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 Ⅶ. 단독자[獨]의 의미
Ⅶ. 단독자[獨]의 의미
성인의 도로 성인의 재주가 있는 이에게 알려주는 것 또한 쉬운 일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에게 알려주고서 그를 지켜보았는데, (그는) 삼일이 지나서 천하를 잊어버릴 수 있었다. (그가) 이미 천하를 잊어버린 후 나는 그를 지켜보았는데, (그는) 칠 일이 지나서 외부 대상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그가) 이미 외부 대상을 잊어버린 후 나는 그를 지켜보았는데, (그는) 구 일이 지나서 삶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以聖人之道告聖人之才, 亦易矣. 吾猶守而告之, 參日而後能外天下; 已外天下矣, 吾又守之, 七日而後能外物; 已外物矣, 吾又守之, 九日而後能外生;
이미 삶을 잊어버린 후 (그는) 조철(朝徹)할수 있었다. 조철한 후에 (그는) 단독자[獨]를 볼 수 있었다. 단독자를 본 이후에 (그에게는) 고금의 구별이 없을 수 있었고, 고금의 구별이 없어진 후에야 (그는) 생사의 대대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삶을 죽이는 자는 죽지 않고, (자신의) 삶을 (오로지 자신만의) 삶이라고 여기는 자는 살지 못하게 된다. 단독자라는 것은 (마치 거울처럼) 마중가지도, 맞이하지도, 훼손하지도, 이루어주지도 않는 것이다. 그것을 일러 영령(攖寧)이라고 한다. 영령이란 무한한 타자의 도래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안정됨을 말한다.
已外生矣, 而後能朝徹; 朝徹而後能見獨; 見獨而後能無古今; 無古今而後能入於不死不生. 殺生者不死, 生生者不生. 其爲物無不將也, 無不迎也, 無不毁也, 無不成也. 其名爲攖寧. 攖寧也者, 攖而後成者也.
1. ‘삶을 기뻐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의식’
1. 소의 물살에서 자유자재 헤엄치던 사람
장자는 ‘나는 나다’라는 인칭적 자의식을 마음에서 해체하라고 권고했다. 이런 해체를 통해서 우리는 접촉한 타자에 따라 임시적인 자의식을 구성할 수 있는 마음의 유동성, 즉 비인칭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장자에게 고착된 자의식이 ‘자신을 이것이라고 여긴다[自是]’라는 의식형태로 규정될 수 있다면, 임시적이고 유동적인 자의식은 ‘자신을 저것으로 여긴대[自彼]’라는 의식형태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은 이것[是]이라고 개념 규정되기에, 자신을 저것으로 여기는[自是] 주체의 의식 상태는 이것[是]이면서 동시에 저것[彼]인 상태, 즉 ‘이것=저것’인 상태라고 정의될 수 있다. 장자는 이것을 도의 지도리[道樞]라고 정의하는데, 이것이 바로 이것과 저것[是彼]이라는 대대 관계가 해소된 무대[無待]의 상태다. 그러나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즉 ‘스스로를 저것으로 여긴다’는 것, 다시 말해 무대의 상태는 결코 주체와 타자가 변증법적으로 지양되어 하나가 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주체가 타자와 더불어 공생의 흐름을 형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생(達生)」편에 나오는 다음 이야기는 이런 우리의 분석에 대한 증거로서 읽힐 수 있을 것 같다.
공자가 여량(呂梁)이라는 곳에 유람을 하였다. 그곳의 폭포수가 삼십 길이나 되었는데, 그 폭포수에서 떨어져 나온 물거품이 사십 리나 튈 정도로 험해서, 자라나 물고기 등도 수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한 사나이가 그런 험한 곳을 수영하는 것을 목도하게 되었고, 공자는 그 사람이 어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자살하려고 물에 들어간 것이라고 여겼다. 공자는 제자들로 하여금 물길을 따라가서 그 사나이를 건지게 하였다. 그 사나이는 한참이나 물 속에서 물을 따라 흘러가다가 마침내 물에서 나와 젖어 흐트러진 머리로 노래를 부르며 둑 아래를 유유자적하면서 걸어갔다. 공자는 그를 따라가서 물어 보았다.
孔子觀於呂梁, 縣水三十仞, 流沫四十里, 黿鼉魚鱉之所不能游也. 見一丈夫游之, 以爲有苦而欲死也. 使弟子幷流而拯之. 數百步而出, 被發行歌而游於塘下. 孔子從而問焉,
“나는 그대가 귀신인 줄 알았네. 그러나 지금 보니 자네는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군. 그대에게 수영을 하는 어떤 특이한 방법이라도 있는지 묻고 싶네.”
曰: “吾以子爲鬼, 察子則人也. 請問: 蹈水有道乎?”
