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 Ⅺ. 의미와 자유

건방진방랑자 2021. 7. 2.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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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I. 의미와 자유

 

 

혜시가 장자에게 말했다. “위나라 임금이 준 큰 박 씨를 심었더니 거기서 다섯 섬이나 담을 수 있는 박이 열렸다네. 그런데 거기다 물을 채웠더니 너무 무거워 들 수가 없었지. 쪼개서 바가지를 만들었더니, 깊이가 얕고 납작해서 아무 것도 담을 수가 없었네. 그래서 나는 그것을 무용하다고 생각해서 깨뜨려 버렸네.”

惠子謂莊子曰: “魏王貽我大瓠之種, 我樹之成而實五石. 以盛水漿, 其堅不能自擧也. 剖之以爲瓢, 則瓠落無所容. 非不呺然大也, 吾爲其無用而掊之.”

 

장자가 대답했다. “여보게 자네는 큰 것을 쓸 줄 모르는군. 송나라에 손이 트지 않게 하는 약을 만드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약을 손에 바르고 무명을 빨아서 탈색하는 일을 대대로 하였다네. 어떤 이방인이 그 말을 듣고 금 백 냥을 줄 터이니 약 만드는 비방을 팔라고 했지. 그러자 그 사람은 가족을 다 모아 놓고 의논하기를 우리가 대대로 무명을 빨아 탈색시키는 일을 했지만 기껏해야 금 몇 냥밖에 만져 보지 못했는데, 이제 이 약의 비방을 금 백 낭에 사겠다는 사람이 있으니 팝시다라고 하였다.

莊子曰: “夫子固拙於用大矣. 宋人有善爲不龜手之藥者, 世世以洴澼絖爲事. 客聞之, 請買其方百金. 聚族而謀曰: ‘我世世爲洴澼絖, 不過數金. 今一朝而鬻技百金, 請與之.’

 

그 이방인은 오나라 임금에게 가서 그 비방으로 유세를 했다. 마침 월나라 임금이 싸움을 걸어오자, 오나라 임금은 그 이방인을 수군의 대장으로 삼았다네. (왜냐하면 그 이방인에게는 물에서도 손이 트지 않게 하는 비방이 있었기 때문이지.) 결국 겨울에 수전을 벌여서 그 이방인은 월나라 군대를 대패시켰다네. 오나라 임금은 그 사람에게 땅을 떼어주고 영주로 삼았다네.

客得之, 以說吳王. 越有難, 吳王使之將. , 與越人水戰, 大敗越人, 裂地而封之.

 

손 트는 것을 막는 약은 마찬가지였는데, 한 쪽은 그것으로 영주가 되었고 다른 쪽은 그것으로 무명 빠는 일밖에 못했네. 사용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지. 자네는 어찌하여 다섯 섬을 담을 수 있는 박으로 큰 술통을 만들어 강이나 호수에 띄워 놓고 즐길 생각을 못하고, 깊이가 너무 얕아서 아무것도 담을 수 없다고만 걱정하는가? 자네는 아직도 쑥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네.”

能不龜手一也, 或以封, 或不免於洴澼絖, 則所用之異也. 今子有五石之瓠, 何不慮以爲大樽而浮乎江湖, 而憂其瓠落無所容? 則夫子猶有蓬之心也夫!”

 

 

 

 

 

1. 의미란 무엇인가?

 

 

1. 돌덩이와 고인돌

 

 

강화도에 가보면 커다란 돌덩어리가 하나 있다. 그 돌덩어리는 상당히 넓은 편편한 돌덩어리가 작은 돌덩어리들에 의해 받쳐져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어른으로서 우리는 그 돌덩어리가 고인돌이라는 것과 그것이 이전 선사시대 때 무덤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바로 그 순간 우리가 어린아이들이 칼싸움을 하느라고 그 고인돌을 오르고 뛰어내리는 것을 보게 되었다고 하자. 어른으로서 우리는 권위 있는 목소리로 얘들아! 거기서 뛰어놀면 안 돼!”라고 소리치기 마련이다.

 

