다는 조항도 없다. 우선 조선에 일본 영사를 두겠다는 조항은 모든 수교의 기본이니까 연하다. 또 부산을 포함해서 세 개의 항구를 개방다는 조항은 전통적으로 3포를 통해 일본과 교역왔으니 전혀 어렵지 않다. 게다가 조약의 제1반갑기 그지없는 조항이다. 조선은 자주 국가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강화도조약을 통해 일본은 조선에게 선의를 베푼 걸까?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문안보다 맥락이, 보다 콘텍스트가 더 중요한 게 바로 외교 분야다. 조선이 자주 국가라는 것을 명시한 이유는 바로 전까지 조선이 자주 국가가 아니었다는 것을 뜻한다. 말할 것도 없이 조선은 전통적으로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 아니며, 따라서 중국은 조선에 대해 종주권이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된다. 물론 문안 상으로는 좋은 말이다. 그러나 그 문안의 맥락을 해석하면 앞으로 일본이 조선을 어떻게 한다 해도 중국을 포함해서 어느 나라도 전혀 간섭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일본은 교묘하게 정한론(征韓論)의 근거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 일본의 의도를 더 잘 보여주는 게 바로 조약의 제7조, 즉 조선의 연해와 섬들을 자유로이 측량할 수 있다는 조항이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강화도조약의 불평등성을 명시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은 이 조항 하나뿐이다. 동등한 관계라면서 남의 나라를 일방적으로 측량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약이 발효되면서 일본은 곧바로 한반도에 대한 면밀한 조사 작업에 들어간다【고구려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가 발견된 이 측량작업의 과정에서다. 조약에서는 한반도의 연해와 섬들만 측량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본인들은 이제 자유롭게 조선을 드나들 수 있게 되었으므로 일본 정부는 군인들을 민간인으로 위장시켜 조선 전역의 지리와 문물을 조사하게 했다. 1882년 그런 밀정으로 활약하던 사카와 가게노부 중위는 만주를 돌아다니다가 압록강 중류 부근에서 높이 6미터의 거대한 비석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다. 물론 앞에서 보았듯이 무려 1500년 동안이나 그 비석은 그곳에 있었으나 그 전까지는 그게 광개토왕릉비인 줄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처럼 중요한 발견을 한 사카와는 그 비석에 중요한 조작을 한다. 일본이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를 속국으로 삼았다는 그의 조작은 훗날 일본의 한반도 역사 조작 가능케 하는 근거가 된다】.
그리고 나중에 보겠지만 일본이 한반도 전체를 강점한 뒤 이 측량 작업은 토지조사사업으로 이어져서 한반도를 장차 중국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로 재편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강화도조약에서 일본은 조선 대표가 한성이라 부르던 한양을 굳이 경성京城이라는 용어로 불렀는데, 나중에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이 용어가 뿌리를 내리게 된다).
▲ 시아버지의 고집과 며느리의 야심 왼쪽은 대원군, 오른쪽은 민비(閔妃)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인 이 두 야심가로 인해 중요한 시기 조선의 대외 정책은 오락가락과 갈팡질팡을 거듭했다. 물론 그들 사이에 끼인 고종은 완벽한 바지저고리였다. 아마 고종은 나라의 걱정보다 아버지와 아내의 대립에서 더 마음의 고통을 느꼈을 터이다.
또 하나의 해법: 문 열기
똑같이 남의 손에 의해 강제로 개항을 당한 처지였지만 일본과 조선의 차이는 불과 20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컸다. 일본은 서양 열강의 압력으로 문호를 개항했으나 그 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이루면서 아시아 최초의 제국주의 국가로 도약했고, 조선은 그 일본에 의해 개항되면서 신흥 제국주의의 성장을 위한 발판으로 전락했다.
두 나라가 그렇듯 큰 차이를 보이게 된 이유는 뭘까? 단지 개항을 강요한 상대방이 달랐기 때문일까? 이를테면 일본은 선진 제국주의에 의해 개항된 탓에 도약을 이루었고 조선은 후발 제국주의에 의해 개항된 탓에 비참한 운명으로 전락한 걸까? 그렇지는 않다. 흔히 잘못 알고 있는 것처럼 일본은 19세기 중반에 개항과 메이지 유신을 통해서 단기간에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 게 아니다. 그 배경에는 17세기 초부터 시작된 에도 바쿠후 시대의 오랜 번영기가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은 비록 대외적으로 쇄국을 유지했고 대내적으로도 숱한 진통과 혼란을 겪었으나 전반적으로 보면 비중화세계 특유의 역동성을 바탕으로 착실히 국력을 키웠다.
그렇다면 조선이 일본에 뒤처진 이유는 단지 개항에서 늦었기 때문은 아니다. 17세기에 중국마저 비중화세계로 편입된 이후 홀로 남은 조선은 중화 세계의 근본 모순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낡은 세계의 수호자가 되는 복고와 보수의 길을 선택했다【더구나 그렇게 조선이 제 발로 우물 안을 찾아들어갈 무렵 우물 바깥에서는 인류 문명사적으로 커다란 전환점을 맞고 있었다. 특히 서유럽에서는 정치적으로 절대왕정 체제를 거치며 시민계급이 착실히 성장함으로써 18세기부터는 시민들이 사회를 주도하는 의회민주주의와 국민국가 체제를 이루었으며,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제도로써 생산력과 국민경제를 성장시키고 있었다. 이렇듯 유럽 문명이 장차 세계를 주도할 메이저 문명으로 발돋움하는 기간에 동아시아 사회는 여전히 수구와 보수의 구태 속에 머물고 있었다. 그나마 중국과 일본은 비중화세계로 체제를 전환하면서 변화를 모색했으나 조선만은 고집스럽게 중화를 고수했으니 이때 이미 조선의 미래는 결정되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18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중화세계의 한계를 느끼고 정치에서는 왕국의 실험을, 학문과 사회에서는 실학의 실험을 통해 변화를 꾀했으나(그 최종적 실험자가 정조였다), 조선의 지배자인 사대부(士大夫)들은 성리학 이념이 가져다주는 체제 안정의 유혹으로부터 끝내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을 정체시키고 발전을 가로막은 원인과 주범은 분명해진다. 원인은 개국 초기부터 조선의 발목을 잡은 성리학 이념이며, 주범은 성리학 이념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지배 체제와 기득권을 유지하려 했던 조선의 사대부들이다.
