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수(朴珪壽, 1807 순조7~1877 고종14, 자 桓卿ㆍ瓛卿ㆍ鼎卿, 호 瓛齋ㆍ桓齋ㆍ桓齋居士)는 구한말의 대표적인 개화사상가 중의 한 사람이다. 박지원(朴趾源)의 손자인 그는, 북학파가 주창했던 실사구시의 학풍에 눈떠 중농주의적인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정약용(丁若鏞)과 서유구(徐有榘)를 사사하기도 하였다.
그가 일생을 통해서 배웠던 학자로는 박지원(朴趾源)ㆍ정약용(丁若鏞)ㆍ서유구(徐有榘)ㆍ김매순(金邁淳)ㆍ조종영(趙鐘永)ㆍ 홍석주(洪奭周)ㆍ윤정현(尹定鉉) 등이 있고, 남병철(南秉哲)ㆍ김영작(金永爵)ㆍ김상현(金尙鉉)ㆍ신응조(申應朝) 등과 교유하였으며, 그의 문하(門下)에서 김옥균(金玉均)ㆍ박영효(朴泳孝)ㆍ김윤식(金允植)ㆍ유길준(兪吉濬) 등 개화사상의 선구자들이 배출되었다.
1848년(헌종14)에 증광시(增廣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으로 출사의 길에 오른 그는, 벼슬길이 비교적 순탄하여 병조정랑(兵曹正郞)ㆍ예조판서(禮曹判書)ㆍ대사간(大司諫)ㆍ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ㆍ대제학(大提學)ㆍ형조판서(刑曹判書)ㆍ우의정(右議政)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개화사상가로서 그를 거듭나게 하였던 계기는 이 시기의 개화사상가들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그에게도 국외 여행의 기회가 부여된 것이다. 즉 1861년에 열하부사(熱河副使)로서 처음 중국을 여행하였을 때, 중국은 이미 1856년의 애로우호 사건에서의 패배로 인해 당시 황제인 함풍제(咸豊帝)가 열하(熱河)에 피신하고 있을 만큼 위태로운 정세에 있었으므로, 박규수(朴珪壽)는 약 6개월간의 체류기간을 통해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살필 수가 있었다. 귀국 직후 그는 1862년에 진주민란의 안핵사(按覈使)로서 현지에 파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1866년에는 평안감사로서 대동강에 불법침입한 미국의 무장상선 제너럴 셔어먼호의 격침을 직접 지휘하기도 하였다. 두 번째의 중국 여행은 1872년에 이루어졌는데, 그는 진하사(進賀使)의 정사(正使)로서 서장관 강문형(姜文馨), 수역(首譯) 오경석(吳慶錫)을 대동했다. 이때 서양의 침범에 대응하기 위하여 중국인들이 일으킨 양무운동(洋務運動)을 목격하고 개국, 개화에의 확신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박규수(朴珪壽)의 실천적인 경세가(經世家)로서의 체질에서 보면, 그는 마땅히 경술(經術)로써 명군(明君)을 보좌해야만 했기 때문에 그의 문집도 대부분 관각문자(館閣文字)로 채워져 있다. 시작(詩作)에 있어서도 「봉소여향절구(鳳韶餘響絶句)」 100수를 제작하는 등 세교(世敎)에 관계되는 것이 많다. 그밖의 시편(詩篇)에서도 그는 조식(藻飾)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오히려 질박하기만 하다.
예술적인 향훈(香薰)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박규수(朴珪壽)는 시작(詩作)에서도 역시 민풍(民風)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바 있어 죽지사(竹枝詞)를 제작하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강양죽지사(江陽竹枝詞)」 13수 중 제5수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秋入江陽水不波 | 가을이 강물에 들어도 물결은 일어나지 않고 |
凌空石塔皓嵯峨 | 구름 뚫은 석탑은 허옇게 우뚝 섰네. |
一林疎雨紅流路 | 온 숲에 성긴 비 내리는 홍류동(紅流洞) 길에 |
誰復騎牛訪脫蓑 | 누가 다시 소 타고 올 것이며 도롱이를 벗을까? |
강양(江陽)은 합천(陜川)의 옛이름이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속리산(俗離山)에 들어가 동주(東洲) 성제원(成悌元)을 방문하고 돌아갈 때, 다음 해 8월 보름에 다시 해인사(海印寺)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기약한 그 날에 연일 비가 왔지만 남명이 비를 무릅쓰고 해인사 문에 이르렀더니 동주가 이미 도착하여 막 우장을 벗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덕천사우록(德川師友錄)』에 전한다. 환재 박규수(朴珪壽)는 강양(江陽) 땅에 이르렀을 때 이 미담(美談)을 상기하여 시화(詩化)한 것이다. ‘기우(騎牛)’는 남명이, ‘탈사(脫蓑)’는 동주가 찾아온 사실을 함께 말한 것이다. 전혀 다듬어져 있지 않지만 민간의 이야기나 민풍을 시로써 읊어내는 죽지사(竹枝詞)에서는 흔한 일이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