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부 식민지ㆍ해방ㆍ분단
식민지 시대에도 사대부(士大夫)의 후예들은 친일파로 변신하거나 독립운동의 명망가로 거들먹거렸다.
가장 치열한 항일투쟁을 전개해야 할 시기에 한반도에서는 오히려 투쟁의 불꽃이 사그러들었고, 그 결과 일본이 패망한 뒤에도 한반도는 열강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남북한의 정권이 권력욕에 가득한 음모가들의 손아귀로 넘어간 것은 ‘혁명 없는 역사’의 필연적인 귀결이다.
1장 가해자와 피해자
식민지를 환영한 자들
어쩌면 러일전쟁의 승패와 상관없이 처음부터 일본의 조선 지배는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전쟁에 임하는 두 나라의 자세가 그렇다. 1904년 2월 8일 일본은 러시아를 불시에 기습하면서 그 이튿날로 인천을 통해 서울로 입성했다. 그리고 군대를 따라온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는 고종(高宗)에게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면서 일본을 도우라고 강요했다. 아직 선전포고를 하기도 전이었다. 그 반면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는 2월 12일에 공관 수비대와 함께 일찌감치 서울을 빠져나갔다.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사실상 조선의 임자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전쟁 중에도 하야시는 조선의 외부대신(외무장관)인 이지용(李址鎔, 1870~?)과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체결해서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물자를 조선으로부터 징발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으며, 일본 수상 가쓰라 다로(桂太郞)는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사인 윌리엄 태프트(William Taft)와 밀약을 맺고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서로 교차 승인해주기로 약속했다. 한일의정서는 일본이 조선을 소유했다는 뜻이고,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그 소유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는 뜻이니, 일본이 러시아에게 승리하는 순간 이미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아직 밟아야 할 절차가 있다. 조선과 일본은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강화도조약에서 규정된 ‘대등한 관계’에 있었고, 더구나 조선은 비록 무늬만이기는 하나 일본과 같은 제국의 위상이다. 그래서 조선을 완전히 소유하려면 먼저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드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 1905년 11월 초 일본 메이지 정부의 실력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특별대사의 자격으로 조선에 온 목적은 바로 일본이 조선을 보호 해주겠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다(강화도조약에서 두 나라를 ‘대등한 관계’라고 규정했던 일본이 조선을 속국화하려는 것은 자기모순이지만, 불행히도 당시는 논리보다 총칼이 앞선 시대였다).
덜떨어진 고종(高宗)도 이번만큼은 일본의 의도를 분명히 알아차리고, 이토를 만난 자리에서 보호받을 의사가 없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나 그대로 물러날 이토였다면 애초부터 한반도에 발을 내딛지도 않았다. 그는 일본 군대를 무장시켜 서울 시내를 시위하도록 하고, 궁성 주변에는 헌병과 경찰을 삼엄하게 배치해서 잔뜩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는 다시금 고종(高宗)에게 회유와 협박을 가했다. 과연 이 방법은 효과가 있었다. 겁을 집어먹은 고종은 슬그머니 무대에서 퇴장해 버렸고 ‘국왕이 빠진 어전회의’는 처음처럼 강력한 반대의 분위기를 유지하지 못했다(수구화에는 앞장서다가 정작 국가적으로 중요한 때는 말없이 물러나 버리는 고종을 어떻게 봐야 할까?). 때를 놓칠세라 이토는 직접 회의를 주재하면서 조정 대신들에게 한 사람씩 차례로 의사를 물었다. 어차피 국왕도 책임을 회피한 마당에 망설일 이유가 없다. 모두 여덟 명의 주요 대신들 가운데 다섯 명이 찬성함으로써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통과되었는데, 이완용, 이지용, 이근택(李根澤), 박제순(朴齊純), 권중현(權重顯)의 다섯 명이 바로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 불리는 자들이다【그들은 비록 1905년 11월 20일자 『황성신문(皇城新聞)』에서 장지연(張志淵, 1864~1921)의 집중포화를 맞았고 매국노라는 비난을 얻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줄 잘 선 대가를 톡톡히 받았다. 그 공로로 일본 정부가 수여한 작위를 받았을 뿐 아니라, 모두 권력을 누리면서 살 만큼 살다가 죽었기 때문이다(특히 이완용은 이후에도 적극적으로 친일과 매국 행위를 계속해서 후대에 매국노의 대명사라는 영예를 차지하게 된다). 나라가 망한 것도 비극이지만 이처럼 민족의 반역자들이 제때 처단되지 못한 것은 더 큰 비극이다. 나중에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에서 해방된 뒤에도 친일 매국노들이 판치는 세상이 된 것은 그런 역사적 선례가 있기 때문이다】.
▲ 합방의 두 주역 일본과 조선은 둘 다 제국이지만, 두 제국의 합병은 각각의 실세인 이토(아래쪽)와 이완용(위쪽) 사이에 이루어졌다. 비록 둘 다 실세였고 양국의 황제들은 허수아비나 다름없었지만, 일본은 황제와 정부가 원하는 조약이었고, 조선은 그렇지 않았으니 합병 조약의 애매한 성격은 여기서 비롯된다.
강압적 분위기에서 달리 방법이 있었겠느냐고 을사오적을 두둔하는 건 옳지 않다. 그들과 달리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에 끝까지 강하게 반대했고 나중에 일본이 인사치레로 주는 작위마저 거부한 참정대신(지금의 부총리급) 한규설(韓圭卨, 1848~1930) 같은 사람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을사오적에게만 모든 책임을 돌리는 것 역시 옳지 않다. 근본적으로는 잘못된 역사를 진행해 온 필연적 귀결이지만, 당시의 인물 만으로 책임을 따진다 해도 가장 큰 책임은 단연 고종(高宗)에게 있다. 따라서 을사오적은 ‘고종과 을사오적’이라고 하든가, 마치 록밴드 이름 같아 거부감이 든다면 고종을 포함시켜 ‘을사육적’이라 불러야 한다.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휘둘리고 젊은 시절에 아내의 치마폭에 싸여 지낸 것까진 인물이 모자란 탓이라고 봐넘길 수도 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내가 사라진 뒤에도 남의 집 더부살이로 국가 위신을 실추시키고 자주국권을 수호하려는 애국 단체를 탄압하는 정신나간 행동을 일삼은 고종은 을사오적보다 훨씬 더 무책임한 매국노다.
정작 그가 잘못을 깨달은 것은 조약이 체결되고 난 뒤다. 이듬해 1월 을사조약을 주도한 일본 공사이 해체되고 통감부(統監府)가 성립되었다. 이제 조선은 공식적으로 일본의 속국이 되었으므로 공사관 대신 정식 지배기관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과연 통감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공사관의 위상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조선 정부의 외교권과 군사권을 박탈하는 것이었으니까. 사실 오랜 세월 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던 조선은 전통적으로 중국에게 외교권과 군사권을 내맡겨 왔으니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종주국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박탈감이 더 심할뿐더러 향후의 조짐도 심상치 않다. 일본이 단지 예전의 중국이 담당해 온 조선의 관리자라는 역할에만 머물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제야 고종은 자신의 지위조차도 오래 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실감한다. 물론 왕위에 특별한 미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그의 대에서 조선의 왕통이 끊어진다면 종묘 사직에 대죄를 짓게 되고 죽어서 조상 뵐 면목도 없어지게 되니까 큰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원래 모든 후회는 때늦은 법, 이제 와서 그가 쓸 수 있는 카드는 거의 없다. 한 가지 있다면 오로지 국제사회에 호소하는 것이지만 그것도 쉽지 않다. 사실상 조선의 정부가 된 통감부는 외국에 있는 조선의 공사관들을 일제히 소환하고, 서울에 주재한 외국의 공사관들도 철수시켜 버렸기 때문이다(아마 외국에서도 일본과 조선이 하나로 통합되었다면 한 나라에 두 개의 공사관을 둘 필요는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고종(高宗)에게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은 그의 친정집이나 다름없는 러시아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1907년에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를 열자고 열강에 제안하면서 고종에게 특사를 파견하라는 초청장을 보내온 것이다. 회의의 목적은 유럽에 감도는 전운을 해소하자는 것이지만 니콜라이가 굳이 종속국의 지위에 있는 조선에까지 초청장을 보낸 것은 아마 일본에게 조선을 빼앗긴 것을 억울하게 여긴 탓일 터이다. 어쨌거나 국제사회에 조선의 사정을 알릴 ‘매체’가 전혀 없었던 고종(高宗)으로선 하늘이 내린 기회나 다름없다【당시 유럽 세계에서 태풍의 눈은 독일이었다. 뒤늦게 통일을 이루고 후발 제국주의 국가로 나선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 등 선진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전세계의 식민지 분할이 사실상 완료되자 누구보다 불만이 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독일은 같은 처지인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와 함께 삼국동맹을 맺고 형세의 역전을 도모한다. 그러자 독일의 강력한 군사력에 긴장한 영국은 라이벌 프랑스에다 오랜 앙숙인 러시아까지 끌어들여 삼국협상을 맺고 삼국동맹에 대비한다(『종횡무진 서양사』, 「열매 2」 3장 참조). 국제적 평화회의가 필요해진 이유는 이런 유럽의 정세 때문이었으므로 먼 극동의 사정이 열강 대표의 관심을 끌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일본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회의를 1년 앞둔 1906년 4월에 일찌감치 이상설(李相卨, 1870~1917)이 출발했고 1년 뒤에는 이준(李儁, 1859~1907)이 조선을 떠났다. 두 사람은 러시아의 수도인 페테르부르크에서 만나 그곳에 체재하고 있던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李瑋鍾, 1887~?)과 합류해서 1907년 6월 회의 날짜에 맞춰 헤이그에 도착했다. 여기까지는 작전 성공이지만 그 다음에는 역시 각오했던 어려움이 따른다. 회의의 분위기나 쟁점이나 식민지ㆍ종속국 문제와는 전혀 무관했으니 이들의 활동이 순탄할 리 없다. 우선 열강은 조선 대표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을사조약으로 일본의 속국이 된 이상 참가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뒤늦게 사실을 파악한 일본 대표가 유럽 대표들을 상대로 적극적인 방해 공작을 펴기도 했지만 애초에 유럽 열강에게 조선의 처지를 공감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이준은 현지에서 순국해서 열사가 되었고 나머지 두 사람은 눈물로 이준을 매장한 다음 귀국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러시아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활동했다.
그래도 밀사들이야 돌아오지 않으면 그뿐이지만 그럴 처지가 못 되는 고종은 꼼짝없이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조약 체결 이후 초대 조선 통감(統監, 통감부의 책임자인데 아직 조선은 완전한 식민지가 아니기에 총독에 해당한다)이 된 이토는 이완용을 시켜 고종(高宗)에게 사태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면서 제위에서 물러나고 아들에게 섭정을 맡기라고 강요한다. 자신도 어차피 허수아비인 판에 섭정까지 들인다면 허수아비의 허수아비가 되는 셈인데, 아무리 모자라고 못난 고종이라 해도 지켜야 할 최소한의 자존심은 있다. 결국 그는 아들에게 양위를 해버렸고, 이로써 대한제국의 2대 황제이자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純宗, 1874~1926, 재위 1907~10)이 즉위했다【개인적으로는 자존심을 지킨 것일지 모르지만 그 양위는 결국 고종(高宗)의 마지막 실책이 되었다. 아무리 속국의 신세라 해도 조선 조정과 국민들의 정서가 있고, 또 아직 조선은 속국일 뿐 식민지는 아니었으므로 통감부가 조선의 황실을 마음대로 하기는 어려웠다(이완용을 통로로 활용한 것도 그 때문이다). 따라서 고종에게 진정한 저항의 의지가 있었다면 당연히 통감부의 강압에도 굴하지 않고 최대한 자리에서 버티었어야 했다(더욱이 헤이그에 밀사를 보낸 것은 ‘실정법’을 위반한 행위도 아니지 않은가?). 물론 그랬더라도 식민지화를 막을 수는 없었겠지만, 일본은 무척 난처한 입장에 빠졌을 테고 다만 몇 년이라도 조선의 식민지화를 지연시킬 수는 있었을 것이다. 하긴, 고종에게는 그런 정도의 저항을 기대하는 것도 무리였을까?】.
▲ 바지와 저고리 앉아 있는 늙은 자가 고종(高宗)이고 서 있는 젊은 자는 순종이다. 이들의 명함에는 황제라고 찍혀 있으나 실상 이들은 바지저고리였다. 그래도 쓸데없이 오래 재위했고 독립협회(獨立協會)의 탄압 같은 데서나 권한을 발휘한 고종에 비해 처음부터 끝까지 멋모르고 끌려다닌 순종이 조금 낫다고나 할까?
때늦은 저항
조선의 왕위 교체가 무의미해진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니까 순종이 즉위했다고 해서 하등 달라질 건 없다. 오히려 일본으로서는 나이든 고종(高宗)보다 젊은 순종(純宗)이 훨씬 다루기 쉽다. 고종은 40년간이나 재위하면서 조선 국왕으로서의 상징성이 굳어진 데다 러시아와의 친분도 두터울 뿐 아니라 드물긴 하지만 나름대로 실권을 행사한 경험도 있으니 아무래도 껄끄러운 데가 있지만, 순종은 조선 국민들에게 인지도도 비교적 약하고 외국과의 별다른 인맥도 없으니 과도기에 써먹기 딱 좋은 바지저고리다(게다가 그는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하마터면 일본 깡패들의 손에 죽을 뻔한 적도 있으니 기합이 잘 들어 있었을 터이다).
과연 순종이 즉위하면서부터 통감부의 프로그램은 한층 탄력을 받는다. 즉위한 지 불과 나흘 만에 조인된 정미 7조약이 바로 그 즉각적인 성과다(1907년이 정미년이기에 그런 이름이 붙었는데, 고종이 더 버티었더라면 ‘무신 7조약’이나 ‘기유 7조약’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토의 사랑스런 수족인 이완용은 순종의 재가를 얻어 전권대신이 된 뒤 이토의 집(통감 사택)에서 둘이 사이좋게, 조선의 군대를 해산하고 사법권과 경찰권마저 통감부에 위임한다는 엄청난 내용의 조약을 체결했다. 이제 일본은 조선에게서 독립국으로서의 권리(외교권, 군사권)만이 아니라 속국으로서의 권리마저도 모조리 빼앗았다. 남은 절차는 일본의 공식적인 식민지로 만드는 것뿐인데, 곧바로 그 절차를 밟지 못한 이유는 조선 국민들의 저항 때문이었다. 그것도 왕실이나 조정의 일부 대신들처럼 소극적 저항이 아니라 무력을 이용한 저항, 즉 의병(義兵)이었으니 일본으로서는 무엇보다 급한 문제였던 것이다.
