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서』가 세상에 나오게 된 까닭
『효경』은 첫머리부터 공자가 증자에게 “삼(參, 증자의 이름)아, 게 앉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주겠다”하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증자의 책으로서 『대학(大學)』과 『효경』은 라이벌 관계에 있게 된다.
『대학(大學)』을 경(經)과 전(傳)으로서 나누어 장구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주희는 당연히 『효경』마저 같은 방식으로 경(經)과 전(傳)으로 나누어 새로운 장구작업을 시도하려 하였다. 물론 그는 그의 도학적 틀 속에 『효경』을 편입시키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효경』에 손을 대고 보니 『효경』이라는 경전은 전혀 자기의 도학적 틀과 맞아떨어지는 책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경문을 만드는 과정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부분들을 삭제하게 되었고, 또 그렇게 억지춘향이로 만들어 놓은 경문과 전문을 매치시키는 과정에서 또 많은 삭제가 불가피했다.
결과적으로 주희는 『효경』에 손을 댔다가 사상적으로도 자신의 성리학적 틀을 보완할 수 있는 결정적 내용을 얻지 못했고 텍스트비평의 성과도 올리지 못했다. 애꿎게도 한대로부터 이미 경(經)의 권위를 획득하여 내려온 바이블 한 권만 망쳐버린 결과를 낳은 것이다. 아무리 레토릭의 구사가 좋은 주희라 할지라도 『효경간오』를 세상에 내놓을 자신은 서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서문도 아니 쓰고 장구주해작업도 하지 않고 서궤에 쑤셔넣어 두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효경간오』 작업의 실패로 말미암아 주희는 사자서의 구상에 대한 확신을 획득한다. 자기의 경학 틀 속에서는 『효경』을 잠재워버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증자의 작으로서는 오직 『대학(大學)』만을 어필시키기로 작심한 것이다. 4년 후 61세 때 드디어 회암(晦, 주희의 호)은 임장군(臨漳郡)에서 『사자서(四子書)』를 상재(上梓) 한다(소희紹熙 원년, 1190), 『주문공문집(朱文公文集)』 권82에 ‘서임장소간사자후(書臨漳所刊四子後)’라는 발문이 실려있다.
성인께서 경전(바이블)을 지으시어 후세에 가르침을 드리우실 때에는, 읽는 자로 하여금 그 문장을 암송하고, 그 뜻을 생각하고, 사리의 당연함을 깨달아, 도의(道義)의 전체를 보고 몸으로 힘써 실천하여, 성현의 경지에 스스로 들어가게 하려 함이라 … 도(道)를 구하여 덕(德)에 들어가려고 하는 자는 성인의 경전을 버리고서는 도무지 마음 쓸 곳이 없다.
聖人作經, 以詔後世, 將使讀者誦其文, 思其義, 有以知事理之當然, 見道義之全體而身力行之, 以入聖賢之域也. … 欲求道以入德者, 舍此爲無所用心矣.
그러나 지금 성인의 시대로부터 세상이 너무 멀어져 그 뜻을 일깨워 강의해주는 자들이 사라졌고, 그 상수(象數)와 명물(名物)로부터 훈고(訓詁), 범례에 이르기까지 서당에서 가르치는 선생님이나 덕망이 높은 대학자들도 그 뜻을 다 알지 못한다. 그런데 하물며 새로이 공부하려는 초심자가 벼락 같이 읽기 시작하여 그 큰 대강의 뜻과 핵심적 요점을 갑자기 터득한다. 하는 말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然去聖旣遠, 講誦失傳, 自其象數名物, 訓詁凡例之間, 老師宿儒尙有不能知者, 況於新學小生, 驟而讀之, 是亦安能遽有以得其大指要歸也哉!
그러므로 하남 정부자(程夫子, 정이천을 가리킨다)께서 사람을 가르치실 때에 반드시 먼저 『대학(大學)』ㆍ『논어(論語)』ㆍ『중용(中庸)』ㆍ『맹자(孟子)』 네 책을 먼저 힘써 공부하게 하셨고, 그 네 책을 마스터 하고난 연후에나 육경(六經)의 공부를 시작하게 하시었다. 대저 그 쉽고 어렵고, 멀고 가깝고, 크고 작은 것의 순서가 원래 이와 같은 것이니 함부로 어지럽히지 말아야 할 것이다.
故河南程夫子之敎人, 必先使之用力乎大學論語中庸孟子之書, 然後及乎六經. 蓋其難易遠近大小之序, 固如此而不可亂也.
이것이 그 유명한 『사서집주』가 이 세상에 나오게 되는 첫 실마리이다. 그러나 이때 간행된 최초의 『사자서(四子書)』가 오늘날 우리가 보는 형태의 『사서집주』였는지, 어떠했는지도 확인할 길이 없다. 인류의 역사를 뒤바꾸었다고도 말할 수 있는 희대의 명저 『사서집주』의 초간본인 『사자서』는 현재 하나도 남아있질 않기 때문이다.
주희는 당대에는 복건성에 사는 외롭고 고고한 시골선비에 불과했다. 그의 벼슬경력은 극히 미약하다. 19세에 진사에 급제하여 50년간이나 관원 직원록에 등록은 되어있었지만 대부분 명목상의 직책에 그쳤다. 지방관 생활 9년, 중앙에서 천자시강 45일, 그것이 전부였다.
소라이(荻生徂徠, 1666~1728)는 주자학의 맹점이 바로 사서로부터 육경으로 진입한다는 사실에 있다고 혹평을 늘어놓는다. 그것은 읽는 순서나, 난이(難易)의 차서(次序) 문제가 아니라, 근원적으로 사서의 이론적 틀 속에서 육경을 규정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므로 선왕지도(先王之道)로서의 육경의 성격이 사서의 관념적 틀 속에서 왜곡되는 결과를 낳는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사서를 통하여 육경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육경의 오리지날한 틀 속에서 사서를 용해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소라이의 비판도 일리가 있지만 하여튼 주희의 문제의식은 그 나름대로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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