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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삶을 만나다 - 제2부 친숙한 것들을 낯설게 만들기, 2장 국가라는 가장 오래된 신화 본문

책/철학(哲學)

철학, 삶을 만나다 - 제2부 친숙한 것들을 낯설게 만들기, 2장 국가라는 가장 오래된 신화

건방진방랑자 2021. 6. 28.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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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국가라는 가장 오래된 신화

 

 

국가를 문제 삼기가 어려운 이유

 

 

여러분은 스톡홀름 증후군(Stockholm Syndrome)’이란 말을 들어 보았나요? 이것은 1973년 스웨덴 스톡홀름의 어떤 은행에서 일어났던 인질·강도 사건에서 생긴 용어입니다. 당시 강도들에게 잡힌 인질들이 오히려 강도들에게 협조하고, 반대로 자신들을 구하려는 경찰들에게 극도의 적대감을 보였었지요. 경찰에 포위된 인질범들이 인질들에게 인간적인 대우를 해줌으로써 이와 같은 병적인 심리 상태가 더욱 강화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사람들은 강한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자기 나름대로 그 상황에 적응하기 위한 방어기제를 작동시키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인질로 잡힌다는 것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심각한 스트레스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인질범들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결국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지요. 더구나 이런 위험 상황을 통제해줄 수 있는 힘이 경찰에게 없다면, 인질들의 스트레스는 더욱 가중될 것이 분명합니다.

 

인질범들에게 잡힌 이런 위기 상황에서 인질들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인질들은 자신들을 도울 수 없는 경찰이나 사회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을 억류하고 있는 인질범들의 편을 들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인질들이 빠지게 되는 스톡홀름 증후군의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은 세 단계로 진행됩니다.

 

우선 인질들은 자신들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인질범들이 자신들을 해치지 않는 것을 고마워하며, 결국 그들에게 온정을 느끼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인질들은 자신들을 구출하려고 하는 경찰들에게 오히려 반감을 느끼게 됩니다. 경찰들이 자신들과 인질범들 간의 우호적인 관계를 파괴함으로써 오히려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마지막으로 인질범들도 인질들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억류시킨 인질들이 자신들이 아니라 오히려 경찰들에 대해 반감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질들과 인질범들은 함께 고립되어 비슷한 두려움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인질들과 인질범들 사이에 우리라는 기묘한 믿음의 공간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지요.

 

스톡홀름 증후군 메커니즘 1 인질범들이 자신들을 해치지 않는 것을 고마워함.
2 자신들을 구출하려고 하는 경찰들에게 오히려 반감을 느낌.
3 인질범들도 인질들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느낌

 

 

역사적으로 모든 국가는 위기에 빠지면 항상 전쟁을 통해서 국내의 불만을 잠재우려고 했습니다. 왜 그랬던 것일까요? 그것은 국민을 일종의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뜨리려는 책략이 작동했기 때문이지요. 통치 계층에게 불만을 가진 국민도 이런 위기 상황에서는 통치 계층과 자신들이 동일한 운명 공동체, 우리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국가라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파헤치기 어려운 이유는, 바로 우리가 일정 정도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국가는 분명 자신이 지배하는 국민에 대해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가지고 있는 기구입니다. 다시 말해 공권력이라는 명분으로 폭력적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진 기구라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 국가는 우리를 모조리 죽일 수 있는 잠재적 폭력 자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는 왜 우리를 죽이지 않을까요? 아니 죽이려고 하기는커녕 오히려 우리를 위해 많은 정책적 배려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생각해보면 고마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인질들이 인질범들에게 동질감을 갖듯이 국가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을 갖게 됩니다. 만약 누군가가 국가를 문제 삼으면, 우리의 마음은 무척 불편해집니다. 인질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경찰들이 인질범들을 자극하는 것을 극히 싫어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결국 이런 메커니즘으로 국가는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것, 즉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착각이 발생하게 됩니다. 인질범들에게 향해진 총구를 스스로 막고서 인질범들을 변호하는 어느 인질들의 경우처럼 말이지요. 국가와 관련해서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이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박정희(朴正熙, 1917~1979)로부터 시작되는 군사독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4·19 민주혁명을 와해시키고 출현한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은 사실 우리 모두를 볼모로 잡은 인질범들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스톡홀름 증후군에 걸린 인질들처럼 박정희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자행했던 억압과 탄압의 요소들은 대부분 잊고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를 보릿고개를 없애준 사람,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우리 민족을 고질적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 사람으로 기억하려고만 합니다. 그만큼 우리는 박정희에게 인질로 사로잡혔던 아련한 기억을 스스로 미화하기에 여념이 없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박정희란 인물은 도대체 우리의 삶에서 어떤 작용을 했던 사람일까요? 최근에 불치의 병으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정치학자 전인권(全寅權, 1957~2005)전인권은 정치학자이며 동시에 미술평론가, 저술가로 활발히 활동하였다. 박정희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주로 그의 외적인 주장이나 행동들에 매몰되어, 그를 극도로 찬양하거나 아니면 폄하하는 양극단에 처해 있다. 반면 전인권의 연구는 어떤 가치 평가도 전제하지 않고 박정희와 그의 내면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도모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박정희 평전, 남자의 탄생, 아름다운 사람 이중섭등이 있다은 박정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자 합니다.

