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굴뚝청소부 - 결론
결론 : 근대철학의 경계들
근대철학을 정점에 올린 헤겔
지금까지의 논의를 간략하게 요약합시다. 주체와 진리라는 두 개념으로 요약했던 데카르트의 문제설정은 신학과 교회의 지배 아래 있던 철학을, 그 중심을 ‘나’라는 주체로 전환함으로써 중세 전체와 구별되는 하나의 전기를 마련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새로운 철학적 ‘시대’를 여는 새로운 사고방식의 출발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철학적 근대가 시작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이 철학적 근대를 특징짓는 근대적 문제설정은, 주체의 통일성과 중심성을 가정하며 그것을 개념적 연역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었다는 점에서 주체철학’이란 특징, 모든 지식을 오직 ‘참된 지식’ ‘과학’이란 기준으로 판단하거나 정당화하는 점에서 ‘과학주의’란 특징을 갖고 있었습니다. 더불어 ‘이성의 빛’으로 만물을 비추어야 하며, 인간의 몽매한 삶과 실천 역시 이 이성의 빛에 의해 ‘계몽’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계몽주의’라는 특징도 갖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중세철학과 단절하면서 근대철학이 힘차게 그었던 새로운 경계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문제설정은 주체와 대상 간의 일치를 보증할 수 없다는 난관에 봉칙하게 됩니다. 이는 주체철학과 과학주의, 나아가 계몽주의라는 근대철학의 입장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근본적 난점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근대철학의 근본적 딜레마로, 이로 인해 이후 근대철학에서는 다양한 흐름과 입장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한편 로크는 영국의 유명론적인 전통에 입각해 데카르트 철학을 새로이 변형시킵니다. 본유관념과 실체를 유명론의 입장에서 비판함으로써 흔히 ‘경험주의’라고 부르는 독자적인 흐름을 이루어냈습니다. 이것은 분명 근대철학의 경계 안에 있는 것이긴 하지만, 데카르트적 흐름과는 매우 다른 독자적이고 새로운 흐름임에 틀림없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경험론을 통해 유명론은 ‘근대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명론과 근대철학은 해소하기 힘든 긴장을 갖고 있었고, 이 긴장은 흄에 이르러 극한에 다다릅니다. 즉 그것은 근대철학의 딜레마를 극한까지 밀고 나가 근대철학의 출발점과 목표 전체를 해체시켜 버립니다. 이로 인해 ‘근대철학의 위기’가 나타나죠.
칸트는 위기에 처한 근대철학에 ‘선험적 주체’라는 새로운 기초를 마련함으로써 그것을 재건합니다. 그것은 모든 주체들에게 공통된 보편적 사고구조를 찾아냄으로써 그들이 보편적 판단에 이를 수 있음을 밝히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여기서 그가 사용한 방법은 진리를 주체 내부로 이전시킴으로써 주체를 객관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객관적 진리를 사고 주체의 속성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주체에게는 객관성을 주는 방법인데, 한마디로 말하면 주체와 객체를 동일한 것으로 결합시키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주-객 동일성’의 이념은 이후 독일철학 전반을 특징짓는 매우 중요한 특징이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칸트는 데카르트나 로크와 다른 또 하나의 새로운 철학적 흐름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선험적 주체’ 혹은 ‘절대적 주체’(그걸 피히테처럼 ‘자아’라고 하든, 헤겔처럼 ‘절대정신’이라고 하든)로 하여금 자기 스스로를 기초짓도록 함으로써 딜레마의 해소를 겨냥하지만, 그 결과는 딜레마의 이전과 자신의 입론에 대한 절대적 정당화였습니다. 즉 다른 입론이나 목소리를, 자기 안에 포섭될 수 있는 것은 자기와 동일시하고, 다른 것은 배제하는 메커니즘을 작동시킴으로써, 사고할 수 있는 영역을 ‘지금 사고하고 있는 것’으로 제한하고 봉쇄하는 효과를 가집니다. 이것은 후에 근대철학의 근본적 결함으로 비난받는 요인이 됩니다.
결국 헤겔에서 절정에 이른 근대철학은 이제 새로이 근대적 경계 자체를 뛰어넘으려는 다양한 시도들에 부닥칩니다. 실천이란 개념으로 그 경계선을 허물고 한계를 넘어서려 했던 맑스나, 무의식이란 개념으로 근대철학의 지반을 해체시킨 프로이트, 그리고 가치와 권력의지 개념으로 근대철학을 공격함으로써 새로운 문제설정을 정립하려 했던 니체가 지금 중요해지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 때문입니다.