도대체 왜 이런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는가? 그것은 돌덩어리에 대한 의미 부여가 어른과 아이들에게 각각 상이하기 때문이다. 어른에게 돌덩어리는 고인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반면, 아이들에게 돌덩어리는 놀이 공간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어른과 아이들의 갈등은 동일한 돌덩어리에 대한 의미 부여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강화도의 그 돌덩이는 천여 년 간 무의미한 돌덩이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다시 말해 천여 년 동안 그 돌덩이는 아이들이 부여한 대로 놀이 공간에 지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어느 날 일군의 학자들이 그 놀이 공간에 줄을 치고 발굴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푯말이 그 돌덩어리를 둘러싸고 있는 철망에 붙여진다. ‘고인돌: 선사 시대의 무덤.’ 이제 우리는 모두 그 돌덩이를 놀이 공간으로 보지 않게 되었다. 그 돌덩이는 이제 고인돌이라는 확정된 의미를 부여받게 되었고, 우리는 강화도를 방문해서 놀이 공간으로서의 돌덩이가 아닌 고인돌로서의 돌덩이를 보고 오게 된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우리는 고인돌이라는 의미를 먼저 알고, 그 고인돌이라는 의미에 부합되는 돌덩이를 찾아간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왜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에 대해서는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 돌멩이는 그저 무심결에 발에 차이고 비를 맞으며 아이들에게 망치로 쓰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돌멩이는 진정으로 어떤 의미도 없는 것일까? 그것은 선사시대 이전 인류가 문화를 갖추기 이전에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다. 또 그것은 선사시대 때 돌팔매질할 때 쓰였던 도구일 수도 있다. 또 삼국시대 때 산성을 이루던 돌덩이에서 쪼개진 것일 수도 있다.

 

다시 앞의 고인돌의 예로 돌아가 보자. 만약 아이들이 어른에게 죄송합니다. 저희들은 그것이 고인돌인 줄 몰랐어요.”라고 사과했다고 하자.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이들은 자신들이 그 돌덩어리에 대해 부여했던 놀이 공간이라는 의미를 포기하고 어른이 부여한 고인돌이라는 의미를 수용했다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아이들이 어른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공유할 때, 그들은 어른으로 자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에게는 이제 놀이 공간으로서의 돌덩이는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이처럼 아이들이 배운다는 것은 어른들의 의미를 공유한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아이들이 금속으로 만든 길고 가느다란 막대를 가지고 코를 파고 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아이들은 먼저 그 막대에 코를 파는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해야만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아이들을 혼내준다. “이놈아, 그것은 젓가락이야.” 다시 말해 그것은 반찬을 집을 때 쓰는 도구라는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2. 의미가 먼저이고 주체와 대상은 이후에 구성되는 결과물이다

 

 

우리는 보통 대상과 의미를 혼동한다. 엄격하게 말해서 대상은 사물 자체에 의미가 덧붙여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물 자체는 우리가 관념 속에서 어떤 대상으로부터 그것에 부여된 의미를 억지로 빼어냈을 때 확인된다는 점에서, 이것은 순수한 관념의 대상이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일체의 의미를 결여하고 있는 사물 자체를 생각할 수는 있지만 경험할 수는 없다. 이 말은 우리가 경험하는 일체의 대상은 모두 의미를 부여받은 것으로 경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쩌면 우리의 경험은 우리 자신이 이미 부여한 의미를 다시 확인하는 과정이라고까지 말할 수도 있다. 놀이 공간으로서의 돌덩이에서 놀이 공간이라는 의미를 빼는 순간, 우리에게 무엇이 경험되겠는가? ‘무의미가 경험된다. 이 말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무의미란 무경험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무의미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의미를 생산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점에서 무의미의 경험은 새로운 의미 생산의 가능 조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도 부여받지 않는 돌덩이는 사물 자체의 좋은 예일 수 있다. 이것에 놀이 공간이라고 의미가 부여되면, 우리는 아이가 되고 돌덩이는 놀이 공간이 된다. 그러나 이것에 고인돌이라는 의미가 부여되면, 우리는 어른이 되고 돌덩이는 선사시대의 유물이 되고 만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대상을 그것에 원래 의미가 내재해 있는 것처럼 경험한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해서 대상은 의미부여의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아가 우리 자신들도 의미의 결과물이라고 해야 한다. 놀이 공간이라는 의미가 놀이 주체를 아이로, 사물 자체를 놀이 공간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고인돌이라는 의미가 주체를 어른으로, 사물 자체를 선사시대의 유물로 만들어 버린다. 우리는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 즉 의미가 먼저이고 주체와 대상은 이로부터 구성되는 결과물이라고 말이다. 예를 들어 사랑이라는 의미가 발생하면, 타인은 연인이 되고 나는 사랑에 빠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 타인에게 사랑받을 만한 본성이 미리부터 있었던 것도 아니며 나에게 사랑할 수 있는 본성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이것은 모두 사랑이라는 의미가 발생한 후, 주체나 타자에게 그 의미를 확인하기 때문에 생기는 환상일 뿐이다.

