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 해법: 문 닫기
왕국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균형감각을 유지하면서 여러 가지 방책을 저울질하던 대원군을 한 방향으로 몰고 간 사건은 어찌 보면 우연한 ‘사고’에서 비롯되었다. 1865년 말 두만강 쪽에서 러시아가 통상을 요구해 온 게 그 계기다. 물론 조정의 분위기는 결사 반대인데, 그때 대원군의 측근 인물로 그리스도교도였던 남종삼(南鍾三, 1817~66)이 대원군에게 묘한 제안을 했다. 영국, 프랑스와 결탁해서 러시아의 진출을 막자는 것이다(아마 그는 선교사들을 통해 영국과 프랑스가 유럽과 아시아 곳곳에서 부동항을 확보하려는 러시아의 남진정책을 저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텐데, 그 제안이 옳든 그르든 그는 조정의 개구리들 보다는 훨씬 시대의 흐름에 밝았다고 하겠다). 이이제이(以夷制夷)라면 원래 중화 제국의 전통적인 방책이 아닌가? 솔깃해진 대원군은 남종삼의 의견에 따라 이미 조선에 와 있던 프랑스 선교사 베르뇌(Siméon François Berneux, 1814~66)를 만나기로 약속한다(그는 조선교구장으로 10년 전부터에 밀입국해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원군은 그다지 강경한 척화론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현기증이 날 정도로 급박하게 돌아가는 당시의 정세는 베르뇌가 대원군을 만나러 한양으로 올라오는 짧은 기간마저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공교롭게도 영국군이 중국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는 베이징발 소식이 전해진 것은 바로 그 시점이다. 실은 소식이라기보다는 소문이었고, 그것도 사실이 아닌 오보였으나 당시 조선 정부는 뜬소문만으로도 정책이 뒤바뀔 만큼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렇잖아도 대원군이 사교의 신부를 만난다는 것에 눈을 모로 뜨고 있던 조정 대신들이 거세게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대원군은 노선을 급선회해서 서양 세력과의 타협 없는 투쟁을 선언한다. 그 결과가 바로 1866년 2월의 병인박해(丙寅迫害)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는 이미 여러 차례 있었지만 이번처럼 정부에서 단단히 작정하고 교도들을 대대적으로 잡아들인 적은 없었다. 전통적 처형장인 새남터에서 한양 마포 부근의 산봉우리로 처형장을 옮긴 데서도 정부의 그런 각오를 읽을 수 있다. 서양 오랑캐로 더럽혀진 한강물을 서학교도의 피로 씻어야 한다는 논리였는데, 그래서 오늘날 그 산은 절두산(切頭山)이라는 섬뜩한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이곳에서 ‘절두’된 교도의 수는 남종삼을 비롯해서 1만 명에 가까웠으니 가히 사상 최대규모다. 그러나 그 수천 명의 목숨보다 더 큰 비중을 가지는 것은 베르뇌를 비롯해서 프랑스 신부 아홉 명이 함께 처형되었다는 사실이다. 간신히 탈출한 신부 한 명이 베이징으로 가서 프랑스 함대에게 긴급 지원을 요청하면서 이 사건은 새로운 사태를 낳게 된다(제국주의 시대에 선교사와 군대의 긴밀한 공조 체제를 잘 보여주는 예다).
▲ 야만의 중화 프랑스 신부들이 처형당하는 장면이다(왼쪽), 포교가 불법이라면 마땅히 그들을 국외로 추방했어야 했다. 아무리 전근대적 사회라 해도 이렇게 남의 나라 국민을 재판도 없이 마구잡이로 살해한 것은 전형적인 야만국의 관습이다. 조선이 유일한 중화세계로 자처하면서 최고의 문명국가로 자부한 게 실상 아무런 근거도 없음을 말해준다. 오른쪽은 당시 상황을 재연해 놓은 모형으로 경기도 안성 미리내 성지 안에 있다.
하지만 프랑스 함대보다 먼저 들이닥친 것은 미국의 상선이다. 한강의 피비린내가 채 가시지 않은 그 해 7월 미국 국적의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 하구에 와서 통상을 요구한다. 당시 평안도 관찰사였던 박규수(朴珪壽)는 당연히 그 요구를 거부했으나 대포까지 장착한 상선답지 않은 상선은 물러가기는커녕 오히려 대동강을 거슬러오더니 급기야는 선원들이 평양에 무단으로 상륙해서 관민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마침내 조선 군인이 대포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터지자 분노한 박규수는 셔먼 호를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무리 증기선에 대포까지 있다 해도 스물네 명의 선원이 수천 명의 관민들을 당해낼 수는 없다. 결국 군함 같은 상선과 깡패 같은 선원들은 이역만리까지 와서 제 무덤을 팠다.
