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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부 식민지ㆍ해방ㆍ분단 - 2장 식민지 길들이기, 주식회사와 토지조사(동양척식주식회사)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12부 식민지ㆍ해방ㆍ분단 - 2장 식민지 길들이기, 주식회사와 토지조사(동양척식주식회사)

건방진방랑자 2021. 6. 22.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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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장 식민지 길들이기

 

 

주식회사와 토지조사

 

 

그 이름으로 보나, 조약의 취지로 보나 한일합병이란 일본과 조선을 한 나라로 통합시킨 조약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게 금세 드러났다. 합병이라면 조선이 일본의 한 지방처럼 되었다는 뜻일 텐데, 일본 정부는 조선을 지방으로 대우하기보다는 착취하고 이용하는 데 열심이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조약의 제1조는 한반도 전체에 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일본에게 양도한다는 것이었으니 도저히 정상적인(?) 합병 조약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일본은 애초부터 한반도를 동반자가 아닌 소유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그래도 순종(純宗)은 사직을 보존했고 이완용은 권력과 부를 챙겼으니 합병에서 밑진 것은 없다. 그러나 합병을 환영한 그들과는 달리 조선 국민들은 보존할 것도, 챙길 것도 없다. 오히려 가진 것이나마 잃지 않으면 다행이겠는데, 불행히도 그들은 그것조차 어려워지게 된다. 나라와 주권이야 원래 백성들 게 아니었으니 빼앗기든 말든 별로 상관없다. 문제는 그들이 가진 유일한 재산, 즉 얼마 안 되는 땅조차 빼앗길 처지에 놓였다는 점이다.

 

비록 한반도 전체를 합병했지만 조약 제1조에서 보듯이 아직 일본은 조선에 관한 정치적 통치권을 손에 넣은 것일 뿐 실익을 얻지는 못했다. 통치권은 수단이자 도구이므로 이제부터는 그것을 활용해서 조선으로부터 수확을 거둬야 한다. 어떤 방법이 있을까? 영리하게도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는 기존의 토지 소유 개념이 모호하다는 데 착안한다.

 

알다시피 전통적으로 고려와 조선의 한반도 왕조들은 왕토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쉽게 말해 전국의 모든 재산, 특히 부동산은 오로지 왕(국가)의 것이므로 왕 이외에는 그 누구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었다. 이런 체제에서는 농민들의 경작권은 인정되어도 토지 소유권은 인정되지 않는다. 이 점은 관리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으므로 관리들은 국가로부터 토지 자체를 불하받은 게 아니라 토지에서 나오는 생산물을 수취할 권리, 수조권(收租權)을 봉급으로 받았다. 이런 이중적 토지 소유관계 때문에 고려와 조선에서는 늘 중대 이후에 토지제도가 붕괴했고 그것이 결국 경제적 기반의 와해를 가져왔다앞에 말한 조선의 애매한 정체 문제도 실은 이런 사실과 연관된다. 국가주권이 국왕에게만 귀속되어 있으므로 일본이 절차상 하자 없이 정치적인 행위로 포장해서 쉽게 조선을 합병할 수 있었듯이, 모든 국가 재산이 명목상 국왕의 것이었으므로 일본은 조선 백성들이 사실상 소유하고 있는 토지도 아무런 하자 없이 빼앗을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전제군주국이라는 조선의 정체가 일본의 침략을 훨씬 손쉽게 만들어준 셈이다. 거듭 말하지만 형식상의 정체만이라도 개혁했더라면 일본의 식민지화 작업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 비해 일본은 역사적으로도 봉건 영주들이 각자 자신의 장원을 소유하는 방식의 토지제도를 취하고 있었던 데다중세 일본의 경우 한반도와 비슷한 제도로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고 조세를 수취하는 반전제(班田制)가 있었으나, 이 제도의 적용 단위는 한반도의 경우처럼 나라 전체가 아니라 장원이었다. 즉 봉건 영주들이 자신의 영지에서반전제를 시행하면서 독자적으로 조세를 수취한 것이다. 게다가 일본 역사에서는 이 장원을 나라(, 구니)’라고 불렀으므로, 정치적 위상으로만 비교해 보면 일본의 한 지방은 곧 한반도 왕조 전체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중국의 경우처럼 독자적인 천하의 역사를 꾸려 왔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으로 근대적 토지 등기제도가 성립되어 있었으므로 토지 소유관계가 훨씬 명확하다. 말할 것도 없이 합병이란 이제부터 일본과 한반도에서 하나의 제도를 적용한다는 뜻이니까 이 점을 잘 이용하면 한반도 농민들의 토지를 통째로 먹을 수 있게 된다. 그런 취지에서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시행된 게 바로 토지조사사업이다.