그 사나이가 대답했다. “무슨 특별한 방법이 있겠습니까? 나는 과거의 삶의 문맥에서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현재의 삶의 문맥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부득이한 소통의 흐름에서 제 자신을 완성했기 때문입니다[始乎故, 長乎性, 成乎命]. 물이 소용돌이쳐서 빨아들이면 저도 같이 들어가고, 물이 나를 물 속에서 밀어내면 저도 같이 그 물길을 따라 나옵니다. 물의 길을 따라서 그것을 사사롭게 나의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曰: “亡, 吾無道. 吾始乎故, 長乎性, 成乎命. 與齊俱入, 與汩偕出, 從水之道而不爲私焉. 此吾所以蹈之也.”
그러자 공자가 물어 보았다. “과거의 삶의 문맥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의 삶의 문맥에서 자라날 수 있었던 것은 부득이한 소통의 흐름에서 자신을 완성했기 때문이라고 그대는 말했는데, 그것은 무슨 의미인가?”
孔子曰: “何謂始乎故, 長乎性, 成乎命?”
그 사나이가 대답했다. “제가 육지에서 태어나서 육지에 편해진 것이 옛날의 삶의 문맥[故]이고, 제가 현재 물에서 자라서 물에 편해진 것이 지금의 삶의 문맥[性]이고, 내가 지금의 삶의 문맥에서 어떻게 그렇게 수영을 잘 하는지 모르지만 수영을 잘하는 것이 소통의 부득이한 흐름[命]입니다.”
曰: “吾生於陵而安於陵, 故也; 長於水而安於水, 性也; 不知吾所以然而然, 命也.”
계곡에는 소(沼)라는 연못이 있다. 소는 폭포와 같은 물줄기가 떨어지는 큰 웅덩이처럼 생긴 연못이다. 그런데 이 소 안에서 한 번 넘어지면 일어설 수가 없다. 왜냐하면 폭포로 떨어졌던 물은 소의 바닥을 타고 강하게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소에 빠져 중심을 잡고 물살에 말려서 허우적거릴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엄습하는 죽음에 대한 공포다. 위의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는 이런 죽음이 엄습하는 듯한 공포 분위기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야 우리는 죽음의 공포를 이기고서 이제 소용돌이치는 소의 물살에 따라 자유자재로 수영하는 사람에 대한 공자의 감탄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사람은 어떻게 이리도 자유롭게 수영을 잘 할 수 있었을까? 이 사람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사사롭게 고착된 자의식을 가지고 물의 흐름을 판단하기보다는, 오히려 매 순간마다 미묘하고 특이하게 변하는 물의 흐름에 맞추어서 자신의 몸동작을 조절했던 인물이다. 다시 말해 이 사람은 마음의 유동성을 회복했기에 타자와 어울리는 임시적 자의식을 구성할 수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2. 생사의 관념조차 벗어나다
우리가 처음 수영을 배울 때 먼저 배우는 것이 물에 뜨는 법이다. 수영 강사는 내게 물에 몸을 맡기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는 ‘물에 빠져 죽으려는 느낌으로 물에 몸을 맡겨라’라고 내게 말한다. 그러나 이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끝내 나는 다시 물에 가라앉고 잔뜩 물을 먹고 말 뿐이다. 우리는 화가 나서 수영 강사에게 다음과 같이 따질 수도 있다. “당신이 이야기한 대로 물에 빠져 죽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들어갔는데도 제가 이렇게 물을 먹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런 질문에 대해 수영 강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당신은 물에 빠져 죽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물에 빠져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하기만 하면, 설마 물에 빠져서 죽지는 않겠지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당신은 물에 빠져서 죽지 않고 살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영을 배우기 위해서 우리는 살겠다는 생각과 아울러 죽겠다는 생각도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죽겠다는 생각의 이면에는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살겠다든가 아니면 죽겠다라는 의식에서 자명한 것처럼 전제되어 있는 ‘나는 나다’라는 인칭성이다. 이 점에서 갓 태어난 어린 아이가 수영을 자유자재로 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갓난아이에게는 ‘나는 나다’라는 인칭성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갓난아이는 비인칭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사태에 대해 유동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이야기에서 수영을 귀신처럼 잘하게 된 사람은 바로 갓난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비인칭적인 마음, 즉 허심(虛心)을 갖기 위한 최종적 관건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그것은 바로 삶과 죽음[生死]이라는 관문이다.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생사라는 짝(=대대) 관념은 「제물론(齊物論)」편에서 해체되고 있는 피시(彼是)라는 대대 관념으로 포섭될 수 있다. 그러나 생사라는 관념은 실천적이고 실존적인 지평에서 근본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생사라는 대대 관념은 가장 심층에서 우리의 고착된 자의식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나는 나다’라는 인칭적 자의식의 최종적 보루가 바로 ‘나는 살아있다’라든가 ‘살아있는 나’라는 규정이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양파껍질과 같이 구조화되어 있는 고착된 자의식을 벗겨 나가면 제일 마지막 남는 껍질이 바로 생사라는 대대 관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장자에게는 이 생사 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주체로 거듭나는 마지막 관문이 된다.
