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야망
1차 대전에서 일본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했다는 것은 사실 커다란 역설이다. 비록 박쥐처럼 이중적인 존재이기는 하지만 일본은 ‘체질상’ 동맹국에 가까웠기 때문이다(그런 점은 원래 독일에 붙으려 했다가 달마치야 해안지대를 주겠다는 연합국 측의 막판 제의에 마음을 돌린 이탈리아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같은 색이었던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결국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파트너를 이루게 된다).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연합국의 주축은 시민혁명과 의회민주주의의 역사를 거친 ‘정상적인’ 제국주의 국가들인 데 반해 일본은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처럼 시민사회의 토대가 취약하고 의회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국가 주도형 후발 제국주의 국가였다. 게다가 일본은 군국주의적 색채마저 농후한 나라였으니, 종전 후 평화를 바라는 국제사회의 희망과는 반대로 언제든 태풍의 핵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충분했다.
사실 1차 대전 초기부터 일본은 그런 본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산둥을 점령하고 중국에서 독일 세력을 몰아낸 뒤에도 일본은 군대를 철수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증원했다. 이러한 무력을 바탕으로 유럽 전선에서 아직 포연이 한창이던 1915년에 일본은 중국의 지배자인 위안스카이를 위협해서 독일의 이권을 대신 차지하고 남만주와 몽골 및 중국 연안 일대까지 독점 조차하기로 하는 내용의 조약을 관철시켰다. 전쟁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것은 일본의 그런 야망을 연합국이 사후 승인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일본은 모든 것을 파멸시킨 세계대전을 계기로 오히려 세계적인 경제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인류 최초의 세계대전은 패전국들은 물론이고 전승국들에게도 막대한 피해를 주었으므로 연합국 중에서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을 받지 않은 나라는 일본과 미국밖에 없었다. 전쟁 중에 일본의 산업과 무역은 큰 성장을 이루어 종전 후 일본은 자본 수입국에서 자본 수출국으로 면모를 일신했다. 또 하나의 커다란 소득은 국제적 지위가 크게 상승한 것이었다. 종전 직후 미국 윌슨 대통령의 주창으로 결성된 국제연맹에 일본은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와 함께 당당히 이사국으로 참여하여 세계 5대 강국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이 연합국 측의 일원으로 참여한 처음이자 마지막 행사였다】.
이제 일본의 앞에는 두 가지 길이 놓여 있다. 하나는 독점 자본주의로의 길, 이미 일본은 유럽 열강 어느 나라에도 뒤질 게 없는 경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으므로 서양식 ‘정통’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할 자격이 충분하다. 다른 하나는 군국주의로의 길, 군사적으로도 세계 정상급인 일본은 경제적인 침략보다 더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군사적 침략을 실행할 힘도 충분히 지니고 있다. 경제적 노선과 군사적 노선, 이 두 가지 중 일본이 택한 것은 뭘까? 힌트는 1930년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 수상이 군부의 손에 암살된 사건에서 찾을 수 있다.
세계 경제가 최대의 호황을 누리던 시점에서 갑자기 터져나온 1929년의 세계 대공황이 없었다면 혹시 일본은 경제적인 노선, 즉 정상적인 제국주의화의 길로 나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국 경제를 순식간에 마비시킨 공황의 피해는 태평양 건너 일본에게도 직격탄을 날렸다. 일본은 경제 대국이었으나 대외 의존도가 높다는 게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대공황이 터지자 서유럽 국가들은 피해를 막기 위해 지역적으로는 블록 경제를 취하고 국내적으로는 국가독점 자본주의 노선으로 나아갔는데, 그 때문에 일본 경제는 수출이 급격히 감소되면서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기업들이 도산한 것은 물론이고, 그렇잖아도 대기업(재벌)과 중공업 위주의 성장 전략으로 고통과 희생을 치르고 있던 노동자와 농민 등 기층 민중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사태에 대한 정부의 해결책은 단연 경기 부양이다. 일본 정부는 서유럽 국가들과 공동 대응을 모색하고 그들로부터 금융 지원을 받아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그러나 같은 문제를 보는 군부의 시각은 다르다. 군부가 제시한 해법은 만주를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고 나아가 중국마저 정복해서 경제 위기를 타개하자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대동아공영의 이데올로기다. 말하자면 유럽의 블록화 전략을 색다르게(?) 해석한 결과라고나 할까? 이런 상황에서 하마구치 수상의 피살은 정부와 군부의 싸움에서 군부가 승리했음을 뜻하며, 독점 자본주의와 군국주의의 갈림길에서 군국주의가 채택되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1931년 9월 18일 일본의 만주 주둔군인 관동군의 일부 장교들은 남만주 철도를 몰래 폭파해놓고, 그것을 중국군이 저지른 짓이라고 몰아붙이면서 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이 도발한 예전의 전쟁들과 마찬가지로 선전포고 없이 기습으로 시작된 이 전쟁이 바로 만주사변이다. 중국의 위안스카이 정권은 일본의 의도를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전력의 열세 때문에 만주를 거저 내주고 만다【당시 중국이 만주를 쉽게 포기한 데는 아마 역사적으로 만주에 대한 집착이 덜했던 전통도 작용했을 것이다.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청나라가 무너진 것은 진시황제 이래 2천여 년 동안 유지되어 온 제국의 시대가 종말을 고한 것인 동시에 300여 년에 걸친 이민족 지배가 끝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중국은 비록 왕조는 아니지만 군벌들이 지배하는 한족 정권으로 되돌아왔다. 알다시피 만주는 청나라 황실의 고향이고, 또 역사적으로 한족의 세력권일지언정 영토는 아니었으므로 당시 중국의 집권 세력인 국민당은 아마 만주를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쑨원(孫文, 1866~1925)이 한때 만주를 일본에 팔아넘길 마음을 먹었던 것도 그만큼 만주를 중국 영토로 여기는 의식이 희박했기 때문이다(그 계획은 5ㆍ4운동으로 무산되었다)】.
