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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자람 - 6장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 무한 내전의 출발: 귀족이 주도한 율령제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자람 - 6장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 무한 내전의 출발: 귀족이 주도한 율령제

건방진방랑자 2021. 6. 7.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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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족이 주도한 율령제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으로 탄생한 율령 체제의 경제적 토대는 모든 토지가 국가, 즉 천황의 것이라는 공지제(公地制)였다앞에서 보았듯이, 왕토 사상은 동북아시아 문화권에 내재해 있었다. 일본의 공지제가 아니더라도 어느 나라 어느 왕조는 개국 초에는 왕토 사상을 철저히 지키게 마련이다. 사회적 원리의 면에서도 그렇지만 지배층에게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다. 이전 왕조의 경제적 토대를 무너뜨리는 동시에 개국 공신을 비롯한 새 정치 세력에게 토지를 분급하기에 좋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서도 신라를 접수한 고려, 고려를 타도한 조선은 초기에 왕토 사상을 표방하고 나섰다. 그러나 처음에는 관리들에게 독봉으로 토지의 점유권만 인정하지만 얼마 못 가서 점유권은 사실상 소유권이 되어버린다. 왕토 사상이 이념적으로만 유지될 뿐 현실적으로는 무력화되는 것이다. 그래서 중기쯤 되면 예외 없이 대토지 겸병이 일어나면서 경제가 붕괴하게 된다. 나중에 보겠지만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영주들이 구분전을 겸병하면서 부지런히 장원의 토지를 늘려갔다.

 

그러나 처음에는 기세 좋게 시작했어도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르면 모든 토지에는 사실상의 소유자가 생겨나게 된다. 공지제가 무너지면서 이 사실상의 토지 소유자인 묘슈(名主)가 늘어나자 형식상의 토지 소유자인 국가에서도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쯤 되면 차라리 토지소유를 현실로 인정하고 조세를 부과하는 편이 낫다. 그래서 국가는 점차 묘슈를 과세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는데, 이는 사실상 율령제의 경제적 기초를 부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이때부터 일반 백성 가운데서도 제법 토지를 모은 묘슈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유력 가문과 지방 호족 들이 소유하는 장원이 확대되면서 율령은 법제화된 지 50년도 채 안 되어 변질되기 시작했다. 애초에 율령 체제의 문제점은 중국의 모방에 있지 않았다. 만약 제대로 모방했다면 일본의 환경에서도 나름대로 유용하게 기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율령 체제를 확립한 주체는 다이카 개신에서 공을 세워 일약 스타가 된 후지와라(藤原) 가문이었다(천황은 다이카 쿠데타의 일등공신 가문인 나카토미 씨족에게 후지와라라는 새 성을 하사했다). 귀족계급관료제를 핵심으로 하는 율령 체제의 주역이라니,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지만 이는 앞서 말한 기형적 모방의 결과물이었다.

 

당시 일본의 정치는 귀족 지배 체제였다. 천황은 물론 절대적 권위를 지닌 존재였지만, 현실 정치에 관한 권력을 가졌다기보다는 상징적인 권력자에 가까웠다. 그래서 천황은 실력 가문과 결탁하지 않으면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였다. 실은 천황의 등극에도 귀족들의 입김이 거셌다. 최고 실력자인 후지와라 가문은 천황을 등에 업고 자기들끼리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모처럼 정한 수도도 여러 차례의 반란으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 784년에는 교토(京都)에 헤이조와 똑같은 헤이안(平安) 성을 지어 그곳으로 옮겼다(이때부터 교토는 400년간 정치ㆍ문화의 중심이 되는데, 이를 헤이안 시대라고 부른다).