 

 

박정희의 국가사상은 궁극적으로 국가주의 사상으로 귀결된다. 그의 국가주의는 자신의 목가적인 정치적 이상을 국가기구를 중심으로, 폭력성과 지도성을 가미하여 조직화된 형태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민족의 생존은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박정희의 국가주의적 신념들은 민족 개조, 국민 도의 함양, 국민 도의 확립 등과 같이 교육적·계몽적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국민교육헌장(國民敎育憲章)이다. 국민교육헌장은 전체적으로 개인을 국가의 목표에 종속시키는 사고의 전형을 보여준다. 새마을운동 역시 일견 목가적이고 계몽적인 성격을 갖고 있지만, 그 내면으로 들어가면 국가 총력주의와 같은 사상이 근원적인 동기를 이루고 있다. 또한 체력은 국력이라는 표어가 유행한 적이 있는데, 여기서 개인의 체력은 국가의 국력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민족중흥과 같은 근대화 담론도 결국 국력 배양이란 국가주의적 사상의 실천 방향이 된다. 박정희 평전

 

 

 

 

전인권은 박정희의 정치사상을 국가주의사상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합니다. 여기서 국가주의는 그의 말대로 개인을 국가의 목표에 종속시키는생각, 즉 개인은 국가의 수단이며 국가는 개인의 목적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박정희에게서 우리는 단지 국가 발전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 이상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국가 혹은 민족이야말로 절대적인 선,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절대적 권위였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박정희의 생각이 옳다면 누구도 국가를 문제 삼고, 국가에 대해 회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지상 최대의 순수한 목적인 국가 자체에 대해 왈가불가할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박정희의 국가주의를 맹목적으로 따라도 괜찮을까요? 아니면 국가에 대해 스스로 사유하기 시작해야 할까요? 박정희가 우리에게 각인시킨 국가주의라는 망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혹은 국가에 대한 스톡홀름 증후군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국가를 사유할 때 발생하는 불편함과 불쾌함을 견딜 필요가 있습니다.

 

 

 

 

수탈과 재분배의 논리

 

 

사실 국가주의는 박정희만의 독창적인 생각은 아닙니다. 국가가 생긴 이래 국가가 국민에게 자신에 대한 충성과 복종을 강요해온 것은 너무나 오래되고 익숙한 일입니다. 예로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국가에 대한 충성을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선전하지 않은 문명은 없었으니까요. 이 점에서 국가주의는 인류의 문명 만큼이나 오래된 사유 전통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위대한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물론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도 인간을 편들기보다는 국가를 편들었던 사람이니까요. 그럼 이제 그의 말을 직접 경청해보도록 하지요.

 

 

국가는 자연적으로 존재하며, 개인에 선행하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 두 가지 명제의 증거는, 국가는 전체이며 개인은 그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개인은 고립되어서는 자족적일 수 없으므로 전체에 모두 같이 의존해야만 한다. 그리고 국가만이 자족적인 상태에 이를 수 있다. 고립된 개인은 정치적 결사의 혜택을 타인과 더불어 누릴 수 없거나 혹은 이미 자족해 있으므로 국가의 일부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고립된 개인은 짐승이 아니라면 신일 것이다.

정치학(Politica)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에 대해 사유했던 걸까요? 이것은 그가 국가를 하나의 낯선 탐구 대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느냐는 물음과 같습니다. 그는 국가는 자연적으로 존재하며, 개인에 선행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그가 국가를 사유하지 못했다는 것, 아니 문제 삼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단지 국가를 절대화하거나 혹은 정당화하고 있을 뿐이지요. 오히려 그는 국가로부터 벗어나려는 개인에게 협박까지 하고 있는 셈입니다. 국가를 벗어난 고립된 개인은 짐승이 아니라면 신일 것이다. 물론 우리는 신이 될 수 없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는 결국 인간은 국가를 떠나서는 짐승과 별반 차이가 없어진다는 의미이지요. 짐승은 분명 약육강식이라는 야만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도 약육강식의 논리에 따라 존재하는 야만이 아닐까요? 이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과는 달리 국가로부터 벗어나려는 고립된 개인은 사실 야만의 세계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문명의 세계로 상승한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지배와 복종이라는 가장 지독한 야만의 고리를 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결국 국가를 벗어나려는 개인은 아이러니하게도 짐승이 아닌 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에 대해 진정으로 사유하지 못하고 그것을 단지 자명한 것으로 방치했습니다. 그러나 슬픈 열대(Tristes Tropiques)에서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1908~1991)가 이미 지적했던 것처럼 국가는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3000년 내지는 4000년 전부터 지중해 동쪽, 중국, 아메리카 등지에서 문자의 출현과 함께 발생한 것이니까요. 그러니 그 이전에는 아주 오랫동안 국가가 없는 사회도 충분히 있었던 셈이지요.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도 우리는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국가를 최상의 목적인 것처럼 사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1941~)가라타니 고진은 타자차이라는 문제를 숙고하고 있는 현대 일본의 탁월한 사상가이다. 부러운 것은 그가 숙고하고 있는 타자와 차이의 문제가, 서양의 데리다나 들뢰즈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깊이가 있다는 점이다. 최근에 그는 어떻게 하면 타자와 공존하는 사회, 즉 차이를 동일성으로 환원시키지 않는 사회를 구성할 것인지를 이론적으로 고민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트랜스크리틱, 일본정신의 기원등이 있다의 도움을 얻을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으로 생각해볼) 유형의 교환은 강탈하는 것이다. 하여튼 교환하기보다는 강탈하는 편이 빠른 길이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이것을 교환이라고 하는 것은, 지속적으로 강탈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다른 적으로부터 보호한다거나 산업을 육성해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국가원형이다. 국가는 더 많이 그리고 계속해서 수탈하기 위해 재분배해줌으로써 토지나 노동력의 재생산을 보장하고 관개 등 공공사업을 통해 농업생산력을 높이려고 한다. 그 결과 국가는 수탈의 기관으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농민이 영주의 보호에 대한 답례로 연공(年貢)을 지불하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일면적으로 국가는 초계급적이고 이성인 것처럼 표상된다. 예컨대 유교가 그러한데, 치세자(治世者)()’이 설파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강탈과 재분배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교환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일본정신의 기원

