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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10부 왕정복고 - 3장 마지막 실험과 마지막 실패, 도서관이 담당한 혁신④: 북학파의 기용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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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10부 왕정복고 - 3장 마지막 실험과 마지막 실패, 도서관이 담당한 혁신④: 북학파의 기용

건방진방랑자 2021. 6. 21.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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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이 담당한 혁신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이 당내민주주의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개가 웃을 일이듯이, 혁신을 꾀하는 규장각(奎章閣)이 그 내부 운영부터 혁신적이지 못하다면 말도 안 될 것이다. 과연 정조(正祖)는 우선 인사 행정부터 파격적으로 가져간다. 도서관의 기능을 하는 이상 규장각에서는 검서관(檢書官)이 중요한 실무인력이다(상위 서열로는 제학과 직제학 등이 있었으나 이들은 원로로서 형식적으로 임명되었을 뿐 규장각의 실제 운영은 검서관들이 도맡았다). 정조(正祖)는 이 검서관직에 과감히 서얼 출신을 기용한다. 초대 검서관 네 명 중 이덕무(李德懋, 1741 ~ 93)박제가(朴齊家, 1750 ~ 1805)가 바로 서자의 신분이었다는 것은 정조가 의식적으로 신분 차별을 철폐하고 실력 위주의 인사를 집행하려 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준다.

 

물론 단순히 서얼 출신을 기용했다고 해서 그 자체로 혁신적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검서관들의 성향은 정조의 혁신 정치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이덕무는 청나라에 서장관으로 가서 그곳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서학을 익혔으며, 일반 학문은 물론 건축학, 식생학, 동물학, 곤충학까지 두루 관심을 가지게 된 대표적인 실학자다. 또 박제가는 성리학의 한 덕목을 뜻하는 이름[齊家]과는 달리 청나라의 선진 제도와 문물을 집중적으로 연구해서 북학의(北學議)라는 책을 펴낸 북학파의 젊은 대가다. 또한 서자 출신은 아니지만 또 다른 초대 검서관인 유득공(柳得恭, 1749 ~ ?)도 학자로서 발해를 우리 역사에 최초로 포함시켜 발해고(渤海考)를 쓴 북학파의 학자다.

 

이렇듯 북학파가 규장각(奎章閣)의 실권을 쥐고 혁신의 주체로 나섰다면 정치 분야에서도 그런 분위기가 팽배했을 터이다. 하지만 조정은 영조(英祖) 시대부터 노론이 장악하고 있다. 비록 북학파 학자들 가운데는 홍대용이나 박지원(朴趾源)처럼 노론측의 인물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노론 중에서도 진보적인 소장파에 속했고, 노론의 중심 세력은 여전히 중화적 세계관에 물든 골수 성리학자이며 호시탐탐 당쟁의 기회를 노리는 낡은 사대부(士大夫) 체제의 유물이었다. 그렇다면 노론과 정조(正祖)의 관계가 어땠을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정조의 개혁에서 타깃은 당연히 노론이다. 이제 정조의 실험은 막바지 고비에 이르렀다. 250년 동안 조선을 지배했던 사대부 세력과, 시대적 조류에 발맞추어 한시바삐 왕국을 복원하려는 정조의 대결은 그 실험의 성패를 가려줄 것이다.

 

 

 규장각도와 현판 가운데 2층 건물 중 1층이 규장각이고 2층이 주합루이다. 서울 창덕궁의 비원에 있다. 규장각은 도서관이고 주합루는 일종의 열람실이었다. 뒤쪽으로 창덕궁의 뒷산인 응봉이 보인다. 김홍도의 그림이라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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