사실 의병은 이미 2년 전인 1905년부터 활발히 일어나고 있었다. 처음 의병이 일어난 것은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斷髮令)이 있었던 1895년 무렵이지만 그때는 사안이 일회성인 탓으로 의병도 얼마 안 가서 사그러들었다. 그러나 을사조약은 국가의 존망이 걸린 사건인 탓에 이번의 의병은 규모에서나 강도에서나 전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런 데다가 고종(高宗)이 반강제로 퇴위당하고 군대가 해산되는 사태에 이르자 ‘을사의병’은 자연히 ‘정미의병’으로 이어지면서 한층 치열해졌다. 왕고참에 해당하는 유인석을 비롯해서 박창로(朴昌魯, 1846~1918)와 정운경(鄭雲慶, ?~1908) 등 강원도와 충청도를 무대로 활약한 의병장들이 주축을 이루었으며, 그밖에 경기도의 여주, 양평, 영남의 경주, 영덕 등지에서도 의병들이 구름처럼 들고 일어났다. 구국을 모토로 삼은 만큼 의병에는 신분 차별도, 나이 구분도 없었다. 민종식(閔宗植, 1861~1917) 같은 민씨 세도가의 인물이 있는가 하면 신돌석(申乭石, 1878~1908)과 같은 평민 의병장도 있었고, 정환직(鄭煥直, 1843~1907)과 같은 노인이 있는가 하면 이은찬(李殷瓚, 1878~1909)과 같은 젊은이도 있었다.
일본의 조선 침략을 ‘자본 진출을 통한 예속화’쯤으로 착각한 애국적 부자들이 이른바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라는 명목으로 차관을 갚자는 캠페인을 벌일 무렵【물론 국채보상운동도 구국운동의 일부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으나, 그 운동을 주도한 민족자본가들은 일본의 진정한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몰랐으므로 별로 저항의 의미는 없다고 하겠다. 당시 일본은 조선에 네 차례에 걸쳐 대규모 차관을 제공했는데, 주로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자금 용도였다. 그런 만큼 일본은 차관을 반환받을 의지가 전혀 없었으므로 채권자의 의도와 무관한 채무보상운동은 무의미했던 것이다. 그래도 이 캠페인은 무장투쟁보다는 참여하기가 쉬웠던 탓에 전국민적인 호응을 얻었으며, 그 때문에 통감부는 이 운동을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탄압하고 운영자인 영국인 베델과 양기탁(梁基鐸, 1871~1938)을 잡아들여야 했다】 각지의 의병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러나 그 치열함에 비해 효과는 별로 없었다. 자연발생적이고 비조직적인 의병은 훨씬 우수한 화력으로 무장한 일본 정규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더욱이 통탄스러운 일은 의병의 비밀조직을 색출하는 데 조선인들이 앞장섰다는 사실이다. 친일 민간단체인 일진회(一進會)가 특히 그악스럽게 굴었는데, 일본군의 통역을 맡은 송병준(宋秉畯, 1858~1925)이라는 자가 창립한 유신회(維新會)를 기반으로 하고 이완용의 지령을 받은 단체였으니, 그 이름은 아마도 조선의 식민지화를 위해 ‘일로매진’한다는 뜻이었을까?
비록 때늦은 저항이라 하더라도 의병의 의의는 적지 않다 해야겠지만, 의병운동은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자주 독립의 취지만큼은 높이 살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위정척사의 이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인석도 그렇지만 실제 의병 활동은 보잘것없던 최익현이 의병운동의 상징적 구심점으로 널리 받아들여졌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래서 의병들의 공격 대상에는 침략자 일본과 그 앞잡이들은 물론이고 개화 사상을 가진 인물들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념적 목표도 외세를 완전히 배제하고 옛날의 제도를 부활하는 것에 두고 있었다【의병운동이 그런 ‘오해’를 피하려면 사실 독립협회(獨立協會)가 해산될 때도 일어났어야 했다. 의병운동이 진정 구국을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면 조선이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일어났어야 할 텐데, 그것은 바로 자주국권을 기치로 내세운 독립협회가 탄압을 받은 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국보다는 수구를 이념으로, 민족보다는 왕실과 유학 체제의 보존을 목표로 삼았기에 정작 그런 위기에서는 의병이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유림 세력은 을사조약으로 조선 왕실이 위기에 처하고 정미조약으로 고종(高宗)이 퇴위된 사건에서 자극을 받아 의병을 일으킨 것이니, 그것을 순수한 민족운동이나 애국운동으로 볼 수는 없다】.
40년 전의 위정척사 운동이 그랬듯이 의병운동 역시 성리학적 세계관을 동력으로 하는 시대착오적이고 수구적인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외세의 침략에 반발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중국이나 러시아의 침략보다도 일본의 침략에 특히 민감하게 반발한 배경에는 전통적으로 중국을 섬기고 일본을 오랑캐로 경멸해 온 중화 이데올로기가 있었다. 결국 그토록 오랫동안 조선의 발목을 잡아 온 그 질곡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도 그 발목을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 마지막 전쟁포로 일본 검찰 앞에서 안중근이 유언을 남기고 있는 장면이다. 당시까지 아직 조선 합병되지 않았으므로 안중근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밝힌 것처럼 ‘전쟁포로’다. 그러나 나라를 빼앗긴 뒤에 활약한 독립투사들은 불행하게도 법적으로 ‘테러리스트’의 지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식민지화 일정이 가시화되자 의병 이외에 또다른 형태의 저항 방식이 생겨난다. 그것은 바로 테러다. 어쩌면 일본과 친일파들은 의병보다 그것을 더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 유학을 이념으로 삼고 유림에서 출발한 보수적 의병운동은 일본의 탄압이 심해지자 위축되었으나, 전통적 이데올로기에 물들지 않은 새로운 저항 세력은 점차 중국의 만주와 러시아의 연해주로 거점을 옮겨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그런 항일운동가들 중에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이 있었다.
안중근은 열여섯 살 때 그리스도교에 입문해서 세례까지 받은 데다 유학의 굴레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황해도 출신이다. 그런 만큼 그는 전통적 이념의 굴레에 얽매이지 않았으므로 진보와 보수를 논하기 전에 민족을 먼저 생각할 수 있었고 개화와 척사를 따지기 전에 먼저 자주를 바라볼 수 있었다. 정미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연해주로 넘어가서 그곳에 부대를 가지고 있던 이범윤(李範允, 1863~?)의 휘하로 들어가 함경도 일대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한다. 1909년 봄 동지들과 함께 단지회(斷指會)를 결성한 안중근은 새끼손가락을 자르는 데 그치지 않고,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앞으로 3년 이내에 암살하지 못하면 조선 국민에게 자결로 속죄하겠다고 맹세한다.
그 기회는 3년이 아니라 반 년 만에 왔다. 만주와 연해주의 항일 세력을 처리하는 문제로 그 해 10월 26일 하얼빈에 온 이토는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한 뒤 군중 속에서 뛰쳐나온 안중근의 총탄을 세 발 맞고 죽는다. 젊은 시절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주역이었고 일본을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시킨 일본의 영웅이 조선의 식민지화를 추진하다가 조선 청년의 저격을 받고 이국 땅에서 숨을 거두었으니, 과연 죽는 것도 다섯 가지 복 가운데 하나라는 이야기가 실감나는 장면이다【실제로 일본의 역사에서 이토는 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위대한 인물로 큰 존경을 받지만 우리 역사에서는 조선 침략을 주도한 원수일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안중근도 역시 조선에서는 항일투쟁의 상징적 영웅이며 어린이 위인전에 등장하는 단골 멤버지만 일본에서는 민족의 영웅을 살해한 테러리스트일 뿐이다. 이렇게 한 인물에 대한 평가도 나라와 민족에 따라 엇갈릴 수밖에 없다면, 역사에서 객관적인 관점이란 대체 뭘까?】.
이 사건이 단순한 테러가 아니라는 점은 사건 직후 안중근이 직접 밝힌 거사 동기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에서 그는 개인적인 동기로 거사한 게 아니라 대한의용군 참모중장이라는 자격으로 조선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적을 쏘아죽인 것이므로 자신을 전쟁포로로서 취급해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했던 것이다. 자신의 행위를 테러가 아닌 전쟁이라고 밝힌 것은 그가 의병운동과 항일운동의 본질적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의병운동은 조선의 왕실과 옛 체제를 부활시키려 했지만, 항일운동은 ‘왕국으로서의 조선’에 집착하지 않고 ‘주권국가로서의 조선’을 내세우는 것이었다. 이렇게 ‘국가 대 국가’의 관점을 취해야만 겉으로 테러처럼 보이는 사건도 ‘전쟁’에 포함시킬 수 있다.
안중근은 죽을 때까지 당당한 태도와 소신을 굽히지 않을 수 있었지만, 불행히도 그의 논리는 그가 죽은 뒤 몇 개월 만에 근거를 잃게 된다. 전쟁이 가능하려면 무엇보다 국가가 행위의 주체여야만 하는데, 1910년 8월에는 조선이라는 국가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후에 일어난 독립투사들의 의거는 안중근의 경우처럼 ‘전쟁’이 되지 못하고 적어도 실정법상으로는 ‘테러’에 그치고 만다. 안중근으로서는 그런 꼴을 보지 않고 죽었다는 게 차라리 다행이라 할까?
▲ 근정전에 나부끼는 일장기 근정전이라면 국왕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고 왕명을 반포하는 곳이다. 일본이 일장기를 근정전에 내걸었다는 것은 명백히 근정전의 상징성을 이용하려는 의도다.
진정한 치욕이란
이토가 죽으면서 공석이 된 통감 자리는 일본의 육군대신인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穀)에게로 넘어갔다. 문관 출신인 이토의 후임으로 군 출신 인물이 부임했다는 것은 곧 조선의 식민지화가 임박했음을 말해주는 사실이다(러일전쟁 이후 일본 정부는 군부가 사실상 장악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일본 제국주의는 본격적으로 군국주의 노선으로 전환하게 된다). 아닌 게 아니라 이미 1909년 가을에 대대적으로 전개된 ‘토벌작전’으로 한반도 내의 의병운동은 완전히 진압되었으므로 남은 절차는 합병 조약을 비준하는 것뿐이었다.
일본의 통감은 교체되었어도 일본의 조선 측 파트너는 죽지도 바뀌지도 않았다. 이제 총리대신이 되어 있는 이완용이 바로 그 영원한 파트너다. 1910년 8월 22일 데라우치와 이완용이 비밀리에 만나 합병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조선 왕조는 건국한 지 519년 만에, 왕통으로 따지면 27대 만에 마침내 최종적으로 문을 닫았다. 어찌 보면 1800년에 22대 왕인 정조(正祖)가 죽으면서 망했어야 할 왕조가 100년 이상 쓸데없이 존속한 셈이니까 별로 통분해할 것은 없다. 하지만 그때 망했더라면 새 왕조로 교체되었을 것을 오래 살아서 오히려 남의 손에 나라를 넘겨주는 꼴이 되고 말았으니, 건전지가 아니라면 오래 간다고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의병이라는 구체적인 저항 형태는 사라졌으나 워낙 큰일을 저지른 만큼 일본은 이완용을 제외한 조선 국민들의 반발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조약을 비준해 놓고도, 정치단체의 집회를 금지하고 조정 원로대신들을 연금하는 등 정지작업을 거친 다음 8월 29일에야 비로소 그 사실을 공식적으로 발표한다【이 사건으로 데라우치는 하마터면 전임자와 똑같은 길을 걸을 뻔했다. 안중근의 사촌동생인 안명근(安明根)이 그 해 12월 압록강 철교의 준공식에 참여하기 위해 신의주에 오는 데라우치를 암살하려 시도했던 것이다. 사전에 발각되어 거사는 실패했으나 데라우치는 안씨 형제와의 악연(?)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으리라. 보복에 나선 그는 안창호(安昌浩, 1878~1938)와 신채호(申采浩, 1880~1936)가 이끄는 항일단체인 신민회(新民會)를 타깃으로 삼아 애국지사들을 잡아들였다(안명근은 신민회 소속이 아니었으니 엉뚱한 분풀이인 셈이다). 당시 105명이 검거되었기에 그것을 ‘105인 사건’이라 부른다】.
결국 조선의 국민들은 나라를 빼앗기고도 일주일 동안이나 그런 사실조차 몰랐었다는 이야기다. 이 사건을 공식적으로는 한일합병(韓日合倂)이라 부르지만, 이 해가 경술년인 탓에 비공식적으로는 경술국치(庚戌國恥)라고 부르기도 한다. 국가적인 치욕을 결코 잊지 말고 길이 기억하자는 의미에서는 한일합병보다 경술국치라는 노골적인 이름이 더 나을 듯싶다(더구나 일본에서는 일한합병이라 부르는 것을 굳이 순서를 바꾸어 표현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합병을 한국이 주도했다는 뜻일까?).
어쨌든 이것으로 조선은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었으므로 별도의 정부는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조선 정부는 즉각 해체되고 그 대신 일본 제국정부의 위임을 받아서 한반도를 지배할 총독부(總督府)가 탄생한다. 통감부는 조선총독부로 자동 승격되었고, 통감으로 부임한 데라우치는 조선총독부의 초대 총독이 되었다. 그의 충실한 파트너인 이완용은 한 제국의 총리대신이란 직책에서 일개 총독부의 고문이 되었으니 강등된 것이었으나, 원래 제국보다 총독부가 높았으니 실은 승진인 셈이다. 또한 3년 전에 멋모르고 고종(高宗)에게서 제위를 물려받았던 순종은 황제에서 왕으로 지위가 한 급 낮아진다. 그래도 그로서는 왕실이 그렇게나마 존속하게 된 것에 감지덕지해야 했을까? 그렇게 사직을 보존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일본이 조선 왕실의 문을 아예 닫아 버리지 않은 이유는 뻔하다. 한편으로는 왕실로 대표되는 조선 왕조의 상징적인 측면마저 없앨 경우 국민적 저항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순종(純宗)을 황제에서 왕으로 강등함으로써 조선이 일본제국의 속국이라는 측면을 부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왕이라면 황제(일본 천황)를 섬겨야 하니까.
우리 역사에서 이 한일합방은 일본이 조선 국민에게서 나라를 빼앗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일까? 일본은 과연 조선의 주권을 침탈하고 우리 민족에게서 강제로 나라를 빼앗은 것일까?
심정적으로는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물론 일본은 분명 조선에 대한 침략 의도를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힘을 앞세워 조선을 병합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는 적어도 두 가지의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다.
