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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섞임 - 9장 도발로 수미일관한 일본, 번영을 낳은 쇄국, 유신을 낳은 개항: 일본의 머리에 서양의 손발(메이지유신, 이토 히로부미)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섞임 - 9장 도발로 수미일관한 일본, 번영을 낳은 쇄국, 유신을 낳은 개항: 일본의 머리에 서양의 손발(메이지유신, 이토 히로부미)

건방진방랑자 2021. 6. 9.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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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머리에 서양의 손발

 

천황이 실권을 가지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양식 절대왕정 같은 체제가 수립된 것은 아니다. 영국의 튜더와 스튜어트 왕조,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로 대표되는 서양의 절대군주는 군주 자신이 최대의 봉건영주로서 정치와 외교, 군사 등 모든 분야의 최고 결정자였다. 그러나 일본의 천황은 법제상으로만 절대 권력을 지닐 뿐 현실적으로는 휘하 관료들이 권력을 소유하고 집행했다.

 

그렇다 해도 천황은 이제 과거의 상징적 존재와는 달랐다. 관료들은 모든 권력을 천황의 이름으로행사했으므로 천황은 모든 권력의 원천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일본의 천황은 절대 권력자를 넘어 신적 권위를 지닌 존재였다. 이 점에서 천황은 유럽의 어느 절대군주도, 심지어 중국의 황제조차 미치지 못하는 위상이었다.

 

따라서 일본의 근대화에 결정적 기여를 한 유명한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은 소년 천황 메이지가 직접 주도한 게 아니라 메이지 정부의 관료들이 천황의 이름으로 입안하고 집행한 것이다. 그렇다면 바쿠후 시대와 어떤 점이 다를까? 쇼군이 지배하던 바쿠후 시대에도 실제 행정과 정치는 어차피 실무 관료들이 담당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우선 권력의 성질이 다르다. 바쿠후 시대의 쇼군은 최고 권력자였을 뿐 절대 권력자는 아니었다. 쇼군은 자신이 거느린 군사력을 바탕으로 지방의 다이묘와 번주를 제압하고 그들에게서 충성을 요구했지만, 천황은 무력이 아니라 정치적 권위로 군림하는 존재이므로 쇼군과는 차원이 달랐다. 바쿠후를 공화국의 여당에 비교한다면, 천황은 왕국의 왕에 해당한다. 공화국의 여당과 야당은 힘 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어도(실제로 바쿠후 정권은 몇 차례 바뀌기도 했다), 왕국에서 왕을 바꾸려 하는 행위는 곧 반란이 된다. 왕정복고를 계기로 일본의 정치 체제는 바쿠후 때와 성격이 다른 강력한 중앙집권으로 바뀌었다.

 

또한 바쿠후 체제와 왕정 체제의 차이는 관료 집단의 성격에도 있었다. 중국의 역사에서 보았듯이 황제를 정점으로 한 중앙집권과 쌍둥이처럼 어울리는 게 바로 관료제였다. 메이지 시대의 관료들은 바쿠후와 다이묘의 지휘를 받는 바쿠후 시대의 관료들과 전혀 달랐다. 그들은 위로부터 명령을 받아 실행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할 수 있는 능력과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그렇지 않았다면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화려한 드라마는 결코 현실의 무대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메이지 정부는 우선 지배계급을 재편하는 일부터 착수했다. 전통적 지배층인 다이묘와 더 전통적 지배층인 귀족을 함께 아울러 화족(華族)으로 묶고 무사는 사족(士族)으로 분류했다. 또한 중앙 행정기구로서 중국식 6성을 두었고, 지방의 번들은 먼저 번지사(藩知事, 앞에서 보았듯, ‘란 일을 맡긴다는 뜻이므로, 지사는 번의 주인처럼 독립적인 의미가 아니라 중앙집권적ㆍ관료적인 의미다)로 바꾸었다가 이내 그것마저 폐지하고 그 대신으로 현()을 설치했다(이 현 제도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늘날 일본의 행정제도로 사용된다).

 

 

유신 교육 메이지 시대의 소학교(초등학교) 교실에서 산수 수업이 진행되는 광경이다. 사진을 찍는다니까 이런 자세를 취하게 했겠지만, 학생들이 줄을 반듯이 맞추어 무릎을 꿇고 앉은 모습에서 유신의 필연적 귀결인 군국주의를 읽는다고 해도 억지는 아닐 것이다.

 

 

여기까지는 서론에 불과하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본론은 근대화를 통한 부국강병 작업이다. 1871년 체제 정비를 완료한 유신 정권은 최고 수뇌부의 절반에 달하는 48명의 대규모 사절단을 편성해 미국과 유럽으로 파견했다. 당면 목적은 그때까지 서구 열강과 체결한 불평등조약들을 수정하려는 것이었으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구 열강의 선진 문물을 현지에서 시찰하고 새 일본 건설에 적용하려는 장기적인 목적이었다. 1000여 년 전 당 제국이 건강했을 때 일본은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배우기 위해 견당사를 파견했다. 그러나 당시의 견당사가 주로 유학생들이었던 반면 메이지 사절단은 직접 통치를 담당하는 관료 집단이었다.

