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로크 : 유명론과 근대철학
로크의 입지점
알다시피 로크는 경험주의를 하나의 사조로, 흐름으로 만들어낸 사람입니다. 이러한 로크의 철학을 떠받치고 있는 두 개의 지반이 있습니다. 하나는 데카르트가 새로운 장을 열었던 근대철학의 문제설정입니다. 신에게서 독립한 주체, 그래서 존재ㆍ인식ㆍ가치의 새로운 중심이 되었던 근대적 주체가 로크 철학에서도 마찬가지로 가장 중요한 지반이 됩니다. 진리라는 인식의 목표 역시 마찬가지지요.
다른 한편 그는 갈릴레이, 뉴턴, 호이겐스 등이 이룩한 과학혁명의 획기적 효과 속에서 사고했습니다. 즉 근대 초의 과학혁명이 로크의 사상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제 과학은 진리에 이르는 가장 커다란 길, 어쩌면 암묵적으로는 유일한 길로 간주됩니다. 데카르트가 기초를 닦아놓은 과학주의가 탁월한 과학자들의 성공적인 작업으로 인해 반석 같은 위치를 얻게 됩니다.
따라서 로크는 과학 발전을 가로막는 허구적인 원리나 개념, 사고 등을 제거하는 ‘청소부’로서의 역할을 자임합니다. 이런 관점에 선 그에게는 경험과 관찰만이 과학에 이르는 유일한 길로 보였습니다. 다시 말해 경험과 관찰이야말로 과학에 이르는 왕도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흔히 ‘경험주의’라고 부르는 것이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영미 철학에선 주류를 이루는 입장입니다.
이처럼 경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입장은 똑같은 과학주의라고 해도 데카르트와는 크게 다른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알다시피 경험과 관찰의 불확실성을 지적하면서, 오히려 이성에 내재해 있는 본유관념과 그것에 의거한 연역적인(예컨대 수학적인) 지식이 우리로 하여금 진리에 이르게 하리라고 생각했지요.
반면 로크의 생각은 경험이나 관찰에 의하지 않은 지식이나 개념, 예컨대 신학적인 우주론은 오히려 올바른 관찰에 입각한 과학적 지식의 발전에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선 데카르트의 본유관념 역시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런데 앞서 우리가 유명론과 연관해서 얘기했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경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로크의 입장은 분명 유명론적 전통에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유명론자 오컴 역시 영국 출신이었습니다).
요컨대 로크의 과학주의는 유명론적 전통에 따르면서 데카르트와는 전혀 다른 고유한 흐름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렇지만 로크의 철학은 데카르트가 마련해 놓은 근대철학의 문제설정 위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요컨대 독립적인 인식주체를 축으로 삼아 신학적 사고에서 벗어났으며, 과학이란 이름의 진리를 목표로 삼아 추구하고 있는 근대적 철학입니다.
이런 점에서 중세적 유명론과는 전혀 다른 흐름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유명론과 근대적 문제설정의 결합을 통해 로크는 중세적 유명론과도, 데카르트 근대철학과도 다른 독자적인 흐름을 철학 안에 만들어낸 것입니다.
‘본유관념’ 없는 진리를 위하여
데카르트가 진리의 근거를 이성과 이성의 본유관념에서 찾았다는 것은 앞서 거듭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로크가 보기에 이런 본유관념이란 중세적이고 스콜라철학적인 잔재였습니다. 로크가 지금 있다면 이런 식으로 예를 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불을 찾아서」란 영화가 있지요. 불을 사용하던 원시인들이 불씨가 꺼지자 불을 찾아오라고 몇 사람의 대표를 보내고, 이들은 고생 끝에 불을 찾아옵니다. 그러나 원시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불을 물에 빠뜨려 꺼뜨리고 맙니다. 그런데 이때 주인공은 그걸 찾는 과정에서 배운 불피우는 법을 써서 불을 피우려고 하지요. 물론 잘 안 되어, 그걸 가르쳐준 여자가 대신 피워 주지요.
불을 피울 줄 몰랐던 원시인이라면 어디엔가 있는 불을 찾아 쓸 줄밖에 몰랐을 것이고, 따라서 불이란 누가 준 선물처럼 생각했을 겁니다.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 몰래 가져다 준 선물이 바로 불이었다는 식의 신화가 보여주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도 보여주지만, 불이란 신이 우리에게 준 선물(본유관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불이 나는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고 경험함으로써 배운 것입니다.
좀더 정확한 예를 들어 봅시다. 제가 들은 바로는 부시맨은 수를 8인가까지밖에 세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걸 넘는 수는 그냥 ‘많음’인 거지요. 비단 부시맨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그런 시절이 있었을 겁니다. 숫자가 만들어지고 그것을 써서 수학적 계산을 하기 시작한 것은 길게 잡아야 5000년 정도 전입니다. 그럼 그 이전에는 어땠겠습니까? 있어봐야 ‘적다’/ ‘많다’ 정도 아니면 ‘하나’/ ‘다수’ 정도 아니겠습니까?(이게 지금까지도 언어상에 남아 단수/복수라는 형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산수와 같은 매우 자명해 보이는 수학적 지식 역시 타고난 것이라고 하기는 힘들다는 게 로크의 생각입니다. 따라서 로크는 어떠한 본유관념도 있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는 어린 아기나 야만족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반면 우리의 지식은 모두 경험의 산물이라고 합니다. 만약 데카르트처럼 경험 이전에 이성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건 틀림없이 ‘백지’(tabula rasa)일 거라고 합니다.