우선 이완용이라고 하는 조선 측 파트너가 있는 한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빼앗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매국노든 뭐든 이완용은 엄연히 조선을 대표하는 관직에 있었다는 사실을 무시하면 안 된다. 그는 분명 순종(純宗)에게서 전권을 위임받아 데라우치와 국제법상으로 하자 없이 합병을 조인한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입장에서는 국가 사이의 정치적 행위를 진행한 데 불과하다(일본의 침략 행위를 비난하는 것과 절차의 하자를 따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만약 일본이 을미사변(乙未事變)에서처럼 물리력을 동원해서 순종을 살해하거나 자결을 강요한 다음 조선을 합병했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일본은 교묘하게도 이완용이라는 조력자를 만들어내서 작업을 진행했으므로 도덕적 비난은 할 수 있을지언정 그 자체가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럼 나라를 빼앗긴 데 대한 책임을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는 걸까? 그렇지는 않다. 당연히 순종(純宗)과 이완용에게 물어야 한다. 비록 일본의 압력 앞에 그들은 허수아비에 불과한 존재였지만, 아무리 바지 저고리라고 해도 일국의 왕과 전권대신이라면 그 상징에 걸맞는 현실적 위상을 가지고 있다【이 점은 앞서 살펴본 사대부(士大夫) 시대의 조선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조선의 국왕은 실권이 없는 상징에 불과했다. 따라서 사대부 세력이 권력다툼의 과정에서 국왕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집권을 공식적으로 추인받기 위한 절차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 국왕이 마음만 먹는다면 상황의 반전도 얼마든지 가능했다는 게 중요하다(비록 사대부들의 입김이 컸다고는 하나 예컨대 기묘사화(己卯士禍)에서 조광조(趙光祖)를 최종적으로 단죄한 것은 중종中宗이었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에서 항복을 결심한 것은 인조仁祖였다), 이렇듯 상징은 현실과 전혀 무관한 게 아니라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모든 쿠데타 세력이 집권한 직후 상징 조작부터 손대는 것은 바로 그게 권력의 유지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을사조약이 체결될 때 고종(高宗)의 경우도 그랬듯이, 만약 순종(純宗)이 합병 조약에 끝까지 강력하게 반대했다면, 또 이완용 같은 적극적인 협력자가 나오지 않았다면 일본의 식민지화 작업이 상당한 난항을 겪었을 것은 분명하다(실제로 일본은 조약의 비준을 순종의 조칙이라는 형식으로 발표했다). 물론 당시의 정황에서는 합병이 불가피했다는 추론도 일리는 있다. 이를테면 누가 왕이라 해도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며, 어차피 매국노 몇 명쯤은 나오게 마련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고 해도 책임 소재 자체를 따질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 필연성을 읽는 관점과 개별 사건의 책임을 묻는 관점은 서로 별개의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고려할 사항은 당시 조선의 정체(政體)가 왕국이라는 사실이다. 나라를 빼앗겼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우선 조선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조선 국민의 입장에서 볼 때 일본이 한일합병을 통해 조선이라는 나라를 빼앗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은 공화국이 아니라 왕국이므로 그런 말은 사실 성립하지 않는다. 굳이 표현한다면 한일합병은 조선의 지배층이 조선의 소유권과 지배권을 일본에게 넘겨준 사건이라고 말해야 한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소유자는 바로 왕이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도 역시 단지 형식적이거나 절차적인 것만이 아니다. 조선은 외형상 전제군주국이었기에 일본은 교활하게도 조선의 왕실만을 집중적으로 공략해서 쉽게 나라를 빼앗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유럽 국가들처럼 의회가 있었다면 국가 권력과 주권 소유자가 분산되어 있으니까 일본으로서도 조선을 통째로 집어삼키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10여 년 전에 입헌군주제를 제안했던 독립협회(獨立協會)는 뛰어난 혜안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독립협회의 의견을 받아들여 형식적으로라도 의회와 헌법을 갖추었더라면 일본은 합병이 아닌 다른 방식을 모색해야 했을 것이다. 결국 오직 사직을 보존한다는 일념으로 고종(高宗)과 순종(純宗) 부자는 다른 모든 것을 내주었지만, 그 결과로 얻은 것은 오직 사직뿐이었으니 엄청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하긴, 조선! 왕국인 이상 가장 중요한 것은 왕실 보존이니 그들의 생각도 틀린 것은 아니다).
일국의 왕으로서 순종이 취했어야 할 태도는 차라리 죽을지언정 조약을 비준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어야 했다(그랬다 해도 순종이 죽는 일은 없었겠지만). 사실 그것은 영웅적인 기개를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그저 국왕으로서 최소한의 의무만이라도 이행하는 것에 불과하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맞았을 때 인조(仁祖)가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았다면 더 많은 조선 백성들이 죽음을 당했겠지만, 일본의 압력을 순종(純宗)이 끝까지 거부한다고 해서 조선 국민들이 특별히 더 피해를 입는 일은 없다. 국치로 불릴 만큼 한일합병은 역사적이고 국가적인 치욕이지만, 진정한 치욕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사실보다 그런 못난 지배자를 두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 통감에서 총독으로 전임 통감과 달리 군 데라우치가 새 통감으로 부임했다는 것은 일본의 합병 전략이 막바지 단계에 왔음을 뜻한다. 1910년 7월 23일에 데라우치가 마차를 타고 부임하는 장면인데, 다음 달에 합병이 이루어지면서 총독으로 승진한다.
2장 식민지 길들이기
주식회사와 토지조사
그 이름으로 보나, 조약의 취지로 보나 한일합병이란 일본과 조선을 한 나라로 통합시킨 조약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게 금세 드러났다. 합병이라면 조선이 일본의 한 지방처럼 되었다는 뜻일 텐데, 일본 정부는 조선을 지방으로 대우하기보다는 착취하고 이용하는 데 열심이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조약의 제1조는 ‘한반도 전체에 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일본에게 양도한다’는 것이었으니 도저히 정상적인(?) 합병 조약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일본은 애초부터 한반도를 동반자가 아닌 소유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그래도 순종(純宗)은 사직을 보존했고 이완용은 권력과 부를 챙겼으니 합병에서 밑진 것은 없다. 그러나 합병을 환영한 그들과는 달리 조선 국민들은 보존할 것도, 챙길 것도 없다. 오히려 가진 것이나마 잃지 않으면 다행이겠는데, 불행히도 그들은 그것조차 어려워지게 된다. 나라와 주권이야 원래 백성들 게 아니었으니 빼앗기든 말든 별로 상관없다. 문제는 그들이 가진 유일한 재산, 즉 얼마 안 되는 땅조차 빼앗길 처지에 놓였다는 점이다.
비록 한반도 전체를 합병했지만 조약 제1조에서 보듯이 아직 일본은 조선에 관한 정치적 통치권을 손에 넣은 것일 뿐 실익을 얻지는 못했다. 통치권은 수단이자 도구이므로 이제부터는 그것을 활용해서 조선으로부터 수확을 거둬야 한다. 어떤 방법이 있을까? 영리하게도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는 기존의 토지 소유 개념이 모호하다는 데 착안한다.
알다시피 전통적으로 고려와 조선의 한반도 왕조들은 왕토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쉽게 말해 전국의 모든 재산, 특히 부동산은 오로지 왕(국가)의 것이므로 왕 이외에는 그 누구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었다. 이런 체제에서는 농민들의 경작권은 인정되어도 토지 소유권은 인정되지 않는다. 이 점은 관리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으므로 관리들은 국가로부터 토지 자체를 불하받은 게 아니라 토지에서 나오는 생산물을 수취할 권리, 즉 수조권(收租權)을 봉급으로 받았다. 이런 이중적 토지 소유관계 때문에 고려와 조선에서는 늘 중대 이후에 토지제도가 붕괴했고 그것이 결국 경제적 기반의 와해를 가져왔다【앞에 말한 조선의 애매한 정체 문제도 실은 이런 사실과 연관된다. 국가주권이 국왕에게만 귀속되어 있으므로 일본이 절차상 하자 없이 정치적인 행위로 포장해서 쉽게 조선을 합병할 수 있었듯이, 모든 국가 재산이 명목상 국왕의 것이었으므로 일본은 조선 백성들이 사실상 소유하고 있는 토지도 아무런 하자 없이 빼앗을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전제군주국이라는 조선의 정체가 일본의 침략을 훨씬 손쉽게 만들어준 셈이다. 거듭 말하지만 형식상의 정체만이라도 개혁했더라면 일본의 식민지화 작업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 비해 일본은 역사적으로도 봉건 영주들이 각자 자신의 장원을 소유하는 방식의 토지제도를 취하고 있었던 데다【중세 일본의 경우 한반도와 비슷한 제도로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고 조세를 수취하는 반전제(班田制)가 있었으나, 이 제도의 적용 단위는 한반도의 경우처럼 나라 전체가 아니라 장원이었다. 즉 봉건 영주들이 자신의 영지에서반전제를 시행하면서 독자적으로 조세를 수취한 것이다. 게다가 일본 역사에서는 이 장원을 ‘나라(國, 구니)’라고 불렀으므로, 정치적 위상으로만 비교해 보면 일본의 한 지방은 곧 한반도 왕조 전체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중국의 경우처럼 ‘독자적인 천하’의 역사를 꾸려 왔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으로 근대적 토지 등기제도가 성립되어 있었으므로 토지 소유관계가 훨씬 명확하다. 말할 것도 없이 합병이란 이제부터 일본과 한반도에서 하나의 제도를 적용한다는 뜻이니까 이 점을 잘 이용하면 한반도 농민들의 토지를 통째로 먹을 수 있게 된다. 그런 취지에서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시행된 게 바로 토지조사사업이다.
조선에 근대적인 토지 소유관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사실상 모든 토지제도의 기능이 마비되면서 왕토의 개념이 무너진 상태였다. 따라서 그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토지의 사유화가 진행되어 토지의 매매까지도 이루어질 정도 였다. 다만 그것이 공식적으로 제도화된 게 아니라 관행적으로 묵인되어 왔다는 게 문제인데(현실적으로는 왕토 사상이 해체되었지만 공식적으로는 존재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노린 약점은 바로 그 공식과 관행의 틈이었다【오늘날까지도 우리 사회의 약점이 되고 있는 ‘투명성’의 문제는 이렇게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토지의 실제 소유권과 형식적 소유권이 다르다는 것은 늘 실제 권력자와 상징적 권력자가 분리되어 왔던 조선 역사의 필연적인 ‘불투명’을 반영한다】.
우선 전통적인 대지주의 토지는 건드리기 어려우니까 그대로 등기화해서 그 소유를 인정해준다. 또 소유권을 확실하게 입증할 수 있는 일부 농민들의 토지도 등기를 거쳐 소유권을 인정해준다. 여기까지가 바로 토지조사사업의 긍정적인 측면이다(토지 소유의 근대화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그러나 원래 없었던 공식적인 기준을 처음으로 설정했으니 그 기준에서 벗어난 토지의 소유관계는 모조리 비공식적인 것이 되며, 따라서 무효가 된다. 즉 소유권을 문서로써 입증할 수 없는 모든 토지는 졸지에 임자 없는 땅이 되어 버린 것이다. 등기권자만 없을 뿐 경작자는 있었으나 근대적 토지 소유제도에서 경작권이라는 모호한 권리는 전혀 배려되지 않는다.
그에 따라 사실상 자기 땅으로 알고 대대로 경작해 오던 농민들은 이제부터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새로 설정된 지주에게 높은 소작료를 물고 계속 땅을 부쳐먹든가, 아니면 고향을 등지고 새 땅을 찾아 떠나는 것뿐이다. 말이 두 가지지 대다수 농민들은 후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이렇게 해서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많은 농민들이 토지를 잃고 고향에서 쫓겨나게 된다. 게다가 이 과정을 더욱 가속화시킨 것은 한반도 최초의 주식회사다.
▲ 이상한 주식회사 이름은 주식회사지만 설립 취지에서나 기능과 임무에서나 동척은 주식회사라기보다는 조선의 농민들을 만주로 내몰고 일본인들을 이주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 과정에서 자연히 간도와 만주의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만주 침략이 용이해졌으니, 일본 정부는 애초부터 그런 효과를 예상하고 있었던 듯싶다.
한일합병이 정식 조인되기 전인 1908년에 조선과 일본 양국은 함께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라는 합자회사를 만들었다. 곧이어 합병이 이루어지게 되므로 합자회사라는 것은 사실 별 의미가 없지만, 창립 당시 본사는 서울에 두었으므로 한반도 최초의 주식회사인 셈이다. 동척을 만든 일본의 의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듯이 동척을 통해 한반도를 경제적으로 운영하는 것은 물론, 장차 만주를 침략할 때 경제적 전진기지로 활용하려는 데 있었다. 우선 최고 책임자인 총재부터가 일본군 현역 육군 중장인 데서도 그런 의도를 읽을 수 있다(앞서 말했듯이 당시 일본 정부는 군부가 지배하고 있었다).
합병과 더불어 동척은 눈부신 활동을 전개한다. 1차 목표는 조선 내의 토지다. 우선 동척은 주로 곡창지대의 조선 농민들로부터 헐값으로 토지를 사들인다. 이 과정에는 병행되고 있던 토지조사사업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등기가 불가능한 토지는 곧바로 동척의 부동산이 되어 버렸고, 등기된 토지라 해도 새로 제정된 소유관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농민들은 동척의 집요한 공세에 휘말려 싼 값으로 땅을 팔아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동척은 이렇게 마련한 토지를 일본에서 조선으로 이민 오는 농업 이민자들에게 불하했다.
낯선 땅에 가서 사느니 내 나라에서 가난하게 살겠다. 이런 이민의 두려움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일본의 농민들은 아무리 조선을 일본이 지배하고 있다 해도 낯설고 물선 조선으로 가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당근을 투약한다. 농업 이민자들에게는 조선의 농지를 싸게 불하하는 것을 비롯해서 많은 특혜를 주기로 한 것이다. 그러자 처음에는 꺼리던 이민 지망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든다. 심지어 일본 정부는 지망자들 가운데서 조선 침략에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을 엄선하여 이민을 허가할 정도였다.
