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모순의 집약지
한반도에서 동척의 활동과 토지조사사업이 한창이던 1910년대 세계적인 관심의 대상은 한반도의 사정도 아니었고 식민지ㆍ종속국의 문제도 아니었다. 당시 유럽 세계는 물론이고 멀리 극동의 중국과 일본에게도 초미의 관심사는 1914년 6월 28일 발칸에서 한 발의 총성과 함께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등 선진 제국주의 열강(연합국)에게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후발 제국주의 열강(동맹국)이 도전한 이 전쟁은, 이미 전 세기 말부터 증폭돼 오던 삼국협상과 삼국동맹 간의 다툼이 빚어낸 사건이었다(『종횡무진 서양사』, 「열매 2」 4장 참조). 그렇다면 전쟁의 성격도 그렇고 전장도 유럽이었으니 한반도에는 별 영향이 없어야겠지만, 중국과 일본이 참전을 선언했기에 문제가 된다.
중국은 독일이라면 이를 갈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연합국 편인데, 일본은 어느 편으로 참전했을까? 제국주의의 발달 수준으로 보면 일본은 후발 제국주의에 속하므로 동맹국 측에 붙어야 한다. 그러나 세계적인 기준으로 보자면 그렇지만 지역적인 기준에서 보면 다르다. 아시아에서 일본은 유일한 제국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은 연합국 측에 가담하게 되는데, 포유류에 속한 박쥐처럼 모양새는 좀 이상하지만 결과적으로 일본을 위해서는 대단히 현명한 선택이었다(물론 한반도에게는 그 반대다). 아마 그 선택에는 무대가 유럽이므로 설사 연합국이 진다 해도 일본으로서는 크게 손해볼 게 없으리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전쟁 과정에서 일본은 태평양 지역에 산재한 독일의 해외 식민지들을 차례로 접수하고(후발 제국주의인 독일은 뒤늦게 식민지 쟁탈전에 나섰기에 태평양의 작은 섬들에 대해서까지 왕성한 ‘식욕’을 보였다) 중국 산둥에 있는 독일군 기지를 파괴하는 정도의 미미한 전과를 올리는데 불과했으나, 아무튼 연합국은 아시아에서 제 몫을 해준 일본을 기특하게 여긴다. 그래서 전후 처리 과정에서 일본은 독일이 가지고 있던 중국에 대한 모든 이권을 승계하고 나아가 만주 지역의 개발권마저 소유한다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게 된다.
그러자 가장 입이 부은 것은 단연 중국이다. 개전초부터 연합국 측에 가담해서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고 또 나름대로 열심히 싸웠는데도 오히려 전후의 논공행상에서는 승전국에 마땅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사실 연합국 세력이 중국을 무시한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우선 중국은 중국 내의 독일 조차지들을 공략한 정도였으므로 별로 전황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더욱이 연합국의 관점에서 보면 그나마 중국군의 활약은 자기 나라를 독립시키기 위한 것일 뿐 전쟁 자체를 위한 것은 아니므로 평가절하될 수밖에 없었다. 더 큰 이유는 연합국 측의 세계적 구상에서 중국의 역할은 없었기 때문이다. 신흥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을 축으로 해서 아시아의 제국주의적 질서를 구축하려는 게 연합국 측의 의도였으니, 여기서 중국의 사정 따위는 전혀 배려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연합국은 차후 일본의 중국 침략을 공식 승인한 셈이 되었지만, 모든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던 당시에는 연합국의 어느 지도자도 그것까지 예측하지는 못했다】.
결국 승전의 대가가 고작 독일 대신 일본을 불러들인 것뿐임을 자각하게 된 중국 민중은 1919년 5월 4일 전국적인 반일 시위를 벌였다. 중국인들이 그제야 일본의 진의를 알아차렸다면 한반도인들은 일본의 식민지로 10년을 보낸 만큼 자각도 약간 더 빨랐다. 그래서 그에 두 달 앞서 한반도에서는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대규모 반일 봉기가 일어나는데, 이것이 바로 3ㆍ1운동이다(이 운동이 중국의 5ㆍ4운동에 영향을 주었음은 물론이다).
