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유쾌한 시공간 - 2부, 5장 『열하일기』 고원 혹은 리좀
5장 『열하일기』 고원 혹은 리좀
벅찬 텍스트
측근 관료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문체반정(文體反正)의 바람은 마침내 그 진앙지로 『열하일기』를 찾아낸다. 정조는 당시 규장각 관료였던 남공철에게 이렇게 분부했다(『과정록過庭錄』 2권).
근자에 문풍이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박지원의 죄다. 『열하일기』를 내 이미 익히 보았거늘 어찌 속이거나 감출 수 있겠느냐?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된 후로 문체가 이같이 되었거늘 본시 결자해지(結者解之)인 법이니 속히 순수하고 바른 글을 한 부 지어 올려 『열하일기』로 인한 죄를 씻는다면 음직으로 문임 벼슬을 준들 무엇이 아깝겠느냐?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무거운 벌을 내릴 것이다. 너는 즉시 편지를 써서 나의 이런 뜻을 전하도록 해라!
近日文風如此, 莫非朴某之罪也. 『熱河日記』, 予旣熟覽, 焉敢欺隱? 『日記』行世後, 文體如此, 自當使結者解之. 斯速著一部純正之書, 卽爲上送, 以贖『日記』之罪, 雖南行文任, 豈有可惜者乎? 不然則當有重罪, 須以此意, 卽爲貽書.
문풍을 타락시킨 ‘원흉’으로 『열하일기』를 지목한 정조의 안목은 과연 적확한 것이었다. 그러나 『열하일기』가 일으킨 파장의 측면에서 본다면, 정조의 그 같은 조처는 ‘뒷북’ 치는 감 또한 없지 않으니, 앞에서 이미 짚었듯이 이 텍스트는 이미 10여 년에 걸쳐 열렬한 찬사와 저주어린 비난을 동시에 받으며 풍문의 한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문체반정(文體反正)은 이 풍문의 정점이자 공식적 확인절차였던 셈이다.
어쨌든 사태가 이쯤 되자, 사대부들의 시선이 일제히 연암에게 쏠렸음은 말할 것도 없다. 당시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과정록過庭錄』 2권).
임금님께서 『열하일기』를 거론하신 건 기실 노여워하여 하신 말씀이 아니라 장차 파격적인 은총을 내리시려는 것이다. 그리고 임금님의 분부 중에 여러 사람의 잘못을 일일이 지적하면서도 특히 박아무개를 들어 죄인 중의 우두머리라고 하신 것은 임금님께서 박아무개에게 주의를 주어 그 글이 좀더 발전되게 함으로써 장차 문임을 맡기려는 의도이시다. 더군다나 『열하일기』를 가리켜 문체를 그르친 장본이라 하시면서도 그것을 익히 보셨노라고 하여 애호하는 뜻을 나타내셨음에랴! 반드시 바른 글을 한 부 지어서 얼른 바치도록 해야 한다.
此實非怒之敎, 將有格外異數. 且聖敎中, 歷數諸人之愆, 而特擧朴某爲罪魁者, 乃大聖人抑而進之, 推任文權之意. 又况擧『熱河日記』爲眞贓, 而加以熟覽字以寵之乎! 是必有一部文字趁早撰進.
이런 반응이 일반적이었다. 당시 연암과 함께 안의에 있던 여러 문사들은 뛸 듯이 기뻐하며 연암에게 참고가 되는 글을 베끼는 일을 한다든가 사실을 고증하는 일을 떠맡고자 하였다.
그들이 보기에도 정조는 연암에게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휘둘렀다. 그러나 이 노회한 조치에 대해 연암은 어떻게 반응했던가? “보잘것없는 제 책이 위로 임금님의 밝으신 눈을 더럽힐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豈意兎園之遺册, 上汚龍墀之淸塵哉]”느냐, “중년 이래로 불우하고 영락하여 스스로 자중하지 못하고 글로써 유희를 삼아 때때로 궁한 처지에서 나오는 근심과 게으르고 나태하여 원고를 챙기고 단속하는 일을 제대로 못한 탓에 자신과 남까지 그르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僕中年以來, 落拓潦倒, 不自貴重, 以文爲戱, 有時窮愁無聊之發, 無非駁襍無實之語. 性又懶散, 不善收檢, 旣自誤而誤人].”, “문풍이 이 때문에 진작되지 못한다면 자신은 문단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文風由是而不振, 士習由是而日頹, 則是固傷化之災民, 文苑之棄物也]”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견책을 받은 몸이 새로 글을 지어 이전의 잘못을 덮으려 해서야 쓰겠느[安有荷譴之蹤, 作爲文字, 自許純正, 要掩前愆]”냐며 결국은 반성문 하나 제출하지 않는다. 당근도 채찍도 모두 비켜간 것이다. 문체반정(文體反正) 이후 대부분의 문인들이 견책을 면하기 위해 혹은 영달을 위해 철저한 고문주의자로 변모해갔지만, 연암은 이후에도 정조의 견제, 아니 집요한 ‘구애의 손길’을 요리조리 빠져나간다. 뱀처럼 유연하고, 두꺼비처럼 의뭉스럽게.
정조의 관심도 집요하여 1797년 연암이 면천군수에 임명되었을 때, 정조를 알현하자 “내 지난번에 문체를 고치라고 했는데 과연 고쳤느냐[予向飭文體之變改矣. 果改之乎]?”고 다그치고, 제주 사람 이방익이 바다에 표류한 일의 전말을 들려주고서 기어코 글을 쓰게 만든다. 「서이방익사(書李邦翼事)」는 이렇게 해서 쓰여진 글이다. 『열하일기』가 일으킨 파장은 그처럼 깊고도 넓었다.
