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변기의 비중화세계
대원군 자신도 병인양요(丙寅洋擾)가 끝나고부터는 쇄국의 결심을 굳혔다. 그렇다면 조정의 분위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항로(李恒老, 1792~1868), 기정진(奇正鎭, 1798~1879) 등 원로대신들은 물론이고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유인석(柳麟錫, 1842~1915) 등 소장파와 유생들까지 일제히 존화양이(尊華洋夷, 중화를 숭상하고 서양 오랑캐를 배척한다는 정신)를 목청껏 외친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모두 실학의 냄새마저도 없는 골수 성리학자들이었으니, 말하자면 실로 오랜만에 수구 대통합이 이루어진 셈이다(더욱이 그들은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사업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이제는 그런 갈등도 사라졌다). 중화세계라는 자신들의 ‘지구’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나선 이 ‘독수리 형제들’의 구호는 거창하게도 위정척사(衛正斥邪), 즉 정의를 수호하고 불의를 배척한다는 것이다. 이런 결속의 분위기를 축하라도 하듯이 대원군은 신미양요(辛未洋擾)가 끝난 직후 한양과 강화를 비롯해서 전국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웠는데, 거기에 새겨진 문구는 ‘서양 오랑캐의 침략에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짓’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이었다.
얼핏 생각하면 그런 입장은 난세를 맞아 조선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이며 민족 주체성의 발로인 듯도 하다(실제로 그렇게 주장하는 역사학자도 많이 있다), 하지만 나라 바깥을 모조리 한 가지 색깔로 칠해놓고 오로지 타도해야 할 적으로만 취급하는 정신병적인 태도를 최선의 방책이며 주체적인 자세로 본다면, 조선 역사상 모든 정신나간 위정자들도 다 민족주의자라고 칭송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주체’란 중화세계일 뿐이고 그들의 ‘민족’이란 중화세계에 사는 사람만을 뜻하므로 그들의 입장은 소아병에 다름아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아이 같은 심성과 습성을 버리지 못하는 게 소아병이라면, 조선의 지배층은 아이 정도가 아니라 아예 200년 전으로 되돌아간 격이다. 이 정도 정신병이라면 가히 불치병이 아닐까?
더 큰 불행은 불치병 환자가 된 조선을 보살펴줄 보호자가 주변에 없다는 것이다. 영원한 사대와 흠모의 대상이었던 중국도, 언제까지나 교린의 어깨 동무라고 여겼던 일본도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조선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이 일부러 조선을 왕따로 만든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조선은 어느덧 동아시아에서도 외톨이가 되어 있었다(하긴, 200년 전부터 유일한 중화의 나라로 남았으니 그렇게 된 것도 자업자득이지만). 그러나 같은 비중화세계 출신이라 해도 19세기에 중국과 일본이 걸어온 과정은 사뭇 달랐으며, 따라서 이후 조선에 미치는 두 나라의 영향도 사뭇 달라진다.
▲ 화친은 매국이다 두 차례의 양요를 겪고 난 뒤 대원군이 전국 각지에 세우게 한 척화비다. 사람 키만 한 높이의 비석에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 옆에는 이 교훈을 만 년 동안 대대로 명심하고 지켜나가라고 쓰여 있으나 척화비는 불과 6년 뒤 대원군이 실각하자 곧 철거된다.
우선 중국은 앞서 잠시 보았듯이 18세기 말 건륭제(乾隆帝)의 치세 말기부터 날개 없는 추락을 거듭했다. 주요 수출품을 모직물에서 아편으로 바꾸면서 영국은 그 신상품의 ‘약발’ 덕에 그간의 중국차 수입으로인한 적자를 완전히 해소하고 막대한 무역흑자를 올리기 시작했다. 견디다 못한 중국이 1839년 인도산 아편 2만 상자를 압수해 불태운 사건은 오히려 영국이 본격적인 침략 노선으로 전환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이를 빌미로 영국은 아편전쟁을 일으켜 중국을 굴복시키고 최초의 불평등조약인 난징조약을 맺는 데 성공한다【이 조약으로 영국은 홍콩을 할양받고 중국의 다섯 항구를 개항시켰는데, 이때부터 홍콩은 영국령이 되어 150년 뒤인 1997년 7월 1일에야 중국에 반환된다. 그밖에 영국은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받아내고 아편 문제는 제기하지도 못하게 했으니 그런 적반하장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치명적인 것은 관세 결정권을 영국이 가지기로 한 점이었다. 전쟁에서 진 탓도 있지만 중화세계의 질서에만 익숙했던 청나라 정부가 근대적인 관세 개념을 전혀 몰랐던 탓이다. 더구나 그런 불평등조약에도 불구하고 청나라 정부는 오로지 서양 오랑캐와 국제 조약이라는 것을 맺었다는 사실만을 씻지 못할 굴욕으로 여겼으니, 중화 이데올로기의 독소가 얼마나 뿌리깊은 것인지를 보여준다】.
