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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 Ⅻ. 결론과 더 읽을 것들 본문

고전/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 Ⅻ. 결론과 더 읽을 것들

건방진방랑자 2021. 7. 2.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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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II. 결론과 더 읽을 것들

 

 

1. 장자철학의 고유성

 

 

1. 대화와 소통이란 주제를 담은 장자

 

 

장자의 철학은 어떤 통일된 공동체라는 토양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그의 철학은 전국시대(戰國時代)라는 정치적 상황과 제자백가(諸子百家)로 상징되는 사상적 상황의 산물이었다. 다시 말해 대화와 소통의 결여라는 상황 속에서 그의 철학은 탄생했다는 것이다. 정치적인 측면에서의 일방적인 무력 사용과 사상적인 측면에서의 독단적 학설 묵수는 당시가 대화와 소통에의 의지가 결여되었던 시대임을 증거하고 있다. 왜냐하면 일방적인 무력의 사용은 상대 국가를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지 않을 때에만 가능하고, 독단적인 학설의 묵수는 상대 학파를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지 않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당시는 표면적으로 다양한 국가들과 다양한 사상들이 유행했던 시대인 듯이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다양한 유아론자들만이 존속했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장자는 이런 유아론자들을 꿈꾸는 사람들이라고 비유한다. 왜냐하면 꿈속에서의 대화는 겉으로는 대화인 듯이 보이지만 결국 유아론적 독백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갈등과 대립의 시대에 장자는 진정한 대화와 소통을 꿈꾸었던 사람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진정으로 타자와 대화하고 소통하기 위해서 이런 유아론적 꿈으로부터 깨어나야만[] 한다. 문제는 꿈과 깨어남이 주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스스로 깨어 있다고 자임해도 주체의 행동은 항상 꿈에 사로잡힌 행동에 불과할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꿈꾸고 있는 것이냐 아니면 깨어 있는 것이냐의 문제는 주체로부터는 결정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꿈과 깨어남을 결정하는 기준은 주체라기보다는 타자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장자에게는 꿈이 주체가 스스로에게 닫혀 있음을 의미한다면, 깨어남은 주체가 타자에게로 열려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다른 무엇보다도 장자철학의 고유성을 규정하는 것은 그가 자신의 철학체계 속에서 타자를 도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어렵지 않게 깨어나는 것만으로 대화와 소통이 완수되지 않을 것임을 예견할 수 있다. 단지 이 상태는 주체가 자신의 유아론적 자기동일성으로부터 벗어나서 타자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된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장자에게 깨어남은 타자와 대화하기 또는 소통하기 위한 필요조건이지 결코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깨어남은 주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일 뿐, 결코 필연적으로 타자와의 소통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비록 깨어난 주체가 소통을 완수하려고 노력한다 할지라도, 소통은 항상 좌절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소통은 소통의 양 항이라고 할 수 있는 주체와 타자에 의해 동시적으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장자의 철학이 아직도 우리에게 의미 있는 이유는 그가 통찰해낸 타자에 대한 이런 현실적 감각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장자의 철학은 철학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는 대화와 소통이란 주제에 대한 사색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2. 소통을 위해 거울과 같이 맑은 마음을 유지하라

 

 