병인박해(丙寅迫害)는 조선이 일으켰고 제너럴 셔먼 호 사건은 조선이 당한 케이스지만, 둘 다 제국주의 열강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조선은 곧이어 두 사건의 후유증에 시달려야 할 운명이다.
셔먼 호가 화염에 휩싸인 지 한 달 뒤 프랑스 동양함대 사령관인 로즈가 군함 세 척을 거느리고 인천 앞바다로 왔다. 물론 목적은 병인박해에 대한 보복이지만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주의 함대답게 그들은 결코 서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침략의 의도를 깨닫지 못한 조선 관헌들로부터 음식까지 제공받으면서 한 달 동안 인근 섬들의 방어 태세와 한양까지의 수로를 탐사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두 달 뒤인 10월 초 프랑스의 군함 일곱 척과 병력 1천 명이 본격적인 원정에 나섰다. 이것이 병인양요(丙寅洋擾)인데, 침략자들은 “프랑스 신부 아홉 명을 죽인 대가로 조선인 9천 명을 죽이겠다”고 선언했으니 서학교도의 피로 한강물을 씻겠다는 병인박해(丙寅迫害)의 정신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고 할까?
미리 원정지를 답사해둔 덕분에 프랑스군은 곧바로 강화도에 상륙해서 순식간에 섬 전체를 점령하고는 강화 해협을 건너 김포의 문수산성을 공략해 육지 진출의 교두보까지 확보했다. 전광석화와 같은 프랑스군의 기습 공격에 조선 정부는 크게 당황한다. 그러나 뒤이은 조선 정부의 조치는 이번에는 프랑스군을 당황하게 만든다. 정부의 특명을 받은 양헌수(梁憲洙, 1816~88)가 특공대를 이끌고 한밤중에 강화도로 건너가 정족산성을 점령한 것이다. 느닷없는 후방 공격에 크게 놀란 프랑스는 급히 군대를 돌려 정족산성을 공략했으나 조선 특공대가 워낙 결사적으로 방어한 탓에 성을 재탈환하지 못했다. 결국 예상치 못한 조선의 변칙 전술과 악착같은 방어에 질린 프랑스군은 11월 초 함대를 철수하기로 결정했다【정족산성을 공략한 전술은 과연 적의 후방을 교란한다는 의도였을까? 그것은 아니다. 그런 의도였다면 오히려 조선군은 산성을 점령하지도, 방어에 성공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조선이 정족산성의 탈환에 그토록 집착을 보인 이유는 바로 그곳에 역대 왕조실록들을 보관한 사고가 있었기 때문이다(원래는 마니산에 있다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청나라의 공격으로 불타 무너지자 정족산으로 옮겼다). 중화세계에서 역사서라면 국가 최고의 보물이자 비밀인데, 그걸 오랑캐에게 빼앗겼으니 조선 정부가 얼마나 애를 태웠을지 짐작할 만하다. 결과적으로 그 때문에 프랑스를 물리칠 수 있었지만, 진짜 의도가 사고를 탈환하기 위해서였다면 뒷맛이 개운하지는 않다. 하기야, 애당초 강화도에 국가 보물을 보관한 이유도 역사적으로 적의 침략을 당할 때마다 정부가 강화도로 도망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니 누굴 탓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 역사보다 중요한 역사서 강화도에 있던 정족산 사고(史庫)의 옛 모습이다.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예상치 못한 조선의 후방 기습 전술에 프랑스군은깜짝 놀라 후퇴했지만, 아마도 그것은 이 사고를 적의 손에 넘겨줘서는 안 된다는 동기가 있었기 때문일 터이다. 이렇게 해서 조선 정부는 역사서를 되찾았으나 결국 역사는 빼앗기고 말았다.