마치 영국이 중국의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난징조약 이후 서양의 열강은 앞다투어 중국으로 달려와서 각종 불평등 조약을 연달아 맺는다. 나라 꼴이 이 모양이니 가뜩이나 소수의 만주족 지배에 입이 부어 지냈던 한족들이 가만 있을 리 없다(중국식 제국의‘진화론’에 따르면, 열강의 침략이 없었어도 어차피 건륭제(乾隆帝)의 치세가 끝난 뒤에는 청나라가 멸망하고 한족 왕조가 들어서야 할 시점이었다). 공교롭게도 조선에서 최제우가 동학(東學)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포교하던 무렵에 중국에서는 홍수전(洪秀全, 1814~1864)이라는 자가 등장해서 그리스도교와 중국의 전통 사상을 적당히 버무려 상제교(上帝敎, ‘상제’란 옥황상제를 뜻한다)라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고 반(反)만주족지배와 반외세를 구호로 내건다. 이것이 중국판 동학 운동, 즉 태평천국운동이다(홍수전이 최제우보다 10년쯤 먼저 시작한 걸 보면 아마 최제우는 그를 모델로 삼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동학을 태평천국의 조선 버전이라 해야 할까?).
태평천국군은 전국민적 지지를 받으며 급속히 세력을 키워 강남 전역을 손에 넣고 난징을 수도로 삼아 화북까지 노린다. 하지만 이미 중국의 실제 주인은 서양 열강이었으니 그들이 그 반란을 내버려둘 리가 없다. 일단 중국 내부의 정치적 문제인지라 그들은 직접 전면에 나서지 않고 청나라 정부군에게 서양식 무기를 제공하고 서양식 편제와 훈련을 실시한 다음 반란 진압에 투입했는데, 과연 그것은 효과 만점이었다. 10년 동안이나 반란군에 쩔쩔 매던 정부군은 이후 연전연승을 거두면서 파죽지세로 반란군을 몰아붙여 1864년 마침내 난징을 탈환하고 중국 역사상 최장기의 반란을 종식시켰다.
중국의 지배층이 크게 각성한 것은 바로 그 무렵이다. 진압군의 지휘관으로 참전한 진압군의 지휘관 증국번(曾國藩, 1811~72)과 이홍장(李鴻章, 1823~1901)은 자기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서양의 힘에 감탄하면서 어서 빨리 중국도 그 마법을 배워야 한다고 느낀다. 그래서 이때부터 19세기 말까지 약 30년 동안 중국에서는 서양의 우수한 과학 기술을 적극 도입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자는 양무운동(洋務運動)이 활발히 전개된다. 그 일환으로 광산업과 조선업 등 군수 산업을 중심으로 한 근대적 중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했으며, 서양식 무기와 군사 제도를 본받는 데서 더 나아가 유능한 인재를 서양에 보내 군사학과 군사 훈련을 이수하게 하는 등 다양한 자강책이 실시된다. 대원군이 쇄국을 공식 정책으로 선언했을 때 중국에서는 이처럼 서양을 본받자는 양무운동(洋務運動)이 한창이었으니, 조선에서 골수 성리학자들이 득세한 것도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이제 조선은 중국으로부터 배울 게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사대와 흠모는커녕 더 이상 중국과 교류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다.
▲ 수난의 섬 강화도 병인양요(丙寅洋擾)와 신미양요(辛未洋擾) 당시 프랑스군과 미국군의 침입 경로를 보여주는 지도다. 프랑스와 미국은 일단 강화도를 점령해 서울 침략의 교두보로 활용하고자 했다(특히 프랑스는 한달 동안이나 강화도를 지배했다). 외침만 있으면 망명정부가 들어섰던 강화도가 최초의 침탈지가 되었으니 아이러니다.
