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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에 찾아온 유학자들, 정약용 - 반주자학자, 탈주자학자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강의실에 찾아온 유학자들, 정약용 - 반주자학자, 탈주자학자

건방진방랑자 2022. 3. 8.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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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주자학자, 탈주자학자

 

 

정약용은 주자학을 비판적으로 해체한 인물로 유명합니다. 조선시대는 고려의 불교적 관념을 비판하면서 주자학, 곧 성리학을 왕조의 정통 이념으로 채택했지요. 그런데 이 주자학이 조선 중기를 거치면서 매우 경색됩니다. 다시 말해, 현실 변화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지식인들과 관료들의 사변적인 논쟁 수준에 머물고 만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이런 사변적인 논쟁을 통해서 불가피한 현실의 변화와 개인들의 다양한 욕구를 억압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지요. 그러다 보니 자연히 사회 내부적으로 정통 이념인 주자학의 아성과 권위에 도전하는 목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특히 임진왜란(壬辰倭亂)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으면서 조선의 사대부 지식인들이 매우 무력한 태도를 보여주었던 터라, 주자학의 유효성과 가치에 대한 반발이 여기저기서 터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한번쯤 들어보았을 윤휴, 박세당 같은 인물들이 이런 와중에 등장하게 됩니다. 이들은 주자학을 신봉한 자들에게서 모두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판결을 받고 죽음을 당했습니다. 말하자면 주자학에 대한 이단이라고 해서 사약을 받은 것이지요. 이로써 자유로운 논쟁이 어느 정도 가능했던 퇴계와 율곡의 시대에 비해 몹시 경직되고 폐쇄된 사회적 분위기로 바뀌어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의 큰 흐름은 누구도 막기 어려운 법입니다. 이미 1600년대 초부터 청나라를 통해 서구의 과학기술과 천주교 사상 등, 매우 낯설고 이질적인 외래의 사유 경향들이 조선으로 유입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성호(星湖) 이익(李瀷, 1579~1624) 같은 실학파 학자들이 속속 배출됩니다. 그들은 당시 정권을 장악한 노론 계열 학자들에 비해 서구 사유에 보다 개방적이고 우호적이었지요. 물론 노론 계열에서도 홍대용 같은 인물들이 북학파(北學派)의 흐름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노론보다는 역시 이익 문하의 남인 계열 학자들 사이에서 보다 많은 인물들이 배출됩니다. 우리가 실학자로 알고 있는 상당수 학자들이 여기에 포함되며, 지금 살펴보는 정약용 역시 남인 계열 학파의 마지막 자리쯤에 속해 있습니다.

 

우리는 정약용을 실학(實學)의 집대성자라고 부르는 것을 자주 들어왔습니다. 이 실학이란 명칭에는 기존의 관념적인 주자학을 비판한다는 의미가 강하게 들어 있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을 반주자학자나 탈주자학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정약용 역시 그렇게 불리곤 했습니다. 하지만 실학자들은, 특히 정약용 같은 인물은 조선시대 주류 담론이었던 주자학에 대해 그렇게 단순한 입장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자학의 사변성에 대해 비판적인 칼날을 들이대면서도, 자신의 철학에 부합되는 몇 가지 측면들은 잘 계승했기 때문입니다. 정약용은 주희의 이기론(理氣論)을 비판했습니다. 만물 속에 공통된 원리[]가 내재되어 있다는 관점을 거부한 것이지요. 그는 오히려 모든 개별자는 서로 다른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희가 미발의 때에 본성을 함양하라고 한 공부에 대해서도 불신했습니다. 선불교의 선사들이 면벽참선(面壁參禪)하면서 내면에 갇히는 공부와 유사하다고 보았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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