3. 고착된 자의식이란 양파를 벗겨가다
고착된 자의식은 ‘나는 이제 자신을 비웠어’라는 의식으로는 해소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런 의식에도 이미 나라는 인칭적 자의식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의식의 동일성을 해체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삶에 대한 애정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감정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제 우리는 생사 관념도 대대 관념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처럼 언어적 논리에 대한 직시로만 해소될 수 있는 성질의 관념이 아니다. 왜냐하면 생사는 형식적으로는 저것과 이것[彼ㆍ是]으로 대표되는 대대 관계 일반의 한 사례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우리 인간의 고착된 자의식 가장 깊은 곳에서 작동하는 가장 치료하기 어려운 대대 관계이기 때문이다. 장자는 생사라는 대대 관념을, 직접 저것과 이것[彼ㆍ是]의 논리로 밝힘으로써 해체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생사라는 관념은, 단순히 언어적 구조를 보여줌으로써 완전히 해체될 성질의 것이 아님을 장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장자는 생사라는 관념에 대해서만은 삶을 기뻐함과 죽음을 싫어함이라는 우리의 전형적인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로 다시 문제삼고 있다. 왜냐하면 죽음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이기에 기본적으로 죽음의 문제 같은 경우는, 미래에 대한 태도(=예기와 기대)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의식의 동일성을 규정하는 내용 중 가장 확실하다고 여겨지는 판단은 ‘나는 살아 있다’라는 것이다. 여타의 자기 동일성의 내용과는 전적으로 다른 확고부동한 규정성이 바로 ‘살아 있는 나’라는 것이다. 누구도 자신이 살아 있음을 부정하기는 힘든 법이다. 그래서 우리가 삶을 좋아하고 기뻐하는 것은 자명한 것처럼 보인다. 군주니 신하니 하는 규정성은 단지 사회적 규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부정할 수도 있지만, 끝내 뿌리치기 힘든 규정성은 바로 ‘내가 살아 있다’는 규정이다. 왜냐하면 모든 언어의 대대적 의미와 그것에 근거한 인식의 규정은 모두 살아있는 나라는 확고부동하고 자명한 규정 위에서만 타당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장자는 지금 삶과 죽음을 부정하고 있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장자는 사유와 주체 중심적인 진리관을 꿈이라고, 그리고 존재와 타자 중심적인 진리관을 깨어남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그가 부정하고 있는 것은 꿈의 지평에서 사유된 생사(生死)이지, 깨어남의 지평에서 경험하게 되는 생사는 아니다.
생사 관념의 중요성은 「내편」 일곱 편들 중 「대종사(大宗師)」 편이 바로 이 고질적인 생사 관념의 해체를 위해서 편집된 편이라는 데서도 확인될 수 있다. 「대종사(大宗師)」 편에 나오는 이야기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우리가 발제 원문으로 선택한 ‘견독(見獨) 이야기’ 혹은 ‘여우(女偊) 이야기’라고 불리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고착된 자의식이라는 양파의 껍질을 벗겨가는 실천적 내용을 담고 있다. 첫 번째 껍질은 전체를 상징하는 천하(天下)다. 두 번째 껍질은 내가 사유하고 인식하는 개별자를 상징하는 대상[物]이다. 세 번째 껍질이 바로 자신의 고착된 자의식의 최종 껍질인 살아있는 나를 상징하는 삶[生]이다. 최종 껍질을 벗긴 상태를 장자는 조철(朝徹)이라고 부른다. 조철이라는 장자의 신조어는 아침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조(朝)라는 글자와 밝다, 환하다를 의미하는 철(徹)이라는 글자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이 조철이라는 개념은 밤새 빗소리에 뒤척이면서 꾸었던 악몽으로부터 밝게 갠 아침을 맞아서 깨어났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사유와 주체 중심적인 진리 혹은 고착된 인칭적 자의식으로부터 깨어나서 우리가 존재와 타자 중심적인 진리 혹은 유동적이고 비인칭적인 마음을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장자는 바로 이런 꿈으로부터 깨어난 사람을 삶과 소통의 주체를 상징하는 단독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제 구체적으로 장자가 이상적인 인격으로 보는 단독자란 어떤 철학적 함축들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2. 단독자[獨]의 철학적 의미와 함축
1. 철학적인 ‘외(外)’의 의미
‘좌망(坐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단독자 이야기’도 신비스러워 보이는 수행과 실천에 대한 이야기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얼른 보면 철학에서는 다룰 수 없는 영역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옳은 인상이다. 왜냐하면 장자는 지금 여기서 우리의 주체 형식의 변형을, 다시 말해 이론적 체계가 아닌 실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우리가 이 이야기를 분석할 수 없음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구체적으로 이런 실천이 어떻게 수행되는지에 대한 사실적 이해보다는 이 실천이 지닌 철학적 의미가 무엇인지에 주목하면서, 우리는 이 이야기를 충분히 독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선 단독자 이야기를 읽었을 때 우리의 눈에 띄는 것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외(外)라는 글자다. 이 글자는 직역을 하면 ‘바깥으로 여기다’를 의미하고, 잊는다[忘]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외래는 글자를 도외시하다로 해석한다. 그러나 직역을 해서 ‘바깥으로 여긴다’로 그냥 그대로 해석해도 된다. 문제는 어떻게 이해하든지 이 외라는 글자는 세계[天下]ㆍ대상[物]ㆍ삶[生]이라는 언어나 관념을 나 자신으로부터 밖으로 보낸다는 의미다.