 

고인돌이라는 의미가 부여된 대상은 이미 어른으로서의 나와 동시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다시 말해 고인돌이 선사시대에 있었다는 의미 부여는 이미 사회적 어른으로서의 내가 역사시대에 살고 있다는 의미 부여와 동시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주체와 사물 자체 사이에 의미가 발생하게 되면 주체는 특정한 주체(=의미 부여된 주체), 사물 자체는 특정한 대상(=의미 부여된 대상)으로 생산된다. 놀이 공간이라는 의미가 발생하게 되면, 주체는 노는 아이로 사물 자체는 노는 장소로 현상하게 된다. 반면 고인돌 혹은 선사시대의 유물이라는 의미가 발생하게 되면, 주체는 유물을 관람하는 어른으로 사물 자체는 선사시대의 무덤으로 현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우리의 추론이 옳다면, 우리는 새로운 주체가 가능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새로운 주체가 출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의미 부여가 불가피하게 요구된다. 그러나 새로운 의미 부여가 단순히 이렇게도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정도로 구성되는 것이라면, 새로운 주체는 제대로 만들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정도의 의미는 단지 현존하는 주체의 공허한 상상에 불과한 것이고, 따라서 주체는 여전히 기존의 고정된 의미에 사로잡혀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철학적 성찰에 따라 사람의 의미는 변한다

 

 

전통 유가사회에서 여성은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따라야만 한다고 의미 부여된 존재였다. 다시 말해 여성은 결혼하기 전에는 아버지의 말을 따라야만 하고 결혼해서는 남편의 말을 따라야만 하고 남편이 죽은 후에는 아들의 말을 따라야만 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여성은 남자의 말에 복종해야만 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결국 남자와 여자 사이를 매개하는 의미는 명령과 복종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지금 이런 고전적인 의미는 와해되어 가고 있다. 현대를 살고 있는 어떤 젊은 여성도 스스로에게 자신은 남자에게 복종하는 존재라는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정은 그 반대여서, 현대 여성들은 스스로를 남자와 마찬가지로 자율적인 인격체라고 의미부여한다. 이런 현대의 여성이 시집을 가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결혼을 하게 되면 현대의 여성은 시어머니라는 여성과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고부간의 갈등이다. 물론 이 말은 이전 시대에도 고부 간의 갈등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현대의 고부간의 갈등은 이전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왜 시어머니나 갓 결혼한 새댁이 동일한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갈등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시어머니가 현대 여성과 마찬가지로 생물학적으로는 동일한 여성성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현대 여성과는 완전히 다른 여성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어머니가 여성에 부여한 의미와 갓 결혼한 새댁이 여성에 부여한 의미가 상이하기 때문에, 고부간의 갈등은 자연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모든 갈등은 상이한 의미들 간의 충돌이라고 규정될 수도 있겠다.

 

역사는 의미의 변화가 아니라면 아무 것도 아니다. 고정된 의미 속에서 역사는 증발해버리고 만다. 태어나는 모든 인간이 자신의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동일한 의미들을 공유한다면, 역사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역사란 의미의 단절이 가능해야 존립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생물학적으로는 유사한 부모와 자식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부모와 자식 사이를 매개하는 의미가 변하지 않는다면 역사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아침에 일어나 부모님에게 문안 인사를 올리는 것이 부모님이 조부모님에게 했던 것을 반복하고 있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역사도 기대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의미가 주체와 대상에 내용을 부여하듯이, 의미의 변화는 주체의 실존양식의 변화와 대상의 경험양식의 변화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만약 누군가가 역사를 변화시키려고 한다면, 혹은 현존하는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의미를 총체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역사적이라는 수식어는 그래서 함부로 붙여서는 안 되는 말이다. 역사적 사건이란 표현은 새로운 의미를 도래하게 한 사건에 대해서만 사용되어야 하고, 또 역사적 인물이란 표현은 새로운 의미를 도래하게 한 인물에 대해서만 사용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는 역사적 인물이고 그의 자본론은 역사적인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마르크스와 자본론이전의 노동자와 그 이후의 노동자는 전혀 다른 노동자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와 자본론을 통해서 노동자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 주체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이전의 노동자가 어떤 착취에도 불구하고 노동을 해서 임금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본가의 착취와 탄압을 달게 견디어 냈다면, 자본론이후의 노동자는 자신들의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요구했으며 자신도 자본가와 마찬가지로 동등한 인권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스스로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마르크스와 자본론이 전적으로 새로운 노동자와 노동의 의미를 생산하였기 때문이다. 철학은 결국 주체에 대한 것도 또는 대상에 대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철학은 주체와 대상을 분절시키는 의미의 층위에서만 자신의 존재 이유를 갖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철학이, 마르크스나 장자 또는 수많은 비판적 철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기존의 의미를 반성해서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2. 자유란 무엇인가?

 

 

1. 자리 양보와 실천 이성

 

 