 

 

가라타니 고진의 분석이 중요한 이유는, 그가 국가를 하나의 신적인 실체가 아니라 교환관계로 숙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르면 국가는 기본적으로 약탈을 통해 힘의 우월성을 확보한 것, 그리고 약탈의 연속성과 지속성을 위해 재분배를 작동시키는 폭력적 기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국가의 교환 논리는 표면적으로는 은혜와 보호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조세를 거둬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에서는 마치 등가교환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국가를 규정하는 주종 관계는 분명히 등가교환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데도 말이지요. 세금을 낼 때 피통치자는 자신이 국가에 의해 보호받는 대가를 동등하게 지불할 뿐이라고 착각합니다. 마치 서비스를 받으면 팁을 내는 손님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만약 피통치자가 보호가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 세금을 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런 것을 흔히 조세저항이라고 말하지요. 예전이라면 그것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저항이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지요. 현재도 국가는 법의 권력을 통해 그 대가를 톡톡히 묻고 있지 않습니까? 이 점에서 루소루소는 제네바의 칼뱅파 집안에서 태어난 사상가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자연주의자였다. 자연 상태와 자연인이라는 가설적 테마를 통해서, 그는 인간의 기본적인 관심이 이기적이라는 것을 통찰했으며, 또한 이런 이기적 본성이 사회의 산물이라는 것도 발견했다. 정치와 사회를 숙고하기 위해서, 현재 그 누구도 루소를 우회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주요 제서로 에밀, 인간불평등기원론, 사회계약등이 있다의 통찰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주종 관계란 사람들의 상호 의존과 그들을 결합시키는 서로의 욕구가 있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을 복종시킨다는 것은, 미리 그를 다른 사람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처지에 두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인간불평등기원론(Discours sur l'origine de l'inegalité parmi les hommes)

 

 

중요한 것은 통치자가 이미 피통치자가 자신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이로부터 국가의 교환 논리는 기본적으로는 우월한 힘을 가진 통치자와 그렇지 못한 피통치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부등가교환이 됩니다. 다만 국가는 더 많이 그리고 계속해서 수탈하기 위해 재분배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 점에서 가라타니 고진의 논의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그가 국가의 교환 논리가 수반하는 피통치자의 환상(illusion) 혹은 전도된 의식에 대해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피통치자는 국가가 자신을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펴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국가를 위해 세금을 내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바로 여기에 피통치자가 부등가교환을 등가교환으로 착각하게 되는 이유가 있지요. 사실 국가가 피통치자에게 재화를 재분배하거나 혹은 관개 사업 등의 공공사업을 일으키는 이유는, 사실 더 효율적으로 구성원을 수탈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점에서 가라타니 고진의 분석은 박정희의 독재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줍니다. 그는 경제개발을 해서 국민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 독재를 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피통치자, 즉 우리의 착각일 뿐이지요. 가라타니 고진의 분석이 옳다면, 박정희는 자신의 독재 통치를 영구히 하기 위해 경제개발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덕의 논리와 자발적 복종

 

 

여러분은 이제 국가가 국민을 위해 온갖 정책을 펼치는 이유를 알았을 겁니다. 국가는 국민에게 마치 선물인 것처럼 온갖 정책을 시행한다고 자랑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자체를 위해 존재할 뿐이라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국가와 국민 간의 관계는 마치 축산업자와 소 사이의 관계와도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소를 기르고 있는 한 축산업자를 생각해봅시다. 그는 정성을 다해서 소들에게 음식을 공급하고, 그들의 잠자리를 청결하게 유지합니다. 가끔 그는 소들의 정서 안정을 위해서 모차르트나 슈베르트의 아름다운 음악도 자장가처럼 들려줄 수 있습니다. 그의 소 사랑은 너무나 지극해서, 어떤 소가 병이라도 나면 밤새도록 간호해줄 정도지요. !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어떤 소가 주인의 정성에 감동해서 주인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할 각오를 다지는 장면을 말입니다.