로크가 보기에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완전한 개념’은 신이 준 것이 아니며, 타고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경험에서 추출된 것이며, 불완전한 모습들을 관찰하여 불완전성을 제거하고 완전한 모습을 그려낸 것일 뿐이라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편은 단지 개별에서 추상된 것이며, 그 공통된 특징에 붙인 이름일 뿐이라는 유명론의 논지와 유사함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로그는 모든 보편 개념(일반 개념)은 우리의 사고가 만들어낸 것이며, 다만 이름으로서 의미를 가질 뿐이라고 합니다. 그는 단순관념과 복합관념을 나누는데, 단순관념은 저 누런 금속을 보고 금이라고 판단하거나 ‘노랗다’고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복합관념은 우리의 사고가 이 단순관념들을 결합해서 만듭니다. ‘금’이라는 단순관념과 ‘산’이라는 단순관념을 결합해 ‘황금산’이란 관념을 만드는 경우가 이에 해당됩니다.
단순관념은 사물에 의해 자극되어 만들어집니다. 반면 복합관념은 단순관념들을 오성(understanding)이 결합해서 만듭니다. ‘신’이나 ‘인간’과 같은 보편 개념은 모두 복합관념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의 오성(깨닫는 능력)이 만들어내는 것이며,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명목적인 것입니다.
보다시피 로크는 데카르트의 본유관념과 이성/진리의 개념, 보편 개념에 대해 유명론의 입장에서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런 반박을 통해 로크는 본유관념을 끌어들이지 않고도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음을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경험과 관찰에 입각한 지식이 바로 그것이지요.
로크의 딜레마
그런데 로크는 곧 딜레마에 빠집니다. 이는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 데 하나는 실체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진리에 관한 것입니다.
첫째로 실체에 관한 것. 로크는 경험을 통해 우리의 감각은 대상에 대한 지식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로크가 환각이나 착각에 의한 경험을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경험을 통해 ‘나’를 자극하는 요인이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내가 어떤 사물을 보고 ‘빨갛다’고 지각했다면, 나로 하여금 빨갛다고 생각케 한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만약 그게 없다면 나는 착각한 거거나 꿈을 꾸고 있는 거겠지요.
물론 경험이나 관찰한 바가 잘못되어서 나중에 수정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혹은 그게 원래 빨간 건지, 아니면 다른 건데 우리가 그렇게 감각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마치 태양이 무슨 색인지 모르지만 대개는 노란색으로, 때로는 주홍색으로 보이듯이 말입니다. 내가 노랗다고 하건 벌겋다고 하건 태양이 있음엔 분명하다는 겁니다.
이처럼 로크는 ‘빨갛다’ ‘노랗다’ 같은 단순관념을 야기하는 것을 ‘물질적 실체’라고 합니다. 이 물질적 실체(예를 들면 태양)가 우리(주체)의 감각을 자극해서 단순관념(‘빨갛다’ ‘노랗다’)이 생기도록 한다는 거지요. 물론 이 물질적 실체는 우리가 어떻게 경험하든 불변인 채 있을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경험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이며, 우리의 감각적 경험 외부에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 태양을 보면 언제나 태양으로 인식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같은 걸 보고서 언제는 태양이라고 했다가, 언제는 찐빵이라 하고, 또 언제는 농구공이라고 해서는 올바른 인식이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인식의 불변적인 주체를 로크는 또 하나의 실체라고 합니다. 이건 ‘정신적 실체’지요.
결국 로크는 물질과 정신이라는 두 개의 실체를 받아들입니다. 이 두 개가 없으면 어떠한 올바른 지식도, 진리도, 과학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똑같은 걸 보고서 언제는 태양이라고 했다가, 또 언제는 찐빵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진리나 과학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또 물질적 실체(태양)가 없는데 마치 있는 것처럼 노랗다고 하거나 빨갛다고 한다면, 꿈과 과학(진리) 간에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을 나누는 근대철학 안에서 로크처럼 진리로서의 과학을 추구하려 하는 한, 물질적 실체를 끌어들이는 것은 불가피한 일처럼 보입니다. 결국 데카르트 비판에서 시작한 로크는 아이러니하게도 데카르트의 주장으로 되돌아온 겁니다. ‘실체’ 같은 보편 개념은 오직 이름일 뿐이라는 유명론에서 시작해, ‘실체’가 없어선 안 된다며 두 개의 실체(물질과 정신)가 있다는 ‘반유명론적인’ 주장으로 되돌아온 겁니다.
