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집/열하일기

열하일기, 유쾌한 시공간 - 2부, 3장 대체 소품문이 뭐길래!

건방진방랑자 2021. 7. 8. 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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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대체 소품문이 뭐길래!

 

 

소품문의 정의와 특징

 

 

我見世人之 譽人文章者 이 세상 사람들을 내 살펴보니 남의 문장을 기리는 자는
文必擬兩漢 詩則盛唐也 문은 꼭 양한(兩漢)을 본떴다 하고 시()는 꼭 성당(盛唐)을 본떴다 하네
曰似已非眞 漢唐豈有且 비슷하다는 그 말 벌써 참이 아니라는 뜻 한당이 어찌 또 있을 리 있소
  (중략)
我亦聞此譽 初聞面欲剮 내 또한 이와 같은 기림을 듣고 갓 들을 땐 낯가죽이 에이는 듯싶더니
再聞還絶倒 數日酸腰髁 두번째 듣고 나니 도리어 포복절도 여러 날 허리 무릎 시큰하였다네
盛傳益無味 還似蠟札飷
 
이름이 널리 알려질수록 더욱 흥미 없어 밀 조각을 씹은 듯이 도리어 맛이 없더군

 

 

연암이 지은 좌소산인에게 주다(증좌소산인, 贈左蘇山人)라는 시의 한 대목이다. 양한은 사마천(司馬遷)과 반고의 문장, 성당은 한유(韓愈)유종원(柳宗元) 등의 시, 한마디로 고문을 말한다. 연암 역시 젊어서는 이런 문체적 규범을 열심히 따랐고, 세인들로부터 훌륭하다는 칭찬을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 있는 문장이 아니었다. 밀랍을 씹는 듯했고, 사모관대를 하고 죽은 시체와 같았다. 앙상한 규범으로만 존재하는 문장에 어떻게 천지자연과 삶의 생동하는 호흡을 불어넣을 것인가? 이것이 연암을 위시한 18세기 신지식인들의 시대적 화두였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부상한 것이 소품문이다.

 

소품이란 말 그대로 짧은 글이다. 우선 고문이 지닌 불필요한 긴호흡을 한칼에 잘라버림으로써 그 위압적인 무게를 해체해버린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게 소품의 전략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뛰어난 기지와 창발성이 받쳐주어야 한다. 단순히 글재주로만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삶 자체가 그대로 글이 되어야 비로소 가능한 스타일, 그것이 바로 소품체다. 그래서 소품문이 번성했다는 것은 새로운 삶과 사유로 무장한 신지식인들이 출현했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시야를 더 넓혀보면, 이런 방식의 모색에는 명말청초 양명좌파(陽明左派)들의 사유가 깊이 각인되어 있다. 양명학은 주자학과 더불어 중국 철학사의 양대산맥이다. 주자학의 성()과 리()에 맞서 심(), 양지(良知) 등의 개념을 창안해냈다. 체계적인 학습보다 주체의 실천성, 지행합일 등을 강조하는 까닭에 유학자들로부터 불교에 침윤되었다는 비난이 끊이지 않았다. 주자와 동시대 논적이었던 육상산(陸象山)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으나, 본격적인 틀을 갖추게 된 건 명말의 왕양명(王陽明)에 의해서다. 육상산과 왕양명을 합쳐 육왕학(陸王學)이라고도 한다.

 

왕양명 사후 제자들에 의해 분파가 구성되는데, 특히 불교도교까지를 넘나들면서 중세적 구도를 전복하고자 했던 쪽을 양명좌파라고 부른다. 이탁오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자신의 책 제목을 분서(焚書, 태워버려야 할 책)’, ‘장서(藏書, 깊이 숨겨두어야 할 책)’라고 이름 붙일 만큼 그의 사유는 도발적이었다. 당연히 그는 이단으로 몰려 수난을 겪다가 풍속사범으로 감옥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그의 사상 역시 이단으로 몰려 아예 유학의 계보에서 축출되었지만, 그의 이론은 공안파(公安派) 문학이론을 통해 세상에 널리 유포되었다. 주자학이 압도했던 조선에서는 양명학 자체가 금기시되었기에 조선에 들어온 것은 바로 이 공안파의 문학이론이다. 특히 원굉도의 문집 원중랑집이 유포되면서 지식인들 사이에 관습적 인용을 참신한 언어로 재구성하는 소품체 신드롬이 일어나게 된다.

 

 

 

 

이옥과 이덕무 작품으로 본 소품체의 특이성

 

 

그 가운데서도 대표주자라면, 단연 이옥(李鈺)이덕무(李德懋)일순위로 꼽힐 것이다.

