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언어학의 기착지
소쉬르의 언어학을 가장 적극적으로 발전시킨 사람들은 흔히 ‘프라하학파’라고 불리는 언어학자들입니다. 야콥슨(R. Jakobson)과 트루베츠코이(N. Troubetzkoy)를 필두로 하는 이들의 이론은 대개 ‘구조주의 언어학’이라고 불립니다. 특히 야콥슨은 2차 대전으로 인해 미국에 망명해 있던 레비-스트로스와 같은 학교에서 지내면서, 레비-스트로스에게 매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나중에 다시 다루겠지만, 바로 레비-스트로스를 통해 이제 구조주의 언어학의 방법론과 사고방식은 언어학을 넘어 인문-사회과학의 다양한 분야로 흘러들어 갑니다. 여기서는 일단 우리 주제와 관련해 야콥슨의 이론적 입장을 최대한 간략히 살펴보고, 그 특징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첫째, 기호의 구조를 인간의 기호사용 능력으로 환원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소쉬르를 다루면서 결합관계와 계열관계를 얘기했지요? 거기서 우리는 “먹었다”란 말을 예로 사용했습니다. 이때 “먹었다”라는 단어는 단지 하나의 단어만이 아닙니다. 먹었다면 무엇인가를 먹었을 거고, 또 누군가가 먹었다는 게 함축되어 있는 거니까요. 다시 말해 ‘먹었다’라는 말에는 ‘누가 무엇을’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는 ‘먹었다’라는 말이 그와 인접한 다른 단어들을 대표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이처럼 ‘인접성’을 갖는 기호들이 하나의 기호로 표현되는 경우를 야콥슨은 ‘환유’(metonymy)라고 합니다. 연기를 보면 불을 떠올리듯이, 서로 가까운(인접한) 관계여서 하나를 보면 다른 것을 알 수 있을 때 단어는 생략될 수 있다는 거지요.
한편 “먹었다”라는 말은 “무엇을”이란 목적어를 갖습니다. “무엇”의 자리에는 밥이 올 수도 있고, 빵이 올 수도, 물이 올 수도 있습니다. 요컨대 유사성을 갖는 다른 단어들이 선택되고 대체되어 사용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처럼 ‘유사성’을 갖는 기호들이 선택ㆍ대체되는 관계를 아콥슨은 ‘은유’(metaphor)라고 부릅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언어의 두 가지 측면을 요약하고 있습니다(「언어의 두 측면과 실어증의 두 유형」, 『일반언어학이론』), ‘사과’라는 말로 ‘사랑’이라는 기호를 표시하는 경우 역시 은유의 예지요.
소쉬르의 결합관계와 계열관계가 언어의 구조를 뜻하는 것이었다면, 야콥슨의 은유와 환유는 기호를 사용하여 문장을 구성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는 실어증에 대한 그의 분석을 보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언어의 두 측면과 실어증의 두 유형」,에서 야콥슨은 은유와 환유라는 두 개의 축에 따라 실어증을 두 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칼’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여러분들은 무엇을 떠올립니까? 아마 여러분 중에 ‘죽음’ ‘공포’ 혹은 ‘강도’ 등등을 떠올리는 분이 계실 겁니다. 이는 ‘칼’이란 말에서 칼과 인접해 있는 다른 것들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접성 연관입니다. 이런 분들은 자신의 사고구조가 환유적이라고 보면 됩니다. 한편 ‘칼’이란 말을 듣고 ‘못’이나 ‘송곳’ ‘포크’ 등등 칼과 ‘유사’한 것들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유사성 연관입니다. 이런 분들은 은유적인 방식으로 사고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어증에도 이런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유사성 연관이 파괴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인접성 연관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유사성 연관이 깨진 사람은 예를 들어 ‘남편 없는 여자’를 표현하기 위해 ‘과부’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못합니다. “네 말대로라면 저 여자는 과부란 말이지?”라고 물으면, “아니, 그 여자는 남편 없는 여자야”라고 대답하는 경우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겁니다. 이런 유형의 실어증 환자는 유사한 단어를 찾아내 설명하거나 치환시킬 줄 모릅니다. 그리고 이 증상이 심해지면 환유적인 문법구조만 남게 되어 다른 단어는 다 잊어버리고 접속사만 남습니다.
반면 인접성 연관이 깨진 사람이 있다면, 그는 명제를 구성해내지 못합니다. 그는 단지 한 단어를 비슷한 다른 단어로 대체하는 것만 할 수 있지요. 예컨대 “과부는 밤에 외롭다”와 같은 명제를 만들지 못합니다. 특히 접속사를 잘 사용하지 못하지요. 다만 유사한 다른 단어를 찾거나 비유를 할 뿐입니다. 과부는 ‘미망인’이고, ‘남편 없는 여자’고 등등으로 말입니다.
이것은 언어를 구성하는 능력이 인간의 사고 안에, 즉 인간의 뇌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쉬르가 생각했던 언어의 구조가 야콥슨에 이르면 인간의 선험적인 언어사용 능력이 됩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것이며, 언어를 사용하기 이전부터 갖고 있는 것이고, 그것이 깨지면 사고하거나 판단하는 게 불가능해지는 그런 능력이지요.
이것은 인간이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기호나 기호의 망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선 적극적인 측면을 갖습니다만, 동시에 또 하나의 선험적 주체를 가정 ― 물론 주체라는 말을 쓰지는 않지만 ― 하는 효과를 갖습니다. 즉 소쉬르의 언어학이 갖고 있는 칸트주의적 요소를 더욱 확대하는 것이죠. 이런 점에서 야콥슨은 훔볼트의 칸트주의에 근접하는 셈입니다. ‘주체 없는 주체철학’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나중에 레비-스트로스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되는 특징입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소쉬르조차 야콥슨을 통해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리고 야콥슨의 영향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에 이런 측면은 결코 사소하지 않은 특징이 됩니다.
다른 한편, 야콥슨은 소통(communication)학자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소통이론의 관점에서 언어학과 시학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킵니다. 「언어학과 시학」이란 논문에 나오는 다음 도식은 매우 유명합니다.
상황 | ||||
발신자 | ―― | 전언 | ―― | 수신자 |
접촉 | ||||
코드 |
이 그림에 기초해 그는 언어의 여섯 가지 기능을 정의하지요(이는 그냥 넘어갑시다). 여기서는 소통이론에 따르면, 발신자와 수신자가 있고, 전해야 할 메시지(전언)가 있다는 데 주목합시다. 그리고 메시지를 만들거나 전달된 메시지를 해독할 ‘코드’가 있습니다. 이런 도식에서 언어는 어떤 의미를 있는 그대로 전달해 주는 수단이고, 그로 인해 메시지는 수신자에게 전달되며, 코드는 그런 전달 가능성을 미리 확보해 주는 조건입니다.
결국 이런 요소들은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보편적인 요인들이고, 언어학은 이런 보편적-과학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학문이 됩니다. 여기서 진리는 메시지의 참뜻, 즉 발신자가 수신자에게 보내려 한 의미고, 그걸 받아보는 수신자는 진리를 읽어내는 자가 됩니다. 코드는 메시지에서 진리를 읽어내는 수단이며, 결국 진리가 소통구조 전체에서 목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이러한 이론적 구조에서 진리 주위를 맴도는 근대적 과학주의를 읽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요컨대 야콥슨의 언어학은 특이한 방식으로, 소쉬르 언어학을 근대적인 주체철학과 과학주의의 방향으로 끌고 나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소쉬르 안에 있는 근대적 요소와 탈근대적 요소 가운데 전자를 확대하면서 후자를 약화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