 

그러나 만약 소들이 축산업자 주인의 음흉한 속내를 알게 된다면, 상황은 어떻게 전개될까요? 그들은 주인의 목적이 결국 자신들을 살찌우고 마침내는 도살하여 팔려는 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이런 사실을 의식적으로 안다고 가정한다면 그들은 주인의 사랑을 단호하게 거부할 것입니다. 그의 사랑을 받으면, 자신들은 결국 죽게 된다는 점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다면 축산업자가 기르던 소들은 점점 말라갈 것이고, 주인 자신도 끝내는 파산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소들을 살찌우기 위해서, 그는 소들에게 자신이 그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진짜 이유를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 될 겁니다. 노자가 간파했던 것도 바로 이 점입니다. 사실 국가의 논리를 숙고하는 데 있어서는 동서양의 구분이 불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두 문명권 모두 국가 형식을 근본으로 해서 출현했기 때문이지요.

 

 

오므라들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펴주어야만 한다. 약하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강하게 해주어야만 한다. 제거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높여주어야만 한다. 빼앗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주어야만 한다. 이것을 은미한 밝음[微明]’이라고 말한다. 유연하고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법이다. 물고기는 연못을 벗어나게 해서는 안 되고, 국가의 이로운 도구는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 도덕경36

將欲歙之, 必固張之, 將欲弱之, 必固强之, 將欲廢之, 必固興之, 將欲奪之, 必固與之, 是謂微明. 柔弱勝剛强. 魚不可脫於淵, 國之利器, 不可以示人.

 

 

노자의 생각은 다음 한 구절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빼앗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주어야만 한다.’ 만일 가축업자가 노자의 말을 들었다면, 그는 충분히 고개를 끄덕였을 겁니다. 좋은 육질의 소고기를 얻기 위해서, 그도 정성과 사랑으로 소들을 돌보고 있기 때문이지요. 노자는 이 원리가 은미한 밝음’, 즉 미명(微明)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은미함()‘국가가 국민에게 시혜하는 목적이 국민에게는 은미해야 한다는 것, 즉 알려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반면 밝음[]’은 통치자나 통치 계층이 자신이 국민에게 시혜하는 목적을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국가가 재분배하는 이유를 국민이 알게 된다면 국가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노자는 국가의 이로운 도구는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國之利器, 不可以示人]”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런 정치철학을 통해서 노자는 국가나 통치자들에게 일종의 우민(愚民) 정책을 제안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흥미로운 것은 노자의 정치철학적 통찰로부터 동양 특유의 논리, 즉 덕()의 논리가 파생되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보통 주변에서 어떤 사람이 덕이 있다거나 혹은 덕이 없다고 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나 덕이 있다 혹은 덕이 없다는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도덕성을 갖추고 있거나 혹은 그렇지 않다는 말일까요? 자세한 내막을 알기 위한 실마리는 사실 ()’이라는 글자 자체에 있습니다. 이 한자는 두 글자로 구성되어 있지요. 그것은 얻는다는 의미의 ()’이라는 글자와 마음을 의미하는 ()’이란 글자입니다. 그렇다면 이란 글자의 의미는 마음을 얻는다는 뜻이 될 겁니다. 그래서 이미 한비자(韓非子, ?BC 233)라는 사상가도 덕은 얻는 것을 말한다고 이야기했던 것이지요. 이 점에서 이란 개념은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도덕성을 의미하는 ‘virtue’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타인의 마음을 얻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까요.

 

 

 

 

 동양에서는 덕을 가진 대표적인 인물로 흔히 누구를 떠올릴까요? 이를테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라는 대하 역사소설의 주인공 유비(劉備, 161~223)유비는 삼국지연의라는 소설을 통해서 이미 하나의 전설이 되어버린 군주이다. 그는 중국 역사상 가장 덕이 있는 인물로 평가되며 아직도 외적인 통치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희망이자 상징으로 남아 있다. 역사적으로 유비는 삼국 시대를 연 주역 중의 한 명이다. 그는 관우, 장비와 의형제를 맺고, 마침내 삼고초려를 통해서 제갈량이라는 뛰어난 재상을 얻음으로써 촉나라를 창건하여 황제에 오를 수 있었다를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 타인의 마음을 얻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삼국지연의의 한 장면을 보도록 합시다.

 

 

저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한 죄를 지었습니다. 미 부인께서는 중상을 입으셨는데, 제가 아무리 청해도 말에 오르지 않으시더니 그만 우물 속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습니다. 저는 겨우 토담으로 우물을 메운 다음 공자(公子)를 갑옷 속에 품고서 간신히 포위를 뚫고 달려왔습니다.”

雲喘息而言曰: “趙雲之罪, 萬死猶輕! 糜夫人身帶重傷, 不肯上馬, 投井而死. 雲只得推土牆掩之, 懷抱公子, 身突重圍, 賴主公洪福, 幸而得脫. 適纔公子尙在懷中啼哭, 此一會不見動靜, 想是不能保也.”

 

말을 마치고 조자룡이 급히 갑옷을 끌러 품 안에서 아두(유비의 아들)를 꺼내보니, 아두는 쌔근쌔근 숨소리를 내며 잠을 자고 있었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두 손으로 아두를 받들어 유비에게 내밀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유비는 자신의 아들을 받아들자마자 땅바닥에 내던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까짓 어린 자식 하나 때문에 하마터면 나의 큰 장수를 잃을 뻔했구나!”