결국 이듬해 일본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불러와 만주국이라는 괴뢰 정권을 세우고 만주를 손아귀에 넣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일본이 만주 정복에 만족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이제 누구의 눈에도 뻔하다. 일본의 야망은 무력을 통해 경제 위기를 타개하는 데서 더 나아가 장차 아시아 전체를 지배하는 데 있음이 명백해진 것이다.
일본의 대륙 침략이 노골화됨에 따라 조선의 항일운동도 커다란 전환점을 맞는다. 이제 항일의 과제는 조선만이 아니라 중국에게도 발등의 불이 된다. 한 가지 다행스런 점은 비록 분열과 재집결을 거듭하는 문제점은 있으나 그래도 항일운동의 조직적 지도부가 생겼다는 사실이다. 이미 5년 전의 6ㆍ10만세운동을 통해 이 장점은 여실히 발휘된 바 있었다. 1926년 6월 10일 순종(純宗)의 장례식에 맞춰 권오설(權五卨, 1899~1930), 김단야(金丹冶) 등의 사회주의자들이 노동자, 학생들과 연대해서 조직적인 대규모 시위를 전개한 것은 운동 지도부가 존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순종은 아버지처럼 장례식을 통해 민족에게 가장 큰 기여를 했다). 이 사건에 힘입어 그 이듬해 젊은 조선공산당원들과 원로급 민족주의자들은 처음으로 새로운 조직을 통해 상견례를 하게 되는데, 그렇게 탄생한 민족운동 통합 조직이 바로 신간회(新幹會)다(6ㆍ10만세운동으로 일본이 유화책으로 돌아선 덕분에 신간회는 합법 단체로 출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나 조선공산당처럼 동질적인 이념을 지닌 조직들에서도 늘 인맥들 간의 분열과 반목으로 애를 먹었는데, 신간회 같은 ‘대동단결형’ 조직이 멀쩡할 리는 만무하다. 특히 명망가 지향적인 우익 민족주의 계열이 지도부 구성을 거의 자파로 도배한 것에 대해 좌익 계열은 처음부터 불만이 많았다. 출범 후에도 본연의 활동을 하지 못하고 한동안 강령을 만드느니, 전국과 해외에 지회를 설립하느니 하면서 부산을 떨던 신간회는 결국 좌익의 지원으로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된 허헌(許憲, 1885~1951)이 우익 조병옥(趙炳玉, 1894~1960)의 탄핵을 받으면서 지도부가 분열되어 1931년 5월에 와해되고 만다. 일본이 만주 정복에 정신이 팔려 있던 중요한 시기에 대형 민족운동 조직이 스스로 붕괴되었다는 것은 사실상 국내 항일운동의 맥이 끊겼음을 뜻한다.
따라서 항일의 구심점은 자연히 북쪽의 만주로 옮겨가게 된다. 당시 남만주 일대에는 토지조사사업과 동척에 밀려 고향을 떠나온 조선인들로 이미 ‘또 하나의 조선’이 성립되어 있었다. 이를 배경으로 1920년대부터는 만주에서도 본격적인 항일투쟁이 시작되었는데, 일본의 치안력이 한반도만큼 강력하게 작용하지 못하는 지역이었기에 이곳의 투쟁은 일찌감치 명망가 중심의 정치운동에서 벗어나 무장투쟁의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항일투사의 사관학교에 해당하는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비롯해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의 무장 조직들이 모두 1919년에 결성되었으니, 여기서도 3ㆍ1운동의 파급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특히 북로군정서는 1920년 김좌진(金佐鎭, 1889~1930)의 지휘하에 만주의 청산리 전투에서 무려 열 배에 달하는 일본군 2개 사단 병력을 무찔러 이름을 떨친 바 있었다.
만주사변으로 일본의 야망이 드러나자 만주의 항일무장투쟁 조직들에게는 중요한 원군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조선과 같은 운명에 처한 중국이다. 아직 중국은 워낙 넓은 탓에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았지만, 일본의 대륙 침략이 일정에 오른 만큼 더 이상 힘의 열세를 탓하며 수수방관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 그래서 중국은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선의 항일 세력들과 통일전선을 구축하게 되는데, 항일무장투쟁의 분야에서는 조선이 선배였으니 중국에 한 수 가르친 셈이다.
▲ 황제가 더 있었더라면 3ㆍ1운동과 달리 6ㆍ10만세운동은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사회주의자와 학생들이 조직한 결과였으므로 한층 진일보한 투쟁이었다. 그러나 고종(高宗)의 장례식을 D - 데이로 삼았던 3ㆍ1운동처럼 이번 거사도 순종(純宗)의 장례식을 이용했으니, 두 황제는 죽음으로써 민족에게 기여했다고 할까? 사진은 순종의 장례식에 모인 군중이다. 일본으로서는 더 이상 황제가 없다는 데 안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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