장자철학을 이해하는 데 핵심 개념이 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의존하지 않음이라고 번역되는 무대(無待)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이 기존의 연구자들처럼 절대(絶對)로 이해될 때, 결코 우리는 장자철학의 핵심에 이를 수 없게 된다. 반면 무대라는 개념이 꿈과 같은 일체의 매개에 의존하지 않음이라고 이해될 때, 우리는 그가 모색했던 삶과 소통의 진실에 이르게 된다. 절대라는 개념 속에서는 주체와 타자는 원리적으로 소멸되어 버릴 수밖에 없다. 반면 무대가 매개에 의존하지 않음으로 이해될 때, 주체와 타자는 실존적으로 긍정될 수 있다. 매개가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타자와 소통하기 위해서 목숨을 건 비약을 수행해야만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비약에 실패해서 주체와 타자 사이에 입을 벌리고 있는 심연에 빠져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타자와 소통하려면 우리는 이런 심연을 건너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인간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장자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유한자라는 사실을 긍정하고 있다. 이 말은 인간이 그 자체로서 존립할 수 있는 신적인 실체(substance)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타자와 소통하면서 그리고 소통해야만 존립할 수 있는 존재다.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마음의 역량이 주어져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분명 유한자이지만, 제한적인 의미에서는 무한자의 역량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장자에게 인간은 유한한 무한자 또는 무한한 유한자라고 규정될 수 있는 존재다. 따라서 무한한 역량을 가지고 있는 마음은 결코 우리의 실존과는 별개로 독립적인 존재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생각은 단지 인간의 구체적 실존의 양태인 무한한 유한자라는 통일성으로부터 무한성만을 부당하게 추상화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쨌든 타자와의 소통은 무한한 유한자로서의 인간이 지닌 무한성의 측면인 마음에서 사유되고 모색될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우리는 왜 장자가 마음이라는 존재론적 장소를 통해 소통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조건을 숙고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장자는 진정한 마음, 혹은 본래적인 마음을 거울로 비유한다. 거울은 자신이 조우한 어떤 것이든지 투명하게 비춘다. 이것은, 자신이 비추는 것이 추녀이든 아니면 미녀이든 상관없이, 거울은 타자를 있는 그대로 비춘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울의 잘 비추어내는 역량 자체를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 거울이 잘 비추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우리는 그 거울을 들여다보아야만 하는데, 그 경우 우리는 거울 속에 비친 우리 자신의 모습만을 확인하게 된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의 본래 모습과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비교할 수 있는 절대적 위치에 설 수 없다. 결국 거울의 밝음의 능력 그 자체는 오직 다양한 타자를 비춤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확인될 수밖에 없다. 우리의 마음도 이와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자신의 마음이 맑다는 것은 오직 타자와 잘 소통하는지의 여부로서만 사후에 확인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유지하려는 시도는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최종적 목적이 아니라 타자와의 소통을 위한 필수적인 수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3. 소통을 통해 변한다

 

 

소통은 지적인 이해나 또는 정서적 교감과도 구별되어야 한다. 왜냐 하면 지적인 이해나 정서적 교감에 대한 논의는 기본적으로 독립된 주체와 타인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적인 이해나 정서적 교감은 나는 나이고, 너는 너라는 인칭적 수준에서 일어난다는 말이다. 그러나 소통은 기본적으로, 독립된 주체와 독립된 타인 사이의 관계 맺음이라기보다, 우리가 소통을 통해 새로운 주체로 거듭날 수 있다는 점에 그 논점이 있는 개념이다. 이처럼 소통은 우리가 새로운 주체로 생성되는 비인칭적 수준에서의 관계맺음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그래서 소요유(逍遙遊)라는 자유를 이야기하는 대붕 이야기도 곤()이라는 물고기에서 대붕(大鵬)이라는 새로운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장자에게 주체의 자유는 주체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주체 형식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런 주체 형식의 변화는 조우한 타자와의 소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장자가 권고하는 자유는 우리가 타자와 소통함으로써 부단히 자신을 극복하고 새롭게 생성될 수 있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치 행글라이더를 타고 자유롭게 비행하는 사람의 자유가 기본적으로 바람의 섬세한 흐름을 통한 끊임없는 자기조절을 통해 존립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타자와의 소통으로서의 자유가 주체와 타자의 구분이 해소되는 절대적 자유가 아님에 주목해야 한다. 결코 나와 너는 변증법적으로 지양되어 우리로 소멸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차피 나와 타자는 모두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유한자이기 때문이다. 만약 나와 타자변증법으로 지양되어 하나가 되어버린다면, 이것은 마치 거울이 하나의 영상만을 가진 사진이 된 것에 비유될 만한 사태다. 그러므로 나 아닌 것으로서 타자들은 기본적으로 무한히 다양하고 복수적이라는 것을 긍정하는 데서 장자가 권고하는 자유의 현실성이 존재한다고 말 할 수 있다.