현대철학의 두 가지 방향
다른 한편 언어학을 경유해 근대철학의 한계를 넘으려는 태도 역시 오늘날 매우 중요한 또 하나의 흐름입니다. 그것은 예전에는 주체의 작용으로 이해되던 의미나 판단이 사실은 주체 외부에 있는 언어구조에 속하는 것이란 명제에 기인합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소쉬르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1세기 전에 훔볼트는 칸트주의의 입장에서 그와 유사한 입론을 발전시키려고 했습니다. 이는 언어학적 구조주의가 사실은 칸트주의라는 근대적 틀 속에 포섭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는 야콥슨이나 레비-스트로스의, 말 그대로의 ‘구조주의’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근대적 문제설정을 벗어나려는 흐름들을 전반적으로 특징짓고 있는 ‘가족유사성’이 있다면, 다음의 두 가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는 근대철학에서는 ‘주체’라는 범주가 선험적인 출발점이었는데, 탈근대적 문제설정들에서 주체는 여러 가지 요인들에 의해 결과물로서 구성되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그 요인이 사회적 생산관계(맑스)는, ‘타자’로서 무의식(프로이트 라캉)이든, 권력의지(니체)나 생체권력(푸코)이든, 혹은 이데올로기(알튀세르)간에 말입니다. 물론 이들이 이처럼 구성되는 주체에게 부여하는 기능이나 작용, 이론상의 위치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잊어선 안 된다는 단서를 달아야 하지만 말입니다.
다른 하나는 지식을 파악하는 방식입니다. 근대철학에서 그것은 인간의 인식이 도달해야 할 목표지점이었고, 따라서 ‘참된 지식’으로서만 다루어졌습니다. 그러나 탈근대적 문제설정들에서 지식은 주체를 구성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담론’으로 정의되며, 지식은 그게 참이든 거짓이든, 그게 야기하는 효과가 무엇인가를 통해 사고됩니다.
따라서 어찌보면 주체와 지식의 관계가 근대의 그것과는 반대로 뒤바뀌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지식이 효과를 야기하는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고, 주체는 그 결과 구성된 것이 된 셈이니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입지점에서 본다면 이 두 가지 요소가 근대철학의 문제설정과 그것을 넘어서는 문제설정 사이에 경계를 그어주는 특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한편, 지금까지 근대철학의 문제설정을 넘어서려는 현대철학의 여러가지 시도들을 살펴보았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상이한 두 가지 방향의 흐름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변화보다는 불변성을, 가변성보다는 항속성을 찾으려는 경향입니다. 이런 경향은 때론 개별적인 것에 반하여 보편성 내지 일반성에 우위를 부여하기도 하고, 현상들에 대해 법칙성을 강조하여 후자야말로 진정한 지식의 대상이라고 간주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는 수많은 개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 수많은 경우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동일성/정체성’이 가능한가를 묻고 대답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하지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적ㆍ과학주의적 태도나, 라킹이나 알튀세르의 주체 개념, 혹은 그 근원으로서 프로이트의 이론에서도 그런 경향이 쉽게 발견됩니다.
다른 하나의 경향은 반대로 보편성의 형태를 취하는 동일성이나 법칙적인 동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차이를 강조하고, 평범하고 평균적 규칙성에 대비하여 아주 다양한 양상으로 차이화되어 나타나는 특이성을 강조하는 입장, 혹은 동일화하려는 권력이 작용하는 동일자에 반하여 그에 의해 배제되거나 억압되는 ‘타자성‘을 강조하려는 태도, 불변성이 아니라 변화를, 정체성이 아니라 변이를, 안정적인 정착이 아니라 역동적인 유목을 강조하는 그런 입장입니다. 이런 입장을 가장 명시적으로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사람은 아마도 푸코와 들뢰즈/가타리일 겁니다.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차이의 철학이나 노마디즘은 이러한 태도를 가장 심오하고 가장 풍부하게 발전시킨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푸코는 근대사회에서 개체들을 동일화시키는 동일자의 메커니즘을 추적하면서 그것의 이면에 항상 억압되고 배제된 타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려했고, 그런 연구를 통해서 침묵 속에 갇힌 타자들의 목소리, 차이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자 했으며, 그럼으로써 동일자의 지반을 전복하여 차이들이, 타자들이 숨쉬고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자 했지요. 이런 점에서 그는 들뢰즈/가타리와 아주 인접한 입장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실제로 푸코와 들뢰즈는 오랫동안 친구였고, 서로 간에 긍정적인 방식으로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였지요). 표면적으로 보자면 푸코는 차이가 동일성 안에, 타자가 동일자 안에 포섭되고 동일화되는 양상을 근대사회의 역사를 통해서 보여주었다면, 들뢰즈/가타리는 차이 자체의 개념을 더욱더 멀리 밀고 나가 동일자의 권력, 동일성의 메커니즘에서 벗어나는 탈주의 방법을 발전시키려고 했다는 점에서 대비되지만, 사실은 동일한 문제의식 주변에서 서로에 대해 ‘보충적인’(supplementary) 작업을 했던 셈이지요.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도 단순히 동일성의 철학을 추구했다고 하기 힘든 면이 있음을 추가해 두어야 합니다. 