온전한 의미에서 자유에 대한 논의는 칸트(I. Kant)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칸트에서부터 자유는 정당하고 깊이있게 다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칸트는 자유를 어떤 상태를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인간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것, 혹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감을 갖는다는 것에 주목하면서 자유에 대해 접근해간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칸트의 자유 개념이 법정 논리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법정은 기본적으로 어떤 행위의 책임을 묻고 따지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살인을 해서 재판을 받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재판정에는 판사ㆍ변호사ㆍ검사가 들어와 있다. 그렇다면 살인 사건에 대한 재판에서 변호사와 검사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변호사는 살인이라는 그 행위가 피고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만약 살인 행위가 피고의 자유 의지 외에 다른 원인들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면 그 정도만큼 피고의 책임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반대로 검사는 그 살인 행위가 피고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만약 살인 행위가 피고의 철저한 자유로부터 수행된 것이라면, 피고는 법에서 정한 최고의 형량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보통 우리는 변호사는 우호적이고 검사는 악의적이라는 느낌을 받는데, 사실 그 이면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변호사가 우리에게 너희들은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야라고 이야기하는 직업이라면, 검사는 우리에게 너희들은 철저하게 자유로운 사람이야라고 이야기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다른 어떤 외적이고 자연적인 원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유롭게 어떤 행위를 선택해서 수행하였다면, 우리는 그 행위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역으로 만일 우리의 어떤 행위가 부자유스럽게 행해진 것이라면, 다시 말해 타율적으로 수행된 것이라면, 우리는 그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질 이유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전철 안에서 좌석에 앉아 있는 어떤 청년이 있다고 하자. 몇 역을 지나지 않았는데 할아버지가 전철을 타서 자기 앞에 서 있게 되었다. 여기서 두 가지 경우가 가능해진다. 첫째, 이 청년은 자유롭게 실천 이성의 명령, 너는 젊은 사람으로서 노약자에게 좌석을 양보하는 것이 마땅하다라는 실천 이성의 말을 듣고 자리를 양보할 수 있다. 둘째, 이 청년은 주변의 눈치 때문에 혹은 할아버지가 야단을 치자 자리를 양보할 수도 있다. 첫째 경우라면 이 청년은 도덕적이라고 칭찬받을 만하다. 왜냐하면 이 경우 자리를 양보하는 행위는 다른 일체의 외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실천 이성에 따라 자유롭게 자율적으로 수행된 것이기 때문에, 그 선행에 대한 책임(=칭찬)은 전적으로 이 청년에게 귀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두 번째 경우라면 이 청년은 칭찬 받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청년의 행위는 타율적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따라서 칭찬받아야 할 것은 이 청년이 자리를 양보하게끔 강제했던 주위의 시선이나 할아버지의 야단이라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의 깊은 독자들은 칸트의 자유 혹은 자유 의지라는 생각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을 던질 것이다. 실천 이성의 명령을 듣고 한 행위가 과연 자유로울 수 있는가? ‘너는 젊은 사람으로서 노약자에게 좌석을 양보하는 것은 마땅하다라는 실천 이성의 명령 자체가 어쩌면 오히려 타율적인 것이 아닌가? 단지 실천 이성의 명령이 다른 사람이 아닌 나의 내면에서 저절로 떠올랐다고 해서, 그 명령이 바로 나 자신이 나에게 내리는 실천 명령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칸트가 우리가, 동일률이나 모순율과 같은 순수한 이론적 원칙을 자명한 것으로 의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순수한 실천 법칙을 의식할 수 있다고 말했을 때, 그는 너무 단순하고 쉽게 생각한 것이 아닐까? 칸트에 따르면 우리가 자명하다고 의식하는 실천 법칙 혹은 도덕 법칙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원칙이다.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 이런 순수한 도덕 법칙에 따라 지하철의 청년은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은 보편적 법칙으로 수립되어도 좋은 것이다라고 자신의 행위 준칙을 정하고, 그리고 할아버지에게 자리를 양보했다는 것이다.

 

 

 

 

2. 양심의 소리를 듣는 것과 거부하는 것

 

 

칸트의 자유 개념에서 문제되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내면에 떠오르는 실천 명령, 또는 양심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 자유와 양립 가능한 생각이냐는 것이고, 둘째는 순수한 도덕 법칙에서 등장하는 보편적 법칙이 과연 진실로 보편적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우선 첫째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자. 앞에서 이미 우리는 정신분석학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 중 특히 중요한 것은 전통적으로 양심의 소리, 또는 내면 깊이 울려나오는 소리란 다름아닌 공동체적 규칙이 내면화되어 이루어진 것, 즉 초자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 따르면, 즉 내가 판단하고 행위하는 것의 기준이 초자아라면, 결국 나의 행위는 자유롭다기보다는 구속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이 초자아가 원하는 것이 타자 일반(=공동체 일반)이 원하는 것과 그 내용상 같은 것이라면, 여기서 나의 자유란 전혀 성립될 여지가 없을 수밖에 없다. 단지 나의 자유란 초자아, 실천 이성의 명령에 따를 것인가 또는 따르지 않을 것인가의 여부에서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 만약 내가 초자아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되면 나는 의식적으로 악이라는 것을 선택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초자아의 지배를 계속 받고 있다면 나는 이렇게 악을 선택한 것에 죄책감마저 느끼게 될 것이다. 반면 내가 초자아의 명령을 따른다면 나는 선을 선택한 것이고 따라서 내면에서의 초자아의 칭찬, ‘그래 잘 했어. 일체의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렇게 자리를 양보하다니 너는 참 훌륭하구나라는 소리를 듣고 보람을 느끼기까지 할 것이다.

