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사진 같은 마음과 거울 같은 마음
문제는 자신의 도가 가진 태생적 제약성을 망각하고, 우리가 자신의 도를 보편적이라고 자임하는 데 있다. 이런 착각 속에서 소통의 흔적으로서의 도는 절대적 기준이자 원리로 추상화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눈길을 걷고 있다고 해보자. 그 사람이 걸었던 길에는 발자국이 남게 되고, 바로 그것이 길[道]이 된다. 애초에 정해진 어떤 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구체적이든 추상적이든 모든 길은 이런 식으로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긴 길은 뒷사람들에게는 안전한 길로 보이게 된다. 그래서 이 길을 가는 사람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고, 어느 사이엔가 이 길은 절대적인 길로 변해버린다. 절대적인 길은 이제 모든 인간들에게는 결코 회의될 수 없는 절대적인 방법이자 매개로 보인다. 결국 이렇게 되면 우리는 ‘왜 도가 있어야 하는지?’를 망각하게 된다. 이런 망각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자신이 소통을 해야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유한자라는 것을 망각한다는 것을 함축하고, 따라서 우리가 타자를 망각하는 데로 귀결된다.
바로 여기에서 ‘도는 작은 이룸에서 은폐된다[道隱於小成]’는 장자의 지적이 의미를 가진다. 이 작은 이룸[小成]이란 고착된 자의식의 출현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이런 소통의 사후적 흔적만이 유일무이한 절대적인 도라고, 그래서 참된眞] 도라고 주장하게 된다. 또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의 눈에는 다른 사람의 소통과 그 흔적은 거짓된[僞] 도로 드러나게 된다. 결국 작은 이룸 혹은 고착된 자의식이 장자가 ‘도는 어디에 숨어서 참과 거짓이 생기게 되는 것일까[道惡乎隱而有眞僞]?’라고 물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특정한 소통의 흔적(=도)을 마음이 성심의 형태로 담아 두고 절대적 기준으로 삼는다면, 이런 마음은 거울이 아니라 사진으로 비유될 수 있는 마음일 것이다. 이런 사진과 같은 마음은 다른 타자와 조우할 때 결코 그 타자와 소통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장자는 「응제왕(應帝王)」편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언어의 주인이 되지 말고, 사유의 창고가 되지 말고, 일의 담당자가 되지 말고, 인식의 주인이 되지 말라. 몸으로는 무한한 타자와의 소통을 다하고,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을 다하지만, 얻은 것을 드러내지 말라. 역시 비울 뿐이다.
無爲名屍, 無爲謀府, 無爲事任, 無爲知主. 體盡無窮, 而游無朕. 盡其所受乎天而無見得, 亦虛而已!
지인(至人)의 마음씀은 거울과 같아 일부러 보내지도 않고 일부러 맞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대로 응할 뿐 저장해 두려 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개별적인 것들을 이기고 상함을 받지 않는다.
至人之用心若鏡, 不將不逆, 應而不藏, 故能勝物而不傷.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