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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사, 한시 문학의 종장 - 1. 한말의 사대가(박규수)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사, 한시 문학의 종장 - 1. 한말의 사대가(박규수)

건방진방랑자 2021. 12. 21.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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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규수(朴珪壽, 1807 순조7~1877 고종14, 桓卿瓛卿鼎卿, 瓛齋桓齋桓齋居士)는 구한말의 대표적인 개화사상가 중의 한 사람이다. 박지원(朴趾源)의 손자인 그는, 북학파가 주창했던 실사구시의 학풍에 눈떠 중농주의적인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정약용(丁若鏞)과 서유구(徐有榘)를 사사하기도 하였다.

 

그가 일생을 통해서 배웠던 학자로는 박지원(朴趾源)정약용(丁若鏞)ㆍ서유구(徐有榘)김매순(金邁淳)ㆍ조종영(趙鐘永)홍석주(洪奭周)ㆍ윤정현(尹定鉉) 등이 있고, 남병철(南秉哲)ㆍ김영작(金永爵)ㆍ김상현(金尙鉉)ㆍ신응조(申應朝) 등과 교유하였으며, 그의 문하(門下)에서 김옥균(金玉均)ㆍ박영효(朴泳孝)ㆍ김윤식(金允植)ㆍ유길준(兪吉濬) 등 개화사상의 선구자들이 배출되었다.

 

1848(헌종14)에 증광시(增廣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으로 출사의 길에 오른 그는, 벼슬길이 비교적 순탄하여 병조정랑(兵曹正郞)ㆍ예조판서(禮曹判書)ㆍ대사간(大司諫)ㆍ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ㆍ대제학(大提學)ㆍ형조판서(刑曹判書)ㆍ우의정(右議政)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개화사상가로서 그를 거듭나게 하였던 계기는 이 시기의 개화사상가들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그에게도 국외 여행의 기회가 부여된 것이다. 1861년에 열하부사(熱河副使)로서 처음 중국을 여행하였을 때, 중국은 이미 1856년의 애로우호 사건에서의 패배로 인해 당시 황제인 함풍제(咸豊帝)가 열하(熱河)에 피신하고 있을 만큼 위태로운 정세에 있었으므로, 박규수(朴珪壽)는 약 6개월간의 체류기간을 통해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살필 수가 있었다. 귀국 직후 그는 1862년에 진주민란의 안핵사(按覈使)로서 현지에 파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1866년에는 평안감사로서 대동강에 불법침입한 미국의 무장상선 제너럴 셔어먼호의 격침을 직접 지휘하기도 하였다. 두 번째의 중국 여행은 1872년에 이루어졌는데, 그는 진하사(進賀使)의 정사(正使)로서 서장관 강문형(姜文馨), 수역(首譯) 오경석(吳慶錫)을 대동했다. 이때 서양의 침범에 대응하기 위하여 중국인들이 일으킨 양무운동(洋務運動)을 목격하고 개국, 개화에의 확신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박규수(朴珪壽)의 실천적인 경세가(經世家)로서의 체질에서 보면, 그는 마땅히 경술(經術)로써 명군(明君)을 보좌해야만 했기 때문에 그의 문집도 대부분 관각문자(館閣文字)로 채워져 있다. 시작(詩作)에 있어서도 봉소여향절구(鳳韶餘響絶句)100수를 제작하는 등 세교(世敎)에 관계되는 것이 많다. 그밖의 시편(詩篇)에서도 그는 조식(藻飾)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오히려 질박하기만 하다.

 

예술적인 향훈(香薰)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박규수(朴珪壽)는 시작(詩作)에서도 역시 민풍(民風)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바 있어 죽지사(竹枝詞)를 제작하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강양죽지사(江陽竹枝詞)13수 중 제5수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秋入江陽水不波

가을이 강물에 들어도 물결은 일어나지 않고

凌空石塔皓嵯峨

구름 뚫은 석탑은 허옇게 우뚝 섰네.

一林疎雨紅流路

온 숲에 성긴 비 내리는 홍류동(紅流洞) 길에

誰復騎牛訪脫蓑

누가 다시 소 타고 올 것이며 도롱이를 벗을까?

 

강양(江陽)은 합천(陜川)의 옛이름이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속리산(俗離山)에 들어가 동주(東洲) 성제원(成悌元)을 방문하고 돌아갈 때, 다음 해 8월 보름에 다시 해인사(海印寺)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기약한 그 날에 연일 비가 왔지만 남명이 비를 무릅쓰고 해인사 문에 이르렀더니 동주가 이미 도착하여 막 우장을 벗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덕천사우록(德川師友錄)에 전한다. 환재 박규수(朴珪壽)는 강양(江陽) 땅에 이르렀을 때 이 미담(美談)을 상기하여 시화(詩化)한 것이다. ‘기우(騎牛)’는 남명이, ‘탈사(脫蓑)’는 동주가 찾아온 사실을 함께 말한 것이다. 전혀 다듬어져 있지 않지만 민간의 이야기나 민풍을 시로써 읊어내는 죽지사(竹枝詞)에서는 흔한 일이다

 

 

 

 

인용

목차 / 略史

우리 한시 / 서사한시

한시미학 / 고려ㆍ조선

眞詩 / 16~17세기 / 존당파ㆍ존송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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