 

이제 두 번째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자. 순수한 도덕 법칙의 핵심을 이루는 보편적 입법이라는 원리는 과연 타당한 것인가? 앞의 예를 다시 들어보자. ‘너는 젊은 사람으로서 노약자에게 좌석을 양보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실천 이성의 명령을 통해서 이 청년이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려고 했을 때, 만약 이 노인이 그 좌석을 양보받는 것을 싫어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경우 우리는 순수한 도덕 법칙 또는 실천 이성의 명령이란 단지 이 청년 내면에서 작동했던 유아론적 원리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처럼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실천 이성의 명령이 내가 만나고 있는 타자가 원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은 무척 중요한 사실이다. 내가 자기만족이나 혹은 내면화된 초자아의 만족을 위해 타자와 관계한다면 이것은 과연 윤리적일 수 있는가? 오히려 초자아의 만족이 아니라 내가 삶에서 관계하는 구체적인 타자가 원하는 것을 부단히 파악하기 위해서 자신의 초자아의 작동을 약화시키는 것이 윤리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앞의 사례에서처럼 우리가 좌석을 양보했는데도 불구하고 할아버지가 양보를 거부했을 때, 우리는 그 자리를 떠나게 된다. 이런 회피적 행위가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윤리란, 기본적으로 구체적인 타자와의 관계일 수밖에 없다는 자명한 사실을 회피하고, 실천 이성이 내렸던 명령의 순수함을 보존하려는 초자아의 경향성 때문에 발생한다. 다시 말해 이것은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보편적이지 않을 때도 있다는 경험을 피하려는 무의식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보편적 입법의 보편성은 고정된 의미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고정된 의미를 기준으로 올바른 의미와 그렇지 않은 의미가 갈라져 나오는 것이다. 칸트의 자유 개념이 책임 개념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고, 나아가 법정의 구조와 유사했던 것도 바로 이런 보편적 입법의 원리라는 고정된 공동체의 의미를 전제로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결국 자유란 이 보편적 입법이 전제하고 있는 특정한 공동체의 의미를 따르거나 따르지 않는 것 사이의 결단 능력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칸트의 자유는 공동체의 규칙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려는 자유를 의미할 뿐이다. 사실 주체로 하여금 고정된 의미에 강제로 복종시킬 필요는 전혀 없다. 왜냐하면 공동체의 고정된 규칙이나 의미가 이미 주체에게는 초자아의 형태로, 즉 양심의 소리라는 형태로 내면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칸트가 권고하는 윤리적 행위에는 고정된 의미를 따랐을 때 외적인 칭찬이나 보상이 없었을 때조차도 내면의 칭찬, 혹은 초자아의 만족이라는 대가가 주어지게 된다. ‘그래. 할아버지가 비록 내가 양보한 좌석에 앉기를 거부했을지라도 나는 자유롭게 윤리적으로 행위했던 거야.’ 반대로 만약 내가 의식적으로 양심의 소리를 거부하고 그것에 반하는 행위를 했을 때,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괴로워하게 될 것이다.

 

 

 

 

3.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순간 기존의 의미 체계는 변동된다

 

 

칸트가 말한 것처럼 자유한 상태를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능력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인간이 초자아에 의해 지배되어 있다면, 다른 말로 고정된 의미에 사로잡혀 있다면, 인간은 다른 일체의 외적인 원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철저하게 자신의 순수한 실천이성의 명령에 따라서 어떤 행위를 선택해서 실천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무엇인가 새롭게 시작되는 것이란 전혀 있을 수 없는 법이다. 이점에서 칸트는 자신으로부터 시작한다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고정된 의미 체계를 그대로 둔 채 어떤 행동을 자신으로부터 시작할 수는 없는 법이다. 자신으로부터 시작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존의 의미 체계와는 다른 의미 체계를 생산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는 기본의 의미 체계에 의해 규정된 주체 형식을 벗어나서 새로운 주체 형식으로 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을 복종하는 존재, 삼종지도를 따라야만 하는 존재라고 의미 부여하는 여성은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다. 물론 어떤 여성은 칸트를 따라서 자신은 자유롭게 보편적 입법의 원리에 따라서 삼종지도(三從之道)를 선택한 것이라고 강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자유, 선택도, 그 무엇도 아니며, 단지 고정된 의미를 반복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자유란 그래서 새롭게 정의되어야만 한다. ‘새로운 의미를 생산해서 한 상태를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능력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새로운 의미를 생산한다는 것은 홀로 남겨져서 이리저리 몽상에 빠지는 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의미란 특정한 주체와 특정한 타자를 생산하는 선험적인 관계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미란 주체와 타자를 동시에 함축하는 개념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결국 주체 홀로 이러저러하게 새로운 의미를 구성할 수는 없다. 그것은 타자와의 관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예를 들어 만약 마르크스가 구체적인 노동자들 및 그들의 삶과 조우하지 않았다면 부잣집 아들 마르크스는 우리가 알고 있는 혁명가 마르크스라는 인물로 변화되지 않았을 것이고, 또 역으로 노동자들은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변화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결국 노동자와 조우하면서 마르크스는 기존의 노동자에 부여된 의미로는 드러나지 않는 노동자의 타자성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리고 이런 타자성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마르크스 자신과 노동자들은 전혀 다르게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주체에게는 타자의 타자성이 의미의 공백, 또는 의미의 블랙홀처럼 현상한다. 다시 말해 타자의 타자성은 기존의 어떤 의미부여도 빨아들이고 흡수해버리는 블랙홀인 것처럼 의미의 결여로서 현상한다는 것이다.