레비-스트로스의 경우에는 서구라는 동일자에 의해 ‘미개’라는 침묵 속에 갇히고 ‘야만’이란 이름으로 억압되었던 타자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일 것을 촉구한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동일자와 대비되는 ‘타자성의 사유’를 시도했던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라캉 또한, 이 책에선 제대로 다루지 못했지만, 상징계의 외부에 존재하며 잠정적인 봉합의 형태로 고정되는 상징계를 변환시키는 실재계의 이론을 68년 이후 새로이 발전시킵니다. 물론 이 경우 실재계란 상징이나 상상의 형태로 말해질 수 없고 포착될 수 없는 것이란 점에서 ‘불가능한 것’(l'impossible)이고, 남근이나 하나의 척도를 통해 규정될 수 없는 차이들을 말없는 형태로 포함하는 것이기에 동일자로 환원될 수 없는 차이를 다룰 수 있는 개념이지요. 그러나 그 경우에도 차이들이 ‘불가능한 것’이라는, 가능한 것의 잔여(residue) 형태에 머물고 있다는 점에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생성과 창조의 길을 열긴 어렵지 않은가 싶긴 합니다. 알튀세르의 경우에도 말년에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필연성이 아닌 우발성을 강조하는 ‘우발성의 유물론’, ‘불확정적 유물론’, ‘만남의 유물론’을 새로이 제시하는데, 이 역시 그의 사유가 이런 맥락에서 앞서와는 상반되는 그런 경향으로 나아갔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어떤 철학이 동일성의 철학인가, 차이의 철학인가를 ‘판정’하고 ‘심판’하는 법적인 태도가 아니라, 어떤 철학 안에 존재하는 상이한 사유의 경향을 섬세하게 구별하는 것이고, 생성과 차이, 변화와 혁명을 사유하는 데 필요한 요소들을 채굴하여 이용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차이와 생성, 변화와 혁명을 사유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고, 그것을 배울 ‘친구’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다만 문제는 동일성과 불변성, 항속성, 영원성에 대한 철학적 경향이 너무도 광범하고 완강한 것임을 잊지 않는 일이 생각보다 쉽진 않다는 점이지만 말입니다.
철학 자체의 한계 뛰어넘기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근대철학은 단순히 시간적인 위치를 가리키는 게 아니란 것입니다. 근대라는 말 자체가 시기적인 구분이 포함된 것이어서, 그 말과 동시에 ‘전근대 → 근대 → 탈근대’의 계열을 연상하는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런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철학에서 지배적인 문제 설정이 역사적으로 나타났던 순서”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면 곤란합니다. 이를테면 그런 변화의 계열을 필연성을 갖는 ‘발전’으로 간주해선 곤란하다는 말입니다.
아도르노(Th. Adorno)의 말을 빌리면, 근대는 시간적인 범주가 아니라 어떤 질적인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근대철학’이란 말보다는 ‘근대적 문제설정’이란 말이 좀더 잘 보여주듯이, 근대철학이란 문제를 설정하고, 그것에 대답하기 위해 나름의 개념적 지반을 마련하여 문제를 풀어나가는 다양한 시도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어떤 질적인 특징입니다. 그것 역시 일종의 ‘가족유사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근대에는 전근대적인 철학이 사라질 것이며, 탈근대의 시기에는 근대적인 철학을 찾아보기 힘들 거라는 생각처럼 소박한 것은 없는 셈입니다. 마치 자본주의가 되면 봉건적인 것이 모두 사라지고, 또 사회주의가 되면 자본주의적 요소들이 자연히 소멸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살핌의 끝에서 우리는 새로운 살핌의 방향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경계선을 넘는 것은 새로운 사고의 영역을 여는 것이기 때문이며, 그 새로운 영역은 새로운 개념과 이론, 새로운 역사를 내부에 싸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계를 넘어서는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식을 비롯한 여러 가지 조건 속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각 사회에 ‘필요한’ 주체로 되어가는지, 혹은 특정한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주체로 만들어지는지를 연구하는 것 같습니다. 이를 제 식으로 표현하자면, 사회적 생산양식과의 관계 속에서 주체 생산방식에 대한 개념적이고 역사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이미 근대를 넘어서려는 사람들에 의해 그 기초가 마련된 것이어서 이런 식으로 제기하는 게 좀 새삼스럽다는 느낌도 없지 않습니다만, 하지만 드러난 모든 것을 반드시 볼 수 있는 건 아니란 점을 고려한다면 이런 식으로 매듭을 짓는 것도 단지 잉여적인 일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연구는 이미 철학 자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일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떠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어떤 요인들에 의해 사람들이 주체로 생산되는지를 연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근대철학에 연관된 지금까지의 고찰이 지시하는 다음의 연구 방향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는 또한 우리의 다음 연구 과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마 다시 ‘근대성’의 문제로, 또한 ‘맑스주의와 근대성’의 문제로 돌아가게 될 것 같습니다. 비록 근대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맥락은 매우 달라질 거라 해도 말입니다(이에 대해서는 제가 쓴 『맑스주의와 근대성』을 참조하시면 좋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