독자들은 장자 당시 맹자(孟子)와 고자(告) 사이에 이루어졌던 ‘인의(仁義)가 내(內)인가 외(外)인가?’라는 논쟁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 논쟁은 보통 ‘인내의외(仁內義外) 논쟁’이라고도 하는데, ‘인의라는 윤리적 규칙의 근거가 주체의 내면에 있는가 아니면 주체의 외면에 있는가?’에 대한 논쟁이었다. 여기서 사용되는 내와 외라는 개념은 철학적으로 많은 함축을 지닌다. 인간의 주체를 설명할 때 어떤 행동 A를 내로 본다는 것은 A를 행위 주체의 내면에 있는 것으로, 즉 필연적인 본질로서 생각한다는 것을 말한다. 반면 어떤 것을 외로 본다는 것은 그것이 문제되는 행위 주체와는 전적으로 무관한 어떤 것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 경우 A는 인간행위 주체와는 무관하고 단지 우연적인 관계만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장자가 여기서 잊는다라는 것의 의미를 명확하게 외라고 설명하고 있을 때, 그는 이 외라는 글자가 가진 당시의 철학사적 쟁점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철학적 문맥에 따라 장자가 외라는 글자를 사용했다면, 그것은 세계도, 대상도, 삶도 나에게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선언을 장자가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물론 여기서 장자가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사유와 주체 중심적으로 고려되는 세계ㆍ대상ㆍ삶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다시 말해 여기서 장자가 외의 대상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세계나, 대상이나, 삶은 사유나 주체에 의해 매개된 것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우리의 판단은 결과론적 이야기일 뿐이다. 이것들을 외로 여기는 순간에는 상당한 문제가 드러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구절을 처음 읽는 독자는 장자가 지금 세계ㆍ대상ㆍ삶을 모두 초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독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오해는 아직도 많은 연구자들의 연구에서도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오해를 바로 잡기 위해서 우리는 세계ㆍ대상ㆍ삶을 잊은 후 도달하게 되는 주체 형식인 단독자를 명확하게 규정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생사라는 관념마저도 우연적이라고 포기되었을 때, 도래하게 되는 새로운 주체 형식 혹은 장자가 권고하는 이상적 실존 형태인 단독자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규정한다면 장자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2. 데카르트의 코기토와 장자의 단독자
발제 원문에 쓰이고 있는 견독(見獨)이라는 말에서 견(見)은 두 가지 의미로 읽힐 수 있다. 하나는 본다는 의미로 주체가 잊음의 과정을 통해서 획득하게 되는 새로운 주체 형태를 본다는 의미다(이 경우 견이라고 읽는다). 다른 하나는 드러난다는 의미로 주체가 새로운 주체 형식으로 드러낸다는 의미다(이 경우는 현이라고 읽는다). 여기서 우리는 장자의 견독(見獨)의 방법을 데카르트(R.Descartes)의 방법적 회의와 대조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데카르트는 의심과 회의의 방법을 통해서 인간의 본래적인 주체 형식을 찾으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모든 진리를 회의한다. 그 회의는 수학적 진리에까지 이를 정도로 투철한 것이었다. 방법적 회의의 끝에 남았던 것이 바로 ‘생각하는 나(Cogito)’다. 결국 코기토란 바로 인간의 자의식의 동일성이자 또는 사유함 자체다.