 

장자에게 소통은 자유[逍遙遊]라는 이념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후대 신유학(新儒學)에서 타자가 도래하면 그에 따라 응한다[物來而順應]’고 표현된 자유 이념의 선구이기도 하다. 그런데 인간은 육체를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유한자라는 점에서, 인간의 자유는 철저하게 인간 자체 내에서만 존립될 수 없다. 오직 비인칭적인 마음으로 타자와의 소통이 가능했을 때, 자유는 실현될 수 있다. 물론 자유가 실현되었다는 것은 동시에 주체가 새로운 타자와 소통해서 새로운 주체로 변형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장자의 소요유는 절대적 주체의 정신적 자유나 심미적 자유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그가 우리에게 권고하는 자유는 절대적 자유가 아니라 제한적인 자유, 유한적인 자유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유한적 자유의 이념으로서의 소요유의 주체는 엄밀하게 비인칭적인 마음을 가진 나를 가리킬 수 없다. 왜냐하면 소요유의 주체는 이미 타자와의 소통을 통해 우리의 한 상관항으로 변화 또는 생성되었기 때문이다.

 

 

 

 

4. 자의식은 버리고 무매개적으로 소통하라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 장자는 비어 있는 마음을 의미하는 허심(虛心)을 강조하고 있다. ‘심재 이야기에서도 잘 드러나 있는 것처럼 허심은 기본적으로 나는 나라는 인칭적인 자의식이 작동하지 않는 비인칭적인 마음의 상태다. 그런데 이런 마음의 상태에서는 사유나 판단이라는 지적인 작용이나 희노애락의 정서적 교감과 같은 인칭적 수준에서의 작용은 지워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지적인 작용이나 정서적인 작용은 모두 선이해나 선감정을 전제로 해서만, 따라서 과거의식에 의거해서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장자가 권고하는 소통은, 기본적으로 과거 의식에 사로잡힌 고착된 자의식을 비운 마음에서 무매개적으로 일어난다는 점에서, 지적인 이해나 정서적 교감보다 더 근본적인 실존적 사태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지적인 이해나 정서적 교감은 특정한 소통의 사태를 전제로 해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허심의 회복 또는 확보는 타자와 조우하기 이전의 수양론이라는 함축만을 가지고 있다. 만약 허심으로 소통이 저절로 발생한다고 본다면, 이런 이해는 기본적으로 수양론적 공간과 현실적인 삶의 공간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장자에게 허심은 그 자체로 추구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타자와 소통한다는 목적에 종속되는 것이다. 이런 장자의 정신은 양생주편에 나오는 포정 이야기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포정이 칼을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 자체로 추구된 것이 아니라 소를 잘 자르기 위해서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을 수양해서 인칭적 자의식을 제거하려는 노력도 타자와 잘 소통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아쉽게도 장자 이후 이 점은 항상 망각되고 잊혀져 버렸다. 도대체 왜 마음을 수양하는지 망각한 채 마음만을 수양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마치 자신이 왜 칼을 가는지 망각한 사람이 그저 칼을 날카롭게 갈아 그렇게 날이 선 칼을 집 장식장에 넣어두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타자와 관계하지 않는 허심이나 소를 자르지 않는 날카로운 칼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것은 단지 편집증에 지나지 않는 자기도착의 결과물에 불과한 것이다.

 