토지조사사업으로 잔매를 맞고 동척에 결정타를 맞은 조선 농민들은 휘청거린다. 토지를 강제로 빼앗기거나 헐값으로 팔아넘기는 것 이외에 일본인 농업 이민자들마저 조선으로 꾸역꾸역 몰려드니 굳이 애국자가 아니더라도 나라 잃은 설움은 새롭기만 하다. 고향을 등지면 어디로 갈 거나? 어차피 남의 것이 되어 버린 내 나라 안에는 갈 곳이 없다. 그래서 조선 농민들은 점점 만주와 연해주로 이민을 가게 되는데, 오늘날 중국의 연변동포나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카레이스키는 바로 이들의 후손이다(그런 점에서 박경리의 소설 『토지』라는 제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26년 일본의 농업 이민 정책은 중단되지만, 이후에도 제 나라에서 밀려나 만주로 새 보금자리를 찾으러 떠난 조선 농민들은 해방 무렵까지 무려 150만 명에 달한다【주식회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회사였지만, 그래도 명색이 주식회사인 만큼 동척이 출범할 때는 일본과 조선에서 공모주 청약을 실시했다. 그런데 당시 일본과 조선의 공모주 청약 상황은 아주 대조적이다. 조선에서는 모집 공모주의 불과 2퍼센트만이 응모한 데 반해 일본에서는 응모자가 엄청나게 몰려 무려 3,500퍼센트, 그러니까 35배가 응모했다. 창립하면서 표방한 취지는 “한국민으로 하여금 문명의 혜택을 입도록 한다”는 것이었는데, 일본인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은 바로 그런 데서 나온 걸까? 하지만 그들과 달리 한국민들은 동척을 문명의 혜택으로 여기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1926년 의열 단원 나석주(羅錫疇, 1892~1926)는 이미 한반도 최대 지주가 된 동척에 폭탄을 투척하고 순국함으로써 그 점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라는 이름에서 ‘척식(拓殖)’이란 개척 이주를 뜻하는 말이다. 물론 원래는 일본 농민의 조선 이주를 뜻하는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그게 도미노처럼 작용해서 조선 농민의 만주 이주까지 촉발하게 되었다. 그 덕분에 일본은 조선 농민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만주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킬 수 있었으니, 아마 일본은 처음부터 그것까지 의도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곧이어 만주를 노리게 되니 말이다.
▲ 정복을 위한 측량 토지조사사업이 시작되자 일본은 많은 측량사와 기술자를 파견해 한반도의 상세한 지적도를 작성했다. 사진 왼편에는 일본인 기술자들이 서 있고 오른편에는 한국인들이 지게로 측량 장비를 실어나르고 있다. 일본의 한반도 측량은 강화도조약 때부터 시작되었다.
세계적 모순의 집약지
한반도에서 동척의 활동과 토지조사사업이 한창이던 1910년대 세계적인 관심의 대상은 한반도의 사정도 아니었고 식민지ㆍ종속국의 문제도 아니었다. 당시 유럽 세계는 물론이고 멀리 극동의 중국과 일본에게도 초미의 관심사는 1914년 6월 28일 발칸에서 한 발의 총성과 함께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등 선진 제국주의 열강(연합국)에게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후발 제국주의 열강(동맹국)이 도전한 이 전쟁은, 이미 전 세기 말부터 증폭돼 오던 삼국협상과 삼국동맹 간의 다툼이 빚어낸 사건이었다(『종횡무진 서양사』, 「열매 2」 4장 참조). 그렇다면 전쟁의 성격도 그렇고 전장도 유럽이었으니 한반도에는 별 영향이 없어야겠지만, 중국과 일본이 참전을 선언했기에 문제가 된다.
중국은 독일이라면 이를 갈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연합국 편인데, 일본은 어느 편으로 참전했을까? 제국주의의 발달 수준으로 보면 일본은 후발 제국주의에 속하므로 동맹국 측에 붙어야 한다. 그러나 세계적인 기준으로 보자면 그렇지만 지역적인 기준에서 보면 다르다. 아시아에서 일본은 유일한 제국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은 연합국 측에 가담하게 되는데, 포유류에 속한 박쥐처럼 모양새는 좀 이상하지만 결과적으로 일본을 위해서는 대단히 현명한 선택이었다(물론 한반도에게는 그 반대다). 아마 그 선택에는 무대가 유럽이므로 설사 연합국이 진다 해도 일본으로서는 크게 손해볼 게 없으리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전쟁 과정에서 일본은 태평양 지역에 산재한 독일의 해외 식민지들을 차례로 접수하고(후발 제국주의인 독일은 뒤늦게 식민지 쟁탈전에 나섰기에 태평양의 작은 섬들에 대해서까지 왕성한 ‘식욕’을 보였다) 중국 산둥에 있는 독일군 기지를 파괴하는 정도의 미미한 전과를 올리는데 불과했으나, 아무튼 연합국은 아시아에서 제 몫을 해준 일본을 기특하게 여긴다. 그래서 전후 처리 과정에서 일본은 독일이 가지고 있던 중국에 대한 모든 이권을 승계하고 나아가 만주 지역의 개발권마저 소유한다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게 된다.
그러자 가장 입이 부은 것은 단연 중국이다. 개전초부터 연합국 측에 가담해서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고 또 나름대로 열심히 싸웠는데도 오히려 전후의 논공행상에서는 승전국에 마땅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사실 연합국 세력이 중국을 무시한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우선 중국은 중국 내의 독일 조차지들을 공략한 정도였으므로 별로 전황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더욱이 연합국의 관점에서 보면 그나마 중국군의 활약은 자기 나라를 독립시키기 위한 것일 뿐 전쟁 자체를 위한 것은 아니므로 평가절하될 수밖에 없었다. 더 큰 이유는 연합국 측의 세계적 구상에서 중국의 역할은 없었기 때문이다. 신흥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을 축으로 해서 아시아의 제국주의적 질서를 구축하려는 게 연합국 측의 의도였으니, 여기서 중국의 사정 따위는 전혀 배려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연합국은 차후 일본의 중국 침략을 공식 승인한 셈이 되었지만, 모든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던 당시에는 연합국의 어느 지도자도 그것까지 예측하지는 못했다】.
결국 승전의 대가가 고작 독일 대신 일본을 불러들인 것뿐임을 자각하게 된 중국 민중은 1919년 5월 4일 전국적인 반일 시위를 벌였다. 중국인들이 그제야 일본의 진의를 알아차렸다면 한반도인들은 일본의 식민지로 10년을 보낸 만큼 자각도 약간 더 빨랐다. 그래서 그에 두 달 앞서 한반도에서는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대규모 반일 봉기가 일어나는데, 이것이 바로 3ㆍ1운동이다(이 운동이 중국의 5ㆍ4운동에 영향을 주었음은 물론이다).
사실 조선에서는 10년 동안 일본의 강압적 지배에 대한 반일 감정이 축적되어 왔거니와 그 감정이 행동으로 표출될 만한 분위기도 팽배해 있었다. 1919년 1월 고종(高宗)이 70년에 가까운 욕된 삶을 마감하고 죽었는데, 때가 때인지라 그가 일본인에게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나돌았던 것이다. 물론 근거없는 소문이었고 또 고종에게 조선 민중이 애정을 품을 이유는 전혀 없었지만, 식민지 세상에서 겪는 설움은 설사 헛소문이라 해도, 설사 못난 국왕이라 해도 폭발의 계기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런 분위기가 2월 8일 도쿄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으로, 3월 1일에는 서울 종로의 한 음식점에서 저명 인사들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읽는 행동으로 이어졌던 것이다(원래 거사 일자는 3월 3일 고종(高宗)의 장례에 맞췄으나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틀 앞당겨졌다).
이른바 민족대표로 불리는 33명은 음식점에서 나와 순순히 경찰에 연행되었으나, 그들도 총독부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은 미리 소식을 듣고 탑골공원에 모여 있던 수천 명의 어린 학생들과 시민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었다. 분노한 조선 민중은 각 종교계 인사들의 정치적 선언에 불과한 사건을 엄청나게 증폭시켜 이후 몇 개월 동안 한반도 전역, 나아가 만주와 연해주까지 대한독립만세의 구호로 뒤덮는 대형 사태로 엮어냈다. 그러나 식민지가 된 이래 처음으로 일본의 지배에 대규모로 항거한 탓일까? 이 운동은 산발적으로 이어졌을 뿐 전혀 조직적으로 전개되지는 못했다. 게다가 전쟁의 피비린내로 얼룩진 당시의 세계 정세에 비하면 순진하다고 할 만큼 철저히 비폭력적으로 진행되었기에 일본은 소수의 기마경찰과 군대로 어렵지 않게 진압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이 남긴 중대한 교훈은 한 가지, 바로 지속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려면 지도부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는 정치 망명객들이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를 수립하게 된다. 하지만 이름은 비록 ‘정부’라고 해도 식민지가 된 조국의 현실에서 도망쳐나온 인물들이 제대로 항일투쟁을 지도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1945년 해방 때까지 임시정부가 그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그저 명패만 내리지 않은 데 가장 큰 의의를 부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물론 윤봉길尹奉吉과 이봉창李基昌의 의거는 ‘임시정부의 작품’이지만, 독립을 기치로 내걸었으면서도 아무런 군대 조직도 없이 테러만으로 목적을 달성하려 했다면 ‘정부’라는 이름이 오히려 사치스럽다).
▲ 뒤늦은 함성 나라를 빼앗길 때도, 의병들이 들고 일어날 때도 기층 민중은 앞에 나서지 않았으나, 토지조사사업과 동척의 활동으로 삶의 터전이 무너지자 식민지 지배의 실상을 깨닫게 되었다. 사진은 3ㆍ1운동 당시 광화문의 비각 앞에 모인 군중의 모습이다. 비록 뒤늦었지만 이 운동으로 인해 임시정부와 만주 독립군 부대들이 속속 탄생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국내에는 항일운동을 지도할 주체가 없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3ㆍ1운동은 중국의 망명정부만 낳은 게 아니었다.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나서 몇 년 뒤인 1925년 4월 17일 김재봉(金在鳳. 1890 ∼ 1944), 김원봉(金元鳳, 1898~?), 이여성(李如星, 1901~?) 등의 젊은 청년들은 서울에서 최초의 사회주의 비밀조직인 조선공산당을 창립했다. 3ㆍ1운동의 영향으로 탄생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지만, 임시정부는 기껏해야 의병 활동의 경력을 가진 노인네 정객들의 친목 조직에 불과한 데 비해 조선공산당은 독립에 대한 신념과 그 신념을 실천할 의지를 지닌 진보적 청년들의 조직이었으므로 두 단체는 단지 연배의 차이만이 아닌 질적인 차이가 있었다(실제로 그 전까지 김재봉과 이여성은 일본 경찰에 의해 여러 차례 투옥된 전력이 있었고 김원봉은 유명한 의열단義烈團의 창단 멤버였으니, 임시정부의 망명객들과는 차원이 다른 투사들이다).
이념적 성향이 사회주의였던 만큼 조선공산당은 3ㆍ1운동을 계승하는 데 머문 임시정부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목표와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식민지ㆍ종속국 운동의 세계적 추세였던 민족해방과 사회주의 건설의 조합 을 근본적인 과제로서 설정한 것이다【이 점은 당시 제국주의 국가와 식민지ㆍ종속국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비롯된다. 3ㆍ1운동과 중국의 5ㆍ4운동에 영향을 준 것은 1차 대전 말기에 미국 대통령 윌슨이 발표한 민족자결주의 노선이었다. 이는 말 그대로 각 민족이 자신의 운명을 판단하고 짊어지는 주체여야 한다는 이념이므로 제국주의 열강의 지배를 받고 있던 조선과 중국의 민중에게 호소하는 바가 컸다. 그러나 사실 윌슨은 유럽 세계 내에서만 민족자결권이 적용된다고 주장했으니, 식민지ㆍ종속국의 처지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그와 달리 1917년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을 승리로 이끈 레닌은 그 원칙이 식민지 민족들에게도 적용된다고 주장하면서 사회주의 이념을 세계화하는 데 성공했다(결과적으로 레닌의 주장은 신생 소비에트 공화국을 반석 위에 올리는 데도 크게 기여했으니, 월슨은 아이디어만 제공하는 데 그쳤고 레닌은 그것으로 실익을 거둬들인 셈이다)】.
그러나 확고한 이념으로 무장한 운동가 집단이나, 별다른 노선도 없이 간판만 내걸고 있는 망명자들의 친목 단체나 조직 운영의 미숙함과 방만함에서는 별 차이가 없었다. 임시 정부도 그랬듯이, 거창하게 내세운 목표와는 달리 조선공산당은 지도부의 분열로 여러 차례 결성과 해산을 반복하면서 표류하고 말았다. 이것 역시 오랜 사대부(士大夫) 정치의 역사적 전통에서 빚어진 지극히 ‘한반도적인 현상’이라고 말한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조선의 지배층은 늘 목표를 정하고 달성하는 일보다 자파의 세력을 늘려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으니까(다만 해방운동의 지도층마저 그런 함정에 빠졌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20세기 초의 상황에서 전세계적으로 작용하는 모순은 크게 세 가지다.
둘째는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모순이며,
셋째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모순이다.
이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첫째 것은 1차 대전으로 완화되었으나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고, 둘째 것은 방치되어 있는 상태이며, 셋째 것은 아직 표면화되지 않았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당시 한반도의 정세에는 이 세 가지 모순이 모두 혼재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한반도에서는 아시아 유일의 제국주의인 일본이 서양의 선진 제국주의와 서서히 갈등을 키워가고 있는 중이었고(첫째 모순), 일본에 병합된 조선이 독립과 해방을 위해 투쟁하고 있었을뿐더러(둘째 모순), 그 투쟁을 주도하는 주요한 세력은 장차 20세기 중반 이후 세계 체제로 등장하게 되는 사회주의 세력이었다(셋째 모순). 이 세 가지 모순이 차례로 발현되면서 한반도 현대사는 엄청난 진통을 겪게 된다.
그런 점에서 당시의 한반도는 사실 세계적 모순의 집약지로서 전세계의 주목을 받을 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그러나 세계의 지도자들은 물론 한반도의 독립을 이끄는 지도자들도 그런 점을 전혀 주목하지 못했다. 하기야, 지내놓고 보면 알기 쉽더라도 당대에는 언제나 정체를 알기 어려운 게 역사다. 일찍이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이 되어야 날기 시작한다”는 헤겔의 말은 바로 그런 어려움을 가리키는 뜻이리라.
▲ 사선에서 만주의 어느 유격대 훈련장에서 전사 후보들이 사격 훈련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미 만주 일대에는 조국에서 몰려난 조선인들이 도처에 자리잡고 있었으므로 3ㆍ1운동 이후 이곳이 독립투쟁의 중심지로 떠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만주의 항일운동이 명망가 중심으로 흐르지 않은 이유는 고향을 등진 기층 민중이 주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야망
1차 대전에서 일본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했다는 것은 사실 커다란 역설이다. 비록 박쥐처럼 이중적인 존재이기는 하지만 일본은 ‘체질상’ 동맹국에 가까웠기 때문이다(그런 점은 원래 독일에 붙으려 했다가 달마치야 해안지대를 주겠다는 연합국 측의 막판 제의에 마음을 돌린 이탈리아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같은 색이었던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결국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파트너를 이루게 된다).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연합국의 주축은 시민혁명과 의회민주주의의 역사를 거친 ‘정상적인’ 제국주의 국가들인 데 반해 일본은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처럼 시민사회의 토대가 취약하고 의회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국가 주도형 후발 제국주의 국가였다. 게다가 일본은 군국주의적 색채마저 농후한 나라였으니, 종전 후 평화를 바라는 국제사회의 희망과는 반대로 언제든 태풍의 핵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충분했다.