 

 

집 안의 사원 8세기 일본의 귀족들에게 불교는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생활 자체였다. 후지와라 가문과 같은 최상류 귀족들은 집 안에 불당을 짓고 그곳을 별당처럼 이용했으며, 승려들을 아예 상주시키면서 경문을 읽게 했다. 9세기 초 당에 유학을 갔던 사이초(最澄)와 구카이(空海)는 각 각 천태종과 진언종을 창시했는데, 두 종교는 밀교적인 성격이 강했으므로 호국불교이면서도 나라(奈良) 시대와 달리 정치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장원제의 발달은 경제적인 측면에만 관련이 있는 게 아니었다. 다이카 개신(大化改新) 이후 일본의 토지제도는 반전제(班田制)였다. 이것은 농민들 개개인에게 구분전(口分田)이라는 토지를 할당하는 제도였다. 누구에게나 갈아먹을 토지를 나누어주는 것이므로 어찌 보면 국가의 시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보다는 국가 재정을 충당하고 귀족들의 사치스런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제도였다. 무엇보다 조용조(租庸調)의 세금이 지나치게 무거웠다. 세금의 비율은 얼추 수확량의 2할가량 되었는데, 당시의 농업 생산력에 비추어볼 때 구분전을 경작해 이 세금을 내면서 멀쩡히 살아갈 수 있는 농민은 거의 없었다.

 

조용조(租庸調) 가운데 특히 가혹한 것은 용(), 즉 요역(徭役)이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심한 것은 병역의 폐해였다. 요역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여기저기서 구분전을 버리고 도망쳤는데, 이것은 말하자면 실정법을 위반하는 셈이었다. 구분전을 경작하는 일은 농민의 권리라기보다 의무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780년에는 징병제도 자체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병역 의무제가 사라지면 귀족의 사병(私兵)이 활성화되는 것은 정한 이치다. 어쩌면 당시 중국의 당이 무너지는 과정과 그리도 똑같을까? 당의 부병제(府兵制) 역시 성립될 당시에는 획기적이었으나 농민들이 토지를 버리고 달아나면서 무너졌다. 그 결과로 지방 호족의 군벌인 번진(蕃鎭)이 생겨났고 이 번진들의 반란 때문에 당은 결국 멸망하지 않았던가?

 

반전제가 무너지고 장원이 발달한다. 징병제가 무너지고 사병 조직이 늘어난다. 그렇잖아도 활발한 반란과 내전으로 호전성을 키워온 중앙 귀족과 지방 호족이 이런 호조건을 놓칠 리 없다. 더구나 장원은 9세기부터 면세의 특권까지 얻으면서 국가의 지배로부터 거의 반독립적인 상태가 되었다. 물론 고쿠시(國司)라는 지방 행정의 수령이 중앙에서 파견되었지만 지방 호족들은 이미 고쿠시의 지배를 벗어나 있었다. 호족들은 자기 장원 내의 백성들을 무장시켜 사병 조직을 강화했는데, 이것을 로도(郞黨)’라고 불렀다. 말 자체로도 사나이들의 패거리라는 뜻이고 실제로도 깡패 집단이나 다를 바 없었다(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사람을 왜색용어로 낭인郞人이라고 부르는데, 일본어 발음으로는 로닌이다. 구한말 일본의 로닌 집단이 명성황후를 살해한 사건은 잘 알려져 있다).

 

이렇게 독자적인 경제력과 무장력을 합법적으로갖추게 된 전통의 씨족 세력, 귀족 가문들은 급기야 자기들끼리 치열한 세력 다툼에 나섰다. 바야흐로 일본 특유의 내전의 역사는 이때부터 한층 강도 있게 전개되기 시작한다.

 

 

사무라이의 군장 귀족들 간의 권력 다툼이 전개되는 동안 그 수면 밑에서는 장차 미래에 일본의 정치를 주도할 무사 계급이 성장하고 있었다. 여기서 사무라이라는 말이 나왔다. 위 사진은 사무라이가 무장을 갖추는 여러 단계를 서양인이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모방의 한계

귀족이 주도한 율령제

순수 무장의 집권

모방을 버리고 독자 노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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