19년이란 시간 동안 소를 잘 자르게 된 포정의 칼은 이제 소와 너무나 잘 소통하게 되어서 날이 방금 숫돌에서 갈려 나온 것처럼 날카롭고 새롭다. 이것은 포정이 허심을 가지고 소와 잘 소통했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정은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비록 그렇게 제가 소통을 한다고 할지라도, 저는 매번 살과 뼈가 엉켜 있는 곳에 이르러 그 자르기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雖然, 每至於族, 吾見其難爲].” 이 말은, 비록 허심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매번 전혀 예기치 않은 그만 두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는[不得已]’ 사태와 조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포정은, 이전에 소를 자르면서 체인하게 된 기술[]을 버리고 그 자르기 힘든 부분[]을 자르기 위해, 다시 마음을 집중해야만 한다. 이처럼 삶의 공간은 우리가 매번 예기치 않던 타자의 타자성과 마주치게 되는 공간이다. 이 점에서 삶의 공간은 수양의 공간과는 반드시 구별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한편 수양의 공간은 삶의 공간을 위해서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이 두 공간은 모두 연속적인 것으로 사유될 필요가 있다. 장자가 우리에게 권고하는 양행(兩行)도 바로 이 두 공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기초해 있으며, 우리에게 수양과 삶을 동시에 성공적으로 이루어야 한다는 전언이라고 할 수 있다.

 

 

 

 

 

2. 장자철학의 가능성과 한계

 

 

1. 장자 철학에서 숙고할 두 가지 사항

 

 

무매개적 소통이라는 이념은 장자철학의 고유성을 규정한다. 그것은 주체와 타자가 일체의 매개 없이 직접적으로 조우해서 소통해야 함을 의미한다. 장자에게 이런 무매개적인 소통은 존재론적으로 우리 마음의 본래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마음은 맑은 거울처럼 모든 타자를 있는 그대로 비출 수 있는 소통 역량[神明]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소통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거울 비유는 확대 해석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규정이랄 수 있는 유한과 무한의 통일성, 혹은 육체와 마음의 통일체 중 후자의 측면, 즉 무한한 마음의 측면만을 추상해서 설명하고 있는 비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자는 우리가 무한한 마음, 혹은 비인칭적인 마음을 회복했다는 것은 단지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필요조건만을 획득한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세편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가 심재(心齋)를 통해 비인칭적인 마음을 회복했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소통해야 한 타자의 타자성[不得已]이 남게 된다. 그가 권고한 것에 따르면, 우리는 고착된 자의식에 근거하는 매개를 통해 규정된 나와 타자 사이의 관계로부터, 일체의 매개 없이 삶의 차원에서 직접적인 소통을 도모하는 나와 타자 사이의 관계로 이행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꿈[]으로부터 깨어나서[] 타자와 소통하려는 목숨을 건 비약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장자가 바로 날개 없이 날 수 있어야 한다[以无翼飛]’, 혹은 알지 못함으로써 알아야 한다[以无知知]’고 말했을 때 의도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항을 숙고해야만 한다. 첫째 는 본래성과 은폐성의 도식에 대한 것이고, 둘째는 무매개적 소통이라는 이념에 대한 것이다. 먼저 첫째 사항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본체[]와 현상[]이라는 도식이 아니라 본래성과 은폐성이라는 도식을 사용함으로써 장자는 수양론과 존재론을 통일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본래성은 수양론의 측면에서 보면 실현되어야 할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고, 존재론의 측면에서는 우리의 마음을 규정하는 원리가 된다. 그런데 본래성과 비본래성이라는 장자의 수양론적 도식은 오히려 타자와의 무매개적 소통이라는 그 자신의 문제의식을 희석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 도식은 마치 마음의 본래성을 회복하기만 하면 타자와의 모든 관계맺음이 저절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듯한 그릇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물론 장자는 수양을 통해서 확보된 마음의 본래성이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타자와 소통하기 위한 필요조건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은연중에 시사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장자내편을 전체적으로 볼 때 너무나 많이 등장하는 수양론적인 이야기들에 비해, 이런 장자의 문제의식을 명확히 드러내주는 이야기들은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은 장자 본인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장자를 편찬했던 그의 후학들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 때문에 수양이 완성되면 타자와의 소통은 저절로 귀결된다는 식으로 장자를 독해하는 해석들, 즉 유심론적 해석들이 나오게 되었다는 점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되겠다.