그 여파 때문이었던지 이 문제작은 연암의 손자 박규수(朴珪壽)가 우의정까지 역임했음에도 조부의 문집을 공간할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오랜 시간 ‘뜨거운 감자’였다. 마침내 1900년 창강 김택영(金澤榮)의 주도로 『연암집』이 처음으로 출판되었고, 이듬해에는 『연암속집』이 발간되었다. 『열하일기』가 단독으로 출간된 것은 1911년 최남선이 고전 보급을 목적으로 창설한 조선광문회가 발행한 것이 최초이다. 흥미로운 것은 김택영조차도 연암의 전(傳)이나 『열하일기』 가운데 「도강록」 이하의 몇 편은 순전히 패관소설체로 되어 있다며, 빼버렸다는 사실이다. 20세기에도 『열하일기』는 여전히 ‘벅찬’ 텍스트였던 것인가?
▲ 『열하일기』와 『연암집』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그리고 촌철살인의 아포리즘(aphorizm)과 우주적 비전으로 가득찬 『연암집』,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의미있는 책을 꼽으라면 나는 단연 이 둘을 선택할 것이다. 나아가 이 난만한 ‘포스트모던’ 시대를 용감무쌍하게 돌파할 수 있는 동력 또한 그 속에 있다고 굳게 믿는다.
수많은 고원으로 이루어진 텍스트
『열하일기』는 수많은 ‘고원’들로 이루어져 있다. 형식상으로는 압록강을 건너는 지점에서 시작하여 마테오 리치의 무덤에서 끝나지만 그것은 사실 시작도 끝도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중도에 있으며, 따라서 어디서 읽어도 무관하게 각각은 서로 독립되어 있다. 또 연행을 마치고 돌아와 연암협에서 다시 메모지를 들고 재구성한 것이기 때문에 연암 자신의 윤색도 적지 않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정리하다가 만 경우도 있다.
내가 중국에서 돌아온 지 오래되어 당시를 회상하노라면 감감하기는 아침놀이 눈을 가리는 듯하고, 아득하기는 마치 새벽 꿈결의 넋 빠진 상태 같다. 그래서 남북의 방위가 바뀌기도 하고 이름과 실물이 바뀌기도 하였다.
余旣自中國還, 每思過境, 愔愔如朝霞纈眼, 窅窅如曉夢斂魂. 朔南易方, 名實爽眞.
「황도기략(黃圖紀略)」의 한 대목이다. 이런 식으로 독자를 헷갈리게 하는 진술이 곳곳에서 출현한다. 그런 점에서 『열하일기』는 텍스 전체가 미완성의 ‘벡터’를 지닌다. 그러나 여기서 미완성은 결여로서의 그것이 아니라, 완결된 체계를 넘어 무한히 뻗어나간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니체가 “차라투스투라의 작품이 위대한 것은 완결된 멜로디를 구사한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멜로디를 구사한다는 점에 있다”고 할 때, 그 찬사는 『열하일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실제로 지금까지 『열하일기』는 그렇게 읽혀왔다. 명확한 정본이 없이 수많은 전사본이 떠돌아다니면서 심심찮게 개작ㆍ윤색이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ㆍ「호질(虎叱)」, 「상기(象記)」 등은 전체 텍스트와 무관하게 독자적인 ‘버전’으로 채취되어 왔다. 그만큼 『열하일기』에는 “다양하게 형식화된 질료와 매우 상이한 날짜, 속도들”(들뢰즈/가타리)이 존재한다.
여행과 유목은 전혀 다른 것이지만, 여기서 여행은 유목과 아름답게 포개진다. 그는 인간, 자연, 동물 등 무엇이든 접속하고 들러붙어 그 표면의 충돌‘들을 세심한 촉수로 낱낱이 잡아낸다. 그의 촉감적 능력이란 실로 경탄할 지경이어서 산천, 성곽, 배와 수레, 벽돌, 언어, 의복제도 등으로부터 ‘장복이의 귀밑 사마귀 여인네들의 몸치장’, ‘장사치들이나 낙척한 선비들의 깊은 속내’, ‘1시간에 70리를 달리는 말의 행렬’ 등에 이르기까지 삼투(滲透)하지 않는 영역이 없다. 『열하일기』의 수많은 고원들은 바로 감각들이 다양하게 교차하는 유목적 여정의 산물이다. 그리고 그것은 중심도 뿌리도 없이 우발적인 흐름에 따라 줄기를 뻗어나간다는 점에서 하나의 ‘리좀(rhizome)’이다.
문체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열하일기』는 정통고문체에서 패사소품체를 종횡으로 넘나든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수많은 변이형들이 산포된다. 우리말 대화는 문어체의 고문으로 표현하되, 중국말 대화는 굳이 구어체인 백화문으로 표현하여 언어의 차이를 부각하는가 하면, 또 조선식 한자어를 고문체 안에 뒤섞거나 빈번히 속담, 은어, 욕설 등을 구사함으로써 ―― 마치 돈키호테의 시종 산초 판사가 그러하듯 ―― 이른바 ‘특수어들의 경연’을 연출해낸다. 정조가 명명한 소위 ‘연암체’의 실체는 바로 이 주류적 언어를 ‘더듬거리게’하고, 나아가 문체의 경계조차 무의미하게 만드는 균열 그 자체에 있는 것일 터, 그러므로 패사소품이 되는 부분만 잘라버리면 어엿한 고문이 되리라 보는 것은 그야말로 착각이다. 리좀(rhizome)의 한 부분을 잘라 땅속 깊숙이 심는다고 어찌 수목의 뿌리가 될 것인가.
고문과 소품, 사실과 허구, 주체와 대상의 경계까지를 모호하게 흐려버리는 이 괴상한 ‘책기계’를 수목이 아닌 리좀이 되게 하는 배치, 그 스릴 넘치는 장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