見 | |
견 | 현 |
주체가 잊음의 과정을 통해서 획득하게 되는 새로운 주체 형태를 본다 | 주체가 새로운 주체 형식으로 드러낸다 |
『자기의식과 존재사유』에서 김상봉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데카르트는 생각과 존재가 근원적으로 일치하는 장소를 하늘 위 이데아로부터 나의 마음으로 옮겨 놓는다. 생각이란 무엇인가? 데카르트는 그것을 존재의 보편적 진리로서 이해하기보다는 나의 본질로 이해한다. 그것은 나에게서 제거할 수 없는 유일한 것이다. 물론 이때 데카르트가 말하는 나는 육체로서의 내가 아니라 정신으로서의 나, 생각의 주체로서의 나다. 즉 그것은 코기토의 주체로서의 나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의미에서의 나는 내가 나 자신을 반성적으로 의식할 수 있는 한에서 존재한다. 데카르트 자신의 말을 빌리면,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는 내가 이것을 말할 때마다 또는 정신에 의하여 파악할 때마다 필연적으로 참이다.’
장자의 단독자와 데카르트의 코기토의 차이는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장자의 단독자는 코기토를 해체해야만 드러나는[見] 것이기 때문이다. 장자에 따르면 진정한 인간의 마음은, 사유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인칭적이고 유동적인 자기 구성의 역량에 관련된다. 사유 자체에 대한 장자의 입장을 확인하기 위해 우리는 견독 뒤에 바로 ‘고금이라는 시간의 대대 관계를 해소했다[無古今]’라는 구절을 통해 장자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를 재구성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과거[古]는 바로 내면 혹은 자아의식으로 기능하는 성심의 시간성을, 그리고 현재는 새로운 삶의 문맥을 짜면서 조우한 타자가 이 내면을 통해 왜곡되어 정립된 외면의 시간성을 가리킨다. 여기서 우리는 인식의 세계 속에서 현재는 과거에 의해, 즉 외면은 내면에 의해 허구적으로 정립된다는 장자의 통찰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내외 혹은 고금의 대대 관계와 허구적 정립 관계는 우리의 삶이 타자와 새로운 삶의 문맥을 짜 나아가는 긴장 속에서 출현하는 전도된 관계임을 알 수 있다.
내면과 외면이 이렇게 성심의 과거성에서 존립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면이 현재성을 띠는 것처럼 보이기에, 이것을 바라보고 있는 내면도 현재성을 띤다는 착각과 전도가 일어나게 된다. 대대 관계의 한 사례로서 내외 관계는 우리 인식을 통해서 이렇게 정립된다. 그러나 인식을 통해 정립된 내면과 외면은 표면적으로는 인식하는 내면과 인식되는 외면으로 현실적 계기[今]인 듯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 내면이 다름아닌 고착된 자의식이라면, 그리고 이 고착된 자의식이 과거[古]의 삶의 문맥에서 구성된 마음에 지나지 않는다면, 인식을 통해 정립된 내면과 외면 모두는 삶이 처한 현실에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과거[古] 계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성심과 관련된 인식과 사유의 문제는 우리의 의식이 지니는 시간성의 계기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반면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기본적으로 시간성의 계기가 전제되어 있는 논의다.
사유와 반성은 기본적으로 대자적이기 때문이다. 만약 사유와 반성이 즉자적이라면 코기토는 확인될 수 없는 것이다. 사유의 이런 대자성은 기본적으로 의식의 시간성을 전제해야 의미를 지니게 된다. 결국 나를 반성하거나 무엇인가를 회의하는 코기토는 장자의 단독자와는 달리 과거와 현재[古今]라는 시간성의 계기로 존립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3. 단독자와 단독자의 만남
무엇보다도 단독자를 의미하는 독(獨)이라는 글자는 글자 그대로 홀로 있음을 의미한다. 홀로 있음은 나 자신이 일반성(generality)으로는 환원되지 않는 단독적인(singular) 나로 남는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단독적인 것(the singular) 또는 단독성(singularity)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독성이라는 개념을 특수성(particularity)이라는 개념으로 혼동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 이야기를 생각해보자. 이 이야기에 따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칠 것을 명령하자, 아브라함의 고민은 시작된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삭을 죽여서 제물로 바쳐야 되는 때가 바로 내일로 다가오자, 아브라함의 고민은 극도로 증폭되었다. 밤에 이삭이 곤히 자고 있는 방에 들어가 아브라함은 눈물을 흘리면서 이삭의 발을 쓰다듬었을 것이다. 이때 누군가가 아브라함의 고민을 들어주기 위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하자. “뭐 그렇게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은 지금도 젊으니까 다시 아들을 낳으면 되지요.” 그러나 이런 위로가 아브라함의 고뇌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절대 그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바로 그 하나뿐인 이삭이기 때문이다. 만약 아브라함이 다시 아들을 낳는다고 해도 그 아들이 바로 지금 제물로 바쳤던 이삭일 수는 없는 법이다.