 

이제 둘째 사항에 대해 생각해 보자. 장자는 모든 이념들을 부정했던 인물은 아니었다. 흔히 장자를 모든 것에서 철저하게 자유로웠던 대자유인으로 간주하지만, 이것은 철학적으로 철저하지 못한 장자 독해로부터 나온 섣부른 평가일 뿐이다. 이런 이해에 따를 경우 장자철학의 무매개적 소통의 이념은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장자는 모든 종류의 주체 형식, 즉 윤리적 주체, 사변적 주체 등을 비판하고 해체했다. 그렇지만 그런 해체의 목적은 소통 주체를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그는 모든 종류의 매개(나 이념)를 비판하고 해체했다. 그렇지만 그런 해체와 비판은 소통이라는 이념을 위해서였다. 사실 이념은 철학의 중핵에 해당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앞으로 실현되어야 할 무엇으로서의 이념은 철학이라는 학문 자체의 존립 근거라는 것이다. 장자에게 무매개적 소통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확고한 이념이고, 단독자는 이런 이념을 실현할 수 있는 완성된 주체다. 실천이나 수양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주체와 이념을 전제하고 있어야 한다. 이념이 없는 수양이나 실천은 맹목적일 수밖에 없고, 주체가 없는 수양이나 실천은 공허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념과 주체가 없는 철학은 철학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공허하고 맹목적인 치기나 횡설수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2. ‘비인칭적 주체의 소통이 가진 문제점

 

 

장자에게 매개에 의해 미리 규정된 주체와 타자 사이의 관계를 매개없는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로 회복하는 관건은, 전적으로 주체의 마음의 문제로 환원된다. 그래서 좌망(坐忘), 심재(心齋)와 같은 수양론은 타자와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필요조건이 된다. 그런데 이 경우 타자라는 요소는 결코 장자의 수양론만으론 해소되지 않는 무엇이다.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장자에 따르면 완수된 소통에 대한 규정은 어떤 성격의 타자와 조우했는지의 여부에 의해 결정된다. 다시 말해 장자가 권고한 대로 비인칭적인 주체로 변형되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타자와 다시 조우하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 이 비인칭적인 주체는 타자에 맞게 임시적 주체로 현실화될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내가 조우한 타자가 어떤 타자인가라는 문제가 중요하게 대두된다. 이 경우 내가 조우하는 타자를 이론적으로 두 가지 예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인칭적인 자의식을 가진 인칭적인 타자이고, 둘째는 비인칭적이고 유동적인 마음을 회복한 비인칭적인 타자다.

 

비인칭적인 주체로서 내[]가 인칭적 주체와 조우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예를 들어 그가 극악무도한 이기주의자라면, 나와 그의 소통은 결국 그의 고착된 자의식과 판단을 수용하는 것일 수밖에 없고, 나의 임시적 주체 형식도 이기주의를 띠게 된다. 그렇다면 이 경우 나의 소통이란 무엇을 하기 위한 소통인가? 더러운 것이 앞에 있을 때 거울은 더러운 것을 비추듯이, 비인칭적인 마음을 회복한 나는 그의 극악무도한 이기주의를 수용할 수밖에 없게 된다. 결국 아무리 자신의 고착된 자의식을 비웠다고 할지라도 이 경우 나는 제3자가 보았을 때, 이기주의를 고착된 자의식의 내용으로 하는 사람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물론 장자는 이 제3자와 조우한다면, 비인칭적 주체는 이 제3자의 고착된 자의식의 규정을 다시 받아들이면 된다는 식으로 변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삶은 단순히 한두 사람의 타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복수적인 타자들과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장자의 이런 해법은 미봉책에 불과하다고 비판받을 수 있다.