遂解視之. 原來阿斗正睡著未醒. 雲喜曰: “幸得公子無恙!” 雙手遞與玄德. 玄德接過, 擲之於地曰: “爲汝這孺, 幾損我一員大將!”

 

조자룡은 황망히 허리를 굽히고 팽개쳐져 우는 아두를 끌어 안고서 눈물을 흘리며 절규하였다.

제가 이제 간뇌도지(肝腦塗地)하더라도 주공(유비의 은혜에 보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삼국지연의

趙雲忙向地下抱起阿斗, 泣拜曰: “雲雖肝腦塗地, 不能報也!”

 

 

여러분은 방금 유비가 어떻게 조자룡이란 용맹한 무장의 마음을 얻었는지 보았을 겁니다. 유비는 조자룡에게 자신의 부인과 아들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조자룡은 엄청난 적병 속에서 유비의 부인과 아들을 잃고 헤매게 됩니다. 만약 그들을 구하지 못한다면, 그는 유비의 어떤 책망도 감수해야 할 판입니다. 그러나 운 좋게도 그는 유비의 아들, 즉 유선(劉禪)을 구하는 데는 성공합니다.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지요. ‘아두(阿斗)’라는 아명으로 불리는 유선은 훗날 촉나라의 황제가 되는 유비의 장남이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주군(主君)인 유비의 부인을 지키지 못한 죄 때문에 조자룡의 마음은 조금도 편하지 않았습니다. 이것만으로도 그는 죽음의 형벌을 면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유비는 조자룡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그의 죄를 따지기라도 했습니까? 유비는 오히려 자신이 사랑하는 장남을 바닥에 내팽개치면서 조자룡에게 이야기합니다. “이까짓 어린 자식 하나 때문에 하마터면 나의 큰 장수를 잃을 뻔했구나!” 이로써 유비는 조자룡의 마음을 확실하게 얻는 데 성공한 셈입니다. 자신의 대권을 물려받을 장남보다 조자룡을 아낀다는 마음을 그에게 분명히 보여주었으니까요. 유비는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이런 은혜를 베풀었던 사람은 결코 아닙니다. 그는 오직 자신에게 결정적으로 도움을 줄 만한 사람에게만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아마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방금 살펴본 조자룡과 제갈량(諸葛亮, 181~234) 정도일 것입니다. 유비는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만 시혜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마치 자본가가 이윤을 남길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에만 투자를 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이렇게 유비는 조자룡에게 뜻밖의 은혜를 베풂으로써, 그가 평생 동안 유비와 그의 아들에게 충성하도록 만들어버립니다. 이제 유비는 조자룡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은 것이지요. 조자룡은 자신의 충성이 외적인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결국 유비의 은혜는 조자룡으로 하여금 자발적 복종을 유도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던 셈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빼앗기 위해서는 먼저 주어야만 한다는 노자의 원리, 즉 수탈하기 위해서는 재분배해야 한다는 국가의 원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비는 아마 이 원리를 가장 성공적으로 실행에 옮긴 정치가였을 겁니다. 이 점에서 볼 때 유비의 자()현덕(玄德)’이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현덕이란 말은 노자가 지은 도덕경에 등장하는 유명한 말로, ‘검은 덕은 다른 사람이 그 속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어서 일견 어두워 보이는 덕을 의미합니다. 이 점에서 유비만큼 스스로 은미한 밝음의 논리를 잘 실현시킨 사람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세계화와 국가

 

 