사실 1차 대전 초기부터 일본은 그런 본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산둥을 점령하고 중국에서 독일 세력을 몰아낸 뒤에도 일본은 군대를 철수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증원했다. 이러한 무력을 바탕으로 유럽 전선에서 아직 포연이 한창이던 1915년에 일본은 중국의 지배자인 위안스카이를 위협해서 독일의 이권을 대신 차지하고 남만주와 몽골 및 중국 연안 일대까지 독점 조차하기로 하는 내용의 조약을 관철시켰다. 전쟁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것은 일본의 그런 야망을 연합국이 사후 승인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일본은 모든 것을 파멸시킨 세계대전을 계기로 오히려 세계적인 경제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인류 최초의 세계대전은 패전국들은 물론이고 전승국들에게도 막대한 피해를 주었으므로 연합국 중에서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을 받지 않은 나라는 일본과 미국밖에 없었다. 전쟁 중에 일본의 산업과 무역은 큰 성장을 이루어 종전 후 일본은 자본 수입국에서 자본 수출국으로 면모를 일신했다. 또 하나의 커다란 소득은 국제적 지위가 크게 상승한 것이었다. 종전 직후 미국 윌슨 대통령의 주창으로 결성된 국제연맹에 일본은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와 함께 당당히 이사국으로 참여하여 세계 5대 강국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이 연합국 측의 일원으로 참여한 처음이자 마지막 행사였다】.
이제 일본의 앞에는 두 가지 길이 놓여 있다. 하나는 독점 자본주의로의 길, 이미 일본은 유럽 열강 어느 나라에도 뒤질 게 없는 경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으므로 서양식 ‘정통’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할 자격이 충분하다. 다른 하나는 군국주의로의 길, 군사적으로도 세계 정상급인 일본은 경제적인 침략보다 더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군사적 침략을 실행할 힘도 충분히 지니고 있다. 경제적 노선과 군사적 노선, 이 두 가지 중 일본이 택한 것은 뭘까? 힌트는 1930년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 수상이 군부의 손에 암살된 사건에서 찾을 수 있다.
세계 경제가 최대의 호황을 누리던 시점에서 갑자기 터져나온 1929년의 세계 대공황이 없었다면 혹시 일본은 경제적인 노선, 즉 정상적인 제국주의화의 길로 나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국 경제를 순식간에 마비시킨 공황의 피해는 태평양 건너 일본에게도 직격탄을 날렸다. 일본은 경제 대국이었으나 대외 의존도가 높다는 게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대공황이 터지자 서유럽 국가들은 피해를 막기 위해 지역적으로는 블록 경제를 취하고 국내적으로는 국가독점 자본주의 노선으로 나아갔는데, 그 때문에 일본 경제는 수출이 급격히 감소되면서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기업들이 도산한 것은 물론이고, 그렇잖아도 대기업(재벌)과 중공업 위주의 성장 전략으로 고통과 희생을 치르고 있던 노동자와 농민 등 기층 민중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사태에 대한 정부의 해결책은 단연 경기 부양이다. 일본 정부는 서유럽 국가들과 공동 대응을 모색하고 그들로부터 금융 지원을 받아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그러나 같은 문제를 보는 군부의 시각은 다르다. 군부가 제시한 해법은 만주를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고 나아가 중국마저 정복해서 경제 위기를 타개하자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대동아공영의 이데올로기다. 말하자면 유럽의 블록화 전략을 색다르게(?) 해석한 결과라고나 할까? 이런 상황에서 하마구치 수상의 피살은 정부와 군부의 싸움에서 군부가 승리했음을 뜻하며, 독점 자본주의와 군국주의의 갈림길에서 군국주의가 채택되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1931년 9월 18일 일본의 만주 주둔군인 관동군의 일부 장교들은 남만주 철도를 몰래 폭파해놓고, 그것을 중국군이 저지른 짓이라고 몰아붙이면서 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이 도발한 예전의 전쟁들과 마찬가지로 선전포고 없이 기습으로 시작된 이 전쟁이 바로 만주사변이다. 중국의 위안스카이 정권은 일본의 의도를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전력의 열세 때문에 만주를 거저 내주고 만다【당시 중국이 만주를 쉽게 포기한 데는 아마 역사적으로 만주에 대한 집착이 덜했던 전통도 작용했을 것이다.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청나라가 무너진 것은 진시황제 이래 2천여 년 동안 유지되어 온 제국의 시대가 종말을 고한 것인 동시에 300여 년에 걸친 이민족 지배가 끝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중국은 비록 왕조는 아니지만 군벌들이 지배하는 한족 정권으로 되돌아왔다. 알다시피 만주는 청나라 황실의 고향이고, 또 역사적으로 한족의 세력권일지언정 영토는 아니었으므로 당시 중국의 집권 세력인 국민당은 아마 만주를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쑨원(孫文, 1866~1925)이 한때 만주를 일본에 팔아넘길 마음을 먹었던 것도 그만큼 만주를 중국 영토로 여기는 의식이 희박했기 때문이다(그 계획은 5ㆍ4운동으로 무산되었다)】.
결국 이듬해 일본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불러와 만주국이라는 괴뢰 정권을 세우고 만주를 손아귀에 넣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일본이 만주 정복에 만족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이제 누구의 눈에도 뻔하다. 일본의 야망은 무력을 통해 경제 위기를 타개하는 데서 더 나아가 장차 아시아 전체를 지배하는 데 있음이 명백해진 것이다.
일본의 대륙 침략이 노골화됨에 따라 조선의 항일운동도 커다란 전환점을 맞는다. 이제 항일의 과제는 조선만이 아니라 중국에게도 발등의 불이 된다. 한 가지 다행스런 점은 비록 분열과 재집결을 거듭하는 문제점은 있으나 그래도 항일운동의 조직적 지도부가 생겼다는 사실이다. 이미 5년 전의 6ㆍ10만세운동을 통해 이 장점은 여실히 발휘된 바 있었다. 1926년 6월 10일 순종(純宗)의 장례식에 맞춰 권오설(權五卨, 1899~1930), 김단야(金丹冶) 등의 사회주의자들이 노동자, 학생들과 연대해서 조직적인 대규모 시위를 전개한 것은 운동 지도부가 존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순종은 아버지처럼 장례식을 통해 민족에게 가장 큰 기여를 했다). 이 사건에 힘입어 그 이듬해 젊은 조선공산당원들과 원로급 민족주의자들은 처음으로 새로운 조직을 통해 상견례를 하게 되는데, 그렇게 탄생한 민족운동 통합 조직이 바로 신간회(新幹會)다(6ㆍ10만세운동으로 일본이 유화책으로 돌아선 덕분에 신간회는 합법 단체로 출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나 조선공산당처럼 동질적인 이념을 지닌 조직들에서도 늘 인맥들 간의 분열과 반목으로 애를 먹었는데, 신간회 같은 ‘대동단결형’ 조직이 멀쩡할 리는 만무하다. 특히 명망가 지향적인 우익 민족주의 계열이 지도부 구성을 거의 자파로 도배한 것에 대해 좌익 계열은 처음부터 불만이 많았다. 출범 후에도 본연의 활동을 하지 못하고 한동안 강령을 만드느니, 전국과 해외에 지회를 설립하느니 하면서 부산을 떨던 신간회는 결국 좌익의 지원으로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된 허헌(許憲, 1885~1951)이 우익 조병옥(趙炳玉, 1894~1960)의 탄핵을 받으면서 지도부가 분열되어 1931년 5월에 와해되고 만다. 일본이 만주 정복에 정신이 팔려 있던 중요한 시기에 대형 민족운동 조직이 스스로 붕괴되었다는 것은 사실상 국내 항일운동의 맥이 끊겼음을 뜻한다.
따라서 항일의 구심점은 자연히 북쪽의 만주로 옮겨가게 된다. 당시 남만주 일대에는 토지조사사업과 동척에 밀려 고향을 떠나온 조선인들로 이미 ‘또 하나의 조선’이 성립되어 있었다. 이를 배경으로 1920년대부터는 만주에서도 본격적인 항일투쟁이 시작되었는데, 일본의 치안력이 한반도만큼 강력하게 작용하지 못하는 지역이었기에 이곳의 투쟁은 일찌감치 명망가 중심의 정치운동에서 벗어나 무장투쟁의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항일투사의 사관학교에 해당하는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비롯해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의 무장 조직들이 모두 1919년에 결성되었으니, 여기서도 3ㆍ1운동의 파급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특히 북로군정서는 1920년 김좌진(金佐鎭, 1889~1930)의 지휘하에 만주의 청산리 전투에서 무려 열 배에 달하는 일본군 2개 사단 병력을 무찔러 이름을 떨친 바 있었다.
만주사변으로 일본의 야망이 드러나자 만주의 항일무장투쟁 조직들에게는 중요한 원군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조선과 같은 운명에 처한 중국이다. 아직 중국은 워낙 넓은 탓에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았지만, 일본의 대륙 침략이 일정에 오른 만큼 더 이상 힘의 열세를 탓하며 수수방관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 그래서 중국은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선의 항일 세력들과 통일전선을 구축하게 되는데, 항일무장투쟁의 분야에서는 조선이 선배였으니 중국에 한 수 가르친 셈이다.
▲ 황제가 더 있었더라면 3ㆍ1운동과 달리 6ㆍ10만세운동은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사회주의자와 학생들이 조직한 결과였으므로 한층 진일보한 투쟁이었다. 그러나 고종(高宗)의 장례식을 D - 데이로 삼았던 3ㆍ1운동처럼 이번 거사도 순종(純宗)의 장례식을 이용했으니, 두 황제는 죽음으로써 민족에게 기여했다고 할까? 사진은 순종의 장례식에 모인 군중이다. 일본으로서는 더 이상 황제가 없다는 데 안심했을 것이다.
3장 항전과 침묵과 암흑의 시기
홍군 속의 조선군
3ㆍ1운동이 임시정부와 조선공산당을 낳았듯이 중국의 5ㆍ4운동도 중국공산당이라는 새로운 항일운동의 지도부를 탄생시켰다. 다만 중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었고 지식인들이 사회주의의 본산인 소련과 접촉하기가 훨씬 용이했던 탓에 중국공산당은 한반도보다 5년 앞선 1920년에 소련의 지원을 받아서 성립되었다. 그러나 소련은 제국주의 열강의 하나였다가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탈바꿈했고, 중국은 대표적인 식민지ㆍ종속국으로서 반봉건(半封建) 사회였으니, 공산당이라는 이름이 같다고 성격까지 같을 수는 없다. 일단 소련의 권유에 따라 중국공산당은 우익의 국민당과 합작(1차 국공합작)을 이루고 반제국주의 항일투쟁을 전개했으나 곧 합작이 깨지면서 소련 측과도 멀어지게 된다. 그에 따라 초기 지도부를 구성했던 소련 유학파 지식인들이 물러나고 토착 공산주의자들이 당을 장악하게 되는데, 그 중심 인물이 바로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이다.
공산당과 국민당이 결별한 이유는 국민당의 지도자인 장제스(蔣介石, 1887~1975)가 어처구니없게도 항일보다 공산당을 탄압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전환했기 때문이다. 국공합작을 주도했던 쑨원이 죽자 장제스는 자신의 독재 권력을 구축하려고 일방적으로 합작을 깬 것이다【지독한 권력욕과 타고난 반공주의자라는 점에서 장제스와 똑 닮은 조선인이 있는데, 바로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이라는 자다. 그는 미국에서 빈둥거리면서도 임시정부의 대통령직을 요구했고, 어리석은 임시정부가 그 요구를 들어주었는데도 여전히 외교를 핑계로 미국에 머물렀다. 장제스와 마찬가지로 이승만도 해방 직후의 한반도에서 민족 지도자 김구(金九, 1876~1949)는 물론 미군정까지도 권하는 좌우 합작을 줄기차게 거부하고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하여 마침내 관철시켰다. 항일이라는 민족적 과제보다 자신의 권력을 추구했고 끝내 조국의 분단을 빚은 점에서 장제스와 이승만은 쌍둥이처럼 닮은꼴이다. 나중에 그들이 독재자가 되어 두 나라의 현대사를 얼룩지게 만든 것은 우연의 일치라기보다는 두 나라의 잘못된 역사가 낳은 필연적인 결과다】.
대적을 앞에 두고 내홍을 빚는 현상은 중화세계의 전매특허라고 해야 할까? 중국 정부의 분열은 당연히 일본에게 호기를 제공한다. 일본은 그 틈을 타서 야금야금 남쪽으로 내려오더니 만주에 이어 화북에도 괴뢰 정권을 수립했다. 마오쩌둥(毛澤東)으로서는 국민당과의 내전도 괴롭지만 어느새 중국 대륙 전체가 일본 제국주의의 타깃이 되었다는 데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는 1935년 8월 1일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민족통일전선을 수립하자는 유명한 8ㆍ1선언을 발표하는데, 이것이 국내외의 커다란 호응을 얻어 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진다. 만주의 조선계 항일무장투쟁 조직들이 중국공산당의 군대인 홍군(紅軍)에 속하게 된 계기는 바로 거기에 있다.
▲ 국적 없는 항일투쟁 나라를 잃은 마당에 새삼 국적을 따질 이유가 없다. 그래서 만주의 조선인 유격대들은 자연스럽게 중국인들과 한몸이 되어 항일투쟁에 나섰다. 사진은 동북항일연군 소속 어느 소부대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왕이면 8로군 소속 조선 유격대와 힘을 합쳐 ‘국적 있는 항일투쟁’을 벌였더라면 해방 후 국제적 발언권이 달라졌을 것이다.