 

반면 비인칭적 주체로서 내가 비인칭적 타자와 소통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 경우 고착된 인칭적 자의식을 주체나 타자는 모두 제거했기 때문에 이들의 소통은 거울과 거울이 마주 서 있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양쪽의 거울은 상대방의 거울을 비추고, 그 안에 있는 자신을 비추고, 이런 식으로 서로 무한히 비추는 것으로 진행된다. 그런데 이런 경우 또한 일상적 의미에서의 소통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저 자신의 모습(맑은 거울)만을 비추는 기이한 상태가 아닌가? 무매개적 소통이라는 이념은 타자의 타자성을 받아들이려는 데 있는데, 그 타자가 자신과 동일하다면 무매개적 소통은 이 경우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장자에게는 타자와의 소통이 완성되었다는 주체가 비인칭적인 주체로 머물러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타자와의 소통은 비인칭적인 주체가 자신이 조우한 타자에 맞게 임시적 주체로 끊임없이 현실화되는 것으로 완성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장자가 강조했던 양행(兩行)이라는 전언의 철학적 함축이다. 그런데 만약 조우한 타자가 비인칭적 타자라면 비인칭적인 주체는 결코 임시적 주체로 현실화될 수 없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구체적인 소통이 이루어지지도 못한 것이다.

 

 

 

 

3. 장자 철학의 한계와 떠나야 할 때

 

 

무매개적 소통은 공동체적 규칙이 내면화된 초자아의 허구적 자기동일성을 비본래적인 것으로 여겨 제거하는 데서 성립된다. 따라서 무매개적 소통에서 비인칭적인 주체 형식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왜냐하면 이런 주체 형식을 갖지 못한다면, 주체는 결코 무매개적인 소통을 통해서 새로운 주체로 거듭날 수 없기 때문이다. 비인칭적 주체는 기존의 의미 체계를 비우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결여하고 있는 주체, 무의미의 주체다. 물론 여기서 말한 무의미는 공허하거나 모순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생성할 수 있는 유동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 그가 권고하는 비인칭적인 주체의 달성은 표면적으로는 어떤 역사적 단절을 가능하게 하는 논리인 것처럼 보인다. 분명 새로운 역사의 도래는 기존의 매개(=의미) 형식의 비판, 혹은 인식론적 단절에서 가능한 것이다. 이 점에서 분명히 장자의 비인칭적 주체는 자유와 역사를 가능하게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장자철학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내재해 있다. 그것은 비인칭적 주체 형식과 더불어 장자가 양행(兩行)의 논리를 통해 권고하고 있는 임시적 주체 형식과 관련된 문제다.

 

임시적 주체 형식은 비인칭적 주체 형식이 단독적인 타자와 조우하면서 그 타자와 어울리게 현실화된 것이다. 그렇다면 임시적 주체 형식이 새롭게 지니는 의미는 어디서 기원한 것인가? 그것은 타자로부터 기원한 것일 수밖에 없다. 만일 이렇게 임시적 주체의 임시성 혹은 임시적 의미가 타자로부터 기원한 것이라면, 이 경우 역사나 자유가 과연 유의미하게 이야기될 수 있을까? 역사나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새롭게 창조된 의미라고 할 때, 우리는 의미의 진정한 자리에 대해 다시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의미의 온당한 자리는 바로 주체와 타자 사이, 혹은 주체와 타자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장자의 임시적 주체가 지니는 새로운 의미는 너무 타자 쪽으로 쏠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장자철학이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인상을 띠게 된 것이다. 한 마디로 양행의 주장으로 요약될 수 있는 장자철학에는 단절해야만 하는 과거, 그리고 타자와 조우하는 생생한 현재라는 두 가지 시간 계기만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장자철학은 미래의 전망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주문은 앞은 알지 못하는 데서 그쳐야만 한다고 주장했던 장자에게 너무 가혹하거나 불공정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즉 기존의 의미 체계는 새로운 의미 체계의 구축을 통해서만 작동을 멈출 수 있다. 단지 장자처럼 기존의 의미 체계에 대한 해체로만 머문다면, 우리는 타자들을 통해서 기존의 의미 체계를 다시 수용할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반복에 빠질 수도 있다.