 

사랑의 경우로 다시 돌아가 보자.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를 만났다고 하자. 처음에 그녀는 그에게 단지 회사 후배에 불과했다. 그러나 어느날 회사 후배라는 의미로는 완전히 관계 맺을 수 없는 어떤 공백과 결여가 그녀에게서 나타났다. 이 남자는 이런 공백과 결여를 애써 잊으려고 할 수도 있고, 또 최근에 자신이 사귀던 애인과 이별했기 때문에 이 후배에게서 그런 이상한 감정이 나타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나타나는 의미의 공백은 더욱더 커져만 간다. 결국 사랑이라는 의미를 그 공백에 부여해야만 이런 공백을 지워버릴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그 공백에 부여된 사랑이라는 의미는 결국 이 남자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그리고 그 여자 후배는 사랑받는 사람으로 변화시킬 수밖에 없다. 처음에 나타난 공백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 여자 후배에게 있었던가? 아니다. 그것은 정확히 이 남자와 그 여자 후배 사이에, 그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타자의 공백 또는 의미의 부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순간 기존의 전체 의미 체계는 변동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처럼 자신을 타자와 더불어 부단히 변화시키는 자유로운 행위는, 새로운 의미 창조로서만 온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나아가 우리 인간의 자유는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면서 자신을 새로운 주체로 만들 수 있다는 데서만 존립하는 것이다.

 

 

 

 

 

3. 조건적 자유의 이념

 

 

1. 장자가 생각하는 자유

 

 

북쪽 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물고기의 이름은 곤()이다. 곤의 둘레는 몇 천 리인지를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 그것은 변해서 새가 되는데, 그 새의 이름은 붕()이다. 붕의 등은 몇 천 리인지를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 붕이 가슴에 바람을 가득 넣고 날 때, 그의 양날개는 하늘에 걸린 구름 같았다. 그 새는 바다가 움직일 때 남쪽바다로 여행하려고 마음먹는다.

北冥有魚, 其名爲鯤. 鯤之大, 不知其幾千里也. 化而爲鳥, 其名爲鵬. 鵬之背, 不知其幾千里也. 怒而飛, 其翼若垂天之雲. 是鳥也, 海運則將徙于南冥.

 

() 물의 부피가 충분히 크지 않으면, 그 물은 큰 배를 실어 나를 수 있는 힘이 부족하게 된다. 당신이 한 사발의 물을 바닥의 움푹한 곳에 부으면, 갈대는 그곳에서 배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곳에 큰 사발을 띄우려 한다면, 그것은 바닥에 붙어버릴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배는 그런 얕은 물에 비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바람의 부피가 충분히 크지 않으면, 그것은 커다란 양 날개를 실어 나를 수 있는 힘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 새가 구만 리를 날아올라 자신의 밑에 바람을 두었을 때에만, 그 새는 자신의 무게를 바람에 얹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새는 남쪽으로 자신의 여정을 시작하려면, 자신의 등에 푸른 하늘을 지고 앞에 명료한 시야를 얻어야만 한다.

() 且夫水之積也不厚, 則其負大舟也無力. 覆杯水於坳堂之上, 則芥爲之舟. 置杯焉則膠, 水淺而舟大也. 風之積也不厚, 則其負大翼也無力. 故九萬里則風斯在下矣, 而後乃今培風; 背負靑天而莫之夭閼者.

 

() 메추라기가 그것을 비웃으며 말했다. “그는 어디로 가려고 생각하는가? 나는 뛰어 위로 날며, 수십 길에 이르기 전에 숲풀 사이에서 (자유롭게) 날개를 퍼덕거린다. 그것이 우리가 날 수 있는 가장 높은 것인데, 그는 어디로 가려고 생각하는가?”

() 蜩與鷽鳩笑之曰: “我決起而飛, 搶楡枋, 時則不至而控於地而已矣, 奚以之九萬里而南爲?”