국가는 기본적으로 약탈의 역사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는 약탈만으로는 효과적으로 이윤을 얻을 수 없다는 점을 곧 자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침내 국가는 피약탈자 위에 군림하면서 영속적으로 정착하게 됩니다. 이제 피약탈자는 국민으로 변하게 된 것이지요. 지속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수탈하기 위해서, 국가는 국민에게 여러 시혜적인 정책들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모든 국민에게 똑같이 그렇게 해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효율적으로 수탈할 수 있는 계층에게만 국가의 시혜가 집중됩니다. 다시 말해 세금을 가장 많이 걷을 수 있는 계층에 대해 국가의 정책적 시혜가 이루어진다는 말이지요. 결국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누가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국가는 세금을 많이 내는 사람들을 우선적인 보호 대상으로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산업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이전에는 국가가 보호하는 일차적인 대상이 농민이었습니다. 국가의 힘과 부는 무엇보다도 농민의 농업생산력과 농민이 구성하는 무력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산업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국가는 자신의 보호 대상을 바꾸고 있습니다. 국가의 일차적인 보호 대상에서 농민은 제외되고, 오히려 자본가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산업자본주의 이전 시대에는 공공사업의 대부분이 농민을 위한 사업, 예를 들면 토지 정비와 농법 개선, 혹은 관개 사업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과연 어떻습니까? 산업자본주의경제 하에서 대부분의 공공사업은, 산업자본이 잉여가치를 만들어내는 데 유리하도록 그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산업자본주의 시대에 들어와 이제 국가의 논리는 자본의 논리와 결합됩니다. 이 말은 결국 국가가 수탈과 재분배의 대상을 농민이 아닌 자본가와 노동자로 바꾸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중세의 봉건사회가 붕괴된 이유를 흔히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상인자본의 발달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세 시대의 봉건적 토대가 무너지고 상업 도시가 발달하기 시작한 이유는, 절대 국가(absolutist state)절대 국가는 16세기 유럽에서 종교가 가졌던 세속적 권력이 군주에게로 이행되면서 출현한 국가 형식이다. 이러한 절대 국가는 왕권신수설과 중상주의를 토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왕권신수설만으로는 절대 국가가 현실적으로 유지될 수 없었다. 군주는 피통치자에게 복종의 대가를 제공해야 했다. 따라서 군주는 재원 마련을 위해서 무역이나 상업을 장려했고, 이것이 중상주의가 대두된 중요한 이유였다가 상인자본을 보다 유력한 세금 공급원으로 보고 보호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절대 국가가 무역을 통해서 막대한 이익을 남기는 상인자본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과거의 봉건적 사회 체계가 과연 붕괴될 수 있었을까요? 이렇게 절대 국가에 의해 보호되고 성장한 상인자본이 비약적인 과학의 발전을 등에 업고 이제 산업자본으로 변신하게 됩니다. 이 점에서 볼 때 농업생산력이 결코 미칠 수 없는 엄청난 이익을 낳게 해주는 상인자본 그리고 무한한 생산력을 자랑하는 산업자본의 잉여가치 창출 능력을 국가가 새로운 수탈 대상으로 선택했다는 것은 어쩌면 매우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산업자본주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국가는 재분배의 대상, 즉 보호와 육성의 대상을 달리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자본가와 임금노동자가 농민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이지요. 이제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농사가 천하의 가장 큰 근본이다라는 국가의 슬로건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변화를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그 예로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Free Trade Agreement)자유무역협정(FTA)은 국가 간의 상품의 이동을 자유화시키는 협정을 말한다. 이것은 특정 국가나 특정 지역 간에 관세 또는 비관세 장벽을 철폐하고 통일된 자본주의 시장을 확립하려는 시도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협정을 맺은 두 국가는 불가피하게 하나의 경제블록을 형성하게 된다는 점이다. 북중미 경제블록, 유럽의 경제블록 등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비준과정이나 최근에 진행되고 있는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 등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농민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역구의 국회의원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정부와 국회뿐만 아니라 언론까지도 산업자본 편을 들고 있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 아닌가요?

 

 

 

 

 흔히들 지금은 세계화(globalization)의 시대, 신자유주의(Neo liberalism)의 시대라고 이야기합니다. 세계화를 지지하는 세력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취지를, 자본의 세계적 흐름을 방해하는 국가의 간섭을 줄이는 것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세계화의 시대에는 국가의 역할과 기능이 축소되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이를 통해 인간이 더욱 자유롭게 된다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윌리엄 탭(William K. Tabb, 1942~)윌리엄 탭은 퀸스칼리지의 경제학과 교수이자 뉴욕시립대학 대학원 정치학과 교수인데, 자본주의의 세계화 경향에 대한 심도 높은 연구로 유명하다. 특히 그는 제3세계 국가에서 세계화가 어떤 효과를 낳는지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주요 저서로 부도덕한 코끼리, 전후 일본 체제, 정치경제의 구조 조정등이 있다의 생각은 이들의 생각과 확연히 다릅니다. 부도덕한 코끼리(The Amoral Elephant)』【『부도덕한 코끼리는 국내에 반세계화의 논리(이강국 옮김, 서울: 월간 말, 2001)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 ‘21세기 세계화와 사회정의를 위한 논쟁과 투쟁이란 부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옮긴이는 한국 사회의 시민들이 이 책을 통해서 세계화의 논리에 대항할 수 있는 이론적 기초를 얻기를 바라고 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폭풍이 거센 지금,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새로운 전망을 꿈꾸어볼 수 있을 것이다에 실려 있는 그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봅시다.

 

 

맑스와 엥겔스가 공산당선언에서 썼듯이, ‘부르주아지는 언제나 생산도구를 끊임없이 혁명하고 따라서 전체 사회관계도 혁명한다.’ 그 글에서 그들이 정확하게 묘사했듯이 세계화는 지리적 확장을 통해 값싼 임금노동자를 찾는 과정이다. (……) 시애틀과 다른 여러 곳의 시위에서 시위대의 분노는, 세계적 기업들의 이해관계를 위해 복무하는 WTO와 같은 국제기구에 주로 맞추어졌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국가의 역할이 점점 더 작아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세계 경제에서 국가를 무능력한 존재로 파악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국가권력은 약해졌다기보다는, 시민이 아닌 기업의 이해를 지지하는 방식으로 의도적으로 재구성되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배적이었던 사회민주주의적인(social democratic)’, ‘국민적 케인즈주의(National Keynesiansim)’국민적 케인즈주의는 규제받지 않는 시장 자본주의가 매우 위험할 수 있다는 경험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자유로운 시장경제가 결국 대공황이란 사태를 발생시키자, 국민적 케인즈주의자들은 정부를 통해서 공평하고 안정된 성장을 추구하려고 했던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정부의 개입을 반대한다는 점에서, 국민적 케인즈주의는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하나의 낡은 경제 이념으로 취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 세계적 신자유주의(Global Neo-liberalism)’로 대체되었던 것이다. (부도덕한 코끼리)