 

결국 장자철학은 매개 제거를 위한 수양론, 그리고 조우한 타자와의 생생한 소통의 모습을 기술하는 데서 멈출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장자철학은, 비록 삶이 직접적인 타자와의 소통 속에서 정립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할지라도, 새로운 타자에 대한 경험과 새로운 주체 형식에 대한 전망에 대해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전망은 기본적으로 역사적인 전망 혹은 미래에 대한 전망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록 장자철학이 주체와 타자 간의 무매개적 소통이라는 현실을 영원한 현실 혹은 영원한 순간으로 매우 섬세하게 포착해서 기술하고 있다 할지라도, 무매개적 소통의 진실은 자신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경험할 수 없는 그런 사적인 것에 머물게 된다. 소통의 즐거움은 오직 나만이, 혹은 잘해야 주체와 타자만이 공유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즐거움에는 애초에 직접적인 주체와 타자를 제외한 다른 제3자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그러나 주체와 타자 간의 갈등이 과연 주체와 타자만의 문제일 수 있을까? 오히려 이런 갈등은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층위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비록 장자가 기존의 모든 이념들에 대해 냉철한 비판의식을 유지했다고 할지라도, 철학은 기존의 삶의 형식에 대한 비판과 수양론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철학은 기존의 삶의 형식과 질적으로 다른 주체 및 타자 형식, 즉 주체와 타자를 거듭 나게 할 수 있는 새로운 의미 체계를 우리에게 던져주었을 때에만 완성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서야 이념을 통해서 세계를 변화시키는 철학의 진정한 역할이 완수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우리가 장자로부터 배우게 되는 마지막 교훈일 것이다. 새로운 체계, 새로운 의미, 나아가 새로운 주체를 우리의 힘으로 구성하라는 것! 이제 장자로부터 떠날 때가 된 것 같다. 언제 다시 우리가 장자에게 돌아올지 기약은 없지만,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우리는 전혀 다른 주체로 변형되어 돌아와야만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장자에 대한 우리의 최소한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3. 더 읽을 것들

 

 

더 깊이 장자를 공부하고 싶은 사람은 곽경번과 왕선겸의 다음 책

을 읽는 것이 좋다.

 

곽경번(郭慶藩), 장자집석(莊子集釋)(북경(北京): 중화서국(中華書局), 1993).

왕선겸(王先謙), 장자집해(莊子集解)(북경(北京): 중화서국(中華書局), 1987).

왕숙민(王叔岷), 장자교전(莊子校詮)(대만(臺灣):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 민국(民國)83).

 

앞의 두 책 중 곽경번의 책은 왕선겸의 책보다 부피가 훨씬 많이 나간다. 그렇지만 이 책은 곽상이라는 최초의 주석자의 주석을 충실하게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철학적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장자내에 나오는 원문들을 독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해석학적, 언어학적인 여러 자료들을 수록하고 있다. 아마도 이 책은 장자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중심적인 교재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간단하게 장자의 철학적 함축들을 읽어보려는 사람에게는 곽경번의 책보다 훨씬 간결하고 요점적인 왕선겸의 책을 권하고 싶다. 최근까지 우리나라 지식인들이 주로 읽었던 것이 왕선겸이 지은 이 책이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았나 싶다.

마지막으로 소개되어 있는 왕숙민의 책은 고증작업에 충실한 주석서인데, 전문 연구자가 되려면 반드시 참고할 많은 사항들을 잘 정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문에 익숙하지 못한 독자들에게는 다음 번역서들을 권하고 싶다.

 

안동림, 장자(서울: 현암사, 1993).

안병주·전호근, 譯註 莊子1(서울: 전통문화연구회, 2002).

오강남, 장자(서울: 현암사, 1999).

 

안동림의 책은 곽경번의 책을 포함한 중국에서 나온 여러 주석서를 참조로 해서 만든 엄청난 양의 번역서다. 그러나 이 책은 분명 장자에 대한 고급 정보를 풍부하게 소개하고는 있지만, 너무 난삽하다는 인상을 준다.

이런 인상을 받는 사람들은 안병주와 전호근이 번역한 책을 보면 된다. 비록 장자내편만 번역한 것이지만, 전통적인 장자 해석에 입각한 아주 훌륭한 번역서라고 할 수 있다. 이 번역서는 한문 원전을 읽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원문 원전을 읽은 효과를 줄 수 있다.