물론 침략 국가가 없다면 침략을 당하는 국가도 있을 수 없다는 논리에서 본다면, 일본의 침략 의도가 조선에게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자체적 변화의 길을 결정적으로 저해한 장애물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아무리 국력에서 현저한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일본의 침략적 의도가 노골화되는 상황에서까지 조선 정부가 철저하게 무능했다는 사실은 이후에 전개되는 조선의 몰락 과정을 결코 남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게 한다. 게다가 개항을 결정한 민씨 정권은 그 개항마저도 일관적으로 추진하지 못했다(아마 대원군 정권에 대해 후대의 역사가들이 비교적 후한 점수를 매긴 이유는 일관성이나마 유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타의에 의해 문을 열게 되었다 하더라도 이왕 개항하기로 했다면 확실히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강화도조약 이후 조선 정부는 일단 개화(開化)를 총론으로 확정해 놓고도 개화에 필요한 구체적인 각론은 전혀 마련하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개화란 오로지 일본만을 대상으로 할 뿐 다른 열강에 대해서는 여전히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는 기형적인 형태였던 것이다(개항 뒤에도 조선은 프랑스와 영국의 통상 요구를 계속 거절하다가 1882년 미국을 시작으로 서양 열강에게도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한다). 앞서 두 차례의 양요에서 서양인이라면 치를 떨게 된 분위기가 조성된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조선 정부의 그 편협한 자세를 보면 과연 개화의 의지가 있는지, 개화의 의미를 알고 있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혹시 조선 정부는 그래도 가까운 일본이 서양 오랑캐보다는 낫다고 여긴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낯익은 제국주의라는 이점을 십분 활용하려 했던 일본의 잔꾀에 보기 좋게 속아넘어간 결과다. 굳이 비교하자면 서양의 선진 제국주의보다 일본의 후발 제국주의가 훨씬 위험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세도정치(勢道政治)가 끝나면서 곧바로 국가적 위기에 빠져들었던 조선은 이제 두 번째 해법을 마련했다. 대원군의 빗장수비가 효과를 보지 못했다면, 아마 그 반대의 전술인 토털사커(total Soccer, 네덜란드의 리뉘스 미헐스 감독이 완성시킨 축구 전술로, 한국에서는 토탈 축구(Total Soccer)로 더 널리 불리고 있다. 그는 자신의 스승이 고안해낸 이론에 그 당시 브라질의 지역방어와 헝가리의 포지션 체인지 등을 도입시키면서 볼을 빼앗긴 후에도 압박을 통해 팀 전체가 최대한 뒤로 물러서지 않고 최후방 라인을 높은 지점에 형성한 뒤, 최전방 공격수부터 상대를 적극적으로 압박하면 그만큼 상대 골문과 가까운 위치에서부터 공격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에서 이 전술을 창안하였다. 이를 통해 보통 수비 상황에서는 잉여전력으로 간주되기 쉬운 공격수들에게 전방에서부터 상대를 압박하도록 만들고, 또 공격시에는 포지션 체인지를 통해 수비수들도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시켜 토탈 풋볼이라는 말 그대로 전원공격 + 전원수비의 형태를 취하는 축구 전술로 발전시켜 나갔다)는 통할지도 모른다. 비록 개화의 첫 단추는 잘못 꿰었다 하더라도 앞으로 자세를 가다듬고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개화 전술을 구사하면 멋진 역전승을 거둘 수도 있을 것이다. 형세가 어렵긴 하지만 실제로 쇄국은 어차피 실패할 전술이었고 개화는 운영 여부에 따라서는 어느 정도 효과를 볼 수도 있는 전술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두 번째 해법은 첫 번째 해법과 단지 형태상으로만 정반대인 게 아니었다. 순식간에 모든 게 거꾸로 돌려지면서 첫 번째 해법으로 해결되었던 문제점이 다시 드러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세도정치다.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를 제압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던 대원군이 허무하게 물러나자 그 빈 자리를 민비(閔妃)의 친정인 여흥 민씨 가문이 꿰찬 것이다. 수십 년 동안 나라를 망쳐놓았던 세도가문이 아주 중요한 시기에 다시 권력을 잡았으니 해법이고 전술이고 제대로 운영될 리가 없다. 그래서 두번째 해법, 개화 전술은 오히려 조선의 위기를 더욱 구체화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 무지가 빚은 무능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강화도의 연무당이라는 관청이다.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외국과 대등한 관계에서 맺은 국제조약이었으나, 불행히도 그 결과는 외세의 침략을 국제법적으로 허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힘의 열세도 열세지만, 무엇보다도 주권이나 무역 등 국제법상의 개념에 대해 전혀 몰랐기에 조선 정부는 그저 일본이 하자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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