물론 장제스는 여론에 밀려 어쩔 수 없이 따랐겠지만 마오쩌둥의 8ㆍ1선언은 일본의 야욕이 노골화되는 상황에서 대단히 효과적인 적시타였다. 특히 그동안 만주 일대에서 턱없이 부족한 화력과 보급품에 오로지 불굴의 투지만을 불살라가면서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던 조선의 독립군에게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소식이었다. 무엇보다 통일적인 지도부가 생겼으니 이제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이 아니라 일본군과 정식으로 맞붙어 볼 수도 있다는 게 가장 큰 보람이다. 그래서 선언이 발표된 바로 다음 달인 1935년 9월 만주 지역의 모든 항일 조직들은 한데 뭉쳐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을 이루었다. 모두 3로군으로 구성된 이 조직에서 조선 독립군은 주로 1로군에 편입되었는데, 그들 가운데는 최용건(崔庸健, 1900~76), 김책(金策, 1903~51), 김일성(金日成, 1912~94) 등 나중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즉 북한 정권을 수립하게 되는 주요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통일전선이 위력을 발휘하게 되는 상황은 과연 얼마 안 가서 닥쳐왔다. 1937년 6월 관동군 참모장인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1884~1948)는 “대소련 작전을 준비한다는 입장에서 볼 때 지금 중국을 공격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것은 한 달 후 또 다시 아무런 예고도 없이 시작된 중일전쟁의 선전포고에 해당하는 발언이었다. 당시 유럽에서도 독일과 이탈리아에 파시스트 정권이 들어서면서 새로운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으니, 제2차 세계대전은 이때 이미 시작된 셈이다【그런 점에서 1936년부터 시작된 에스파냐 내전과 아시아의 중일전쟁은 2차 대전의 서곡에 해당한다(에스파냐 내전에 관해서는 『종횡무진 서양사』, 「열매 2」 6장 참조), 1차 대전이 선진 제국주의에게 후발 제국주의가 도전한 전쟁이었다면, 2차 대전은 1차 대전에서 패배한 후발 제국주의가 파시즘이라는 ‘신무기’로 무장하고 선진 제국주의에게 다시 도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랬기에 1차 대전에서는 연합국 측에 가담했던 박쥐 일본도 이번에는 그 본색을 드러내고 동맹국 측으로 참전하게 된다】.
침략자 일본이 조선과 중국을 구분하지 않으니 당연히 홍군 속의 조선인들도 굳이 국적을 따질 필요가 없다. 그래서 중일전쟁을 맞아 중국공산당이 홍군을 8로군(八路軍, 화북 담당)과 신4군(新四軍, 강남 담당)으로 나누어 재편했을 때 동북항일연군에 참여하지 않은 만주의 조선 유격대들은 대부분 8로군에 속하게 된다. 주시경의 제자로서 한글학자의 길을 걷다가 항일투쟁에 뛰어든 김두봉(金枓奉, 1889~1958)을 비롯해서 최창익(崔昌益, 1896~1957), 무정(武亭, 1905~52, 본명은 김무정) 등 일찍부터 중국공산당과 연계를 맺고 있던 사람들이 당시 8로군으로 소속을 옮긴 조선 전사들이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로 인해 만주에서 활동하던 조선의 무장 조직들은 동북항일연군과 8로군으로 소속을 달리 하게 됐는데, 이 사실이 나중에 북한정권이 수립될 때 권력다툼의 씨앗이 될 줄은 누구도 몰랐으리라.
동북항일연군과 8로군에서 조선인 유격대의 활약은 눈부셨다. 특히 1937년 6월 동북항일연군 1로군 소속의 한 부대는 함경도 갑산의 보천보(普天保)를 습격해서 일본 경찰들을 살해하고 이곳을 잠시 동안 점령하는 쾌거를 이루었는데, 이 사건은 나중에 보천보 전투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지게 된다. 만주의 항일 유격대가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까지 진출한 것은 유례없는 일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규모나 성과에 비해 이 전투가 특별히 유명세를 탄 이유는 따로 있다. 그 부대의 지휘관이 바로 김일성이라는 스물 다섯 살의 젊은 조선인 청년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당시 그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조국이 곧 해방될 것이라는 일장연설을 하고 나서 만주로 돌아갔는데, 꿈같은 연설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슈퍼맨이라도 등장한 것으로 여겼음직하다. 곧이어 이 사건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지면을 타고 전국에 퍼졌으며, 특히 한반도 북부에서 ‘김일성 장군’이라는 이름이 마치 만주 항일 유격대의 대명사처럼 알려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또한 김일성도 대단치 않은 이 사건을 두고두고 우려먹었다).
그러나 중국의 국민당군과 홍군, 거기에다 조선 유격대까지 힘을 합친 거센 항전도 일본의 우수한 화력과 조직적인 공략을 완전히 막아내지는 못했다. 중국의 동해안을 따라 강남까지 남하한 일본군의 집요한 공격으로 중국 정부는 난징에서 우한으로, 다시 우한에서 충칭으로 옮겨가면서 해안을 빼앗기고 연신 내륙 쪽으로 밀려났다(이 과정에서 일본은 무려 20만의 중국인들을 살해하는 난징대학살을 저질렀다). 게다가 때마침 일본의 기세를 더욱 높여주는 사건이 유럽에서 터진다.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2차 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유라시아 대륙 동서 양끝의 파시즘이 서로 만나면서 바야흐로 세계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전란을 맞는다.
▲ 용공 보도? 『동아일보』가 호외로 다룬 보천보전투에 관한 기사다. 식민지 시대 전체를 통틀어 만주 유격대가 국경을 넘어온 경우는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러나 규모와 성과는 대단치 않았던 이 사건이 대서특필됨으로써 김일성이라는 이름이 한반도 전역에 알려졌으니, 이 보도는 해방 후 북한에 김일성 정권이 들어서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봐야겠다.
모두가 침묵한 때
히틀러의 도발을 예견이라도 한 걸까? 이미 1938년에 일본 군부는 국민 총동원령을 내렸는데, 아마 2차 대전에 연루되는 국가들 중에서는 가장 빠른 스타트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재빠르게 운신한 이면에는 사실 중대한 오판이 있었다. 중일전쟁을 시작할 때 일본은 속전속결로 중국을 정복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일본이 예상한 대로 중국군은 홍군과 조선 유격대까지 가세했어도 일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대륙을 먹어들어갈수록 중국 정부가 아니라 중국 민중 전체를 상대로 하는 양상으로 바뀌면서 전쟁은 아무래도 장기화될 전망이 커졌다. 게다가 이미 장악한 중국의 동해안도 워낙 넓은 탓에 일본은 점령지를 수비할 병력조차 모자랄 정도였다. 자칫하면 전투에서는 이겨도 전쟁에서는 질지도 모르는 상황, 일본 군부가 총동원령을 필요로 한 데는 그런 배경이 있었다. 그 덕분에 군부는 일본 내의 기업들은 물론이고 전 국민의 사유재산과 인력까지도 마음대로 동원하고, 국민들의 일상생활까지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 본토가 이럴진대 식민지인 한반도의 사정이 어떨지는 짐작이 간다.
만주사변이 끝난 뒤부터 일본은 한반도를 대륙 침략의 전진기지로 활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일본이 만주를 차지하고서도 5년 뒤에야 중일전쟁을 시작한 이유는 전쟁 수행을 위해 먼저 만주와 한반도를 병참기지화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륙 침략이 늦어진 데는 일본 내부의 사정도 있었다. 1932년에 일본에서는 또 다시 수상이 암살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군부 내에서는 치열한 권력다툼이 벌어졌다. 신흥 재벌과 결탁한 황도파(皇道派)와 전통재벌과 결탁한 통제파(統制派)가 경합한 결과 통제파가 승리하면서 군부는 비로소 대륙 침략을 결정할 수 있었다. 비록 군국주의의 힘이기는 하지만, 중국과 조선에서는 항일운동을 놓고 벌어진 분열조차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데 비해 일본은 그렇듯 번개같이 분열을 봉합했으니 승패는 뻔한 것이었다】. 한반도 북부에 군수공장을 속속 설립하고 광산 개발에 주력한 것이나, 남부에서 미곡 공출량을 크게 늘린 것은 그때부터다(그런 탓에 해방 직후 한반도는 북한의 공업과 남한의 농업으로 심각한 산업적 불균형을 보였다. 물론 분단이 없었더라면 그것은 불균형이 아니었겠지만). 그러나 차라리 경제적 착취라면 아무리 심하다 해도 견딜 수 있다. 한국민들에게 그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일본의 집요한 문화적 수탈, 이른바 ‘민족말살 정책’ 이었다.
▲ 40년대의 국민교육헌장 조선의 어린 학생들이 교사와 함께 황국신민서사를 외우고 있는 장면이다. 두 손을 단전에 모은 모습이 자못 엄숙하다. 이런 유치하고도 군국주의적인 장면이 식민지에서 해방된 지 30여 년이나 지나 박정희 유신정권의 국민교육헌장에서 되풀이된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1920년대 후반 한때 유화 분위기를 보였던 일본은 전쟁 일정이 가시화되면서 다시금 탄압의 고삐를 죄기 시작한다. 그 다급한 심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방법이 유사 이래 어느 억압자도 흉내내지 못할 정도로 교활하면서도 치졸하다는 게 문제다. 어떻게든 조선인들을 전쟁에 동원할 근거를 마련해야 했던 총독부는 이를 위해 우선 일본과 조선이 한몸이라는 일체감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내건 구호가 이른바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와 내선일체화(內鮮一體化)라는 것이다(‘皇國’과 ‘內’란 물론 일본을 가리키는 말이다), 내선일체라면 일본과 조선이 차별과 구별이 없는 공동체라는 뜻일 텐데, 어찌 보면 취지는 괜찮은 듯싶기도 하다. 그러나 그 공동체란 삶과 행복을 함께 하자는 게 아니라 다같이 황국의 신민으로서 공동의 의무, 즉 전쟁의 의무를 함께 나누자는 것이니 눈 가리고 아웅이 따로 없다.
어쨌거나 공식적으로 서로 다른 민족이 아니라면 굳이 말과 글을 따로 쓸 이유가 없어진다. 그래서 총독부는 1935년부터 한글 교육을 일체 금지하고,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부터는 아예 일상생활에서도 일본어만을 사용하라고 명령한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비롯하여 한글을 사용하는 신문과 잡지는 당연히 폐간되었다. 그보다 더 심한 조치는 이른바 창씨개명(創氏改名), 즉 고유의 성과 이름을 버리고 일본식 성명으로 바꾸라는 것이었다. 한글을 쓰지 말라는 건 참을 수 있어도 성씨를 바꾸라는 건 참을 수 없다. 조상 숭배의 오랜 전통과 유학 국가의 오랜 역사를 지녀 온 조선 사람들에게 성씨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존재의 근거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45년 전 단발령(斷髮令)이 시행됐을 때보다도 더 강력한 반발이 따라야 했겠으나, 식민지의 처지인 데다 전시였으므로 그 맹랑한 조치는 그런 대로 먹혀들었다.
그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교육과 취업에서 제한을 받은 것은 물론 각종 징용과 노역을 당해야 했으므로 어지간한 강골이 아니고서는 이름을 바꾸지 않고 버티기가 어려웠다【이런 강제성이 있었기에 1940년 8월의 마감 기한까지 대상의 약 80퍼센트가 창씨개명을 했다. 해방 직후 한때 창씨개명을 했는지의 여부로써 ‘친일파’의 지표를 삼으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만약 그렇다면 한국인의 대다수가 친일파의 딱지를 붙이게 되는 묘한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제2의 단발령’에 용감하게 맞선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단발령(斷髮令) 때처럼 자살로 항거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일부러 자기비하적 인 뜻의 이름을 지어 불복의 뜻을 나타내기도 했다】.
▲ 글과 말을 잊어라 이름을 바꾸게 하고 조선어를 쓰는 것마저 금지할 정도라면 일본이 직전 얼마나 말기적 증상을 보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사진은 학교에서 학부모에게 일본어를 교육하는 장면인데, 그밖에도 학생들을 시켜 집에서 부모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게 하기도 했다.
총독부의 치졸한 일체화 정책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한반도의 역사 전체를 식민사관으로 도배한 『조선사(朝鮮史)』 37권을 간행한 것은 그나마 ‘문화정책’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줄 수도 있겠지만, 동방요배(東方遙拜)라는 이름으로 매일 일본 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해 경배하도록 한다거나, 천황의 신민임을 맹세하는 내용의 ‘황국신민서사’라는 것을 외우도록 한 것은 정책이라기보다는 조잡의 극치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1968년 박정희는 독재정권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이른바 ‘국민교육헌장’이라는 걸 만들어 국민들에게 외우도록 강요했는데, 필경 황국신민서사에서 커닝한 구상일 것이다). 그에 비해서는 차라리 초기의 토지조사사업이나 동척의 활동이 오히려 식민지 지배에 어울리는 정책이 아니었을까?
사실 당시 일본은 정책의 멋을 부릴 처지가 아니었다. 곧이어 1941년 진주만 기습으로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당대의 세계 최강 미국마저 끌어들인 판에 이제는 더 이상 교활한 방식으로 식민지 수탈을 포장할 여유조차 없다. 그래서 이전까지 ‘모집’이라는 형식을 취했던 인력 충원도 이때부터는 노골적인 강제 징발로 대체된다. 싸울 수 있는 자는 전장으로(징병), 일할 수 있는 자는 광산으로(징용), 심지어 젊은 여성들마저 위안부로 만들어 전장과 광산으로 보내면서 일본은 한반도를 전쟁 수행을 위한 전면적 수탈 체제로 편제했다. 이제 한반도는 식민지의 어둠을 넘어 캄캄한 암흑 세상이 되었다.
그런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바로 그때 항일운동의 맥이 뚝끊겨 버렸다는 사실이다. 조선공산당이 유명무실화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1930년대에 그토록 치열했던 항일무장투쟁도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갑자기 사그러든다. 가장 어둠이 짙을 때, 나라와 민족이 가장 깊은 도탄에 빠져 있을 때, 항일투쟁이 가장 긴요하고도 절실할 때 항전이 중단된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멀리 유럽에서는 나치 독일이 강점한 프랑스, 덴마크, 네덜란드, 유고, 체코에서 레지스탕스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을 때 정작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인 한반도에서는 짙은 어둠에 깊은 침묵으로 대응한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물론 완전한 침묵은 아니다. 상하이의 임시정부에서는 1940년에 광복군(光復軍)을 조직해서 처음으로 무력 항전의 기치를 내걸었다. 하지만 임시정부가 성립한 지 20년 뒤에야 비로소 창설된 군대가 제 기능을 하기는 어렵다. 사령관과 참모를 정하고 지휘 체계와 편성을 갖추느라 부산을 떨다가 정작 필요한 병력은 군대 창설 후 1년이 지나서야 겨우 300명 정도 모집하는 데 그쳤으니 광복군은 그저 임시정부도 군대를 거느렸다는 기록만 남겼을 뿐이다. 당시 유일하게 항일투쟁을 지속한 사람들은 중국 홍군에 속한 조선 유격대원들뿐이었으나 이들은 일단 중국공산당의 일원으로 항전한 것이었으니 논외다【1942년 김두봉은 조선의용군이라는 군대를 조직해서 무력 투쟁을 계속했다(공교롭게도 그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사람이 비슷한 군대를 조직했는데, 그것은 김원봉이 창설한 조선의용대다. 하지만 이 군대는 주로 정보전과 테러에 주력했으니 전투를 위주로 한 조선의용군과는 다를뿐더러 나중에는 광복군에 흡수되었다). 당시 항일투쟁에서 국적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겠지만, 종전 후 정치적 구도에 미치는 영향으로 볼 때 홍군의 해방구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고 홍군 지휘부의 지휘를 받았던 조선의용군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나머지는 모두 뭘 했을까?