이처럼 동일한 이삭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두 가지 상이한 방식으로 관계할 수 있다. 하나가 다른 아들로 교환 가능한 특수한 이삭으로 보는 경우라면, 다른 하나는 다른 아들로 교환 불가능한 단독적인 이삭으로 보는 경우다. 전자의 경우 특수성은 기본적으로 일반성의 하나의 사례로 경험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삭도 아들이라는 일반성(generality)의 하나의 특수에 불과하다면 다른 아들을 낳아서 이삭의 자리는 충분히 메울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런 경우라면 사실 아브라함의 슬픔은 이삭의 죽음에 대한 것일 수는 없다. 오히려 그는 지금 아들이라는 일반성의 한 가지 사례가 소멸하고 있음을 슬퍼하고 있다고 해야 한다.
반면 후자의 경우는 이런 일반성의 층위를 부정했을 때, 다시 말해 일반성의 한 사례로서 어떤 것을 특수성으로 보기를 거부했을 때 드러나는 개별자의 규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특수성과 단독성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하는데, 그 관건은 바로 일반성의 유무에 달려 있다. 따라서 우리가 단독성의 층위에서 개별자와 관계하기 위해서는 일반성/특수성의 도식을 제거하여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 일반성/특수성이란 도식은 어디에서 작동하고 있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인칭적인 마음에서 작동하면서, 인칭적 마음을 유지하게 해주는 관건이 된다. 왜냐하면 인칭적인 나는 세계ㆍ대상ㆍ삶이라는 일반성을 통해서 규정되는 나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인칭적인 나는 이 세계 속에서 하나의 대상(= 개별자)으로 살고 있는 나로 정의되는 특수한 나라는 것이다.
장자에게 세계ㆍ대상ㆍ삶을 지우는 견독의 과정은 바로 이 인칭적 마음으로부터 일반성을 지우는 과정이었다. 왜나하면 대상 형식의 일반성을 제거하게 되면 그와 동시에 주체 형식의 일반성도 제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반성을 지우게 되면 하나의 특수성으로서 의 인칭적 마음은 소멸되지만, 비인칭적이고 단독적인 마음이 드러나게 된다. 결국 그는 이런 견독의 과정을 통해서 단독성을 회복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단독자는 거울과 같은 마음, 아이와 같은 마음을 회복한 비인칭적인 삶의 주체 또는 단독적인 삶의 주체를 의미한다. 장자에게 내[自, 己]라는 의식은, 태어난 구체적 사회에 처하면서 언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형성되며, 그렇기 때문에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언어와 인식의 불가분적 관계를 고려해 볼 때, 인식에 의해 정립되는 나는 나라는 개념에 속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모두가 자신을 나라고 부르고 있음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 경우 내가 나를 나라고 의식한다고 해도 그것은 나라는 개념 또는 나라는 유(類)나 일반성의 특수일 뿐이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내가 단독자가 되었을 때, 우리가 조우하는 타자도 단독자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비인칭적이고 단독적인 나에게는 이제 일반/특수성의 도식이 소멸되었기 때문에, 타자도 단독성을 가지고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3. ‘거울[鏡]’ 은유의 중요성과 한계
1. 단독성을 가지고 삶을 영위하기
장자에게 단독자는 미리 설정된 매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단독자는 일반성/특수성이라는 매개 또는 교환의 논리를 제거하면서 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주체도 타자도 모두 단독성을 통해서 조우하고 소통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아버지라는 일반성에 포섭된 특수한 아버지로서의 아브라함은 아들이라는 일반성에 포섭되는 특수한 아들로서의 이삭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일반성이 함축하는 행동 양식에 의해 규정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가령 아브라함은 이삭에 대해 인자하고 자애롭게 처신하고, 이삭은 아브라함에 대해 공경하고 순종적인 태도로 처신할 수 있다. 반면 아버지라는 일반성이 제거된 단독적인 아브라함과, 아들이라는 일반성이 제거된 단독적인 이삭의 만남도 생각해볼 수 있다. 두 단독자들 사이에는 환원 불가능하고 고유한 단독적인 관계가 맺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독자로서의 아브라함과 이삭의 만남이 어떤 모습을 가질 수 있는지 기술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적으로 아브라함과 이삭만이 기술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는 견독(見獨)의 과정을 통해서 장자가 모든 것을 부정해서 그것들을 초월하려고 했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사정은 그 반대인데, 장자는 구체적인 삶의 영역으로 돌아와서 구체적인 소통을 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자는 견독의 다음 과정에서 바로 소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응제왕(應帝王)」 편의 거울 비유에서도 장자는 비인칭적인 마음을 설명하면서, 이 소통이야말로 우리의 본성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의 마음도 자신이 조우한 것만 비추는 거울처럼 새롭게 도래하는 것과 소통하고, 이전에 소통한 흔적을 성심의 형태로 담아 두지는 않는다. 