사실 조선에서는 10년 동안 일본의 강압적 지배에 대한 반일 감정이 축적되어 왔거니와 그 감정이 행동으로 표출될 만한 분위기도 팽배해 있었다. 1919년 1월 고종(高宗)이 70년에 가까운 욕된 삶을 마감하고 죽었는데, 때가 때인지라 그가 일본인에게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나돌았던 것이다. 물론 근거없는 소문이었고 또 고종에게 조선 민중이 애정을 품을 이유는 전혀 없었지만, 식민지 세상에서 겪는 설움은 설사 헛소문이라 해도, 설사 못난 국왕이라 해도 폭발의 계기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런 분위기가 2월 8일 도쿄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으로, 3월 1일에는 서울 종로의 한 음식점에서 저명 인사들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읽는 행동으로 이어졌던 것이다(원래 거사 일자는 3월 3일 고종(高宗)의 장례에 맞췄으나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틀 앞당겨졌다).
이른바 민족대표로 불리는 33명은 음식점에서 나와 순순히 경찰에 연행되었으나, 그들도 총독부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은 미리 소식을 듣고 탑골공원에 모여 있던 수천 명의 어린 학생들과 시민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었다. 분노한 조선 민중은 각 종교계 인사들의 정치적 선언에 불과한 사건을 엄청나게 증폭시켜 이후 몇 개월 동안 한반도 전역, 나아가 만주와 연해주까지 대한독립만세의 구호로 뒤덮는 대형 사태로 엮어냈다. 그러나 식민지가 된 이래 처음으로 일본의 지배에 대규모로 항거한 탓일까? 이 운동은 산발적으로 이어졌을 뿐 전혀 조직적으로 전개되지는 못했다. 게다가 전쟁의 피비린내로 얼룩진 당시의 세계 정세에 비하면 순진하다고 할 만큼 철저히 비폭력적으로 진행되었기에 일본은 소수의 기마경찰과 군대로 어렵지 않게 진압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이 남긴 중대한 교훈은 한 가지, 바로 지속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려면 지도부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는 정치 망명객들이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를 수립하게 된다. 하지만 이름은 비록 ‘정부’라고 해도 식민지가 된 조국의 현실에서 도망쳐나온 인물들이 제대로 항일투쟁을 지도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1945년 해방 때까지 임시정부가 그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그저 명패만 내리지 않은 데 가장 큰 의의를 부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물론 윤봉길尹奉吉과 이봉창李基昌의 의거는 ‘임시정부의 작품’이지만, 독립을 기치로 내걸었으면서도 아무런 군대 조직도 없이 테러만으로 목적을 달성하려 했다면 ‘정부’라는 이름이 오히려 사치스럽다).
▲ 뒤늦은 함성 나라를 빼앗길 때도, 의병들이 들고 일어날 때도 기층 민중은 앞에 나서지 않았으나, 토지조사사업과 동척의 활동으로 삶의 터전이 무너지자 식민지 지배의 실상을 깨닫게 되었다. 사진은 3ㆍ1운동 당시 광화문의 비각 앞에 모인 군중의 모습이다. 비록 뒤늦었지만 이 운동으로 인해 임시정부와 만주 독립군 부대들이 속속 탄생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국내에는 항일운동을 지도할 주체가 없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3ㆍ1운동은 중국의 망명정부만 낳은 게 아니었다.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나서 몇 년 뒤인 1925년 4월 17일 김재봉(金在鳳. 1890 ∼ 1944), 김원봉(金元鳳, 1898~?), 이여성(李如星, 1901~?) 등의 젊은 청년들은 서울에서 최초의 사회주의 비밀조직인 조선공산당을 창립했다. 3ㆍ1운동의 영향으로 탄생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지만, 임시정부는 기껏해야 의병 활동의 경력을 가진 노인네 정객들의 친목 조직에 불과한 데 비해 조선공산당은 독립에 대한 신념과 그 신념을 실천할 의지를 지닌 진보적 청년들의 조직이었으므로 두 단체는 단지 연배의 차이만이 아닌 질적인 차이가 있었다(실제로 그 전까지 김재봉과 이여성은 일본 경찰에 의해 여러 차례 투옥된 전력이 있었고 김원봉은 유명한 의열단義烈團의 창단 멤버였으니, 임시정부의 망명객들과는 차원이 다른 투사들이다).