▲ 징병 그리고 징용 전쟁이 본격화되자 일제는 전 국민 총동원령을 내리고 한반도를 군사기지화했다. 왼쪽은 아들을 학병으로 보내는 어머니의 모습이고, 오른쪽은 징용으로 끌려간 조선인 노동자들이 남긴 피 맺힌 절규다. 학병은 형식적으로는 자원이었으나 총독부는 각 학교를 통해 사실상 강제동원령을 내렸다.
조선공산당의 리더인 박헌영(朴憲永, 1900~55)은 1939년에 만기출소한 뒤 기와공장에 인부로 위장취업해서 동료 공산주의자들과 비밀리에 안부만 주고받으며 지냈다. 그보다도 더 편하게 험한 시절을 보낸 사람은 김일성이다. 처음부터 중국공산당과 거리를 두었던 그는 1940년 동북항일연군이 해체되자 이듬해 동료 대원들과 함께 소련으로 가서 소련군 장교가 되어 해방될 때까지 간부 훈련을 받으며 지냈다. 정작 조국이 가장 어려운 시기를 맞았을 때 그는 투쟁을 포기하고 차후 권력을 장악하는 데 도움이 될 ‘이력서 만들기’에 주력했던 것이다.
모두가 일어나서 가장 가열차게 항일투쟁을 벌여야 할 때 오히려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숨죽여 버렸다. 해방 직후 연합국 측이 한반도를 ‘준전범국’으로 취급한 이유는 일본에 의해 인력이 징병되고 징용당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일본에 협력한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임시정부, 항일 유격대, 조선공산당 등 항일투쟁의 주력이 되어야 할 세력들이 모조리 침묵했기 때문이다. 또한 해방 직후 연합국 측이 한반도의 어느 세력에게도 후한 점수를 주지 않은 이유는 그 가장 어려운 시기에 어느 세력도 앞장서서 항일투쟁에 투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투자한 만큼 이윤을 배분받는 것은 기업계의 원칙만이 아니다. 한반도 토착 세력이 항일에 기여한 게 없으니 해방 후 승전국들이 배분하는 전리품을 그들이 할당받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4장 해방 그리고 분단
남의 손으로 맞은 해방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리라고 믿은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한반도가 식민지에서 해방되리라고 믿은 사람도 많지는 않았다. 일본이 세계 최강인 미국을 물리치기 어렵다는 것은 객관적인 전력상 명백했으나 40년이나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해방이 과연 가능하겠냐는 회의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잘 나가던 일본이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하면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어도, 또 1945년 초에 미군이 유황도와 오키나와까지 진출해서 일본 열도의 직접 공략을 눈앞에 두었어도, 사람들은 일본이 무너진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비록 막바지에 달한 일본 제국주의의 시퍼런 서슬에 눌려 변변한 투쟁을 전개하지는 못했지만, 곧이어 일본의 패전과 한반도의 해방이 다가올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해방이 오기 1년 전인 1944년 8월 이들은 건국동맹(建國同盟)이라는 지하조직을 만들어 놓고 대중적 지지 기반을 넓혀 가다가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전하고 해방이 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지상으로 올라와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결성했다. 그 그룹의 리더인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은 일찍이 임시정부의 수립에도 관여했고, 공산당에도 가입했는가 하면, 외교 무대에서 국제적 활동도 벌였으니, 말하자면 당대의 거물들인 김구와 박헌영과 이승만을 한데 합친 듯한 인물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현대사에서 여운형이 그 세 사람보다 지명도가 낮다는 것은 그 자체로 역사 왜곡이다).
‘준비된 후보’답게 건준의 활동은 신속하다. 해방 후 불과 보름 만에 전국적으로 145개 소에 달하는 지부를 설치하는가 하면, 선언서와 강령을 발표하고 치안대 조직까지 갖추었으니 이만하면 ‘건국준비’라는 이름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활동이다. 사실 당시 건준은 수권 세력으로서의 위상이 충분했으니 그대로 새 독립국의 정부로 이어졌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천항으로 들어와서 반도 남쪽의 새 지배자가 된 미국의 생각은 다르다.
미국이 한반도를 바라보는 관점은 단순하다. 조선의 역사나 일본의 식민지 수탈 과정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시각에서 볼 때 한반도는 일본과 같은 전범국일 따름이다. 미군이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의 자격으로 온 것은 그 때문이며, 즉각 군정청(軍政廳)을 차리고 식민지 지배 형식을 취한 것도 그 때문이다【물론 1943년의 카이로 선언과 1945년의 포츠담 선언에서는 한반도가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동원되었을 뿐이며, 따라서 종전 후 독립국가로 만들어야 한다는 조항이 삽입되어 있었다. 이것이 임시 정부의 유일한 외교적 성과인데, 여기에는 아마 두 회담에 모두 참여한 장제스가 대변인의 역할을 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 전면적으로 항전한 중국과는 아무래도 위상이 달랐기에 한반도는 종전이 되고서도 선언에 규정된 것과 같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그랬기에 중국에 파견된 미군은 철저히 자문의 역할에 국한 되었으나 한반도에서는 지배자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한반도는 진짜 전범국인 일본에 비해 중요도가 크게 떨어졌으므로, 점령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연합군 사령부가 설치된 도쿄에만 신경을 쓸 뿐, 남한의 일은 오키나와에 있던 24군단장 하지에게 일임해 버린다. 한반도에 관해 철저히 무지한 상태에서 서울에 온 하지는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에게서 항복 문서를 받는 자리에서 식민지 시대의 관리들을 모두 그대로 유임시킨다는 약속을 하는데, 안타깝게도 그것으로 한반도의 미래는 사실상 결정되어 버렸다.
이런 미군의 의도를 모르는 채(혹은 무시한 채) 건국 과정을 지휘하던 건준은 1945년 9월 초에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열어 대표자들을 뽑고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수립을 선언한다. 그러나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공화국이 일방적인 선언만으로 세워질 수 있다면 순진한 생각이다. 일단 건준은 그것으로 모든 활동을 마치고 발전적으로 해산했지만, 문제는 한반도의 오너인 미군이 모든 변화를 곧 ‘말썽’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는 사실이다. 인공이 내각 인선을 마친 9월 11일 같은 날에 미 군정청이 세워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공과는 별도로 미 군정청은 미군 장교들을 각 부처의 장관으로 임명해서 또 하나의 ‘내각’을 급조했으며, 미 군정청만이 남한의 유일한 ‘정부’라고 선언했다. 아니나 다를까, 군정청은 곧 인공의 승인을 공식적으로 거부하는 성명을 포고했다. 수권 조직이 미군의 말 한마디로 졸지에 불법 조직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와 동시에 자체적인 정부를 구성하려던 건준의 꿈도 허무하게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여운형으로서는 남의 손으로 맞은 해방의 한계를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한반도 북부에서는 그와 다른 해프닝이 벌어진다. 일단 여기에도 소련군이 진주했지만 사정은 남한과 크게 다르다. 우선 소련은 일본이 항복하기 불과 일주일 전에 극동 전선에 참전했으니 미국처럼 주인 행세를 하기는 어렵다【소련이 반도 북부에 들어온 것은 우리 민족으로서는 큰 불행의 시작이었다. 어차피 한반도는 중국처럼 승전국의 지위를 보장받지 못했으므로 외국군이 진주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는데, 공교롭게도 남북한에 서로 다른 외국군이 들어옴으로써 장차 민족 분단의 씨앗이 배태된 것이다(따라서 한반도는 한국전쟁으로 분단된 게 아니라 해방과 동시에 분단되었다고 봐야 한다). 소련의 의도는 뻔하다. 이미 1943년부터 연합국의 승리는 충분히 예상되고 있었으니까 소련은 전후에 재편될 세계 질서에서 미국과 양강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극동 전선에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더구나 일본의 패전 이후 중국이 미국의 고문단을 받아들인 것에 소련은 더욱 자극을 받았음직하다(당시 중국은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소련이 발붙이기 어려웠다)】.
그래서 북한에 온 소련군은 남한의 미군과는 정반대로 점령군이 아니라 해방군의 제스처를 취한다. 군정청을 설치하지도 않았고, 첫 포고문에서도 ‘조선은 해방됐고 조선의 미래는 조선인의 손에 달려 있다’고 발표한 소련의 태도는 일단 식민지 해방을 인정하면서 한국민에게 자유와 자율을 부여하려는 듯한 자세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믿는 도끼는 따로 있었다. 소련군을 따라 들어온 김일성 일파가 그것이다.
8년 전 보천보 전투에서 얻은 명성은 33세의 김일성을 항일투쟁의 대표자로 격상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오죽하면 나중에 그의 일파를 갑산파라는 이름으로 불렀을까? 미 군정청과 갈등을 빚은 남한의 수권 세력과 달리 소련군의 지원을 등에 업은 김일성은 무주공산의 북한을 손쉽게 장악하고 권좌에 오른다. 한국민의 자체 정권을 세우지 못한 남한에 비하면 그래도 나은 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가장 엄혹한 시기에 투쟁을 방기하고 소련으로 도망쳤던 그가 권력을 차지했다는 것은 이후 북한 정권의 성격을 짐작하게 해주는 단서가 된다.
분열로 날린 기회
미 군정청의 의도는 어떻든 간에 한국민의 손에 남한을 맡겨두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남한을 일본에 부역한 준전범국으로 보던 태도는 곧 사라졌으나 그런 미군의 기본 입장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아마 미군은 남한 정치 세력들의 수권 능력도 의문시했겠지만, 여기에는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함으로써 예상 외로 남한의 전략적 가치가 중요해진 것도 한몫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미 군정청은 인공을 거부한 데 이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김구와 김규식(金奎植, 1881~1950) 등 임시정부의 요인들은 오랜 망명과 항일의 경력에도 불구하고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다.
여운형의 인공과 김구의 임시정부는 둘 다 결격사유는 좀 있지만 어쨌든 식민지에서 독립한 한반도의 정권 담당자로서 큰 하자는 없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두 세력 중 어느 측이 새 나라의 정부를 구성했다 해도 이후의 실제 역사보다 나았을 것은 틀림없다. 게다가 두 세력은 서로 적대적이지 않았으므로 얼마든지 협상을 통해 통합을 이룰 수도 있었고 그게 안 되더라도 최소한 사이좋게 정치적 지분을 나눌 수는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미 군정청이 둘 다 퇴짜를 놓으면서 사정은 달라져 버렸다. 이제는 누구나 대권후보를 노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인공이나 임시정부와 관련이 없는 인물일수록 유리한 상황이 된 것이다(미 군정청으로서는 미국의 이해를 대변해 줄 수 있는 꼭두각시를 바랐을 테니 기존의 권력 기반 같은 것은 없을수록 좋다). 그런 공백을 이용해서 급부상한 자가 바로 ‘대통령병 환자’인 이승만이다.
사실 이승만은 1919년 임시정부가 출범할 때 이미 대통령으로 임명된 바 있었다. 원래 임시정부는 그에게 국무총리 직함을 주었으나 이승만은 굳이 대통령직을 달라고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당시 임시정부는 얼굴마담도 없는 데다 워싱턴에서 얼쩡거리고 있는 이승만 외에는 딱히 국제적으로 조선의 사정을 알릴 루트가 없었던 탓에 그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름뿐인 망명정부의 이름뿐인 직함에까지 욕심을 냈으니 그의 대통령병은 이미 그때부터 심각했던 셈이다(의원내각제를 취했던 임시 정부에서는 원래 대통령이라는 직함조차 없었으므로 순전히 이승만을 위해 급조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해외 동포들의 성금을 횡령하고 외교업무에서 전횡을 일삼아 1925년에 임시정부의 탄핵을 받아 해임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이런 얼룩진 경력에도 불구하고 해방 직후 국내 각 정치 세력마다 이승만을 영입하려 애쓴 이유는 바로 미 군정청이 인공과 임시정부를 모두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존의 모든 활동과 기반을 무시한다면, 영어를 알고 워싱턴 물을 먹어본 이승만이 단연 유리할 수밖에 없다【당시 영어 한마디 할 줄 안다는 것은 정말이지 큰 재산이나 다름없었다. 미 군정청의 ‘각료’들이 한국어를 배울 리는 없으므로 군정청과 대화할 일이 있다면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그랬으니 이승만은 영어를 할 줄 안다는 것만으로도 기본 점수는 따고 들어갔던 셈이다. 한국에서 기업 활동을 하던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막대한 재산(적산敵産)도 영어 한마디만 잘 하면 군정청에서 헐값으로 불하받을 수 있었던 게 당시의 세태였다. 지금의 영어 열풍은 그런 사태를 대비하는 걸까?】.
주가가 잔뜩 오른 이승만은 오만하게도 모든 정치조직과 사회 단체들에게 하나로 힘을 합쳐 자신을 밀어달라고 요구한다. 이렇게 해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라는 해괴한 연합 단체가 출범했는데, 이승만은 그 총재의 자격으로 군정청과 접촉하면서 자연스럽게 단독 대권후보로 떠올랐다(앞서 하지의 발언과 더불어 이승만이 무원칙한 대통합을 추구한 것은 해방 이후 숨죽이고 있었던 친일 전력자들이 부활하는 계기가 되었다).
▲ 메이데이 집회 1946년 서울운동장에서 있었던 좌익 계열의 집회 장면이다. 식민지 시대 지식인과 민중의 대다수는 사회주의 이념에 찬동하고 있었다. 이승만이 전국민적 지지를 받지 못한 이유는 거기에 있다. 또한 그런 분위기를 역전시키기 위해 좌익 갈등을 부추겨 자신의 집권을 이룬 이승만을 민족 반역자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아직 취약한 대국민적 인기를 높이는 일인데, 때마침 그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온다. 1945년 12월 미국, 영국, 소련의 외무장관들이 모인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를 향후 5년간 신탁통치하자는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지명도를 높이기 위해서라면 없던 구실도 만들어야 할 판에 이승만에게는 더없이 좋은 건수다. 식민지에서 갓 해방된 한국민들에게 신탁통치란 그 지긋지긋한 식민지 지배의 연장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신탁통치가 시행된다면 이승만이 바라고 바라던 대통령의 꿈은 무기한으로 미뤄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국민적 여망과 개인적 야망을 한데 모아 이승만은 전국적인 반탁 운동을 계획한다. 여기에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의 명망가들이 가세하면서 이승만의 반탁 운동은 더욱 힘을 얻는다.