이처럼 단독자는 구체적인 주체와 타자에 앞서 미리 이 주체와 타자를 매개하는 본질로서의 제3자(= 일반성)가 없음을 말한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이것이 주체[自]의 소멸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단독자는 타자와 매개 없이 직면해서 소통할 수 있는 주체, 유동적인 삶의 주체에 대한 긍정으로 독해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앞에서 이미 ‘나는 나를 잃었다[吾喪我]’라는 구절에서 이것을 확인한 바가 있다. 단독자는 바로 고착된 자의식을 버린[喪我] 나[吾]다. 이 내[吾=獨]는 결국 타자와 직면한다는 점에서 나 일반에 포섭되는 내가 아니라 단독적인 내다. 여기서 단독성(singularity)은 타자의 나로의 환원불가능성과 아울러 나의 타자로의 환원불가능성으로 경험되고 정의될 수 있는 범주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단독성의 회복은 꿈과 같은 사유와 주체 중심적인 진리관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오직 이런 고착된 자의식이라는 악몽으로부터 깨어나서 나와 타자가 동등하게 단독성을 가지고 삶을 영위한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이 점에서 거울 비유가 가지는 중요성이 있다. 왜냐하면 거울은 사유 현재가 아니라 존재 현재를 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적 사유의 현재성은 ‘어 그 사람이네!’라는 식으로 작동한다. 다시 말해 과거에 만났던 어떤 것을 기억함으로써 그 기억을 현재에 적용시킨다는 것이다. 반면 거울의 현재성은 그렇지 않다. 그저 도래하는 타자를 그 단독성에서 비출 뿐이다. 이처럼 장자가 거울의 비유를 통해서 말하려는 것은 존재 현재, 나아가 존재와 타자 중심적인 진리관이었던 것이다.
2. 거울 비유는 단지 비유일 뿐
장자는 이상적이고 본래적인 마음, 우리가 회복해야만 하는 마음을 거울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거울 비유가 단지 비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만약 거울 비유로 이해된 마음이 실체처럼 사유될 때, 다시 말해 장자가 우리에게 권고하는 마음이 마치 불교의 불성(佛性)처럼 원래 어떤 오염물도 갖고 있지 않은 본래 맑고 청정한 마음으로 이해될 때, 우리는 또 다시 장자를 근본적으로 오해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이해된 마음은 비인칭적인 마음일 수는 있어도 유동성을 갖는 마음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차갑게 응고된 마음, 이 세계를 일체의 편견 없이 관조하기만 하는 마음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의 모든 타자들은 그저 이 거울 앞에 나타나고 또 사라지고 또 나타날 뿐이다. 여기서는 기본적으로 구체적인 삶에서 이루어지는 타자와의 소통과, 그것을 통해서 가능해지는 새로운 주체의 구성은 불가능해지게 될 것이다. 이처럼 형이상학적으로 이해된 거울과 같은 마음은 궁극적으로 모든 소통의 현실을 초월해버린 실체화된 마음, 절대화된 마음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 우리는 장자의 단독자가 비인칭적이고 유동적인 마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 비인칭적인 마음은 타자와의 소통을 존재론적으로 기초하고 있지만, 그것은 우리의 실존적 삶이 지닌 개방성의 측면만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개방성이 우리의 삶에서 요청되는 것은 우리가 기본적으로 육체라는 폐쇄성이나 국부성, 즉 유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소통이라는 말 자체가 소통의 두 항[주체와 타자: 自他]과 그 사이의 관계라는 점을 함축하고 있는 개념이다. 소통의 구체적인 두 항이 없다면, 소통의 논의는 공허하게 되고, 반면 그 둘 사이의 관계가 없다면 두 항은 창(窓)이 없는 모나드처럼 독립적이게 되어 소통은 무의미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장자의 단독자[獨], 즉 단독적인 나[吾]는 비인칭적인 마음이라는 무한성과 육체라는 유한성의 통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장자가 거울로 비유하는 마음의 논점은, 그 자체로 맑고 깨끗한 실체적 마음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한성을 뛰어넘어서 소통할 수 있는 역량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 장자의 거울 비유를 생각해 보자. 거울은 분명 무한한 타자들을 그것들이 도래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비추는 것이다. 그렇지만 거울은 어떤 특정한 공간에 위치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거울의 맑게 비추는 역량은 단독자가 지닌 마음의 무한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울이 어떤 장소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불가피성은 바로 단독자가 지닌 육체의 유한성을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모종삼(牟宗三)을 필두로 하는 심미적 장자 독법에서 이런 육체의 유한성이 빠지고 없다는 데 있다. 그들은 거울의 밝게 비추는 능력만을 추상화해서 보고, 그 거울이 불가피하게 어떤 장소에 국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유한하다[有涯].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유와 주체 중심적인 인칭적 자의식은 우리를 허구적이고 관념적인 무한[無涯]으로 이끈다. 이것은 포기할 수 없는 장자의 문제의식의 기점이다. 장자의 단독자는 우리가 육체의 유한성과 마음의 무한성을 동시에 가진 존재임을 긍정한다. 우리의 마음은, 육체가 하지 못하는, 타자와의 소통 역량을 가지고 있다. 장자의 의도는 이렇게 유한성과 무한성을 포섭하고 통일하려는 시도다. 물론 여기서 마음의 무한성이란 마음의 비인칭성과 유동성을 의미하며, 따라서 타자와 무한하게 소통할 수 있는 소통 역량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3. 장자의 거울은 어느 시점엔 부셔버려야 한다
