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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丁若鏞: 1762(영조 38)~1836(헌종 2)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미용(美庸)ㆍ귀농(歸農), 호는 다산(茶山)ㆍ사암(俟菴)ㆍ자하도인(紫霞道人)ㆍ철마산인(鐵馬山人). 여유당(與猶堂)임.
1762년 | 경기도 양주군 마현리에서 정재원(丁載遠)과 해남윤씨 윤두서(尹斗緖)의 손녀 사이에서 4남으로 태어남. | |
1770년 | 9세 | 어머니인 해남윤씨 사망. |
1776년 | 15세 | 2월 풍산(豐山) 홍화보(洪和輔)의 따님과 결혼함. 부친이 호조좌랑으로 서울에 부임하자, 이가환(李家煥)ㆍ이승훈(李承薰) 등에게 수학함. |
1777년 | 16세 |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유고를 읽고 학문의 좌표를 정함. |
1783년 | 22세 | 2월 감시(監試) 경의과(經義科) 초시(初試)에 합격하고, 4월에 회시(會試) 생원(生員)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함. 정조가 ‘중용강의 80조목’이란 과제를 내자 일등하여 정조로부터 재주를 인정받음. |
1784년 | 23세 | 한강(漢江) 두미협(斗尾峽)의 배안에서 이벽(李蘗)을 통해 천주교에 관해 알게 됨. 이후 잠시 서학에 심취하게 됨. |
1788년 | 27세 | 이경명(李景溟)이 반서교상소(反西敎上疏)를 올리자 정조는 “성리학을 밝힘으로 천주학을 종식시킨다[以明正學, 而熄邪說]”를 지시함. 이 무렵 남인이었던 홍낙안(洪樂安)ㆍ목만중(睦萬中)ㆍ이기경(李基慶) 등이 공서파(攻西派)를 형성하여 노론벽파(老論僻派)와 결탁하면서 신서파(信西派)를 적대시함. |
1789년 | 28세 | 대과(大科)에 갑과(甲科) 이등으로 급제(及第)하여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 승진함. 정조가 화성행차에 필요한 한강의 부교(浮橋)문제에 배다리를 놓아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함. 「문체책(文體策)」을 지음. |
1791년 | 30세 | 호남에서 윤지충(尹持忠) 등이 ‘훼사폐사(毁祠廢祀)’한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남. 홍낙안 등이 남인 정승 체제공에게 장서를 보내 신서파(信西派)의 동향을 경고함. 서학(西學)과 절의(絶義)함. |
1792년 | 31세 | 부친이 진주(晉州) 임소(任所)에서 운명함. 수원성(水原城)을 쌓는 것과 관련하여 필요한 기술적 설계를 담당함. 기중기(起重機)ㆍ고륜(鼓輪)ㆍ활거(滑車) 등의 건설기계를 창안함. 『성설(城說)』ㆍ『기중도설(起重圖說)』을 짓고 『수원성제(水原城制)』를 지어 바침. |
1794년 | 33세 | 청나라 신부인 주문모가 포교를 하자, 목만중 등이 이가환이 그 포교의 배후에 있다고 유언비어를 퍼뜨림. 정조는 이가환을 충주목사(忠州牧使)로, 정약용을 금정찰방(金井察訪)으로 전직시켜 비호하였고 이승훈은 예산에 유배시켜 공서파(攻西派)의 예봉(銳鋒)을 처단함. 암행어사가 되어 경기도(京畿道) 관찰사(觀察使) 서용보(徐龍輔)의 비리를 고발함. |
1796년 | 35세 | 왕명으로 서울로 돌아옴. 초계문신(抄啟文臣)을 중심으로 한 ‘죽란시사(竹欄詩社)’에 참여함. 유배 전까지 이 시사에서 활동함. |
1797년 | 36세 |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승진하지만, 반대파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스스로 서교문제에 대해 해명함. 곡산부사(谷山府使)로 나감. |
1799년 | 38세 | 봄에 남인(南人)을 비호하던 체제공이 서거하고, 형조참의에 제수됨. 다시 서교(西敎) 문제가 붉어져 상소가 빗발침. |