한편 비중화세계라는 점에서는 청나라보다 원조격인 일본에서는 중국이 거친 단계와 과정이 한층 더 압축적으로 진행된다. 사실 신미양요(辛未洋擾)에서 미국이 조선을 거의 제압했으면서도 조선의 개항을 포기하고 물러간 데는 일본에서의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20여 년 전인 1854년에 미국의 페리 제독은 군함 네 척만으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간단히 일본을 개항시키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조선은 대원군 집권기의 10년 동안만 쇄국기였지만 일본은 에도 바쿠후가 성립된 17세기 초 이후 개항될 때까지 무려 250년이나 공식적인 쇄국을 유지했다. 조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쇄국을 가져 온 것도 서양의 그리스도교였다. 처음에 에도 바쿠후의 창건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리스도교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으나 측근 인물들까지도 서양의 종교를 믿는 것에 놀라 탄압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일본은 이후 쇄국을 유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 문물을 수입하는 루트를 완전히 봉쇄하지는 않았다. 특히 네덜란드에게는 계속 무역 특혜를 주었는데, 조선에 처음 온 서양인 (벨테브레와 하멜)이 모두 네덜란드 상인이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일본에는 네덜란드풍의 근세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랬는데 조선에서는 상당한 규모의 전투를 치에도 전혀 개항할 의지를 보이지 않았으니 미국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것도 이해할 만하다.
일본이 그렇듯 쉽게 문호를 열 수 있었던 것은 중국과 에도 바쿠후 정권이 오랜 집권으로 부패할 대로 부패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패와 무능이라면 조선의 집권 세력도 결코 안 뒤지는데, 왜 조선은 일본과 다른 경로를 걸었을까? 그 이유는 역시 성리학적 중화 이념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유교 국가가 아니었던 일본은 지배 권력이 부패하면 얼마든지 반란이나 쿠데타가 일어나 새 정권으로 교체될 수 있었던 데 비해, 조선은 원래부터 골수 성리학 국가인 데다 17세기부터는 유일한 중화세계로 남았기에 정권 교체가 원리적으로 불가능했던 것이다(조선에서는 반역과 개혁이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는 점을 상기하라).
게다가 일본은 천황이라는 상징적 중심이 있었으므로 쿠데타 세력이 등장해서 바쿠후 정권을 거부한다 해도 천황에 대한 반역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정치적 메커니즘이 있기 때문에 개항 이후 일본에서는 시시(志士)라고 불리는 젊은 정치 개혁 세력이 등장해서 미국의 군함 몇 척에 무력하게 굴복한 바쿠후 정권을 타도하는 데 앞장서게 된다. 존왕양이(尊王洋夷, 여기서 ‘왕’이란 물론 천황을 가리킨다)를 구호로 내건 반바쿠후 세력은 1868년에 드디어 바쿠후 정권을 무너뜨리고 무려 1천 년 만에 왕정복고를 이룬다. 당시 천황이 바로 열여섯 살의 메이지 천황이다.
후대에 그의 이름이 유명해진 것은 그의 이름에서 나온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때문이다.1868년부터 시작된 이 개혁 운동은 물론 소년 천황이 직접 주도한 게 아니라 메이지 정부의 젊은 관료들이 입안하고 집행한 것이지만, 어쨌든 일본이 오랜 바쿠후 체제(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조선의 사대부(士大夫) 체제와 같은 위상이다)에서 벗어나 명실상부한 중앙집권 국가로 컴백했기에 가능한 개혁이다. 유신의 바람은 새로 태어난 일본 전역에 새 바람을 불어넣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유신의 이념은 부국강병이고, 이를 위한 수단은 서구화를 통한 근대화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히 일본적인 기반에 뿌리를 둔 서구화이고 근대화였다는 점에서 중국의 양무운동(洋務運動)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당시 일본인들은 그 정신을 화혼양재(和魂洋才), 즉 일본의 혼에 바탕을 두고 서양의 재주를 도입한다는 말로 표현했다(和란 전통적으로 일본을 가리키는 글자다. 일본 고대를 ‘大和’라고 부른 데서 나온 말인데, 지금도 일본식 음식을 흔히 화식和食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우리에게 유신이라면 1970년대 박정희 독재정권이 더 익숙하다. 물론 유신이라는 말은 원래 『논어(論語)』에 나오니까 족보에 있는 용어지만, 박정희는 바로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서 자신의 유신을 따왔다. 그렇다면 화혼양재는 박정희가 주창한 토착 자본주의에 해당한다. 그러나 박정희의 토착 자본주의는 자본주의보다 ‘토착’에 더 중점을 둔 나머지 천민자본주의의 길로 빠져들어 정상적이고 균형적인 발전의 길을 가로막았으니, 화혼양재(和魂洋才)보다도 크게 뒤지는 개념이라 하겠다】.