 

산업자본이 남기는 이윤은 제품을 만드는 데 들어간 화폐량과 제품을 팔아서 생긴 화폐량 사이의 차이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휴대전화 하나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10만 원이고 그것을 팔아서 얻는 값이 12만 원이라면, 이 산업자본은 2만원의 이윤을 남기는 것이지요. 그러나 폐쇄된 지역 경제에만 머물게 되면, 산업자본은 이윤율이 점점 떨어지는 경향을 감수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휴대전화가 이미 소비자에게 충분히 공급되었다면, 이전처럼 높은 가격에 휴대전화가 팔리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물론 기술혁신과 조직 혁신으로 생산성을 높임으로써 이윤율의 하락을 어느 정도는 막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임금이 쌀 뿐만 아니라 자신이 만든 제품의 희소성이 높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만 있다면, 산업자본은 생산성을 향상시켜야 하는 어려움 없이 아주 쉽게 막대한 이윤을 남길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세계화로의 충동이 불가피하게 발생했던 것이지요.

 

따라서 선진 산업자본, 즉 다국적기업(muli-national enterprise)이 많은 미국의 경우 이들의 세계화로의 충동을 막을 수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권장해야만 합니다. 그들로부터 미국은 막대한 세금을 거둘 수 있기 때문이지요. 결국 미국이란 국가의 역할은 압도적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다른 국가의 관세장벽을 부수는 것에 모아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만약 다른 국가에서 미국의 다국적기업들이 만든 제품에 대해 높은 관세를 부가한다면, 이 기업들의 이윤은 현저히 줄어들 테니까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자유무역협정이란 것이 대두된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왜 FTA에 참여하는 것일까요? 미국이 FTA에 참여함으로써 이윤을 얻는 것은 당연한데, 우리나라는 이로부터 어떤 이윤을 얻게 될까요? 그것은 FTA를 통해서 이윤을 얻을 수 있는 우리 사회의 몇몇 거대 산업자본으로부터 국가가 더 많은 세금을 거둘 수 있게 된다는 점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나라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국민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해 FTA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되면 국가기구와 몇몇 거대 산업자본을 제외한 나머지 시민의 삶은 이전과는 달리 전혀 보호받지 못하게 될 겁니다. 국가는 오직 자신의 주요 세금원인 거대 산업 자본의 이해관계만을 보호해주기 때문이지요. 이 때문에 우리는 윌리엄 탭의 지적을 경청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의 말처럼 국가 권력은 약해졌다기보다는, 시민이 아닌 기업의 이해를 지지하는 방식으로 의도적으로 재구성되었던 것입니다. 세계화의 시대에 국가는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자신의 모습을 더 효율적으로 바꾸고 있을 뿐이지요.

 

 

 

 

국가가 아닌 사회를 꿈꾸며

 

 

국가는 수탈과 재분배라는 역동적 교환관계로 유지되는 기구입니다. 그러나 국가의 핵심은 재분배라기보다 압도적 폭력을 바탕으로 하는 수탈이라고 말해야겠지요. 문제는 이렇게 수탈되고 있는 대다수 국민이 스스로 국가 없는 사회를 꿈꾸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너무나 길들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스톡홀름 증후군에 걸린 환자인 셈이지요. 국가의 폭력을 두려워하다가 어느 사이엔가 국가의 폭력이 나를 지켜주는 보호막이라는 착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맑스는 자본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깊이 통탄했던 것이지요.

 

 

어떤 인간이 왕이라는 것은 다만 다른 인간들이 신하로서 그를 상대해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은 그가 왕이기 때문에 이제 자기들이 신하가 아니면 안 된다고까지 믿고 있다. 자본론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스스로 왕이 되라고 충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왕이나 신하라는 차별 구조, 즉 수탈자와 피수탈자의 원초적 차별 구조가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그런 차별적 위계 관계를 벗어난 삶을 영위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스스로 강해져야만 합니다. 여러분의 소중한 자유를 양도해버리고 국가 권력에 복종하기 시작한다면, 그리고 그런 메커니즘에 완전히 적응하게 된다면, 여러분은 자신이 자유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될 겁니다.

 

여러분이 또 하나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국가가 자유인을 죽일 수는 있어도, 그 자유인으로부터 자유를 빼앗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문제와 관련해 클라스트르(Pierre Clastres, 1934~1977)클라스트르는 젊었을 때 철학을 공부했지만, 뒤에 남아메리카 인디언의 사회와 문화를 연구하는 인류학자가 되었다. 그는 인디언 사회가 결코 야만 사회가 아니라 문명사회였으며, 오히려 진정한 야만 사회는 우리가 살고 있는 국가라고 주장한다. 클라스트르의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국가나 권력의 문제, 그리고 인간 자유의 문제를 숙고할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된다. 주요 저서로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폭력의 고고학등이 있다라는 인류학자처럼 인디언들의 삶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지배자와 피지배자, 주인과 하인, 왕과 신하라는 차별 구조를 막기 위해 삶을 어떻게 영위해야 하는지를 이해했던 소수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고대적 사회, 각인의 사회는 국가가 없는 사회,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이다. 모든 신체에 똑같이 새겨진 각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너희들은 권력욕망을 지니지 않을 것이고 복종의 욕망을 지니지 않을 것이다라고, 우리와 분리되지 않는 이 법은, 분리되지 않는 공간, 즉 신체 그 자체 이외의 어느 곳에도 새기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이미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끔찍한 참혹함을 대가로 그보다 더 끔찍한 참혹함이 출현하는 것을 막고자 한 이 야생인들(인디언들)의 감탄을 금할 수 없는 심오함, 그것은 바로 신체에 새겨진 법은 망각할 수 없는 기억이라는 점이다.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La Société Contre l'Etat)