 

 

어린아이가 거울을 보다가 깔깔대며 웃는다. 뒤쪽까지 터져서 그런 줄로만 알고 급히 거울 뒤쪽을 보지만 뒤쪽은 검을 뿐이다. 그러다가 또 깔깔 웃는다. 그러면서도 어째서 밝아지고 어째서 어두워지는지는 묻지 않는다. 묘하구나, 구애됨이 없으니 스승으로 삼을 만하다. 선귤당농소

小孩兒窺鏡, 啞然而笑, 明知透底. 而然急看鏡背, 背黝矣. 又啞然而笑, 不問其何明何暗. 妙哉無礙, 堪爲師.

 

문인이나 시인이 좋은 계절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면 시 쓰는 어깨에선 산이 솟구치고, 읊조리는 눈동자에 물결이 일어난다. 어금니와 뺨 사이에서 향기가 일고, 입과 입술에선 꽃이 피어난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분별하여 따지는 마음을 숨김이 있으면 크게 흠결이 된다. 이목구심서

騷人韻士, 佳辰媚景, 詩肩聳山, 吟眸漾波. 牙頰生香, 口吻開花. 少有隱機, 大是缺典.

 

 

둘 다 이덕무(李德懋)의 것이다. 앞의 글은 어린아이의 발랄함에서 때묻지 않은 자재로움을 보는 것이고, 뒤의 글은 시인과 경치가 어우러져 어깨가 산이 되고 얼굴이 꽃이 되는 무아(無我)’의 경지를 간결하게 제시하고 있다. 들뢰즈/가타리 식으로 말하면, ‘-되기’ ‘-되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삼가(三嘉)에 묏자리를 함께한 열 개의 봉분이 있었다. 전하는 말에, ‘어떤 여자가 시집을 가서 곧 과부가 되어, 장례를 지내고 또 시집가서 다시 과부가 되니 아홉 번 시집을 가서 아홉 번 과부가 되었다. 이에 아홉 지아비를 한 곳에 나란히 묻어두고 자기가 죽어서 옆에 묻히어 모두 열 개의 봉분이 되었다고 하니, 또한 기이하다. 부장(附葬)제도가 있은 이래로 이런 경우는 없었다. 다만 구원(九原, 무덤)에서 다시 살아난다면 누구와 함께 살아갈 것인지 알 수 없다. 구부총(九夫冢)

 

 

이옥(李鈺)봉성문여(鳳城文餘)67편 가운데 하나다. 삼가에 유배되었을 때 그곳 풍속을 두루 스케치한 글을 모은 것이다. ‘문여(文餘)’란 문의 나머지, 곧 정체(正體)가 아닌 자투리글이란 뜻이니 소품의 다른 이름인 셈이다. 이 글은 제목부터가 충격이다. 구부(九夫), 곧 아홉 지아비라니, 속된 말로 상부살(喪夫煞)이 낄 대로 낀 과부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판소리 여섯 마당 가운데 변강쇠 타령이란 작품이 있다. 작품의 여주인공인 옹녀는 상부살을 타고나 지아비들이 줄초상이 날 뿐 아니라, 가슴만 만져도, 손목만 쥐어도, 나중에 아예 치마만 스쳐도 남자들이 급살을 맞는다. 과장이 좀 심하다 싶었는데, 이 글을 보니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이 여인의 팔자 또한 옹녀 뺨치는 수준 아닌가.

 

물론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런 기구한 여인네의 운명을 주목하는 이옥(李鈺)의 시선이다. 이옥은 특이하다 할 정도로 팔자 기박한 여인네들의 삶과 비애를 즐겨 다루었다. 비극적인 러브 스토리를 다룬 소설 심생전(沈生傳)은 지금까지도 독자들의 심금을 울린다. 아마도 중세적 글쓰기의 장에서 여성적 목소리가 가장 다양하게 흘러넘친 건 단연 이옥의 글에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되기’, 혹은 슬픈 사랑기계이옥!

 

그리고 그건 단순히 이옥이라는 남성의 트랜스 젠더적 기질의 소산만은 아니다. 그는 이언(俚諺)에서 단호하게 선언한다. “대저 천지만물에 대한 관찰은 사람을 관찰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사람에 대한 관찰은 정을 살펴보는 것보다 더 묘한 것이 없고, 정에 대한 관찰은 남녀의 정을 살펴보는 것보다 더 진실된 것이 없다[夫天地萬物之觀, 莫大於觀於人; 人之觀, 莫妙乎觀於情; 情之觀, 莫眞乎觀乎男女之情].”남녀의 정을 단지 하위개념에 묶어두거나 아니면 아예 봉쇄시켜버리는 중세 철학의 구도를 단숨에 전복하고 있는 것이다.