1800년 | 39세 | 봄에 반대파의 모함과 시기를 피하기 위해 처자를 거느리고 마현리(馬峴里)로 낙향함. 6월에 정조가 갑자기 운명함. |
1801년 | 40세 | 순조가 즉위하고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하자, 신유사옥이 일어나고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진행됨. 이가환(李家煥)ㆍ이승훈(李承薰)을 비롯해 다산 삼형제 등 천주교와 직접 관련이 없는 남인도 대거 체포됨. ‘책롱사(冊籠事)’로 인해 정약전과 다산은 추국(推鞫)을 받음. 정약종의 문서 중에 ‘不能與兄弟同學, 莫非己罪云’이라는 구절이 있어 정약용은 천주교와 관계없다는 판명을 받음. 정약종은 순교하고, 정약전은 신지도로, 다산은 장기(長鬐)로 유배감. 겨울에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가 발견되자, 정약전과 다산은 또다시 서울로 호송되어 국문을 받았지만 무고함이 밝혀짐. 그러나 정약전은 흑산도(黑山島)로, 다산은 강진(康津)으로 이배됨. |
1803년 | 42세 | 군포(軍布)로 인해 남근을 자르는 참상을 목도하고 「애절양(哀絶陽)」을 지음. 강진 읍내에서 직접 목도한 사실을 「도강고가부사(道康瞽家婦詞)」를 형상함. |
1805년 | 44세 | 아암(兒菴) 혜장(惠藏)의 주선으로 거처를 우이산(牛耳山) 보은산방(寶恩山房)으로 옮김. |
1806년 | 45세 | 가을에 보은산방(寶恩山房)에서 이학래(李鶴來)의 집으로 이사함. |
1807년 | 46세 | 황상(黃裳) 등 6명이 문하에서 수학함. |
1808년 | 47세 |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이사함. 두 초막을 짓고 ‘정석(丁石)’이라는 표시를 해둠. |
1810년 | 49세 | 『전간기사(田間紀事)』와 두보(杜甫)의 삼리(三吏)를 차운하여 「용산리(龍山吏)」ㆍ「파지리(波池吏)」ㆍ「해남리(海南吏)」를 지음. |
1811년 | 50세 |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를 완성함. |
1813년 | 52세 |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 40권을 완성함. |
1814년 | 53세 | 『맹자요의(孟子要義)』와 『대학공의(大學公義)』, 그리고 『중용강의보(中庸講義補)』를 완성함. |
1818년 | 57세 | 봄에 『목민심서(牧民心書)』 48권을 완성함. 18명의 제자들에게 다신계(茶信契)를 조직하게 하고 계안(契案)도 마련해줌. 9월 14일 18년 간의 유배생활을 마감하고 고향인 쇠내[苕川]로 돌아옴. |
1819년 | 58세 | 비변사 양전사(量田使)로 천용되었지만 서용되지 못함. 『흠흠신서(欽欽新書)』, 『아언각비(雅言覺非)』를 완성함. |
1822년 | 61세 |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지음. |
1823년 | 62세 | 승지(承旨)로 다시 낙점이 되었지만 곧 환수되어 서용되지 못함. |
1832년 | 71세 |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를 지음. |
1836년 | 75세 | 2월 22일 아침. 여유당(與猶堂)에서 죽음. |
평가
1. 초계문신(抄啟文臣)으로 국왕의 측근에서 연구ㆍ편찬에 참여했고 경기도 암행어사로도 활동하였으며 화성설계의 기획자로 참여함.
2. 정조가 죽고 천주교를 믿었단 이유로 박해를 받아 경상도 장기현과 전라도 강진 땅에 유배가 되었으며 이곳에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며 여러 저서를 집필함.
3. 『마과회통(麻科會通)』,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아방비어고(我邦備禦考)』, 『아언각비(雅言覺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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