 

 

클라스트르에 따르면 인디언들은 사회에서 독립적인 자유인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아주 잔혹한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거의 고문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부족에서는 의례를 집행하는 사람이 의례를 거치는 사람의 어깨나 가슴의 살을 1인치 이상 잡아당겨 칼로 그 살을 뚫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경우 당사자는 결코 어떤 소리도 내서는 안 됩니다. 그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용기 없는 행위로 간주되었으니까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인디언 사회에서 독립적인 성원으로 인정받은 모든 사람이 이런 상처를 예외 없이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 경우 칼로 뚫린 상처는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가하는 고문은 아닌 셈이지요. 그렇다면 인디언들은 왜 이런 고통을 서로에게 주었던 것일까요? 왜 그들은 사회의 모든 성원의 육체에 동일한 흉터를 각인시켜놓으려고 했던 것일까요?

 

인디언들은 국가로 대표되는 권력관계나 차별 관계를 문명이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국가라는 것은 억압되어야 할 자연’, 눌러서 억제해야 할 인간의 탐욕스런 권력을 나타내는 것이었지요. 그들에게 있어 진정한 문명이란 어떤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 독립적인 자유인들의 공동체였습니다. 이 점에서 그들의 통과의례라는 것은 자연으로부터 문명으로의 이행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살 속으로 칼이 깊숙이 뚫고 들어올 때 어떤 신음 소리도 내지 않는 것은 문명인으로서 살아가겠다는 데 대한 동의를 드러내는 것이지요. 몸에 권력욕이 배어들지 않게 하려면, 타인을 얕보고 무시하며 궁극적으로는 노예로 삼고자 하는 야만스런 심성이 생기지 않게 하려면, 누구나 반드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영위하고 있는 삶은 그들과 어떻게 다른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자신보다 힘이 약하다고, 자신보다 지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차별을 다른 사람에게 가하고 있습니까? 처음에는 인디언들도 마찬가지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욕구가 들 때마다 자신의 살에 새겨진 흉터, 그리고 각인된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진정한 문명인으로 남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되었을 겁니다. “나는 권력욕망을 지니지 않을 것이고, 복종의 욕망도 지니지 않을 것이다!”

 

인디언들에게는 약하다고 해서 강한 자에게 복종하고, 강하다고 해서 약한 자를 지배하는 것은 문명이 아니라 자연, 혹은 야만이었습니다. 사실 약육강식의 논리는 동물의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지 않습니까? 인간이 다른 동물과 차이가 나는 이유는 그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강한 사람에게 복종하지도 않고 약한 사람을 지배하려고도 하지 않는 자유인의 의지일 것입니다. 자신을 죽일 수는 있어도 자신의 자유를 빼앗지는 못할 것이라는 용기와 확고한 자유정신 말입니다. 이 점에서 클라스트르가 찾아가 보았던 인디언들의 사회는, 아주 오래된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문명이 발달했던 사회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만적인 지배와 복종의 욕구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사회였으니까요.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는 어떤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까? 약자 앞에서는 한없이 강해지고, 강자 앞에서는 한없이 약한 채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아직 많은 사람이 이런 야만의 상태를 문명의 상태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익숙한 것이라고 해서 항상 올바른 것은 결코 아니겠지요.

 

 

 

 

더 읽을 책들

 

 

전인권, 박정희 평전(서울: 이학사, 2006)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현재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핵심적 이념은 국가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박정희 독재 정권에 의해 훈육되었으며, 국가주의가 개인을 어떻게 구성할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강신주, 노자: 국가의 발견과 제국의 형이상학(서울: 태학사, 2004)

노자는 단순히 자연을 노래한 철학자라는 통념을 깨고 있는 책입니다. 노자의 사유는 기본적으로 통치자를 대상으로 전개된 것이며 아울러 그의 정치철학은 거대한 통일 제국을 위한 형이상학이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소유란 무엇인가(이용재 옮김, 서울: 아카넷, 2003)

프루동은 부르주아사회의 사적인 소유제를 혹독하게 비판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집단 소유 체제, 즉 공유제를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공유제는 결국 국가 권력의 비대화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소유제와 공유제라는 양 극단을 피하려는 그의 지혜를 통해서 우리는 자유로운 사회와 사회 속에서의 자유를 꿈꿀 실마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마이클 테일러, 공동체, 아나키, 자유(송재우 옮김, 서울: 이학사, 2006)

국가를 낯설게 보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사유 전통이 아나키즘입니다. 아나키즘이 고립된 개인주의가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개인의 자유를 위해서 공동체가 왜 필요한지, 그리고 이것이 국가와는 어떻게 다른지를 훌륭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용

지도 / 목차 / 장자 /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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