 

 

 

 

작은 것들의 향연

 

 

이처럼 이덕무(李德懋)이옥(李鈺)의 문장들은 짧은 건 두세 줄, 길어야 한 페이지를 넘지 않는 소품들이지만, 중세적 사유의 뇌관을 터뜨릴 만한 폭발적인 에너지를 내장하고 있다. 무엇보다 상투성의 더께가 내려앉은 고문의 틀에서 벗어나 눈부신 생의 경계를 포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어린아이, 여성, 예인(藝人) 소수적인존재들에 주목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이처럼 한편으론 기존의 중심적 가치를 전복해버리고, 다른 한편으론 전혀 포착되지 않았던, 즉 중세적 표상 외부에 있는 사물들을 문득 솟구치게 하는 것이 바로 소품의 위력이다. 그런 점에서 소품문은 잃어버린 사건들’, ‘봉쇄되었던 목소리들이 각축하는 향연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소품은 길이가 짧다는 것뿐 아니라, 자질구레한 사물들을 다룬다는 뜻도 함께 지니고 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어린아이가 울고 있는 것시장에서 사람들이 사고파는 것”, “사나운 개가 서로 싸우는 것교활한 고양이가 재롱을 떠는 것”, “봄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는 것가을 나비가 꽃 꿀을 채집하는 것등등. 그것들은 지극히 가늘고 적은 것이지만 무궁한 조화의 표현이다. 미세한 차이들이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홀로 봄숲에 우는 새는 소리마다 각각 다르고, 해시(海市)에서 보물을 살펴보면 하나하나가 모두 새롭다[獨其聽禽春林, 聲聲各異, 閱寶海市, 件件皆新]”. “그러므로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 모든 것이 다 시가 되는 것이다.

 

이옥(李鈺)의 작품 가운데 시기(市記)라는 글이 있다. 삼가현이라는 시골의 장터를 점사점포의 작은 창구멍을 통해 살펴보는 것이 주내용이다. “소와 송아지를 몰고 오는 자, 두 마리 소를 끌고 오는 자, 닭을 안고 오는 자로 시작하여, “청어를 묶어서 오는 자, 청어를 엮어서 늘어뜨리고 가져오는 자” “손을 잡아끌면서 희희덕거리는 남녀” “넓은 소매에 긴 옷자락 옷을 입은 자, 솜도포를 위에 입고 치마를 입은 자등등 별의별 인간군상을 한없이 늘어놓는다. 주제는? 없다. 그저 세모(歲暮)에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책상에 엇비슷이 기대어 시장의 모습을 엿보고 있을 따름이다. 이 경우 소품이란 미시적인 세계를 집요하게 드러내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된다.

 

그러나 정조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자질구레한 것들은 문장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문장이란 무릇 저 천상의 가치, 곧 천고의 역사와 우주의 이치를 논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소품문들은 지극히 섬세한 정감의 떨림을 드러내 사람들로 하여금 한없는 슬픔에 잠기게 하지 않으면, 작고 미세한 것들을 밑도 끝도 없이 주절대 시선을 흩어버리지 않는가. 이런 데 빠져들면 사대부들의 존재근거는 위태롭기 그지없다. 고문으로 표상되는 거대담론이 사라진다면, () 계급은 대체 무얼 의지해 통치이념을 구축한단 말인가. 그의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 작은 것들의 향연 속에서 고문의 권위는 차츰 해체되어갔다.

 

배후 조종자답게 연암은 도도한 어조로 당시의 배치를 이렇게 묘파한다. “비슷하다는 그 말 벌써 참이 아니라는 뜻[曰似已非眞]” “눈앞 일에 참된 흥취 들어 있는데 / 하필이면 먼 옛것을 취해야 하나[卽事有眞趣 何必遠古抯]” “반고나 사마천이 다시 태어난다 해도 / 반고나 사마천(司馬遷)을 결단코 모방 아니 할 걸[班馬若再起 决不學班馬]” 어설프게 고문을 본뜨지 말고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삼라만상(森羅萬象)’에 눈뜨라는 것이다. 사마천과 반고의 문장이 위대한 건 바로 그런 경지를 확보했기 때문인데, 그걸 보지 못하고 그저 베끼기에만 골몰하다니. 그들이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그들은 지금 시대에 맞는 전혀 새로운 문장을 만들지, 예전 자신들이 썼던 문장을 본뜰 리가 없다. 그건 이미 지난 시대의 문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때가 천근(淺近)하다 이르지 마소 / 천 년 뒤에 비한다면 당연히 고귀하리[莫謂今時近 應高千載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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