▲ 우리도 할 수 있다! ‘제국주의로 입은 손해를 제국주의로 벌충하자.’ 이 정한론을 결의하는 일본 정부의 모습이다. ‘짝퉁’ 제국주의답게 서양의 시사만화풍으로 그려져 있다.
나이가 많아봤자 사십대이고 주류가 삼십대인 유신 정부의 관료들은 젊은 나이에 어울리게 청렴했고 의욕적이었다. 그들은 48명의 사절단을 1년 동안이나 미국과 유럽에 파견해서 서양의 모든 제도와 문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했으며, 그 결과 교육, 군사, 철도, 체신, 사법 등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단기간에 전면적인 서구화를 이루었다. 서양에서 수백 년씩 걸린 일을 불과 십수 년 만에 해치우는 초고속적인 압축 행정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그 엄청난 속도의 이면에는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군사적 성격이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유신정부가 모델로 삼은 서양 열강을 빠른 속도로 따라잡으려면 모든 근대화 과정을 군대식 편제와 절차에 따라 추진해야만 한다. 게다가 실제로 개혁의 내용에서도 언제나 군사 부문이 최우선의 고려 사항이다. 이처럼 서양을 모델로 삼되 군대식으로 근대화를 추진하는 게 유신의 기본 노선이라면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는 뻔하다. 일단 서양식 근대화니까 일차 결론은 제국주의다. 그러나 여기에 일본 특유의 군대식 형식과 내용이 가미되면 이차 결론이자 최종 결론이 나온다. 그것은 다름아닌 ‘일본식 제국주의’, 즉 군국주의다.
알다시피 제국주의라면 식민지가 필요하다. 그런데 일본이 타깃으로 삼을 식민지 후보라면 한반도의 조선 이외에 또 있을까? 과연 유신의 성과로 어느 정도 자신감을 얻게 되자 유신 정부에서는 즉각 정한론(征韓論)이 제기된다. 말할 것도 없이 한반도를 정복하자는 주장인데, 당시 유신 세력이 정신적 지도자로 여겼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59)의 말에 따르면 이런 논리다. “러시아, 미국과 화의가 맺어지면 우리로서는 비록 오랑캐와의 약속일지라도 신의를 지켜야 한다. 우리는 그 사이에 국력을 배양하여 손쉬운 상대인 조선, 만주, 중국을 취함으로써 교역에서 러시아와 미국에게서 잃은 것을 보충해야 한다.” 제국주의 열강에게 입은 손해를 식민지에 전가하라, 이 탁월한 아(亞)제국주의적 가르침은 곧바로 유신 정권의 대외 진출을 위한 기본 노선이 된다.
조선이 신미양요(辛未洋擾)의 혼란에 빠져 있던 1871년 일본은 중국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그 내용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으나 이 조약은 유사 이래 최초로 일본과 중국이 대등한 입장에서 맺은 외교 관계라는 점에서, 작지만 엄청난 한 걸음이었다. 이제 일본은 조선의 종주국인 중국과 같은 위상이므로 조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일본의 구상은 5년 뒤에 현실로 드러난다.
▲ 진정한 극일을 위해 중화세계가 몰락하고 비중화세계가 떠오르는 상황에서 쇄국이란 곧 정치적 자폐와 같았다. 사진은 17세기 광해군(光海君) 시대에 만들어진 일본어 학습서인 『첩해신어(捷解新語)』인데, 자폐증에서 벗어나려는 당시의 노력은 결국 사대부(士大夫) 정권의 빗장수비에 걸려 빛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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