여기서 따져볼 것은 과연 반탁이 올바른 노선이었느냐는 점이다. 물론 완전한 독립을 바라는 대다수 사람들의 충심을 의심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독립이라는 게 말처럼 쉬운 것이었을까? 유사 이래 한번도 공화정의 경험이 없는 역사에서 서구적 공화정을 한국민 자체의 힘만으로 이룰 수 있을까? 더구나 남의 손으로 해방을 맞은 처지에 한국민들은 그런 화려한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반탁 운동에 동조한 많은 사람들은 신탁통치를 식민지 지배로 단순하게 등식화했지만, 3상회의의 결정에는 신탁통치의 시한이 못박혀 있었고 그 뒤에는 어차피 정부 수립이 예정되어 있었으므로 신탁통치는 결코 식민지 지배와 같은 게 아니었다. 조금만 냉철한 시선을 가졌더라도, 신탁통치 과정을 거치고 나서 정식으로 정부를 수립하는 편이 여러 가지로 미숙한 신생국으로서는 훨씬 순탄한 정치 일정을 걸을 수 있으리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실제로 정부가 수립되는 1948년까지 남한은 미 군정청의 지배를 받았으므로 5년의 신탁통치란 결코 긴 기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에 시달린 한국민들은 신탁통치의 참 의미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반탁 운동을 주도한 이승만은 사람들에게 그 의미를 이해시키려 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임시정부의 명망가들은 이승만의 손에 놀아난 셈이다.
처음에 반탁 운동에 가담했던 좌익은 뒤늦게 사태를 알아차리고 신탁통치 찬성쪽으로 돌아섰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한국민들의 반발이 거센 것에 당황한 UN이 결국 신탁통치안을 거둬들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오히려 그들은 민심을 잃은 데다가 이념적으로 어울릴 수 없는 미 군정청의 미움까지 받아 박헌영, 이승엽(李承燁, 1905~53) 등 지도급 인물들이 월북하면서 와해되어 버린다. 지도부로부터 버림받은 남한의 좌익 세력은 결국 한국전쟁이 터진 뒤 산 속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될 수밖에 없었다.
▲ 정부 없는 독립 나라를 되찾았으나 새 지배자로 들어선 미 군정은 임시정부를 망명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임시정부의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입국해야 했다. 사진은 그들이 귀국을 앞두고 이름과 구호를 적은 일종의 연명서다.
그러나 북한으로 건너간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인물들의 팔자도 편한 것은 못 되었다. 말할 것도 없이 북한에서는 이미 김일성이 실력자의 지위를 굳히고 있었기 때문이다【원래 김일성은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었을 때 북조선 분국을 맡은 책임자였다.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한 세력은 만주의 유격대였지만 공산당 조직의 정통은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있었으므로 북조선은 ‘분국’의 위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실세인 김일성이 마냥 조선공산당의 지휘를 받으려 할 리는 만무하다. 게다가 남한의 공산당은 미 군정청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소수 세력에 불과하지 않은가? 결국 1946년 4월 김일성은 북조선 분국을 북조선노동당으로 바꾸고 독립하는데, 이때부터 원래의 조선공산당은 남조선노동당으로 불리게 된다. 그랬으니 지도부만 달랑 월북한 박헌영 일파를 김일성이 곱게 볼 리가 없다】.
하지만 김일성은 그들을 즉각 내치지는 못한다. 비록 김일성이 가장 선두에 선 대권후보이긴 했지만 아직 라이벌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남로당 인물들만 물리친다고 해서 저절로 챔피언이 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김일성은 남한의 이승만처럼 일단 자신을 구심점으로 해서 북한 내의 여러 세력을 통합하는 데 주력한다.
당시 김일성이 권좌에 오르는 데 걸림돌이 될 만한 세력은 크게 봐서 세 가지, 우익 하나와 좌익 둘이었다. 우익의 핵심 인물은 조만식(曺晩植, 1882~1950)인데, 그는 비록 북한 민중의 폭넓은 존경을 받는 민족주의자였으나 정치적 역량이 모자라는 데다 사회주의 세상이 된 북한의 색깔에 어울리지 않으므로 어차피 놔둬도 오래 가지 못할 게 뻔하다. 좌익의 라이벌은 남로당 이외에 하나가 더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중국공산당에서 활약했던 연안파(延安派)다. 조선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대선배에 해당하는 김두봉은 그 이름 석 자만으로도 빛나는 인물이었고, 특히 무정은 8로군의 군단장까지 맡은 화려한 이력에다 유명한 대장정(大長征)까지 참여한 바 있는 항일 전사로서 중국공산당에도 그 명성이 자자했다. 그런 형편이었으니 김일성으로서는 사실 그들과 어깨를 견줄 처지가 아니었다.
이런 구도였으니 만약 소련이 갑산파를 밀지 않았더라면 김일성은 도저히 집권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항일 경력에서 김두봉과 무정에게 뒤졌고, 공산주의 이론의 수준에서 박헌영에 못 미쳤으며, 연배와 지명도에서는 조만식에 비해 모자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한과 마찬가지로 당시 북한도 역시 최대 주주는 역시 소련이었다. 남한에 비해 북한 정권의 도전자들은 항일투쟁을 주도한 세력이었으므로 어느 정도의 정통성은 인정되었으나,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을 이루지 못했다는 핸디캡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결국 가장 어려운 시기에 독자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지 못한 한계는 남한에서나, 북한에서나 한국민들이 주체적으로 정치 행정을 전개하는 데 끝끝내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다.
▲ 남북한의 닮은꼴 위쪽은 1945년 10월 20일 이승만이 연합군 환영 연설을 하는 모습이고, 아래쪽은 같은 해 같은 달 14일에 김일성이 연설하는 장면이다. 이들의 뒤에는 미군과 소련군이 배석하고 있다. 권좌에 오르지 말았어야 할 자들이 남북한의 권력을 틀어줘으로써 분단이 사실상 확정되었다.
두 개의 정부, 분단의 확정
더 나은 후보들이 즐비했음에도 불구하고 하필이면 결격사유가 가장 크고 가장 권력욕에 찌든 이승만과 김일성이 각각 남한과 북한의 권력을 장악했다는 것은 한반도 전체로 볼 때 크나큰 불운이 아닐 수 없다. 그들보다 조금만 더 역사 의식을 갖추었거나, 조금만 더 권력욕이 덜한 인물들이 집권했다면 한반도의 분단은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승만과 김일성이 대권후보로 자리잡으면서부터 즉각 분단화 작업이 시작된다. 하기야, 혹시라도 한반도가 통일된다면 그들의 권력은 보장받을 수 없을 테니 그들로서는 필사적으로 분단을 바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때마침 민족적인 과제로 부상한 남북협상을 그들이 내심으로 환영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해방 이후 남한과 북한에 서로 다른 주둔군이 투입되고 서로 다른 정치 세력이 부상하자 오히려 이를 먼저 걱정한 것은 UN이다. 물론 UN이 일개 약소 민족의 분단에 신경을 쓸 리는 없었으니, 그것은 단지 전후 세계 질서의 두 축이 될 미국과 소련의 두 강대국이 장차 한반도를 무대로 삼아 충돌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 어느 측도 한반도를 포기할 의사는 전혀 없었으므로 UN의 우려는 정확했으나 쓸데없는 것이기도 했다. 어쨌든 사태를 방치할 수 없었던 UN은 1948년 1월 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해서 한반도에 파견한다. 이들의 목적은 갈라설 조짐을 보이는 남한과 북한에서 통일선거를 실시하여 분단을 막으려는 것이었으나, 미국이 주도하는 UN을 소련과 북한이 환영할 리 없다. 결국 그들이 북한으로부터 입국 자체를 거부당함으로써 UN에 의한 분단 극복은 일단 실패로 돌아간다. 이렇게 북한이 먼저 통일에 대한 반대 의사를 밝혔다면 그 다음은 남한이다.
김일성의 속내도 다를 바 없긴 하지만 이승만은 그보다 더 집요하게 통일을 반대한다. 그도 그럴 것이 각 정파와 단체들이 저마다 따로 놀던 상황을 이제 간신히 다잡아놓았는데 통일이 된다면 그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말 터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정식으로 집권할 기회도 자칫 사라질지 모른다는 점이다. 그런 참에 북한이 UN의 요구를 거부한 것은 이승만에게 하늘이 준 절호의 찬스가 된다. 그래서 이승만은 그것을 빌미삼아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구성하자고 부르짖는다. 대놓고 말하지는 못해도 아마 김일성은 이승만이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것에 마음 속으로 무척 반가워했음 직하다.
하지만 김구와 김규식의 마음은 착잡하고 초조하다【그들과 답답한 심정을 함께 나눌 여운형은 1947년에 암살되었다. 남한 내에서 좌익과 우익의 갈등이 심화될 조짐을 보이자 그는 1946년 초부터 김규식, 허헌 등과 함께 좌우 합작을 도모했으며, 여기서 성과를 얻어 미 군정청의 지원 약속을 받아내기도 했다. 이것이 제대로 되었더라면 아마 남북 분단도 극복될 수 있었을 테지만, 불행히도 여운형은 평양에까지 가서 김일성을 만났으나 협상의 진전을 보지 못한다(이때 이미 김일성은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합작이 아니면 동의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품고 있었다). 이후 그는 온건 좌파로 세력을 재편하고 계속 좌우 합작을 추진하다가 한지근이라는 자에게 암살당했는데, 범인은 이승만 계열의 똘마니였을 게 거의 확실하다. 미 군정청까지 동의한 좌우 합작을 이승만과 김일성이 모두 거부함으로써 비극적인 죽음까지 맞았으니 여운형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다(원래 될성부른 떡잎은 늘 반대파에 의해 제거되는 게 우리 역사였으니 그의 죽음도 이제 낯설지 않다)】.
다급한 마음에 그들은 북한의 김일성에게 남북 지도자 회담을 열자고 제안하는 서신을 보내지만 답장을 받을 가능성은 제로다. 결국 1948년 2월 UN 소총회에서는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추진한다는 결정이 표결로 통과되면서 남북 분단이 사실상 확정되었다. 북한이 제스처를 취하는 것은 그다음이다. 그 다음 달에 북한은 방송과 서신을 통해 남한의 정당, 사회단체들과 연석회의를 갖자는 제안을 해온 것이다. 하지만 회의 개최 장소를 평양으로 일방적으로 정한 데다 초대장은 김구와 김규식 등 단독 선거에 반대하는 정파에게만 보내왔으니 속셈은 뻔하다. 그래도 4월에 열린 회의에는 김구, 김규식, 조소앙(趙素昻, 1887~1958) 등 남한 지도자들이 참가했으나 정작으로 분단 극복에 관한 사항은 아무것도 논의되지 못했다(논의되었더라도 남한의 실세가 빠진 상태에서는 무의미했겠지만).
결국 남북협상은 오히려 이승만과 김일성에게 집권의 기회만을 더욱 강화시켜주었을 뿐이다. 이승만은 이미 단독 선거 방침을 확보했으니 남북협상파를 탄압할 구실을 얻었고, 김일성은 분단 극복을 위해 노력할 만큼 했다는 명분을 얻었다(이후에도 계속 통일을 주장하던 김구는 1949년 육군 장교인 안두희에 의해 암살되는데, 이것 역시 이승만 일파의 공작임이 분명하다).
▲ 합작의 좌절 비록 김일성이 불순한 의도를 품고 깔아놓은 멍석이라지만 어떻게든 분단을 막아야 한다고 여겼던 김구는 남북협상회의에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은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38선을 넘는 김구 일행이다. 그러나 칠십 줄에 들어선 원로 정객의 소망과는 달리 합작은 좌절되었고, 더욱이 이듬해에 김구는 암살되고 말았다.
이제 거칠 게 아무것도 없어진 이승만과 김일성은 집권을 향한 탄탄대로에 들어선다. 이승만은 곧바로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실시해서 제헌국회를 구성했으며, 7월 17일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헌법을 발표했고, 8월 15일 마침내 꿈에 그리던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고 더 꿈에 그리던 대통령이 되었다【이승만으로서는 임시정부 대통령에 이어 두 번째로 대통령이 된 셈인데, 아마 임시정부 시절은 그로서도 잊고 싶은 기억이었던 모양이다. 지금의 헌법 전문(前文)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내용이 명문화되어 있지만, 당시에 채택된 제1공화국의 헌법 전문에는 임시정부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 전문의 내용을 보면, ‘기미 3ㆍ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라고 되어 있는데, 3ㆍ1운동과 대한민국 건립이 그냥 직결되고 임시정부는 살짝 빠져 있다. 하긴, 임시정부와의 악연을 생각하면, 아무리 ‘대통령병’이 심각했던 이승만도 임시정부의 대통령 기억만은 되살리고 싶지 않았을 게다】.
김일성의 작업은 몇 개월의 시차와 명칭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 이승만의 작업과 전혀 다를 바 없다. 행여 남한에 뒤질세라 그는 8월 25일 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남한의 5ㆍ10총선거)를 실시하고, 9월 2일 최고인민회의(남한의 제헌국회)를 구성했으며, 9월 9일 드디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그 수상(남한의 대통령)이 되어 꿈을 이룬다. 남한과 북한의 지루하고 유치한 체제 경쟁은 이때부터 시작된 셈이다(두 체제는 곧이어 토지개혁을 놓고 경쟁을 벌이다 급기야 한반도 역사상 최대 비극인 한국전쟁을 일으키면서 경쟁을 전쟁으로 전화시킨다).
다만 일찌감치 정적을 모두 제거한 이승만에 비해 김일성은 그럴 만한 계기가 없었던 탓에 북한에서는 독재 정권의 수립이 다소 늦어지게 된다. 1950년에 도발한 한국전쟁이 실패로 돌아가자 김일성은 그 책임을 구실 삼아 박헌영과 이승엽 등 남로당 세력을 ‘미국의 간첩’이라는 혐의를 씌워 처형했고, 전후에 김두봉을 비롯한 연안파 세력이 자신의 독재권력에 반대하자 가차없이 숙청해 버렸던 것이다(가장 강력한 정적이었던 무정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에 명령 불이행죄로 숙청되었다).
한반도 역사상 1945년 해방 직후의 상황은 그 어느 시기보다 중요한 때였다. 비록 남의 손으로 맞은 해방이라는 한계는 있었지만, 나름대로 주체적 노력을 통해 극복할 수 없는 한계는 아니었다. 실제로 당시 한반도를 장악한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 국내 정치에 관해 처음부터 일관적인 방침이라 할 만한 게 없었으므로 국내의 정치 세력들이 현명하게 처신했더라면 분단으로 향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었다. 그런 점에서 당시의 민족분단을 순전히 강대국 논리에 의한 강제적인 결과로만 보는 입장은 잘못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최소한 남한의 이승만과 북한의 김일성이 집권하는 것을 막을 수만 있었다면 분단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역사의 전개 과정을 단순히 인물로 치환할 수는 없겠지만, 나라와 민족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는 역시 리더가 중요하게 마련이다. 남한과 북한은 아무런 정통성도 없는, 게다가 자질에서도 문제가 많은 자들을 리더로 선택함으로써 결국 스스로 파멸을 부른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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