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과 진리의 변증법
그러면 이러한 관점에서 헤겔은 진리 문제에 어떻게 대처할까요? 이와 관련해 우리는 헤겔이 말하는 지식과 진리의 변증법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헤겔에게 현실은 주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요? 다시 말해 인식의 대상은 주체 내부에 있는 것입니다. 이를 의식 내부에 있는 거라고 표현하지요. 이러한 사고법은 피히테에게서 발견되는 것과 유사합니다. 모르는 것을 먹을 대상이라고 생각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만을 먹을 수 있고,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만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헤겔은 지식을 “대상에 대한 주체의 연관”이라고 정의합니다. 물론 이것은 의식 내에서 만들어지는 연관입니다. 그렇지만 피히테와 달리 헤겔은 대상을 정립하는 게 곧 진리는 아니며, 따라서 지식이 진리는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지식이 진리인지 아닌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칸트라면 여기에 개개의 지식이나 개개의 인식 이전에 존재하는 선험적 인식 능력을 기준으로 제시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헤겔은 인식 이전에 (진리의) 인식능력을 안다는 것은 물에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으면서 수영을 할 줄 안다는 것처럼 어불성설이라고 합니다. 헤겔에 따르면 지식에 대한 평가기준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의식(시대의식)에 의해서만 마련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로써 헤겔은 지식에 대한 역사적 평가의 장을 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역사적 의식 속에서 진리 여부를 평가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지구의 운동에 대한 물리학자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는 무엇으로 평가해야 할까요? 헤겔이 살던 19세기라면 당연히 뉴턴의 고전 물리학이 그 평가기준이 될 것입니다. 반면 중세 초기였다면 천동설이란 지식이 그 평가기준이 되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진리의 기준은 이미 성립한 하나의 지식이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때그때 이미 옳다고 간주되는 지식이 말입니다. 헤겔은 스피노자의 말을 빌려 진리는 이미 가지고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알다시피 지식은 진리와 동일시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중세에는 천동설이 진리였고, 19세기에는 고전물리학이 진리였다고 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악순환에 접하게 됩니다. 지식의 평가는 진리를 기준으로 하는데, 이 기준은 지식이 제공한다는 악순환!
이 악순환은 앞서 우리가 근대적 문제설정의 딜레마라고 부른 것에서 연유하는 것입니다. 대상과 개념의 일치(진리됨)를 확인하고 보장해줄 믿을 만한 재판관이 있을 수 없다는 딜레마 말입니다. 그런데 헤겔은 이 딜레마를 빠져나갈 묘책을 강구합니다.
진리는 분명히 지식과 다르기에 대상-지식 관계의 외부에 자리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대상 자체가 의식 내부에 있는 거라면, 대상과 개념의 일치로 정의되는 진리 또한 의식 내부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대상도 개념도 모두 의식 내부에 있기 때문이지요. 요컨대 진리는 지식의 외부에 있지만, 의식 내부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식 내부에 지식과 지식을 평가하는 기준이 모두 들어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의식은 자기 내부에 진리의 기준을 가지고 있으며, 바로 의식이 이 기준으로 지식을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그 지식은 대개 그 시대에는 진리로 간주되던 지식이 되겠지요. 결국 의식이 발전함에 따라, 진리의 기준이 되었던 지식 자체도 의식이 스스로 검사하고 다시 평가한다는 말이 됩니다.
이는 의식 자신이 갖고 있는 기준을 의식 스스로 다시 검사한다는 점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입니다(‘자기의식’). 결국 진리란 이처럼 자신이 갖고 있는 기준 자체를 돌이켜 검사하고 정정해 가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란 의식 혹은 “정신 자신의 내적인 관계”라고 말합니다.
헤겔에게 이 의식이나 정신이란 어떤 개인의 의식이나 정신을 가리키는 게 아님은 앞서 말했지요. 그것은 스스로 운동하는 절대자요 절대정신입니다. 따라서 헤겔은 진리란 절대정신의 자기의식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절대정신이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진리의 기준을 계속 정정해 가는 과정이란 뜻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를 확인하고 보증해 주는 것은 발전해 가는 절대정신 자신인 것입니다.
▲ 페루 마추픽추의 잉카 문명 유적
사실 다른 피부, 다른 모습을 가진 인종에 대한 두려움은 어디서나 발견된다. 그러나 그것을 이성과 비이성,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적 ‘대립’으로 포착하여 배제해야 할 어떤 것으로 보거나 아니면 계몽시켜 동일화시켜야 할 것으로 보는 것은, 더구나 그것을 철학으로까지 ‘승화’시킨 것은 서구 근대문명에 독특한 요소다.
그런데 거기에는 약간 곤란한 문제가 있다. 인도나 중국의 거대한 문명은 물론, 야만족이라고 생각해서 노예로 부리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던 아메리카 인디언에게도 마야ㆍ아즈텍ㆍ잉카 같은 거대한 문명의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서구와는 다른 종류의 이 이질적인 문명은 과연 문명인가 야만인가? 마야인들은 살아 있는 사람의 심장을 제물로 바친다는 이유로 야만으로 규정되었다. 하지만 자신들과 너무도 다르지만 ‘문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저 이질적인 세계를 대체 어째야 할 것인가?
헤겔은 여기에 묘안을 제시한다. 그것은 미개와 야만에서 문명과 이성으로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중간 단계들이요 역사적 형태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담과 이브에서 시작해 서양 근대세계로 끝나는 이성의 역사적 발전 안에, 저 이질적인 세계들을 발전 단계에 따라 시간적으로 배열한다. 그리고 그것을 ‘역사철학’이라고 불렀다. 이런 점에서 헤겔식의 역사철학이란 발전이라는 관념을 이용해 이성이 정점에 자리잡은 역사 안에 이질적인 세계를 담는 방법이었던 셈이고, 따라서 결국 ‘발전’하면 서구의 문명을 닮게 되는 ‘동일화’ 과정임을 입증하는 방법이었던 셈이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