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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11부 불모의 세기 - 3장 위기와 해법, 또 하나의 해법: 문 열기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11부 불모의 세기 - 3장 위기와 해법, 또 하나의 해법: 문 열기

건방진방랑자 2021. 6. 22.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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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하나의 해법: 문 열기

 

 

똑같이 남의 손에 의해 강제로 개항을 당한 처지였지만 일본과 조선의 차이는 불과 20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컸다. 일본은 서양 열강의 압력으로 문호를 개항했으나 그 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이루면서 아시아 최초의 제국주의 국가로 도약했고, 조선은 그 일본에 의해 개항되면서 신흥 제국주의의 성장을 위한 발판으로 전락했다.

 

두 나라가 그렇듯 큰 차이를 보이게 된 이유는 뭘까? 단지 개항을 강요한 상대방이 달랐기 때문일까? 이를테면 일본은 선진 제국주의에 의해 개항된 탓에 도약을 이루었고 조선은 후발 제국주의에 의해 개항된 탓에 비참한 운명으로 전락한 걸까? 그렇지는 않다. 흔히 잘못 알고 있는 것처럼 일본은 19세기 중반에 개항과 메이지 유신을 통해서 단기간에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 게 아니다. 그 배경에는 17세기 초부터 시작된 에도 바쿠후 시대의 오랜 번영기가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은 비록 대외적으로 쇄국을 유지했고 대내적으로도 숱한 진통과 혼란을 겪었으나 전반적으로 보면 비중화세계 특유의 역동성을 바탕으로 착실히 국력을 키웠다.

 

그렇다면 조선이 일본에 뒤처진 이유는 단지 개항에서 늦었기 때문은 아니다. 17세기에 중국마저 비중화세계로 편입된 이후 홀로 남은 조선은 중화 세계의 근본 모순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낡은 세계의 수호자가 되는 복고와 보수의 길을 선택했다더구나 그렇게 조선이 제 발로 우물 안을 찾아들어갈 무렵 우물 바깥에서는 인류 문명사적으로 커다란 전환점을 맞고 있었다. 특히 서유럽에서는 정치적으로 절대왕정 체제를 거치며 시민계급이 착실히 성장함으로써 18세기부터는 시민들이 사회를 주도하는 의회민주주의와 국민국가 체제를 이루었으며,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제도로써 생산력과 국민경제를 성장시키고 있었다. 이렇듯 유럽 문명이 장차 세계를 주도할 메이저 문명으로 발돋움하는 기간에 동아시아 사회는 여전히 수구와 보수의 구태 속에 머물고 있었다. 그나마 중국과 일본은 비중화세계로 체제를 전환하면서 변화를 모색했으나 조선만은 고집스럽게 중화를 고수했으니 이때 이미 조선의 미래는 결정되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18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중화세계의 한계를 느끼고 정치에서는 왕국의 실험을, 학문과 사회에서는 실학의 실험을 통해 변화를 꾀했으나(그 최종적 실험자가 정조였다), 조선의 지배자인 사대부(士大夫)들은 성리학 이념이 가져다주는 체제 안정의 유혹으로부터 끝내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을 정체시키고 발전을 가로막은 원인과 주범은 분명해진다. 원인은 개국 초기부터 조선의 발목을 잡은 성리학 이념이며, 주범은 성리학 이념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지배 체제와 기득권을 유지하려 했던 조선의 사대부들이다.

 