비록 규모는 크지 않은 전투였지만 중국과 일본이 모두 실패한 제국주의 열강과의 교전에서 조선은 일단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그게 과연 진짜 승리일까? 사실 프랑스군은 마음만 먹는다면 야포를 동원해서 산성을 재점령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애초에 조선을 정복할 목적으로 온 게 아닌 이상(그랬다면 겨우 1천 명의 병력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실제로 베이징에 돌아간 로즈는 성공적인 전투였다고 자평했다). 더욱이 조선은 승자였으면서도 잃은 게 훨씬 많았다. 전쟁의 사상자보다도 더 큰 손실은 프랑스군이 철수하면서 300여 권의 도서들을 가져갔다는 사실이다. 오늘날까지도 프랑스와의 외교에서 숙제로 남아 있는 ‘외규장각 도서 반환 문제’는 바로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래도 병인박해(丙寅迫害)가 부른 병인양요(丙寅洋擾)는 그럭저럭 극복했으나 그 다음의 시험은 쉽지 않았다. 이번의 시험문제는 제너럴 셔먼 호를 수장시킨 대가를 어떻게 치를 것이냐다. 1871년 봄 로저스가 이끄는 미국의 군함 다섯 척과 1200명의 병력이 또 다시 인천 앞바다에 나타난다. 5년 전 상황과의 차이는, 처음부터 응징과 보복을 부르짖었던 프랑스와 달리 미국은 이미 침몰한 배는 어쩔 수 없으니 그 대신 통상을 하자고 나섰다는 점이다. 물론 군함을 보낸 것을 보면 단순히 거래를 트자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상대방의 태도가 그러하니 일단 조선 측에서도 교섭 대표를 미국함선에 보낸다. 그러나 트집을 잡아서 힘으로 굴복시킨 다음 유리한 조건에서 통상 협상을 벌인다는 게 제국주의적 침략의 기본 공식이 아닌가? 게다가 조선 정부도 실은 서양 오랑캐와 통상할 의도 따위는 전혀 없다. 이렇게 서로 간의 속셈이 다르니 교섭 협상이란 구실일 따름이다(실제로 미국 함대는 일본 해역에서 보름 동안 기동훈련을 실시하고 조선으로 온 것이었다). 과연 로저스는 협상 대표의 지위가 낮다는 이유로 함대를 강화도로 진격시켰고, 5년 전의 악몽을 떠올린 조선군은 먼저 대포를 쏘았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신미양요(辛未洋擾)는 결과를 따지기가 애매하다. 우선 전쟁으로 보면 화력에서 앞선 미국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강화도에 성조기를 꽂기까지 했다. 그러나 미국은 결국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고, 얼마 안 가서 철군하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여느 제국주의 열강이 모두 그렇듯이 미국은 조선 본토는커녕 강화도조차 영토적으로 차지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의도는 일차적으로 조선의 개항이었고, 이차적으로는 미국에 유리한 조건에서의 개항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그와 정반대로 강화도는커녕 조선 본토까지 적에게 정복된다 해도 개항을 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그랬으니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도 두 손 들고 물러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강화도의 복군? 제너럴 셔먼 호는 미국의 미끼였고, 조선은 그 미끼를 덥석 물었다. 사진은 강화도에 상륙해서 공략하는 미군의 모습이다. 마치 남북전쟁의 한 장면 같은데, 남북전쟁이 난 지 불과 6년밖에 안 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미군은 강화도를 손에 넣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계속 점령하지는 못했다.
두 차례의 양요를 겪으면서 조선 정부의 노선은 더욱 분명해졌다. 서양 오랑캐와의 싸움에서 이기든 지든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통상이든 뭐든 그들과 일체의 대화나 교섭도 하지 않는 것이다. 대원군 정권의 유명한 쇄국정책(鎖國政策)은 이렇게 해서 완성된다【마침 그 무렵에는 대원군 자신도 서양인들에 대해 개인적인 원한을 품을 만한 사건이 있었다. 제국주의의 앞잡이답게 통상의 의도를 관철시키지 못한 것에 책임을 느낀 프랑스 신부 페롱은 조선의 교도들에게서 대원군에게 가장 소중한 게 바로 아버지의 묘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독일의 상인 오페르트는 1868년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파내서 유골과 부장품을 가지고 통상 협상을 벌이려는 계획을 꾸미고 각국 국적으로 이루어진 140명의 도굴단을 조직했다. 묘가 워낙 견고해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 사건은 천륜을 무시한 행위였으므로 대원군만이 아니라 조선 국민 전체를 경악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심지어 동양처럼 조상신의 천륜을 모르는 서양인들조차 이 사건을 마뜩찮게 여겨 이후 프랑스와 미국 정부는 거기에 가담한 신부와 자국인들을 소환하고 처벌했다】.
한 나라가 아니라 개인이라 해도 무릇 정책이라면 주변 정황이나 객관적인 정세를 고려하는 게 기본이라고 보면, 바깥에 대해서 아예 눈을 꽉 감아 버린 쇄국정책을 과연 정책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의문이지만, 어쨌든 이제는 조정 대신들만이 아니라 대원군 자신도 그것만이 조선이 살 길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물론 그가 생각하는 조선이 조선인들의 나라가 아닌 ‘국왕과 사대부(士大夫)들의 정권’이었기에 가능한 발상이다.
▲ 야만의 제국주의 신미양요 때 광성진 공방전에서 전사한 아군 병사들의 참혹한 모습이다. 통상이라는 명분으로 자행된 제국주의 만행은 오히려 조선의 문을 닫아걸게 만들어 쇄국정책이라는 강력한 빗장수비를 초래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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