 

 

방금 읽어본 긴 이야기는 장자를 넘기면 제일 처음에 나오는 소요유(逍遙遊)편에 실려 있는 유명한 대붕의 이야기. 보통 사람들이나 전문적인 연구자들도 모두 이 대붕 이야기는 장자가 생각했던 자유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지금도 흔히 대붕의 큰 뜻을 잡새들이 어찌 알겠는가!’라는 말이 관용어처럼 사용되고 있다. 다시 말해 대붕의 커다란 자유를 보잘것없는 작은 새들이 어떻게 짐작이라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처럼 대붕 이야기는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움을 상징하는 이야기로 읽혀 왔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과연 옳은가? ‘대붕 이야기를 직접 읽어보면 우리는 이런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자유를 장자가 대붕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없다. 오히려 대붕은 대붕이 되기까지 너무나 지루하고 힘든 과정을 거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대붕이 되어서도 남쪽으로 날기까지는 너무나 많은 외적 조건들을 갖추어야만 한다. 더군다나 대붕은 원래 자기동일적으로 대붕이 아니라 곤이라는 물고기로부터 변형되어 나온 것이다.

 

장자소요유편을 시작하는 그 유명한 대붕 이야기는 분명 자유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같은 관념적이고 상상적인 자유, 혹은 정신적인 자족의 경지로 이해되는 자유 관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우리가 이미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장자가 권고하고 있는 자유는 주체가 새로운 의미를 생산함으로서 주체 자신을 다르게 변형시킬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자유다. 이런 이해에 따르면 곤이란 물고기가 이전의 주체 형식을 상징한다면, 대붕이라는 커다란 새는 새로운 주체 형식을 상징하는 것이다. 또한 곤이라는 물고기가 놀았던 바다가 이전의 대상 형식이었다면, 대붕이 자신의 날개를 휘젓는 높고 훤히 트인 하늘은 새로운 대상 형식을 상징하는 것이다. 동일한 여성이 후배 여사원에서 사랑하는 연인으로 변한다는 것은 선배 남자사원이 사랑하는 주체가 된다는 것과 동시적인 사태이고, 어떤 돌덩이가 놀이 공간에서 고인돌로 변한다는 것은 어린아이가 어른으로 변한다는 것과 동시적인 사태인 셈이다.

 

 

 

 

2. 대붕과 메추라기의 자유

 

 

장자는 대붕 이야기를 통해서 의미의 생산, 주체의 변형, 따라서 자유라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작업인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날기 위해서 대붕이 구만 리라는 공간을 필요로 했던 것처럼, 자신을 다른 주체로 변형시키기 위해서는 우리는 새로운 의미 창조의 고통을 감당해야만 한다. 작은 홈에 차 있는 물에는 한 장의 잎도 충분히 배라는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지만, 이런 작은 물에서 그릇은 배라는 의미를 부여받을 수 없는 법이다. 기존의 의미체계 속에서 주체는 극 의미 체계에 맞게 구성되어 있을 뿐이다. 여기서 주체의 자유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단지 자신의 조건을 묵묵하게 복종하는 것을 긍정하는 자유, 관념적인 자유, 즉 자기만족에 불과할 것이다. 대붕이 대붕일 수 있기 위해서 이 새는 자신의 주체 형식과 맞는 공간을 찾아야만 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자신을 대붕이라는 주체 형식으로 변형시키기 위해서 대붕은 이미 드넓고 훤하게 트인 하늘에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곤이라는 물고기가 대붕이라는 커다란 새로 변형되고, 그와 동시에 곤이 관계하던 바다가 대붕이 관계하는 하늘로 변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장자가 말하려던 자유가 새로운 의미의 생산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학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대붕 이야기는 정신적 자유와 자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오히려 정신적 자유와 만족을 상징하는 것은 대붕이라기보다는 메추라기와 같은 보잘것없는 새들이 아닐까? 대붕의 부자유스러움, 너무나 커서 날기 위해서 구만 리를 비상해야만 하는 대붕의 부자유스러움에 대해서 메추라기는 조롱하고 있지 않는가? 놀랍게도 기존의 이해와는 달리 어떤 힘든 조건에도 마음의 안정을 유지하고 자족할 수 있는 존재는 대붕이 아니라 타고난 대로 혹은 주어진 조건에 따라서 이리저리 나뭇가지들 사이를 날아다니는 작은 메추라기와 같은 잡새들이라고 해야 한다. 이들은 고착된 자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따라서 자신이 메추라기라는 사실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유롭지 못한 주체를 상징하고 있다. 이들의 이런 부자유는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지 못하는 무능력에 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주어진 고정된 의미 체계 속에서 구성된 자신의 주체 형식을 맹목적으로 맹신하고, 나아가 이것을 자신들의 숭고한 본질인 양 긍정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자신들의 자유로움을 이야기한다. “이 나무 저 나무를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앉고 싶으면 자유롭게 앉는다고 자족하면서 이들은 대붕이 대붕으로서 자신의 주체를 변형시키는 노력을 조롱하고 있다.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따르면서 또는 삼종지도에 의해 길러져서 구성된 복종하는 여성이라는 자신의 주체 형식을 긍정하면서, 어떤 여성이 새로 들어온 며느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하자. ‘나는 어려서는 아버지의 말씀을 따랐고, 시집가서는 남편의 말을 따랐으며, 남편이 죽은 뒤 큰 아이의 말을 따르며 살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은 나의 자유로운 선택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그런 자유로운 선택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한단다.’ 이 여성은 자신이 기존의 의미 체계가 선택한 대로 자신의 삶을 선택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착각 속에서 정신적 자유와 만족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복종의 자유, 복종에 대한 자발적인 선택!’