 

조선에 근대적인 토지 소유관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사실상 모든 토지제도의 기능이 마비되면서 왕토의 개념이 무너진 상태였다. 따라서 그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토지의 사유화가 진행되어 토지의 매매까지도 이루어질 정도 였다. 다만 그것이 공식적으로 제도화된 게 아니라 관행적으로 묵인되어 왔다는 게 문제인데(현실적으로는 왕토 사상이 해체되었지만 공식적으로는 존재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노린 약점은 바로 그 공식과 관행의 틈이었다오늘날까지도 우리 사회의 약점이 되고 있는 투명성의 문제는 이렇게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토지의 실제 소유권과 형식적 소유권이 다르다는 것은 늘 실제 권력자와 상징적 권력자가 분리되어 왔던 조선 역사의 필연적인 불투명을 반영한다.

 

우선 전통적인 대지주의 토지는 건드리기 어려우니까 그대로 등기화해서 그 소유를 인정해준다. 또 소유권을 확실하게 입증할 수 있는 일부 농민들의 토지도 등기를 거쳐 소유권을 인정해준다. 여기까지가 바로 토지조사사업의 긍정적인 측면이다(토지 소유의 근대화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그러나 원래 없었던 공식적인 기준을 처음으로 설정했으니 그 기준에서 벗어난 토지의 소유관계는 모조리 비공식적인 것이 되며, 따라서 무효가 된다. 즉 소유권을 문서로써 입증할 수 없는 모든 토지는 졸지에 임자 없는 땅이 되어 버린 것이다. 등기권자만 없을 뿐 경작자는 있었으나 근대적 토지 소유제도에서 경작권이라는 모호한 권리는 전혀 배려되지 않는다.

 

그에 따라 사실상 자기 땅으로 알고 대대로 경작해 오던 농민들은 이제부터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새로 설정된 지주에게 높은 소작료를 물고 계속 땅을 부쳐먹든가, 아니면 고향을 등지고 새 땅을 찾아 떠나는 것뿐이다. 말이 두 가지지 대다수 농민들은 후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이렇게 해서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많은 농민들이 토지를 잃고 고향에서 쫓겨나게 된다. 게다가 이 과정을 더욱 가속화시킨 것은 한반도 최초의 주식회사다.

 

 

이상한 주식회사 이름은 주식회사지만 설립 취지에서나 기능과 임무에서나 동척은 주식회사라기보다는 조선의 농민들을 만주로 내몰고 일본인들을 이주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 과정에서 자연히 간도와 만주의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만주 침략이 용이해졌으니, 일본 정부는 애초부터 그런 효과를 예상하고 있었던 듯싶다.

 

 

한일합병이 정식 조인되기 전인 1908년에 조선과 일본 양국은 함께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라는 합자회사를 만들었다. 곧이어 합병이 이루어지게 되므로 합자회사라는 것은 사실 별 의미가 없지만, 창립 당시 본사는 서울에 두었으므로 한반도 최초의 주식회사인 셈이다. 동척을 만든 일본의 의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듯이 동척을 통해 한반도를 경제적으로 운영하는 것은 물론, 장차 만주를 침략할 때 경제적 전진기지로 활용하려는 데 있었다. 우선 최고 책임자인 총재부터가 일본군 현역 육군 중장인 데서도 그런 의도를 읽을 수 있다(앞서 말했듯이 당시 일본 정부는 군부가 지배하고 있었다).