 

사절단은 1년 반에 걸쳐 미국은 물론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러시아,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스위스의 순서로 거의 모든 유럽 국가를 두루 돌아보았다. 과거 견당사가 그랬듯이 메이지 사절단도 서구에 대한 엄청난 정보를 가지고 돌아왔으며, 이를 적절히 모방해 국내에 활용했다. 이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구호는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기본 이념인 화혼양재(和魂洋才, 여기서 란 일본을 뜻한다). 즉 일본의 정신으로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비록 일본의 정신으로라는 단서가 붙기는 했지만 메이지 정부의 서구화 노력은 그야말로 혁명적이었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일본에 유럽적 섬나라를 건설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기도 했으며, 학교에서 일본어를 폐지하고 영어를 가르치자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였다.

 

메이지 정부는 서구 여러 나라의 각종 제도를 저울질하면서 그들 중 가장 적절한 것들을 선별해 도입했다. 이를테면 교육제도와 육군, 형법은 프랑스 해군과 철도, 체신은 영국, 대학은 미국, 헌법과 민법은 독일을 모방하는 식이었다. 구체적인 개혁 작업에서 메이지 정부가 취한 대표적인 정책은 신분제를 철폐하고 징병제를 실시하며 의무교육제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서구에서는 수십, 수백 년씩 걸린 일들을 메이지 정부는 불과 십수 년 만에 압축적으로 처리했다. 일본의 의무교육제는 영국(1870)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였다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은 사람들의 일상생활에까지 구석구석 규제를 가했다. 머리 모양을 서양식으로 바꾸는 것은 물론 산발(散髮)을 법으로 금지했으며, 노상방뇨도 금지했다. 이렇게 일상생활의 영역까지 법제화하는 극단적인 경찰 정치100여 년 뒤 한반도에서 똑같은 유신이라는 이름으로 박정희 군사정권이 모방했다. 유신 정권은 정치적 사안을 긴급조치로, 사회적 문제를 경범죄로 처리하면서 전 사회를 옥죄었다.

 

 

민족의 영웅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에서부터 청일전쟁, 러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일본 근대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자칫하면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할 뻔한 일본이 불과 수십 년 만에 제국주의 강국으로 발돋움한 데는 그의 공헌이 절대적이었기에, 지금도 일본에서는 그를 근대 일본의 최대 영웅으로 손꼽는다. 하지만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식민지 지배를 가져온 원흉이며, 오히려 그를 암살한 안중근이 민족의 영웅이다. 민족적 관점에 따라 역사적 평가가 다른 것은 당연하지만, 한쪽은 침략자이고 다른 쪽은 침략에 저항한 것이니 엄연한 차이가 있다.

 

 

이렇게 단기간에 뚜렷한 성과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유신 지도부가 유능할뿐 아니라 청렴했기 때문이다.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아니라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던 만큼 정권의 도덕성은 개혁의 성패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였다. 유신 정권은 신생 정권답게 청렴했으며, 핵심 세력의 나이도 부패 연령에 이르지 않고 젊었다. 최고 수뇌부의 최고 연장자라고 해봐야 40대 중반이었고 주로 30대 소장파가 모든 실무를 담당했다(훗날 조선의 안중근에게 암살당하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도 젊은 시절에 메이지 정부에서 일했다).

 

젊은 그들의 신세대적 감각은 내정 개혁 만이 아니라 대외 관계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이들은 옛 바쿠후가 불평등조약을 통해 서구 열강에 빼앗겼던 각종 이권을 하나씩 회수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조약에 규정된 내용이라 해도 거부할 것은 단호히 거부했으며, 토지 조차권이나 탄광 운영권 등은 위약금을 물어주고서라도 이권을 돌려받았다. 또한 요코하마에 주둔하던 영국과 프랑스 군대의 철수를 줄기차게 요구해 마침내 1875년에 실현시켰다. 난징 조약 이래 무수한 불평등조약을 맺으면서도 빠져나가는 실익과 이권은 무시한 채 오랑캐에게 굴욕을 당한다는 생각밖에 하지 못했던 중국 정부의 관리들에 비해, 일본의 메이지 정부는 당시로서 믿기 어려울 만큼 탁월한 대세 감각을 보였다(메이지 정부는 서구 열강, 특히 영국에 상당히 의존했으나 그들을 철저히 자문 역할로만 활용했다).

 

조국을 근대화하겠다는 데야 누가 뭐라 할 수 없다. 문제는 부국강병을 모토로 내세운 만큼 처음부터 군사적 성격이 강한 근대화였다는 점이다. 산업뿐 아니라 과학과 기술도 군사적인 것이 가장 우선이었다. 이를테면 각 산업체를 부국강병의 기치 아래 국영 기업으로 만들어 경제 발전에 투입하는 방식이었다. 그런 분위기는 필연적으로 서구와 같은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아니라 공동체의 이익을 군사적으로 도모하는 군국주의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바로 그것이 곧이어 한반도와 중국 대륙을 침략하는 국제 범죄의 원동력이 된다.

 

 

유신의 성과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초기 요코하마의 풍경이다. 서양식 건물과 다리가 있고 기차가 달리고 있어 마치 19세기 서양의 어느 항구도시를 보는 듯하다. 유신의 성과는 결국 서구의 모방이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일본의 시민사회

닫힌 문을 두드리는 열강

타의에 의한 복귀

바쿠후의 몰락

일본의 머리에 서양의 손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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