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글의 가치
영대정잉묵 자서(映帶亭賸墨 自序)
박지원(朴趾源)
아무 뜻도 없이 쓰는 상투적인 말들에 대해
(缺六十字.)
所謂右謹陳, 誠俚且穢. 獨不知世間操觚者何限. 印板總是餖飣餕餘, 則何傷於公格之頭辭發語之例套乎? 『堯典』之‘曰若稽古’, 『佛經』之‘如是我聞', 迺今時之右謹陳爾.
과거의 글들은 그 당시 편지글에서 배웠다
獨其聽禽春林, 聲聲各異, 閱寶海市, 件件皆新. 荷珠自圓, 楚璞不劚, 則此尺牘家之祖述『論語』, 泝源風雅, 其辭令則子産ㆍ叔向, 掌故則『新序』ㆍ『世說』, 其核實剴切, 不獨長策之賈傅, 執事之宣公爾.
지금의 작가들은 편지글의 가치를 모른다
彼一號古文辭, 則但知序記之爲宗, 架鑿虛譌, 挐挹浮濫. 指斥此等爲小家玅品, 明牕淨几, 睡餘支枕. 夫敬以禮立, 而嚴威儼慤, 非所以事親也. 若復廣張衣袖, 如見大賓, 略敍寒暄, 更無一語, 敬則敬矣, 知禮則未也. 安在其婾色怡聲, 左右無方也? 故曰: ‘莞爾而笑, 前言戱耳.’ 夫子之善謔. ‘女曰鷄鳴, 士曰昧朝’ 詩人之尺牘爾.
자서(自序)를 짓게 된 이유
偶閱巾笥, 時當寒天, 方塗窓眼, 舊與知舊書疏, 得其副墨賸毫, 共五十餘則. 或字如蠅頭, 或紙如蝶翅, 或覆瓿則有餘, 或糊籠則不足. 於是抄寫一卷, 藏棄于放瓊閣之東樓.
歲壬辰孟冬上瀚. 燕巖居士書. 『燕巖集』 卷之五
해석
아무 뜻도 없이 쓰는 상투적인 말들에 대해
(缺六十字.)
60자가 누락되었다.
所謂右謹陳, 誠俚且穢.
‘다음 같이 삼가 말하겠습니다[右謹陳]’라는 여는 글은 진실로 속되고 더럽다.
獨不知世間操觚者何限.
유독 세상의 문장가들이 어느 정도로 심한지 알지 못하겠다.
印板總是餖飣餕餘,
판에 찍듯 모두 제사에 남은 음식을 쭉 늘어놓듯 하니,
則何傷於公格之頭辭發語之例套乎?
어찌 공문서의 머리말과 발설한 상투어에 해가 됨에랴.
『堯典』之‘曰若稽古’,
『요전』에서 ‘예전을 상고해보면[曰若稽古]’라거나
『佛經』之‘如是我聞',
『불경』의 ‘이와 같이 내가 들어보니[如是我聞]’라는 것은
迺今時之右謹陳爾.
곧 지금의 ‘다음 같이 삼가 말하겠습니다[右謹陳]’【앞의 ‘우근진(右謹陳)’은 관청에 청원하는 문서, 즉 소지(所志)의 서두어이다. 다음에 나오는 ‘옛일을 상고하건대’라는 뜻인 왈약계고(曰若稽古)나 ‘이와 같이 내가 들었노라’라는 뜻인 여시아문(如是我聞)은 『서경』이나 불경에서 말을 꺼낼 때 사용하는 상투어이다】일뿐이다.
과거의 글들은 그 당시 편지글에서 배웠다
獨其聽禽春林, 聲聲各異,
홀로 봄숲에서 새소리를 들어보면 소리마다 각각 다르고
閱寶海市, 件件皆新.
페르시아 시장【해시(海市): 일반적으로는 맑은 날 바다 한가운데 나타난다는 화려한 성시(城市), 즉 신기루(蜃氣樓) 현상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는 해안의 성시로 보아야 할 듯하다. 우상전(虞裳傳)에 소개된 이언진(李彦瑱)의 시 해람편(海覽篇)에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각종 보물들이 거래되고 있음을 노래하면서 “페르시아 상인들도 눈이 부셔하고 절강의 성시들도 빛이 바랬네[波斯胡目眩 浙江市色奪].”라고 하였듯이, 중국 동남 해안의 성시들에서는 각종 보석 거래를 비롯하여 대외무역이 매우 활발했다】의 보물을 보면 하나하나 모두 새롭다.
荷珠自圓, 楚璞不劚,
연잎에 구르는 이슬은 절로 둥글고 초나라 화씨의 구슬은 깎지 않아도 기품이 난다.
則此尺牘家之祖述『論語』,
편지를 쓰는 사람이 『논어』를 조술하고【척독(尺牘)이 문학적으로 볼 때, 『논어』나 『시경』의 참신하면서도 진솔한 문답체 표현 방식을 계승했다는 뜻이다. 그 좋은 예가 자서의 후반에 인용되어 있다】,
泝源風雅,
풍(風)과 아(雅)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며
사령문【사령(辭令): 말로써 응대(應對)하는 것을 말한다. 외교에서는 특히 사령을 잘해야 한다. 정(鄭)이 형법(刑法)의 조문을 새긴 정(鼎)을 주조하자, 진(晉) 숙향(叔向)이 정 나라 공자(公子) 자산(子産)에게 서신을 보내어 형벌로써 백성을 다스리려 하는 것을 힐난했으며, 자산은 이러한 숙향의 서신을 받고 그의 충고에 감사하는 답신을 보냈다. 『春秋左氏傳 昭公 6年 3月』 이는 서신을 통해 사령을 잘한 예이다】에선 정자산과 숙향을 배우고
掌故則『新序』ㆍ『世說』,
전고(典故)에선 『신서』와 『세설신어(世說新語)』【둘 다 한(漢) 때 유향(劉向)이 지은 책이다. 『신서』는 춘추전국 시대의 고사를 모아 놓은 책이다. 『세설』은 실전(失傳)되어 내용을 알 수 없는데, 후세의 『세설신어(世說新語)』는 이 책에서 이름을 딴 것이다】를 배우니,
其核實剴切, 不獨長策之賈傅,
실상에 맞고 간절한 것이 홀로 책(策)에 뛰어난 가의(賈誼)나
執事之宣公爾.
