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디즘
정착민은 정해진 한 곳에 붙박혀 사는 사람들입니다. 유목민은 한 곳에 붙박히지 않고 여러 곳을 이동하며 사는 사람들이지요. 노마디즘, 혹은 유목주의란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의 가치, 하나의 스타일, 하나의 영토에 머물지 않고 반대로 그것들로부터 벗어나는 탈영토화 운동 속에서 사는 방식을 말합니다. “나의 전공은 사회학이야, 저건 나의 전공영역(영토!)이 아니니 내가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어!”하는 식의 태도는 하나의 영토에 머물러 살아가는 전형적인 정착민의 태도지요. 반면 반 고흐는 인상주의라는 새로운 스타일의 영토 안에서 그림을 그렸지만, 거기서조차 인상주의자들과 다른 방식으로 그들의 스타일을 변형시켜 사용하지요. 인상주의자들의 점묘적인 터치는 이제 색채적인 형상을 묘사하는 대신에 힘차게 운동하는 표현적인 선이 됩니다. 그것은 심지어 새로 도착한 영토에도 머물지 않고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유목민의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그렇게 새로이 만들어낸 것에도 머물지 않고 또 다른 탈영토화 운동을 향해, 자기와 다른 것들과 만나면서 자신을 이전의 자신과 다른 것으로 만드는(차이를 만드는!) 운동을 향해 열려 있을 때, 노마디즘이라는 말은 충분한 타당성을 갖겠지만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노마디즘은 새로운 영토를 만들거나 거기에 자리잡는 태도(재영토화)가 아니라, 머물고 있는 곳이 어디든 항상 떠날 수 있는 태도(탈영토화)를 말합니다. 즉 그것은 재영토화가 아니라 탈영토화에 의해 정의됩니다. 재영토화하기 위해 탈영토화하는 게 아니라, 탈영토화의 운동 안에서 잠정적으로 재영토화하는 것이라 말해도 좋겠습니다.
이를 들뢰즈와 가타리는 점과 선의 관계로 구별합니다. 사실 정착민도 이동하며, 유목민도 멈추기 때문에, 이동이나 탈영토화를 유목민에 대응시키고, 정지나 재영토화를 정착민에 대응시키는 것은 부적절합니다. 정착민은 예컨대 이사를 가거나 출장을 가는 사람처럼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이동합니다. 유목민 역시 사막의 대상들처럼 오아시스를 찾아서 이동하지만 그것은 오아시스에 머물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아시스는 다만 이동하는 궤적 가운데 통과하는 점에 불과하며, 따라서 얼마든지 다른 곳으로 대체될 수 있습니다. 반면 이사가거나 출장가는 사람이 목적지를 바꿀 수는 없지요. 어떤 경로를 취하는 목적지에 도달해야 합니다. 이동이 선을 그리고, 멈추는 곳이 점으로 표시됨을 안다면, 정착민의 경우에는 선이 점에 종속되어 있는 반면, 유목민은 점이 선에 종속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활동을 조직하는 방식에서도 양자는 구별됩니다. 정착민은 영토적으로 조직됩니다. 땅을 소유하거나 땅에 긴박되는 방식으로 정착민은 조직되지요. 가령 중세의 농민들은 토지에 매여 있었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었습니다. 아, 사회주의 국가의 인민들도 그렇다고 하지요? 영주들도, 호족들도 영토를 기반으로 자신의 ‘식솔들’을 조직하며, 영토적으로 구별되지요. 그러나 유목민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동하며 사는 것이 그들의 삶이기에, 영토를 할당하거나 소유하는 것은 무의미하거나 불가능합니다. 나아가 사람이나 동물의 이동의 흐름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말뚝을 박고 드나들 수 없는 벽이나 울타리를 치는 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토지를 소유한다는 것도 납득할 수 없는 것이지요. 이것이 유목민이었던 북미 ‘인디언’이 소유권을 주장하며 울타리를 치는 유럽의 이주자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였지요.
하지만 유목민 역시 활동이 조직되어야 하기에, 개체들을 집합적 단위로 묶는 조직의 방식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그들은 영토적 조직방식 대신 번호적 조직방식을 사용합니다. 10개의 가구를 묶어서 10호대로 만들고 아무 숫자나 하나 부여합니다. 마치 군대에서 소대니 5중대니 하듯이. 그런 10호대 10개를 묶어서 100호대를 만들고, 다시 아무 숫자나 부여하고, 그걸 다시 10개 묶어 1000호대를 만들어 아무 숫자나 부여하지요. 군대에서 3대대, 4사단 등으로 묶듯이 말입니다.
이는 몽골인들이 실제로 사용했던 방법입니다. 그리고 군대에서 사용하는 방식이기도 하지요. 영토 단위로 편성되어 그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과 달리 군대는 탈영토화 운동이 중요합니다. 적을 공격한다는 것은 자신이 머물던 영토를 벗어나 움직이는 운동인데, 지역적 조직 같은 영토적 조직으론 그에 걸맞는 운동을 만들 수 없습니다. 탈영토화 운동을 하면서도 집합적 움직임을 역동적이고도 안정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조직방식이 필요한 거지요. 유목민의 번호적 조직이 이런 이유에서 채택된 겁니다. 경찰이 정착적인 조직이라면, 군대는 유목적인 조직인 거지요. 물론 국가장치라는 정착적인 장치에 의해 포섭되고 이용되는 유목적인 조직이지만 말입니다.