물론 침략 국가가 없다면 침략을 당하는 국가도 있을 수 없다는 논리에서 본다면, 일본의 침략 의도가 조선에게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자체적 변화의 길을 결정적으로 저해한 장애물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아무리 국력에서 현저한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일본의 침략적 의도가 노골화되는 상황에서까지 조선 정부가 철저하게 무능했다는 사실은 이후에 전개되는 조선의 몰락 과정을 결코 남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게 한다. 게다가 개항을 결정한 민씨 정권은 그 개항마저도 일관적으로 추진하지 못했다(아마 대원군 정권에 대해 후대의 역사가들이 비교적 후한 점수를 매긴 이유는 일관성이나마 유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타의에 의해 문을 열게 되었다 하더라도 이왕 개항하기로 했다면 확실히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강화도조약 이후 조선 정부는 일단 개화(開化)를 총론으로 확정해 놓고도 개화에 필요한 구체적인 각론은 전혀 마련하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개화란 오로지 일본만을 대상으로 할 뿐 다른 열강에 대해서는 여전히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는 기형적인 형태였던 것이다(개항 뒤에도 조선은 프랑스와 영국의 통상 요구를 계속 거절하다가 1882년 미국을 시작으로 서양 열강에게도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한다). 앞서 두 차례의 양요에서 서양인이라면 치를 떨게 된 분위기가 조성된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조선 정부의 그 편협한 자세를 보면 과연 개화의 의지가 있는지, 개화의 의미를 알고 있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혹시 조선 정부는 그래도 가까운 일본이 서양 오랑캐보다는 낫다고 여긴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낯익은 제국주의라는 이점을 십분 활용하려 했던 일본의 잔꾀에 보기 좋게 속아넘어간 결과다. 굳이 비교하자면 서양의 선진 제국주의보다 일본의 후발 제국주의가 훨씬 위험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세도정치(勢道政治)가 끝나면서 곧바로 국가적 위기에 빠져들었던 조선은 이제 두 번째 해법을 마련했다. 대원군의 빗장수비가 효과를 보지 못했다면, 아마 그 반대의 전술인 토털사커(total Soccer, 네덜란드의 리뉘스 미헐스 감독이 완성시킨 축구 전술로, 한국에서는 토탈 축구(Total Soccer)로 더 널리 불리고 있다. 그는 자신의 스승이 고안해낸 이론에 그 당시 브라질의 지역방어와 헝가리의 포지션 체인지 등을 도입시키면서 볼을 빼앗긴 후에도 압박을 통해 팀 전체가 최대한 뒤로 물러서지 않고 최후방 라인을 높은 지점에 형성한 뒤, 최전방 공격수부터 상대를 적극적으로 압박하면 그만큼 상대 골문과 가까운 위치에서부터 공격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에서 이 전술을 창안하였다. 이를 통해 보통 수비 상황에서는 잉여전력으로 간주되기 쉬운 공격수들에게 전방에서부터 상대를 압박하도록 만들고, 또 공격시에는 포지션 체인지를 통해 수비수들도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시켜 토탈 풋볼이라는 말 그대로 전원공격 + 전원수비의 형태를 취하는 축구 전술로 발전시켜 나갔다)는 통할지도 모른다. 비록 개화의 첫 단추는 잘못 꿰었다 하더라도 앞으로 자세를 가다듬고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개화 전술을 구사하면 멋진 역전승을 거둘 수도 있을 것이다. 형세가 어렵긴 하지만 실제로 쇄국은 어차피 실패할 전술이었고 개화는 운영 여부에 따라서는 어느 정도 효과를 볼 수도 있는 전술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두 번째 해법은 첫 번째 해법과 단지 형태상으로만 정반대인 게 아니었다. 순식간에 모든 게 거꾸로 돌려지면서 첫 번째 해법으로 해결되었던 문제점이 다시 드러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세도정치다.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를 제압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던 대원군이 허무하게 물러나자 그 빈 자리를 민비(閔妃)의 친정인 여흥 민씨 가문이 꿰찬 것이다. 수십 년 동안 나라를 망쳐놓았던 세도가문이 아주 중요한 시기에 다시 권력을 잡았으니 해법이고 전술이고 제대로 운영될 리가 없다. 그래서 두번째 해법, 개화 전술은 오히려 조선의 위기를 더욱 구체화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무지가 빚은 무능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강화도의 연무당이라는 관청이다.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외국과 대등한 관계에서 맺은 국제조약이었으나, 불행히도 그 결과는 외세의 침략을 국제법적으로 허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힘의 열세도 열세지만, 무엇보다도 주권이나 무역 등 국제법상의 개념에 대해 전혀 몰랐기에 조선 정부는 그저 일본이 하자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다시 온 왕국의 꿈

한 가지 해법: 문 닫기

격변기의 비중화세계

잘못 꿴 첫 단추

또 하나의 해법: 문 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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