이념적 성향이 사회주의였던 만큼 조선공산당은 3ㆍ1운동을 계승하는 데 머문 임시정부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목표와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식민지ㆍ종속국 운동의 세계적 추세였던 민족해방과 사회주의 건설의 조합 을 근본적인 과제로서 설정한 것이다【이 점은 당시 제국주의 국가와 식민지ㆍ종속국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비롯된다. 3ㆍ1운동과 중국의 5ㆍ4운동에 영향을 준 것은 1차 대전 말기에 미국 대통령 윌슨이 발표한 민족자결주의 노선이었다. 이는 말 그대로 각 민족이 자신의 운명을 판단하고 짊어지는 주체여야 한다는 이념이므로 제국주의 열강의 지배를 받고 있던 조선과 중국의 민중에게 호소하는 바가 컸다. 그러나 사실 윌슨은 유럽 세계 내에서만 민족자결권이 적용된다고 주장했으니, 식민지ㆍ종속국의 처지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그와 달리 1917년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을 승리로 이끈 레닌은 그 원칙이 식민지 민족들에게도 적용된다고 주장하면서 사회주의 이념을 세계화하는 데 성공했다(결과적으로 레닌의 주장은 신생 소비에트 공화국을 반석 위에 올리는 데도 크게 기여했으니, 월슨은 아이디어만 제공하는 데 그쳤고 레닌은 그것으로 실익을 거둬들인 셈이다)】.
그러나 확고한 이념으로 무장한 운동가 집단이나, 별다른 노선도 없이 간판만 내걸고 있는 망명자들의 친목 단체나 조직 운영의 미숙함과 방만함에서는 별 차이가 없었다. 임시 정부도 그랬듯이, 거창하게 내세운 목표와는 달리 조선공산당은 지도부의 분열로 여러 차례 결성과 해산을 반복하면서 표류하고 말았다. 이것 역시 오랜 사대부(士大夫) 정치의 역사적 전통에서 빚어진 지극히 ‘한반도적인 현상’이라고 말한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조선의 지배층은 늘 목표를 정하고 달성하는 일보다 자파의 세력을 늘려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으니까(다만 해방운동의 지도층마저 그런 함정에 빠졌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20세기 초의 상황에서 전세계적으로 작용하는 모순은 크게 세 가지다.
둘째는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모순이며,
셋째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모순이다.
이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첫째 것은 1차 대전으로 완화되었으나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고, 둘째 것은 방치되어 있는 상태이며, 셋째 것은 아직 표면화되지 않았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당시 한반도의 정세에는 이 세 가지 모순이 모두 혼재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한반도에서는 아시아 유일의 제국주의인 일본이 서양의 선진 제국주의와 서서히 갈등을 키워가고 있는 중이었고(첫째 모순), 일본에 병합된 조선이 독립과 해방을 위해 투쟁하고 있었을뿐더러(둘째 모순), 그 투쟁을 주도하는 주요한 세력은 장차 20세기 중반 이후 세계 체제로 등장하게 되는 사회주의 세력이었다(셋째 모순). 이 세 가지 모순이 차례로 발현되면서 한반도 현대사는 엄청난 진통을 겪게 된다.
그런 점에서 당시의 한반도는 사실 세계적 모순의 집약지로서 전세계의 주목을 받을 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그러나 세계의 지도자들은 물론 한반도의 독립을 이끄는 지도자들도 그런 점을 전혀 주목하지 못했다. 하기야, 지내놓고 보면 알기 쉽더라도 당대에는 언제나 정체를 알기 어려운 게 역사다. 일찍이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이 되어야 날기 시작한다”는 헤겔의 말은 바로 그런 어려움을 가리키는 뜻이리라.
▲ 사선에서 만주의 어느 유격대 훈련장에서 전사 후보들이 사격 훈련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미 만주 일대에는 조국에서 몰려난 조선인들이 도처에 자리잡고 있었으므로 3ㆍ1운동 이후 이곳이 독립투쟁의 중심지로 떠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만주의 항일운동이 명망가 중심으로 흐르지 않은 이유는 고향을 등진 기층 민중이 주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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