일을 집행한 선공(宣公) 육지(陸贄)【가의(賈誼)의 상소(上疏)나 육지(陸贄)의 주의(奏議)에 못지않다는 뜻이다. 한(漢) 때 가의는 문제(文帝)에게 치안책(治安策)을 올렸으며, 당 나라 때 육지는 덕종(德宗)에게 직언(直言)을 서슴지 않는 주의를 올려 국정을 잘 보좌하였다】뿐만이 아닌 것이다.
지금의 작가들은 편지글의 가치를 모른다
彼一號古文辭,
그런데도 저기 한 번 고문의 작가로 이름이 나면
則但知序記之爲宗,
다만 서(序)와 기(記)만이 종주가 되는 줄 알아,
架鑿虛譌, 挐挹浮濫.
허황되고 잘못된 것을 얽고 천착하며 부앙부앙한 것을 끌어 당겨 지목하고서
指斥此等爲小家玅品,
이런 편지글들은 소가(小家)의 묘품(妙品)이 됨을 배척하고서
明牕淨几, 睡餘支枕.
밝은 창가의 깨끗한 안석에서 졸다가 베개로 벤다.
夫敬以禮立, 而嚴威儼慤,
대개 공경이란 예(禮)로 수립하지만 엄격한 위의(威儀)와 삼가는 성실함이
非所以事親也.
어버이를 제대로 섬기는 게 아니다.
若復廣張衣袖, 如見大賓,
옷소매를 널찍하게 해서 큰 손님을 뵌 듯이 하고
略敍寒暄, 更無一語,
추위나 더위만을 대략 물어보고 다시 한 마디 말도 없다면,
敬則敬矣, 知禮則未也.
외면적으로 공경은 공경이지만, 실질적으론 예를 아는 건 아니라 할 수 있다.
安在其婾色怡聲, 左右無方也?
어찌 온화한 안색에 부드러운 음성으로 어버이를 공경함에 격식에 구애되지 않음【좌우무방(左右無方): 『예기』 「단궁(檀弓)」 상(上)에 부모를 섬길 때에는 “곁에서 봉양하는 데 격식에 구애되지 말아야 한다[左右就養無方]”고 하였다】이 있으랴?
故曰: ‘莞爾而笑, 前言戱耳.’ 夫子之善謔.
그러므로 ‘방긋 웃으시며 전에 했던 말은 장난일 뿐이다’라는 건 공자의 해학이다.
『시경』에서 ‘아내가 닭 울었어요라고 말하자, 남편이 아직 해 뜨지 않은 아침이요.’【『시경(詩經)』 계명(鷄鳴)의 첫 구절로서, 아내가 닭이 울었으니 일하러 나가라고 하자 남편이 나가기 싫어 아직 어두운 새벽이라고 둘러대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주자(朱子)는 이 시를 부부가 서로 권계(勸戒)한 것이라고 주해(註解)하였으나, 연암은 부부가 일상적인 집안일로 문답을 나눈 시로 보았다】라고 한 것은
詩人之尺牘爾.
시인의 편지일 뿐이다【계명(鷄鳴)을 지은 옛 시인을 가리킨다】.
자서(自序)를 짓게 된 이유
偶閱巾笥, 時當寒天,
우연히 책상자를 보았는데 그때가 추위가 온 때라
方塗窓眼,
곧 창문을 바르려하다가,
舊與知舊書疏, 得其副墨賸毫,
예전에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 중 부본(副本)으로 남아있던 것을 얻은 게
共五十餘則.
모두 50여건이었다.
或字如蠅頭, 或紙如蝶翅,
어떤 편지의 글자는 파리머리 같고, 어떤 편지는 종이가 나비날개【지여접시(紙如蝶翅): 왕안석(王安石)이 나비를 노래한 시에 “날개가 가루보다 가볍고 비단보다 얇다[翅輕於粉薄於繒].” 하였다】처럼 얇았으며,
或覆瓿則有餘, 或糊籠則不足.
어떤 것은 장독덮개【부부(覆瓿): 가치가 없는 저작을 가리키며, 주로 자신의 저작에 대한 겸양의 말로 쓰인다. 한(漢) 때 유흠(劉歆)이 양웅(揚雄)의 태현(太玄)을 두고 후세 사람들이 장독 덮개로나 쓸 것이라고 풍자한 데에서 유래한 말이다】로 쓰면 남아돌지만, 어떤 것은 장롱을 바르기에 부족했다.
於是抄寫一卷, 藏棄于放瓊閣之東樓.
이에 한 권을 베껴 쓰고서 방경각 동쪽 누각에 보관했다.
歲壬辰孟冬上瀚. 燕巖居士書. 『燕巖集』 卷之五
때는 임진년(1772) 겨울의 시작 상한에 연암거사가 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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