필자가 권하고 싶은 것은 마지막으로 소개한 오강남의 번역서다. 이 책은 내편을 위주로 번역하고 있지만, 최근 서양의 연구경향을 비판적으로 취합해서 장자의 철학이 지닌 현대적 의미를 흥미롭고 재미있게 소개하고 있다. 독자들이 안병주와 전호근의 번역서와 오강남의 번역서를 대조해서 읽어보면 전통적 해석과 최신의 해석들을 아울러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영어를 편하게 읽을 수 있는 독자들에게는 다음 영어 번역서를 권하고 싶다.

 

A. C. Graham, Chuang-Tzu: The Inner Chapters(London: Unwin Paperbacks, 1981).

 

우리나라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래함은 중국의 제자백가 연구에서 한 획을 긋는 연구자다. 그래서 서양에서의 선진중국 철학 연구는 그래함 이전과 이후로도 나누어질 수 있을 정도다. 그가 탁월한 점은 원전에 대한 기존의 주석서들에 가급적 의존하지 않고, 원전의 원문을 그것이 쓰여진 당시의 사상사적이고 언어학적 관점에서 입각해서 거의 직역에 가깝게 번역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통적 주석에 입각해서 장자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래함의 영어 번역본은 자의적인 해석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인상은 그가 얼마나 진지하고 오랜 세월 동안 제자백가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던 사람이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는 엄청난 학문적 성취를 토대로 장자』 「내편에 대한 탁월한 번역서를 썼던 인물이다. 장자가 다루는 철학적 쟁점들이나 혹은 그 당시의 사상사적 쟁점들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이 번역서를 참고해야만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독자들이 읽을 만한 대표적인 연구서들을 살펴보자.

 

이강수, 노자와 장자(서울: , 1997).

김충렬, 노장철학강의(서울: 예문서원, 1995).

김형효, 老莊 사상의 해체적 독법(서울: 청계, 1999).

Paul Kjelberg and Philip J. Ivanhoe(ed), Essays on Skepticism, Relativism, and Ethics in the Zhuangzi(New York: SUNY Press, 1996).

강신주, 장자의 철학: [], 깨어남[] 그리고 삶[](서울: 태학사, 2004).

 

이강수의 연구서는 노자와 아울러 장자에 대한 전통적 해석에 입각해서 평이하게 장자의 사상을 설명한 간명하고 읽기 쉬운 책이다. 이강수의 이 책은 기본적으로 노자와 장자를 동일한 철학체계를 공유하고 있다고 보는 전제 하에서 쓰여진 것이다.

김충렬의 책은 대만의 연구경향에 영향을 받아서 수행된 연구서인데, 장자의 사상을 주관주의적이고 심미주의적인 사상으로 독해하고 있다. 김충렬의 이 연구서는 노자를 존재론적인 사상가로 그리고 장자는 정신 경지를 주로 논의했던 사상가로 규정하고 있다.

김형효의 책은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데리다(J. Derrida)의 해체론에 입각해서 노자와 장자를 현대적 감각에서 해석하고자 한 연구서다. 장자와 관련된 비교철학적 입장이나 최근의 국내 연구경향들을 확인하고자 하는 독자들은 김형효의 연구서를 꼭 읽어둘 필요가 있다.

폴 크젤버그와 아이반호우가 편집한 영어로 된 연구서는 곧 필자에 의해 번역될 연구서다. 이 책은 장자를 연구하는 미국의 학자들이 총집결해 만든 기념비적 연구서다. 이 책은 이미 미국 내에서는 장자를 연구하는 데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소개된 연구서는 필자가 학위논문을 토대로 곧 출판할 책이다. 지금까지 필자가 장자에 대해 논의했던 모든 것은 사실 학위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구성했던 것을 쉽고 평이하게 풀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필자의 논의가 어떤 근거와 논증에서 논의되었는지 학문적으로 관심을 갖는 독자라면 곧 출판될 필자의 연구서를 참조하기 바란다.

 

 

 

 

인용

지도 / 목차 / 장자 / 수업 / 삶과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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