 

 

 

 

3. 장자가 생각하는 부자유

 

 

이제 드디어 발제 원문을 읽어볼 준비가 된 것 같다. 이 이야기는 손이 트지 않게 하는 비방과 관련된 두 종류의 인간의 상이한 삶을 다루고 있다. 한 사람은 대대로 좀 빨래를 하면서 살았는데, 손이 트지 않게 하는 비방을 가지고 있어서 추운 겨울에도 좀 빨래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돈을 벌 수 있었던 사람이다. 다른 한 사람은 전자로부터 이 손이 트지 않게 하는 비방을 사서 그것을 겨울에 벌어진 수전(水戰)에 이용하여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의 이야기다.

 

비록 여기서 장자는 상이한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핵심은, 동일한 손이 트지 않는 비방과 그와 관련된 상이한 의미 부여에 놓여 있다. 한 사람은 이 비방을 가지고 계속 겨울에 찬물로 솜을 빠는 데 사용했다면, 다른 한 사람은 손이 트지 않는 비방을 수전에 이용함으로써 영주가 되었다. 어떻게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인가? 그것은 동일한 손이 트지 않는 비방과 관련된 상이한 의미 부여 때문이었다. 동일한 손이 트지 않게 하는 비방에 대해서 새로운 의미 부여를 하였기 때문에, 이 비방을 솜 빠는 사람에게 값싸게 샀던 사람은 영주가 된 것이다. 결국 소요유편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대붕 이야기에 나오는 의미의 창조, 주체의 변형, 따라서 자유의 문제를 반복해서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장자에 따르면 관계와 의존성을 떠나서 어떤 사물의 자기 원인적인 의미나 본질은 무의미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본질적 의미는 특정 문맥, 즉 특정한 관계의 장에서 추상화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손 트는 것을 막는 약은 동일한 것이었지만, 그 사용한 문맥이 다르다[能不龜手, 一也. () 所用之異也].’는 장자의 지적은 이 이야기의 핵심적 전언을 담고 있다. 이 이야기를 잘못 읽으면 다음과 같은 반문도 가능해진다. ‘그래도 장자는 그 약 자체의 자기 원인적 본질, 즉 손트지 않게 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긍정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손 트는 것을 막는 약이 그 자체로 어떤 자기 원인적 본질을 가질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약 자체가 가지고 있다고 추정되는 손트지 않게 할 수 있는 역량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손과 관계되어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장자에 따르면 어떤 사물의 본질도 관계와 소통에 의해서 사후에 규정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그 사물과 관계하는 주체의 본질에도 적용된다. 왜냐하면 소와 소통해야만 포정은 소 잡는 사람이라고 규정될 수 있고, 솜을 빠는 사람은 솜을 빠는 사람이라고 규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장자가 문제삼고 있는 것은 바로 이렇게 소통의 결과로 사후에 규정된 본질에 우리 인간이 엄청난 집착을 보인다는 데 있다. 그것은, 가장 제거하기 어려운 잡초인 쑥처럼, 거의 무의식에 가깝게 집요한 것[蓬心]이다. 타자에 대한 고착화된 의미 부여는 자신에 대한 고착화된 의미 부여와 동시적인 사태다. 왜냐하면 대상에 대한 규정은 항상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주체에 대한 규정과 동시적인 사태이기 때문이다. 대대로 솜을 빨던 사람이나 큰 박을 무용하다고 평가하는 혜시(惠施)처럼 대부분의 인간들은 새로운 타자와 조우했을 때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장자가 생각하던 부자유다. 장자에 따르면 인간의 부자유는 이처럼 추상화된 본질과 규정, 즉 매개 일반에 대한 노예 상태에 다름 아니다. ‘손 트지 않게 하는 약은 솜을 빨 때만 사용한다거나 박은 어떤 것을 담는 경우에만 사용한다는 판단이 솜 빠는 사람과 혜시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이처럼 장자가 생각하던 자유는 심미적이고 정신적인 자유나, 자기 원인적이고 자발적인 절대적인 자유일 수는 없었다. 오히려 장자가 생각하고 있던 자유는 대상이나 주체를 미리 규정하지 않는, 즉 무매개적이고 비인칭적인 마음에서 존립하는 타자와의 새로운 소통 관계의 구성, 그 관계에서의 새로운 의미 부여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인용

지도 / 목차 / 장자 / 수업 / 삶과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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