정착민과 유목민은 공간을 구성하는 방식에서도 구별됩니다. 가령 유목민의 궤적은 정해진 경로를 가는 경우에조차 하나의 길을 그대로 밟아가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옆으로 벗어나면서 가고, 사정에 따라 가지 않던 길로 가기도 하며, 그래서 예정과 다른 엉뚱한 곳에 이르기도 합니다. 평면 위의 물이 어느 방향으로나 흘러갈 수 있듯이, 미리 정해진 하나의 길이 없습니다. 물이 막히면 돌아가듯이, 다양한 조건 속에서 삶의 흐름, 사람의 흐름이 흘러가는 대로 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유목민의 움직임은 흐름과 같습니다. 동시에 여러 방향으로 나아가는 소용돌이 같은 흐름, 유목민의 과학이 흐름을 다루는 유체역학인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모든 방향으로 동시에 나아갈 수 있는 공간, 이것이 바로 유목민의 공간이지요. 이를 ‘매끄러운 공간’이라고 부릅니다.
반면 정착민은 농사를 짓기 위해서든, 수해를 막기 위해서든 아무 곳으로나 흘러가는 흐름을, 범람하는 물의 흐름을 그대로 방치하지 못합니다. 홈을 파고 수로를 만들어, 그 홈을 따라서만 흘러가게 합니다. 사람들의 흐름이나 삶의 흐름 역시 동일합니다. 흐름의 반복적 행로가 만든 길에 만족하지 못하여, 길에다 돌을 깔고 테두리를 세워 도로로 만들지요. 울타리를 치고 홈을 파서 정해진 시점과 종점을 잇고, 그 홈에 따라서만 사람들이나 삶이 흘러가게 만듭니다. 막히면 그대로 고이고 멈추고 마는 도시의 도로들이 그렇지요. 시위대의 흐름을 정해진 도로로 제한하는 경찰의 역할, 사고의 흐름을 정해진 ‘도로’로 제한하는 학자들의 역할, 삶의 흐름을 먹고 살기 위한 노동으로 제한하고 포섭하는 자본가들의 역할, 이 모두가 흐름의 범람을 막기 위해 홈을 파는 정착적인 메커니즘을 이루고 있는 겁니다. 이처럼 흐름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을 ‘홈 패인 공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유목은 떠돌면서 사는 방랑이나 방황이 아닙니다. “세상을 버리고서 길 떠나는” 슈베르트의 나그네는 어디를 가도 실연의 상처를 잊지 못한 채 방랑하지요. 형수가 되어버린 애인을 잊지 못해, 칼 하나 들고 강호를 넘나들고 사막을 돌아다니지만 마음은 언제나 그 여자가 있는 곳에 매여 있는 「동사서독」의 구양봉은 떠돌고 방랑할 때조차 한 곳에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 유목민이 아닙니다. 상처에 매여 새로운 삶을 시작 할 수 없는 사람, 상처로 인해 마음을 닫고 욕망의 흐름이 그 상처 주변을 맴돌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떠돌아다녀도 유목민이 아닙니다. 상처만은 아닙니다. 파우스트를 사로잡았던 아름다운 순간과도, 혹은 명예와 부, 사랑으로 빛나던 찬란한 영화의 순간과도 언제든지 이별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이 없이는 유목민이 될 수 없습니다.
유목민과 다 쓴 땅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이주민을 혼동해선 곤란합니다. 오히려 유목민은 사막이나 초원처럼 불모의 땅이 된 곳에 달라붙어 거기서 살아가는 법을 창안하는 사람들입니다. 가령 사회주의 체제의 해체 이후 불모가 된 맑스주의를 떠나서 다른 이념이나 ‘주의’로 이주하는 것과, 그 불모가 된 땅에 달라붙어 새로운 사유를 시도하며 다시 혁명을 꿈꿀 수 있는 새로운 이론과 사상을 창안하는 것은 극히 다른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이주민과 유목민의 차이지요. 유목민은 떠나는 자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새로운 것을 창안하고 창조하는 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와 기타리는 “유목민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역설적인 명제를 제시하지요. ‘앉아서 하는 유목’이란 역설적 개념 역시 이런 맥락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새로운 가치의 창안, 새로운 삶의 방식의 창조, 그것을 통해서 낡은 가치를 뒤집고 낡은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는 탈주선을 그리는 것, 그게 바로 노마디즘의 요체입니다. 그것은 낡은 가치에 대한 ‘전쟁’이고, 지배적인 삶의 방식에 대한 ‘전쟁’입니다. 그것은 니체 말대로 ‘포연 없는 전쟁’이지요. “좋은 전쟁에서는 화약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탈주선을 그리려는 욕망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능력을 상실했을 때, 그러면서도 낡은 가치, 기존의 세계에 대한 혐오의 정염만을 키워가게 될 때, 그것은 그저 화약냄새로 가득찬 ‘나쁜 전쟁’으로 전환되고 말지만 말입니다. 이 경우 필경 탈주선은 죽음의 선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탈주선을 그리지 않은 것만도 못한 게 되고 마는 거지요. 노마디즘의 긍정적 태도는 극단적 부정의 절망적 색깔로 변색되고 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탈주선이 일차적이라고, 혹은 탈주적인 욕망이 일차적이라고 하는 말의 의미는, 탈주란 낡은 것의 파괴와 부정(낡은 것, 권력 다음에 오는 이차적인 것이란 의미!)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창안하고 창조하는 긍정을 뜻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낡은 것의 부정이나 파괴는 그러한 긍정의 결과 뒤따라 나오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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