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 주체의 재건②
‘지성’이란 분별하는 능력(분별력)입니다. 크다, 작다, 하나다, 다수다, 필연적이다, 우연적이다 등의 ‘범주’를 통해 대상의 성질을 구별해내고 그것들을 결합해서 “나무를 비비면 불이 난다”는 판단을 만들어내는 능력인 거죠. 그런데 이런 능력이 활동할 수 있으려면, 그래서 경험에서 어떤 판단을 이끌어낼 수 있으려면 최소한 범주가 있어야 한다는 게 칸트의 생각입니다. 이 범주가 없다면 사물을 비교하는 것도, 사물들의 연관(필연적이다. 우연적이다 등등)을 찾아내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따라서 범주는 경험보다 먼저 있어야 하며, 경험에 좌우되는 게 아니라 경험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판단하는 데 필수적인 최소한의 범주를 칸트는 12개로 나누어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범주로 인해 인간은 법칙을 인식하고 사물들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언제나 있는 것이며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공통되기 때문에 인간은 공통된 판단 혹은 공통된 인식에 도달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진리에 이를 수 있다고 합니다. 이래서 칸트는 범주를 ‘선험적인 지성형식’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지성’의 수준에서는 범주야말로 _에 들어갈 말인 셈입니다.
감성만으론 느낄 순 있어도 판단할 순 없습니다. 지성만으론 인식할 자료가 없기 때문에, 느끼지도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이래서 칸트는 “지성 없는 감성은 맹목적이고, 감성 없는 지성은 공허하다”고 말합니다. 즉 감성과 지성이 결합해야 인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인식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감성을 통해 시작한 인식은 지성을 통해 ‘이성’에 다다릅니다. 이때 ‘이성’은 인간의 이성이란 말이나 이성주의라는 말과는 달리, ‘하나의 원리로 통일시키는 능력’이란 뜻을 갖습니다. 이는 칸트만의 고유한 개념입니다.
‘이성’은 경험을 넘어서, 하나의 원리로 다양한 경험들을 통일시켜 파악하려는 욕구를 갖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근본적인 데까지 밀고나가는 성질’을 갖고 있는 겁니다. 예컨대 인간은 근본적인 원인을 찾으려는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부모님이 나를 낳았다는 것만으론 결코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은 누가 낳았고, 그들은 또 누가 낳았고……, 결국 근본적으로 모든 인간을 낳은 궁극적인 원인에 가 닿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생명의 신비함과 소중함을 깨달은 사람은 나무나 돌뿐 아니라 세상 모든 것에 생명이 있다는 식으로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을 확대하고, 그것을 통해 모든 것을 통일적으로 파악하려고 합니다. 이게 바로 이성‘이 하는 일이지요. 그리고 이런 ‘이성’의 형식을 ‘이념’이라고 합니다. ‘세계’ ‘자아’ ‘신’이 바로 그것이지요.
그런데 언제나 끝을 찾아나서다 보면 사고가 나게 마련입니다. ‘이성’ 역시 그렇습니다. ‘원인’이든 ‘생명’이든, 하나의 원리로 모든 걸 통일시키려다 보니 당연히 경험하지 못한 데까지 나아갑니다. 경험하지 못한 것을 하나의 원리로 설명하려다 보니 서로 상충되는 주장이 나타나며, 양쪽 다 옳다고 증명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예를 들면 “시간과 공간은 끝이 있다”와 “끝이 없다”는 두 개의 주장이 다 증명될 수 있습니다. 어디선가 시작한 시점이 없다면 시간을 말하고 시간을 재는 게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따라서 시간에는 시작하는 점(끝)이 있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어디엔가 시간이 시작하는 점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시점 이전에는 시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시간 이전에 시간과 다른 어떤 것이 시간 대신 있었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따라서 그 ‘시점’ 이전에도 시간은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시간은 끝이 없다고 하는 것도 옳은 것으로 증명됩니다.
이처럼 서로 상반되는 주장이 둘 다 옳다고 증명되는 경우를 칸트는 ‘이율배반’이라고 합니다. 그는 『순수이성 비판에서 이율배반의 예를 여러 개 드는데, 예컨대 물질의 더 쪼갤 수 없는 작은 단위는 있다/없다 등이 그것입니다. 이처럼 이성이 이율배반에 빠지는 것은 이성이 경험을 넘어서 하나의 원리를 추구하기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 이는 인간 이성(넓은 의미)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어떤 경험이나 인식도 피해갈 수 없으며, 또한 확실하고 선험적이라는 미덕을 갖고 있는 것들을 찾아낸 셈입니다. 선험적 감성과 선험적 지성이 그것인데, 이런 능력을 합해서 ‘선험적 주체’라고 부릅니다. 이는 관념이나 감각의 ‘다발’에 불과한 경험적 주체와 달리 모든 주체에 공통되며, 경험이나 감각에 좌우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좌우하며, 확실하고 항구적이라는 특징을 갖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어쩌면 경험적인 개인을 넘어서 있다는 뜻에서 ‘객관적 주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로써 칸트는 흄에 의해 해체되어 버린 근대적 주체를 ‘선험적 주체’라는 확고하고 튼튼한 것으로 되살려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