거울로 비유되는 마음은 우리 실존이 갖는 유한과 무한의 통일성 중 무한의 측면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것이 마치 우리에게 내재하는 실체처럼 이해될 때 우리는 장자의 삶의 철학을 근본적으로 오독하게 되고 만다. 우리는 여기서 선불교 역사 가운데 전설처럼 남아있는 혜능(慧能)과 신수(神秀)의 이야기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다음 이야기는 우리에게 마음에 대한 올바른 통찰을 제공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혜능과 신수는 모두 선불교의 다섯 번째 스승[五祖]인 홍인(弘忍)의 제자들이었다. 홍인은 관례대로 여섯 번째 스승[六祖]이 될 만한 사람을 선택해서 자신의 가사와 그릇을 남겨주려고 하였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각자의 깨달음을 벽에 써보라고 말했다. 그러자 제자들 중 가장 신망이 높고 또 지혜로웠던 신수는 다음과 같은 시를 벽에 써놓았다.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 이 몸이 바로 보리수[=지혜의 나무] 마음은 맑은 거울 |
時時勤拂拭 勿使惹塵埃 | 날마다 힘써 깨끗이 닦아야 하리라! 먼지가 앉지 않도록. |
그러자 나무를 하고 오던 일자무식 혜능은 이 시를 보고 웃으면서, 주위에 있던 다른 스님에게 다음과 같은 뜻의 글을 쓰도록 한다.
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며, 맑은 거울에는 (거울의) 틀이 없다. |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 | 본래 아무것도 없는데, 어디에 먼지가 모이겠는가! |
결국 홍인은 혜능에게 자신의 가사와 그릇을 넘겨주게 된다. 그런데 도대체 왜 홍인은 혜능을 깨달음을 얻은 자라고 판단하게 되었을까? 두 시를 비교해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신수가 마음을 자족적인 실체로 이해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혜능은 마음을 실체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은 집에 먼지가 앉을까 하는 근심걱정으로 매일 집에 들어오면 청소하고 또 청소한다고 하자. 반면 다른 사람은 먼지가 앉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여겨서 가끔 손님이 올 때나 혹은 시간이 남을 때 청소를 한다고 하자. 전자가 신수에 해당하는 사람이라면 후자가 혜능에 해당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되물어 보아야 한다. 왜 청소를 하는가? 왜 집을 그리도 깨끗하게 청소를 하는가? 전자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저 깨끗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집을 청소하고 있을 뿐이다. 반면 후자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집은 자신이 쉬는 곳이자 손님들이 와서 더불어 이야기하는 곳이기 때문에 가끔은 정리정돈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신수의 이야기가 아무리 멋있어 보여도 사실 신수의 생각은 강박관념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혜능은 시를 통해서 신수가 가진 생각의 집착과 강박관념을 비판하고 있었던 것이다. 혜능에 따르면 신수는 왜 마음을 닦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저 이전의 부처들과 선배 스님들이 수행을 했기 때문에 자신도 한다는 식일 뿐이다. 신수의 생각에는 도대체 마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숙고가 빠져 있다. 마음이 타자와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신수는 그저 맑은 거울 자체만을 지고한 목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왜 우리가 마음을 닦아야만 하는지 신수는 알지 못한다. 신수의 이런 착각은 어디서부터 기원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가 마음을 실체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혜능은 “거울에는 틀이 없다”는 말로 마음을 실체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적했던 것이다. ‘강을 건넜으면 배를 버려야 한다[捨筏登岸].’ 우리는 장자의 거울 비유로부터 마음의 소통성, 타자 중심적 진리관만을 얻고 그것을 버려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거울 비유를 그대로 가지고 가려 한다면, 우리는 신수가 빠진 폐단에 다시 빠질 가능성에 노출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시점에서 장자의 거울은 반드시 부서져야만 한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