 

합병과 더불어 동척은 눈부신 활동을 전개한다. 1차 목표는 조선 내의 토지다. 우선 동척은 주로 곡창지대의 조선 농민들로부터 헐값으로 토지를 사들인다. 이 과정에는 병행되고 있던 토지조사사업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등기가 불가능한 토지는 곧바로 동척의 부동산이 되어 버렸고, 등기된 토지라 해도 새로 제정된 소유관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농민들은 동척의 집요한 공세에 휘말려 싼 값으로 땅을 팔아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동척은 이렇게 마련한 토지를 일본에서 조선으로 이민 오는 농업 이민자들에게 불하했다.

 

낯선 땅에 가서 사느니 내 나라에서 가난하게 살겠다. 이런 이민의 두려움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일본의 농민들은 아무리 조선을 일본이 지배하고 있다 해도 낯설고 물선 조선으로 가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당근을 투약한다. 농업 이민자들에게는 조선의 농지를 싸게 불하하는 것을 비롯해서 많은 특혜를 주기로 한 것이다. 그러자 처음에는 꺼리던 이민 지망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든다. 심지어 일본 정부는 지망자들 가운데서 조선 침략에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을 엄선하여 이민을 허가할 정도였다.

 

토지조사사업으로 잔매를 맞고 동척에 결정타를 맞은 조선 농민들은 휘청거린다. 토지를 강제로 빼앗기거나 헐값으로 팔아넘기는 것 이외에 일본인 농업 이민자들마저 조선으로 꾸역꾸역 몰려드니 굳이 애국자가 아니더라도 나라 잃은 설움은 새롭기만 하다. 고향을 등지면 어디로 갈 거나? 어차피 남의 것이 되어 버린 내 나라 안에는 갈 곳이 없다. 그래서 조선 농민들은 점점 만주와 연해주로 이민을 가게 되는데, 오늘날 중국의 연변동포나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카레이스키는 바로 이들의 후손이다(그런 점에서 박경리의 소설 토지라는 제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26년 일본의 농업 이민 정책은 중단되지만, 이후에도 제 나라에서 밀려나 만주로 새 보금자리를 찾으러 떠난 조선 농민들은 해방 무렵까지 무려 150만 명에 달한다주식회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회사였지만, 그래도 명색이 주식회사인 만큼 동척이 출범할 때는 일본과 조선에서 공모주 청약을 실시했다. 그런데 당시 일본과 조선의 공모주 청약 상황은 아주 대조적이다. 조선에서는 모집 공모주의 불과 2퍼센트만이 응모한 데 반해 일본에서는 응모자가 엄청나게 몰려 무려 3,500퍼센트, 그러니까 35배가 응모했다. 창립하면서 표방한 취지는 한국민으로 하여금 문명의 혜택을 입도록 한다는 것이었는데, 일본인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은 바로 그런 데서 나온 걸까? 하지만 그들과 달리 한국민들은 동척을 문명의 혜택으로 여기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1926년 의열 단원 나석주(羅錫疇, 1892~1926)는 이미 한반도 최대 지주가 된 동척에 폭탄을 투척하고 순국함으로써 그 점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라는 이름에서 척식(拓殖)’이란 개척 이주를 뜻하는 말이다. 물론 원래는 일본 농민의 조선 이주를 뜻하는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그게 도미노처럼 작용해서 조선 농민의 만주 이주까지 촉발하게 되었다. 그 덕분에 일본은 조선 농민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만주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킬 수 있었으니, 아마 일본은 처음부터 그것까지 의도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곧이어 만주를 노리게 되니 말이다.

 

 

정복을 위한 측량 토지조사사업이 시작되자 일본은 많은 측량사와 기술자를 파견해 한반도의 상세한 지적도를 작성했다. 사진 왼편에는 일본인 기술자들이 서 있고 오른편에는 한국인들이 지게로 측량 장비를 실어나르고 있다. 일본의 한반도 측량은 강화도조약 때부터 시작되었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주식회사와 토지조사

세계적 모순의 집약지

일본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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