둘째로 진리에 관한 것, 이는 ‘제1성질’에 관한 것입니다. 예컨대 태양의 수가 몇 개인가 생각해 봅시다. 제가 면밀히 관찰한 바에 따르면 태양은 하납니다. 혹시 다르게 생각하시는 분 있나요? 여기에는 없는 것 같군요. 그럼 지금 이 강의실의 온도는 어떤가요? 저는 따뜻하다고 경험합니다. 저분은 추워 보이는군요. 다른 분은 춥진 않지만 썰렁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겁니다. 혹시 덥다고 느끼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즉 이 강의실의 온도는 사람마다 다르게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춥다고 경험한다 해서 그를 비웃을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태양이 두 개라고 경험하시는 분이 있다면 다른 모든 사람은 그가 농담을 하고 있거나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할 겁니다. 태양의 숫자를 경험하는 것이나 이 방의 온도를 경험하는 것이나 ‘경험’하기는 마찬가진데, 왜 이토록 달라지는 걸까요?
이에 대해 로크는 말합니다. 이 방의 온도는 그걸 느끼는 주체에 따라 달라지는 성질이지만, 태양의 숫자는 주체와 상관없는 성질이기 때문이라고, 이처럼 주체에 따라 다르게 경험하는 성질을 그는 ‘제2성질’이라고 하고, 주체에 상관없는 성질, 즉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느끼는 성질을 ‘제1성질’이라고 합니다. 제2성질은 경험 안에 있지만, 제1성질은 물체 자체에 속하는 성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진리가 가능한 것은 바로 이 제1성질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인식과 대상은 일치할 수 있고,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지식인 진리가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봅시다. 제1성질은 어떻게 해서 진리를 제공해줄 수 있는 걸까요? 우리가 제1성질을 동일하게 경험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요? 로크에 따르면, 그건 사물에 속하는 성질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즉 사물들은 그런 성질을 타고난다는 겁니다. 따라서 제1성질은 사물이 갖는 일종의 ‘본유성질’(타고난 성질)인 셈입니다.
로크는 데카르트의 본유관념을 유명론의 입장에서 비판하며 주체로부터 본유관념을 떼어냅니다. 그러나 진리가 가능하다는 걸 주장하기 위해서 그는 그 성질(타고난 성질)을 사물들에게 돌려줍니다. 제1성질이라는 ‘본유성질’로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비록 뒤집힌 형태로지만, 다시 데카르트의 주장으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유명론에 반(反)하는 주장으로 말입니다.
유명론의 근대화
앞서 우리는 로크의 경험주의가 두 가지 지반 위에 서 있다고 말했습니다. 표면상으로 그것은 근대철학과 과학주의였지만, 사실상은 근대철학과 유명론이었음을 보았습니다.
중세에 유명론은 보편 개념이 실재한다는 주장의 반론으로 제출되었고, 실재하는 것은 개별자라는 ‘존재론적’ 성격의 사상이었습니다(중세에 별도로 존재론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성격은 존재론이라고 나중에 불리는 것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따옴표를 쳐 ‘존재론적’이라고 한 것입니다). 보편자에 대한 개별자의 우위를 주장하는 ‘존재론’이었지요. 그것은 신학적 문제설정 속에 있었으나, 본질적으로 신학과는 화해하기 힘든 것이어서 끊임없이 신학과 충돌하고 억압받기도 했습니다.
반면 로크에 이르러 유명론은 근대적 문제설정에 포섭되게 됩니다. 인식주체가 신에게서 독립해 있고, “이 주체가 진리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가?”라는 문제의식 속에서 개별적 사실들에 대한 관찰과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죠. 이런 점에서 유명론은 ‘인식론’적 성격의 사상이 됩니다.
따라서 로크의 철학은 ‘유명론의 근대화’ 혹은 ‘근대화된 유명론’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경험주의란 바로 근대화된 유명론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유명론이 중세에는 신학과 충돌했다면, 이제는 근대철학의 과학주의와 충돌하게 됩니다. 로크는 근대적 문제설정 속에서 근대과학의 기초를 유명론을 통해 마련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앞서 본 것처럼 로크 역시 (인식)주체에서 출발하여 진리에 도달하려고 하는 근대적 문제설정 안에 서 있었고, 그러한 근대적 문제설정 안에서 과학이란 ‘대상과 일치하는 지식’임을 보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 로크는 물질과 정신이란 실체를 다시 끌어들여야 했고, 진리가 가능함을 보증하기 위해 ‘제1성질’을 만들어내야 했습니다. 이러한 실체와 제1성질이 유명론의 사고방식과 정면에서 충돌한다는 것은 앞서도 말한 바입니다.
이는 결국 근대적 문제설정(특히 과학주의)과 유명론 사이의 갈등과 대립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로크로선 어느 것 하나를 취할 수 없게 만드는 딜레마의 정체였습니다. 다시 말해 로크가 처한 딜레마의 요체는 유명론과 근대적 문제설정(과학주의) 간의 긴장에서 비롯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유명론이 근대적 문제설정 속에 포섭됨으로써 생기는, 근대화된 ‘유명론’의 내적 긴장이요 ‘모순’이기도 합니다. 이 모순은 이후 버클리와 흉을 통해 경험주의 사상이 발전하면서 더욱 증폭됩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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